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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장 5년 후의 약속
왕중양과 소씨 거렁뱅이의 싸움을 갈수록 치열해졌다. 그들은 서로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대항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온몸은 땀으로 흥건히 젖었고 얼굴마저 시뻘개졌다. 두 사람은 모두 기진맥진했지만 떼어놓을래야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무예의 대가인 단지흥은 이 두 사람의 속사정을 환히 꿰뚫어 보고 개탄을 금치 못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당대의 호걸이다. 그런데 이다지 사리에 어두울 수 있는가? 일시의 만용으로 목숨을 내걸고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왕중양은 명성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그러기에 전진교의 뒷일에 저토록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는 천하의 대사에 대해서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자가의 뜨거운 피를 전장에다 뿌리려고 하지 않는가. 이러한 사람이 어찌 소
씨 거렁뱅이한테 순순히 굴복하려 하겠는가? 만일 이 두 사람을 뜯어말리지 않으면 둘 다 크게 상할 텐데, 이런 무익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단지흥이 다급한 생각이 들어 싸움을 말리려고 불쑥 달려나가는 데 역시 이 모든 것을 환히 꿰뚫어 보고 있던 황약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중양진인께서 소씨 선배님을 이겼소이다. 냉큼 손을 떼시오!"
황약사가 보기에 만일 왕중양이 손을 늦추지 않으면 소씨 거렁뱅이가 위험했던 것이다. 그는 벌써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소씨 거렁뱅이는 가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급기야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왕중양도 얼굴빛이 샛노래졌다. 그는 몸을 일으키면서 황약사를 바라보았다.
"황 도주님, 소인이 다행히도 소 선배님한테 지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황도주님께서 소인과 겨루어 보실 뜻이 있으시면 달갑게 응수하겠습니다."
황약사가 대답했다.
"중양 진인, 그대가 이미 지쳤는데 내가 어찌 손을 댈 수 있겠소? 만일 내가 그대와 겨루면 천하의 영웅들이 이 황약사를 비경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설사 이긴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소. 며칠
푹 쉬시오. 그때 내기 그대와 한번 겨루어 보겠소."
"그럼 그렇게 합시다."
홍칠은 사부를 부축하여 뒤로 물러나며 말했다.
"왕중양, 오늘 우리 사부님이 그대와 겨루기는 하셨지만 결판이 난 건 아니오. 이후에 사부님께서 꼭 그대와 결판을 내실 것이니 그때 봅시다!"
그는 사부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도록 한 뒤 사부의 상처를 치료할 뿐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황약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중양 진인, 그대는 급해 할 필요가 없소. 우리 함께 날짜와 장소를 정해 가치고 길고 짧음을 가려 보도록 합시다. 그래서 이긴 쪽에서 그대의 그 《구음진경》을 가지도록 하잔 말이오."
"좋은 생각입니다."
"중양 진인, 우리 모두 5년 후에 화산(華山)에서 모이기로 하는 게 어떻겠소? 그땐 우리들만 모일 것이 아니라 천하의 영웅들이 다 모일 수 있도록 합시다."
왕중양은 황약사의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5년 후면 나의 전진교도 흥성할 것이고 항금(抗金)의 큰일도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테니, 만반의 준비를 했다가 싸운다면 더욱 손해날 게 없다.'
왕중양은 흔쾌히 대답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단지흥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그때 꼭 다시 중원에 찾아오리라고 마음먹었다. 한쪽에 서 있던 홍칠도 스승을 대신하여 때가 되면 꼭 화산에서 만나자고 왕중양과 단단히 약속했다.
왕중양이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그럼 모두들 약속을 지킵시다. 제게 친구가 한 명 있는데, 여인이긴 하지만 무림의 기인이지요. 제가 그 친구도 데려오겠습니다. 그때 우리 제대로 겨뤄 봅시다."
이렇게 굳은 언약을 하는 동안 황약사는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구음진경》의 위력을 누가 모르겠는가? 만일 왕중양이 5년 동안에 이 경서에 통달하고 자기 제자들한테도 일일이 전수한다면 우리들이 다시 화산에 모여서 무예를 겨룬들 어찌 그를 제압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한 황약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나한텐 작은 청이 하나 있는데, 중양 진인께서 들어주시길 바라오."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서슴지 말고 하십시오."
황약사는 여러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화산에서 무예를 겨룬다면 설사 《구음진경》이 아니더라도 천하의 영웅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고 고금에 다시없는 치열한 겨룸이 될 것이 자명하오. 그런데 이런 큰 겨룸에 아무런 상품도 내걸지 않는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래서 난 이 《구음진경》을 상품으로 내걸자고 제의하오. 중양의 생각은 어떠한지 ? 누구든지 이기기만 하면 천하 무림의 일인자로 추대하고 이 경서도 줍시다.
여러분들의 의향은 어떠한지요?"
황약사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들 좋다고 떠들어댔다.
원래부터 무림의 무사와 협객들은 글을 읽는 선비들과는 형편이 달랐다. 선비들한테는 해마다 과거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향시 (鄕試)를 보고 나서는 경시 (京試)를 준비하느라고 바쁘고, 경시를 보고 나면 전시(嚴試) 때문에 바쁘다 보니 1년 내내 한가한 나날이 별로 없다. 하지만 무림의 인물들은 무슨 큰 사건이나 생겨야 재주를 과시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10년 혹은 20년씩
골방에 틀어박혀 매일 책과 씨름한다는 것이 비록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개중에는 학운이 트여 벼슬자리에 앉거나, 석학대유(碩學大儒)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는 선비들이 적지 않듯이, 무인들이 천하에 이름을 떨치려면 무슨 명목으로든지 무예를 겨루어 이겨야 했다.
관가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외적을 막는 일 외에는 좀처럼 무인들을 머리 속에 떠올리는 일이 없었다. 사태가 긴박해져 서야 무인들한테 달라붙는 것이 바로 관가의 벼슬아치들이다. 하지만 관가의 벼슬아치들만 탓할 일은 못 된다. 예로부터 황제들은 모두 이러했으니, 그들은 평소에는 소위 문사(文事)에만 정신을 팔다가 난세가 돼야 비로소 무사(武事)를 생각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무인들을 양성하려면 선비들을 키워 내는 것보다 돈이 훨씬 많이 들어가는데, 관가의 재정 형편상 무사에게 돈을 푹푹 쓸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예부터 '세상을 다스리려면 학문을 배워야 하고 난세에는 무예를 익혀야 한다'는 말이 전해 내려오지 않는가?
치세에는 무예를 배워도 소용없다. 관가에서 매일 칼부림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마음대로 사람을 잡아죽일 수도 없는 일이니 무예를 익힌들 별 쓸모가 없다. 기껏해야 제 몸을 지킬 수 있는 방신술만 익혀 두면 족하다. 하지만 난세가 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무예를 익히면 변방에 나가 외적을 무찔러 군공을 세울 수도 있고 그로 인하여 빨리 진급할 수도 있다. 몇 년 사이에 큰 관리로 책
봉되고 5품이나 6품 벼슬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하지만 문인 학사(文人學士)들은 조정에서 허리가 휘도록 굽신거리고 서로 작당을 하여 물고 뜯으면서 수없이 암투를 벌여야 관작이 겨우 하나나 두어 급 올라가는 것이다.
사람들이 황약사의 제의에 이구동성으로 찬성하자 황약사가 말을 이었다.
"아마도 여기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5년 후 틀림없이 화산에 전부 오실 것이 틀림없는데, 그때는 오늘보다 더 성황을 이를 것입니다. 제 소견엔 이렇게 했으면 좋을 듯합니다. 그전 천하의 무림 영웅들이 다 모일 테니 최후의 승자는 당연히 이 무림의 기저를 자기 것으로 하는 대신 두 번째 승자에게 한 달 동안 책을 읽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겐 며칠 동안만, 또 그 다음
사람에겐 남들이 책을 보는 것을 구경이나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어떨까 싶소. 이렇게 되면 얼마나 재미 있겠소?"
모두들 황약사의 생각이 아주 괴상하다고 여겼으나 당장 더 좋은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지라 머리를 끄덕였다.
단지흥이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좋소. 때가 되면 나도 꼭 찾아가겠소. 여러분들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이에 황약사도 맞장구를 쳤다.
"저도 도화도에 돌아간 뒤 이 5년 후의 약속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때가 되면 저도 화산 꼭대기에서 여러분들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는 한쪽에 있는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를 건너다보면서 물었다.
"화산 모임에 개방도 올 수 있겠는지요?"
"물론이지요. 우리 사부님께서 안 가신다 해도 난 꼭 가겠소. 그 《구음진경》인지 뭔지가 대관절 어떤 책이기에 천하의 무림 영웅들이 이토록 눈독을 들이는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소……."
이때 소씨 거렁뱅이가 '악!'하고 비명을 지르더니 입으로 핏덩이를 토해냈다.
모두들 불안한 눈초리로 소씨 거렁뱅이의 고통스러워하는 몰골을 지켜. 왕중양은 미안하기 그지없었다.
'소씨 거렁뱅이와 같은 이러한 풍진 세상의 이인(異人)은 강호의 은원(思怨)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지만 자신의 명성에 대해서는 아주 중히 여기지. 때문에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와 내력을 겨루려고 했으며, 이렇듯 중상을 입게 된 것이지. 만일 내가 양보를 했다면 그는 나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몰라. 내가 그한테 해를 입히지 않았다면 그가 나한테 해를 입혔을 거야. 하지만 상황이야 어
쨌든간에 소씨 거렁뱅이가 상처를 입었으니 앞으로 개방과의 관계가 좋을 순 없겠군. 우리 전진교를 원수로 여길 것이 분명해.'
소씨 거렁뱅이는 연신 쿨럭거리며 계속해서 피를 토해냈다. 마옥과 구처기는 외상을 낫게 하는 전진교의 단약(丹蘂)을 꺼내 소씨 거렁뱅이에게 권했다.
소씨 거렁뱅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이 전진교의 개종자들아, 이 어르신이 그렇게 쉽게 죽을 성싶으냐? 그 따위 약 냉큼 치우지 못할까!"
그는 말끝을 맺지 못하고 또다시 피를 내뿜었다. 홍칠은 대수롭지 않게 마옥과 구처기를 보면서 뇌까렸다.
"우리들은 천한 거지라 몇 대쯤 얻어맞는 건 다반사야. 우리 몸뚱어리가 그렇게 귀한 줄 알았어 ?"
이 말에 마옥과 구처기는 얼굴이 붉어졌다. 그들은 손에 약을 든 채 건네지도 못하고 도로 집어 넣지도 못한 채 우물거렸다. 두 사람은 은근히 화가 났다.
'네 놈이 기껏해야 개방 방주의 제자지 뭐냐? 네 놈이 아무리 무예가 빼어나다 해도 우리만은 못할걸? 아무래도 사제간이 더 망신을 당해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두 사람은 서로 눈짓을 하고 동시에 홍칠을 향해 내력을 방출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무도 이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손과 발은 전혀 움직이지 않은 채 내력으로만 공격을 했기 때문이다.
마옥과 구처기가 전신의 내력을 한데 모아 홍칠과 소씨 거렁뱅이를 공격하는 것을 왕중양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왕중양이 큰소리로 소리쳤다.
"마옥아, 너희 두 놈이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느냐!"
그가 고함을 지르면서 마옥과 구처기를 막으려 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두 사람이 발한 내력은 마치 구리로 부어 만든 성벽에라도 부딪친 듯 갑자기 방향을 바꾸더니, 오히려 이들 두 사람을 10여 보나 허우적거리며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두사람은 하마터면 뒤로 자빠질 뻔했다. 왕중양이 고개를 돌려보니 홍칠이 소씨 거렁뱅이 앞을 턱 막아 서서 버티고 있었다.
마옥과 구처기는 비록 왕중양의 제자였으나 나이는 둘 다 왕중양과 비슷했다. 그들은 언제나 전면서 스승인 왕중양을 천하에 둘도 없는 영웅으로 숭앙해 오던 터에 소씨 거렁뱅이와 홍칠이가 왕중양에게 불손하게 구는 것을 보고 한번 본때를 보여 주려던 것이 도리어 망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얼굴이 뜨거워졌다.
왕중양은 속으로 개탄했다.
'우리 전진교 내에 비록 인걸이 적지 않다고는 하나 홍칠이처럼 젊은 나이에 저만한 조예를 가진 명수는 없는 것 같구나. 마옥과 구처기는 이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이 홍칠이란 친구는 지금 수준이 이미 황약사나 단지흥과 엇비슷하다. 기실 내 무예와 견주어도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런데 너희 둘이 홍칠이와 겨루어 보려 했으니 망신을 자초한 셈이지 뭐냐?'
사람들은 모두 무학의 대가로서 저마다 단약을 지니고 있었고 또 저마다 소써 거렁뱅이를 고쳐주려 했지만, 소씨 거렁뱅이는 단지흥의 단약만 받아서 꿀꺽 삼켰다. 소씨 거렁뱅이는 단지흥의 인후한 성품을 잘 아는 터라 가볍게 기침하는 것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대신했다. 단약을 삼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는 어느새 기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구양봉은 중양궁을 떠나그 근처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어느덧 날이 밝아오자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오늘 난 왕중양의 내막을 알게 됐어. 그한테 《구음진경》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고……. 한데 5년 후에야 그 경서를 빼앗을 수 있구나. 이젠 대사막으로 돌아가 형부터 찾아야겠다. 그러면 모용쟁도 찾을 수 있겠지.'
모용쟁을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모용쟁은 형과 눈이 맞아 지내겠지. 노상 붙어 있으니 안 그럴 리가 있겠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구양봉의 마음은 왠지 모르게 불쾌해졌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는 형을 만나면 지난밤에 본 일을 얘기해 주자고 생각했다. 형이 깜짝 놀랄 광경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며 빙그레 웃었다.
구양봉은 곧장 서역 대사막을 향해 떠났다. 10여 일 동안 길을 재촉하여 이윽고 서역에 닿았다. 한 작은 마을에 들어섰는데 그 마을은 아주 깨끗하고 조용했다. 그는 어쩐지 이곳이 마음에 들어 여기저기 구경을 다니다가 날이 저물어서야 한주막에 들어섰다.
주막 안에서는 거지 차림의 중년 사내들 두 사람이 한창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각각 자그마한 주머니를 여덟 개씩이나 메고 있었는데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외에는 별로 이상한 점이 없었으나, 머리에 천으로 된 횐 끈을 질끈 동여맨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상을 당한 듯했다.
한 사내가 입을 열었다.
"날이 좀더 어두워지면 출발하자구. 아마 그쪽에서도 도착한 것 같아. 만일 그쪽에서 모두 왔다면 우리의 대사는 무난할 것이야."
마주앉은 좀 젊어 보이는 거지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는 머리카락 한 오라기 없는 대머리였는데 중이 아닌 것만은 분명했다. 주먹과 팔뚝에 근육이 불끈불끈 튀어나온 것으로 보아 무예가 만만치 않은 사람 같았다.
두 사람은 구양봉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구양봉의 차림새는 서역인을 꼭 닮았다. 중원에서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사람들은 모두 그를 시답지 않은 눈길로 보곤 했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옷차림이 남루해서 거지 같은데다 그 지방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이르는 곳마다 푸대접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양봉은 그런 것에 차차 습관이 되다 보니 별로 개의치 않게 되었다. 그는 돌아다니는 중에도 합마공만은 부지런히 연마하여 무공이
상당히 늘어 있는 상태였다.
두 사람은 구양봉을 얼핏 보더니 본지의 거지인 줄 알았는지 말을 걸었다.
"여보게 노형, 오관묘(五官廟)를 어떻게 찾아가야 하오?"
마침 구양봉은 며칠 동안 이 고장에서 머물면서 구경할 만한 곳은 거의 다 다녀 봤으므로 오관묘가 어디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두 분께선 서쪽으로 곧장 가십시오. 한참 가노라면 강이 하나 나타날 것인데 그 강만 건너면 바로 오관묘입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혼자서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면서 두 거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두 거지 중 하나가 곱지 않은 눈길로 구양봉을 쏘아보았다.
"이 서역 대사막의 자식들은 너무 무례합니다. 보십시오. 담로칠(譚老七)의 제자 놈들이 얼마나 오만한가를. 웃어른들을 보고도 인사할 줄도 모릅니다. 여기 잠깐 계십시오. 제가 버릇을 좀 가르쳐 주고 올 테니까요."
그가 일어나려 하자 다른 거지가 팔소매를 잡으면서 말렸다.
"가만두라구. 이곳은 우리 고장이 아니야. 담로칠도 제 일에 남들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걸 좋아하는 성미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 제자 놈들도 저처럼 목덜미가 뻣뻣한 게지. 그건 그렇다치고, 버릇을 가르치려면 그 장본인을 찾아서 가르쳐야지, 부하들한테 성풀이할 건 뭔가?"
구양봉은 속으로 냉소를 금치 못했다.
'담로칠은 무슨 뚱딴지같은 담로칠? 이 어르신이 화가 나면 네 놈들이야말로 다 죽는 줄 알아라! 개방이 뭐 그리 대단해? 거지 발싸개만도 못한 놈들이!'
그는 어려서 형을 의지해 살아오면서 천덕꾸러기로 남의 수모를 많이 받았었는데 거지들로부터도 적잖게 업신여김을 당했다. 그랬던 터라 그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가 없었다.
'더러운 거지 놈들까지 거들먹거리다니. 한 번만 더 건드려 봐라. 따끔한 맛을 보여 줄 테니.'
그는 속으로 벼르면서 두 사람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조용히 술잔만 기울였다.
두 사람도 더는 구양봉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은 술을 마시면서 잡담을 나누다가 밤이 무척 깊어서야 은전을 탁자에 놓고 주막을 나섰다.
두 사람은 경공이 만만치 않은 것 같았다. 그들은 함께 축지법을 써서 나는 듯이 서쪽을 향해 달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에 두사람은 오관묘 앞에 닿았다. 오관묘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문 앞에서는 숱한 거지들이 땅바닥에 모여 앉아 투전놀이를 하고 있었다. 몇 사람은 그 뒤에 서서 초롱불을 들고 놀음판을 비춰 주고 있었다. 몇 걸음 더 가 안을 들여다보니 마치 온 시가지의 거지들이 몽땅 모여든 듯 오관묘 안은 거지들로 꽉 차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문 앞의 거지들은 투전에 눈이 뻘개져서 그들을 알은체도 안 했다. 두 사람을 미행해 여기까지 쫓아온 구양봉은 문 앞에서 잠깐 망설였다. 그러나 안에서 무슨 일들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한 생각이 들어 마음을 다져 먹고 성큼 성큼 안으로 향했다. 구양봉이 태연하게 걸어 들어가자 파수꾼들은 자기들패거리겠거니 여기면서 그를 순순히 들여보냈다.
곧장 대청 안으로 들어가려던 구양봉은 수많은 거지들이 죄다 대청 밖에 주저앉아 마치 무슨 큰일의 결말을 기다리기나 하듯이 조용히 있는 모습을 보고 멈춰 섰다.
이때 거지 하나가 구양봉을 가로막았다.
"이보쇼, 노형은 장로시오?"
구양봉은 감히 장로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장로가 아닙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시답지 않다는 눈길로 구양봉을 바라보았다.
"장로가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들어가려 하오? 나처럼 밖에 앉아 기다리기나 할 일이지."
그는 '흥!'하고 코방귀를 뀌더니 한마디 덧붙였다.
"안에서 한창 대사를 상의하고 있는데 어딜 함부로 들어가려는거야?"
구양봉은 대뜸 그가 입이 가벼운 놈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넌지시 물었다.
"노형, 난 요새 볼일이 좀 있어서 타향엘 다녀왔네. 그래서 오늘 여기서 뭣들 하는지를 모르고 있었지. 대관절 뭣들 하고 있나?"
그 거지는 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 주지. 우리 개방의 방주이신 소씨 거렁뱅이께서 세상을 떴네. 그래서 지금 저 안에서는 새 방주님을 뽑느라고 장로들만 모여서 대사를 상론하고 있는 중이야."
"새 방주님을 뽑는다면야 하나를 뽑겠구만. 아마 십중팔구는 홍칠이 그 어른이 뽑힐 거야."
구양봉이 대충 알은체를 하자 거지는 자기 허벅다리를 탁 쳤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네도 내막을 어지간히 알고는 있구만.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 어른이 방주 노릇을 안 하겠다고 사양한다는구만 글쎄."
이 말에 구양봉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소씨 거렁뱅이가 죽었는데 홍칠이 방주 자리를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구양봉은 다시금 슬며시 물어 봤다.
"아무리 따져 봐두 우리 개방엔 홍칠공 외엔 방주 재목이 없네. 그런데 그 어른이 뭣 땜에 방주 자릴 마다하지?"
거지는 갑자기 말하기 곤란한 듯 어물거렸다.
"그 어른이 하시는 말씀이 방주 노릇을 하면 맘이 편치 못하다나 뭐라나……."
"방주 노릇을 하는데 왜 마음이 편칠 못하지?"
계속해서 묻자 거지는 구양봉을 바라보며 말을 할 듯 말 듯 주저했다. 구양봉은 이 거지가 내막을 알면서도 뭔가 두려워 입을 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죄를 썼다. 그는 갑자기 무릎을 탁 치면서 소리쳤다.
"그래 그래, 알 만하네. 그 어른이 방주 노릇을 마다하는 것도 일리가 있어."
거지는 눈이 둥그래져서 반문했다.
"자네가 그 내막을 알고 있다는 건가?"
구양봉은 계속 능청을 떨었다.
"그 어른이 이걸 좋아하니 마음이 편하지 못할 수도 있지."
구양봉이 먹는 시늉을 하자 거지가 빙그레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다.
"옳네, 옳아. 보아하니 자낸 홍칠공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네, 안 그래?"
구양봉은 그저 빙그레 웃기만 했다. 어찌 잘 아는 사이다 뿐이겠는가. 홍칠과 함께 황궁 안 깊숙이 들어가 원앙오진회라는 걸 훔쳐 먹은 적이 있을 정도인데 말이다.
구양봉이 은근히 말했다.
"내가 한번 가까이 가서 들어 보겠네. 그래도 되겠지?"
거지는 구양봉이 홍칠과 잘 아는 사이인 줄 알고 선선히 대답했다.
"자네 마음대로 하게, 대청문 앞에 앉아 있는 친구들은 모두 우리 거지방의 수제자들로 다들 무예가 뛰어난 사람들이네. 내가 우리 형제들한테 자릴 하나 내주라고 할 테니까 자넨 조용히 앉아서 듣기만 해야 하네. 절대 소리를 내선 안 돼.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집법장로께서 자넬 용서 안 할 테니까."
구양봉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거지가 나지막이 누군가를 부르자 그 사람은 구양봉이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도록 마련해 주었다. 구양봉은 자리에 앉아서 대청 안을 기웃기웃 들여다보았다.
대청 안에는 열두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가장 복판에 앉은 이가 바로 홍칠이었다. 그는 머리를 숙인 채 마치 늙은 중이 좌선을 하듯이 입을 꾹 봉하고 목석처럼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몸집이 유달리 우람하고 나이가 젊은 사람도 있었다. 그가 홍칠을 재촉했다.
"칠공께서는 생각을 다 하셨소? 다 하셨다면 빨리 예를 올려야 하잖겠소?"
그러자 홍칠이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이미 여러분한테 말을 했지 않나? 그 노릇을 하는 게 맘이 편치 않다고. 난 언제나 하늘에서 마음대로 떠도는 구름처럼, 들판에서 제멋대로 노니는 학처럼 살아왔네. 그런 내가 어찌 방주 노릇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이 이러는 거 난 정말 달갑지 않네."
그러자 다른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노유각, 자넨 개방에서 제일 젊은 장로네. 자네는 어딘지 생각이 모자라는 것 같아. 칠공께서 마다하시는 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그러시는 게 아니겠나?"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이번에는 홍칠을 향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칠공에게 묻고 싶소. 칠공이 보기엔 누가 개방의 방주 노릇을 해야 합당하겠소?"
이 질문에 홍칠은 대답을 못 했다. 그는 좌우를 두루 살펴보았다. 한참 말없이 하나하나 살펴보던 그는 이 자리에 앉은 사람들 중에는 적임자가 하나도 없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나이가 지긋한 장로가 입을 열었다.
"이 팽충(彭沖)의 생각으로는 칠공이 중임을 짊어져야 하오. 소 방주님께서 떠나가셨고 우리 개방엔 할 일이 너무나도 많소. 칠공이 마다하면 우린 어떻게 하겠소? 소 방주님께서 임종시에 칠공한테 누가 우리 개방의 발주 노릇을 해야 할지 물었지요? 그때 칠공은 대답을 못하지 않았소?"
소씨 거렁뱅이의 말이 나오자 홍칠은 당장 침울해지며 비애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소. 사부님이 물으시는데 속에 없는 빈말을 할 수는 없었소."
팽충이 즉시 덧붙였다.
"소 방주님께서는 칠공더러 꼭 방주 자리를 이어받으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지요. 그분은 그저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 개 쫓는 타구봉을 넘겨주셨을 따름이오. 내 말이 틀리오?"
"틀림이 없소."
"그럼 됐지 않소! 칠공이 타구봉을 받아 쥐자 소 방주님께선 비로소 숨을 거두셨소. 내 말이 틀리오?"
"틀림이 없소."
팽 장로와 다른 장로들이 일제히 떠들어댔다.
"칠공은 타구봉을 넘겨받고도 왜 방주 자리는 넘겨받으시려 하지 않는 거요?"
"칠공은 소 방주님 앞에서는 대답을 해 놓고 왜 싫다는 거요? 화산에서 벌어질 무예 시합이 겁나서입니까? 왕중양이 무서워 그렇소? 황약사와 단지흥이 무서워 그렇소?"
여러 사람들이 중구난방으로 한꺼번에 떠들어댔다. 홍칠은 어이없는 듯 잠자코 듣고만 있다가 소리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냉소하며 말했다.
"내가 그들을 무서워한다고? 5년 후 화산에서 그들과 싸우는 걸 보시오. 사부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소. 강룡십팔장에는 일부 허점이 있다고 말이오. 나더러 그 허점을 보완하라고 신신당부하셨소. 난 5년 동안 조용히 몸을 숨기고 무예를 연마할 작정이오. 타구봉법과 강룡십팔장법을 몸에 잘 익히기만 하면 그 어떤 적수라도 거꾸러뜨릴 수 있소. 난 천하 무림의 일인자가 되어 화산
꼭대기에서 우리 개방의 위풍을 떨칠 작정이오."
장로들은 일제히 환성을 질렸다. 홍칠에게 이처럼 높은 뜻이 있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팽 장로가 입을 열었다.
"칠공이 천하 무림의 일인자가 된다면 우리 개방의 더 없는 행운입니다. 하지만 방주 자리를 맡아도 화산의 무예 시합에는 지장이 없을 줄 아오. 방의 사무는 우리 형제들이 어련히 다 맡아 할 테니까 칠공은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하십시오. 절대 방의 시시껄렁한 일로 시끄럽게 굴지 않을 테니까요. 이래도 안 되겠소?"
홍칠도 더는 마다할 수가 없었다.
"좋소, 그럼 내가 방주 노릇을 하겠소. 하지만 여러분들이 문하의 제자들한테 알리시오. 나를 시끄럽게 쫓아다니지들 말라고 말이오."
장로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리구 난 여러분들의 금의파니 오의파니 하는 시비 장단엔 절대 춤을 추지 않겠소. 비단옷을 입든 넝마를 주워 입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할 거요. 그래도 괜찮겠소?"
홍칠이 어떤 조건을 내놓든 장로들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다들 홍칠이 방주 노릇을 하겠다고 승낙한 것만도 고마운데 이런 것쯤이야 양보를 못 하겠느냐는 식의 태도였다.
한쪽에 앉아 장로들을 하나하나 훑어보던 구양봉은 뜻밖에 낯익은 얼굴을 둘이나 발견했다. 이 둘은 형제 간으로 모두 구양봉의 사형들이었다. 그들은 제갈정, 속문성, 석초수와 함께 구양봉을 변경에서 북국으로 끌고 갔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얘기해본 적이 없어 그들의 성과 이름은 모르고 지냈다. 그런데 이 시각 이 두 형제가 홍칠과 마찬가지로 개방 장로의 신분으로 대청에 앉
아 있는 것을 발견한 구양봉은 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양봉은 이 형제가 언제 개방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개방에 가입한 지 오래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개방에 가입한 지 오래지 않다면 어찌 개방의 열두 장로 속에 끼일 수 있겠는가.
'좋다, 네 놈들이 몽땅 여기에 있구나. 오늘은 네 놈들 제삿날인 줄 알아라. 네 놈들을 잡아죽여 사부님의 원수를 갚겠다!'
구양봉의 가슴속에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그의 핏속에는 사부의 피가 흐르고 있고 그의 뛰어난 무예는 사부가 가르쳐 준 것이다. 때문에 그는 언제나 사부를 은인으로 생각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이 두 사형이란 자가 점잖게 앉아 있는 것을 보니 사부가 임종시에 이 두 놈을 저주하던 모습이 자꾸만 뇌리에 떠올랐다.
'네 놈들을 꼭 죽여 버리고 말 테다!'
개방의 장로회의는 더는 길게 끌 것 같지 않았다. 한 장로가 일어나더니 거지 무리를 향해 홍칠이 새 방주가 되었다고 선포하였다. 열두 장로가 다 모였는지라 곧장 방주 취임식에 대한 논의로 들어갔다.
거지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홍칠은 다른 장로들에 비해 무예가 월등했을 뿐 아니라 사람 됨됨이도 솔직했기 때문에 평소에 거지무리의 환심을 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악인들을 죽일 때는 가차없이 죽였고 개방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며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거지들은 자기들이 바라던 대로 홍칠이 새 방주가 되자 모두들 흡족해 했다.
그 자리에서 개방 방주의 등위대전(登位大典)이 거행되었다.
홍칠이 한복판에 나가 앉았다. 그는 엄숙한 낯으로 똑바로 앉아서 거지들을 내려다보았다. 홍칠을 중심으로 열한 명의 장로가 차례로 앉았다. 모두 정돈하여 앉자 집법장로인 팽 장로가 사회를 보았다.
"개방의 새 방주이신 홍칠공께서 취임하셨습니다. 방내의 제자들이 나와서 축하를 드리겠습니다!"
팽 장로의 말이 떨어지자 방내의 제자들이 줄줄이 앞으로 나가더니 홍칠의 몸에다 침을 뱉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한 번씩 뱉었지만 삽시에 홍칠의 온몸은 침투성이가 되어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날 정도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던 구양봉은 기가 막혔다.
'보아하니 거지방 방주 노릇 하기도 쉽지가 않구나. 남들이 참아 내지 못하는 것을 참아 내야 하고, 남들이 견뎌 내지 못하는 고초를 견뎌 내야 하는구나. 저렇듯 침을 뱉는 것은 수천 수만의 침벼락을 무릅쓰고 나서야 비로소 방주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뜻인 모양이다.'
이때 방금 자기를 알선하여 앞자리에 앉혀 주었던 거지가 말을 건넸다.
"여보게, 자네도 방주님과 아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은데 나가서 침을 뱉으라구."
거지는 다짜고짜 구양봉을 잡아 끌고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구양봉은 속으로 당황했으나 자기도 개방의 제자인 것처럼 가장한다면 홍칠이 알아볼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주에 자세히 뜯어보아도 누군지 잘 모를 텐데 황차 밤인데야.
구양봉은 마음을 다잡고 앞에 나서서 문안을 올렸다.
"방주님, 개방의 제자 구양평이 방주님께서 만사 여의하시길 바라옵나이다!"
홍칠은 다른 제자들의 문안을 받을 때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구양봉이 머리를 숙이고 돌아서서 물러 나오려는 순간이었다.
"게 섰거라!"
홍칠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 왔다.
구양봉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가슴은 마치 쌍방망이질을 하는 것처럼 두근거렸다.
'홍칠이 날 알아본 게로구나. 내 모습이 많이 변했을 텐데 어떻게 알아낼 수 있었을까? 만일 내가 개방의 제자가 아니라는 게 발각되면 홍칠의 한마디 영에 거지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텐데 큰일이구나!'
그는 여러모로 생각을 굴렸으나 묘안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히 선 채 홍칠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넌 누구냐?"
"소인은 본방의 제자올시다. 이 고장에 살고 있습니다."
구양봉이 대답하니 홍칠은 다시 묻지 않았지만 한편에 서 있던 집법장로가 구양봉이 당황해 하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넌 누가 데려온 자냐 ? 누굴 따라왔느냐?"
구양봉은 누구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으므로 이름을 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두 사형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대답했다.
"소인은 이 두 분을 따라왔습니다."
홍칠은 구양봉을 바라볼 뿐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구양봉은 두 사람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다가서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난 구양봉이오."
목소리는 아주 낮았으나 두 사람의 귀에는 마치 천둥 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두 사람은 너무나 뜻밖의 상황에 혀가 굳어 버렸다. 한참 후에야 두 사람 중의 하나가 홍칠을 향해 말했다.
"방주님, 이 사람은 우리 개방의 제자가 맞습니다. 저희들 두 형제가 데려왔습니다. 방내의 예법을 잘 모르고 있으니 이후에 저희들이 잘 가르치겠습니다."
이 두 형제는 구양봉이 왜 이곳에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구양봉이 석초수를 죽여 버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터라 구양봉이 자기들도 죽일까 봐 겁이 나서 그를 비호해 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홍칠은 거지떼를 둘러보면서 빙그레 웃었다.
"본방에서 모임을 가졌으나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소. 기실 이 고장은 무슨 요충지도 아니니까 문제가 일어날 것도 없겠지만. 다들 푹 쉬었다가 각자 일을 보도록 하시오."
그가 말을 마치자 거지들은 일제히 소리쳐 대답하고는 허리 굽혀 인사를 한 뒤 흩어지기 시작했다.
두 형제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들은 구양봉을 흘낏거리며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그는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석초수마저 죽여 버린 무서운 인물이 아니던가. 한편 그들은 자기들이 유운장의 노독물 문하에 있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질 까 봐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이 일이 폭로되면 그들의 명성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던 것이다.
구양봉이 재촉했다.
"머뭇거리지 말고 날 따라오게."
두 사람은 말없이 구양봉을 따라 오관묘를 빠져 나와 널따란 공지에 이르렀다.
구양봉은 걸음을 멈추더니 그들을 쏘아보았다.
"여기서 네 놈들을 만나게 되다니 여간 반갑지 않구나. 사부님께서 임종하실 때 난 굳게 맹세했지. 네 놈들을 몽땅 잡아죽이겠다고. 오늘에야 비로소 그 약속을 지키게 되었구나."
두 형제는 말없이 서로 눈짓을 하더니 갑자기 벼락 같은 소리를 지르면서 동시에 구양봉을 덮쳤다.
그들의 무예는 석초수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선수를 쓰기는 했지만 아주 조심스러웠다. 둘 중 하나는 공격 하고 하나는 방어하면서 진퇴를 묘하게 조절했다. 구양봉은 오랫동안 허점을 노렸으나 그들의 일공일수(一功一守), 일진일퇴(一進一退)는 극히 규칙적이고 주도면밀했다. 구양봉은 두 사람과 20합이나 싸웠으나 승부가 나지 않았다.
구양봉은 몹시 화가 났다.
'사부님의 60년 공력을 몸에 익힌데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합마공을 가진 난데 네 놈들 따위한테 질 성싶으냐?'
그는 갑자기 몸을 낮추어 두꺼비처럼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더니 꾸르륵꾸르륵 괴상야릇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모두 노독물 문하의 제자인지라 이 소리를 듣고는 대경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싸움을 시작할 때만 해도 그들은 요행을 바랐었다. 이 싸움에서 자기들이 이기면 구양봉을 죽여 심복지환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요, 진다 해도 이곳 개방의 세력이 크고 사람들이 많으니 구양봉에게 맞아죽기야 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구양봉이 합마공을 쓸 기미가 보이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 그들은 당황하여 도망치려고 했다. 그러나 구양봉은 틈을 주지 않고 천둥 같은 소리를 내면서 두 사람을 향해 양손바닥을 동시에 내밀었다.
두 사람은 저항 한번 못해 보고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구양봉이 내려다보니 두 형제는 이미 숨이 끊어져 늘어져 있었다. 그는 다가가서 중구법(重手法)으로 두 녀석의 머리를 한 번씩 내리쳤다. 삽시에 두 녀석의 두개골이 으깨지고 칠규(七窺)에선 시뻘건 피가 콸콸 흘러 나왔다. 구양봉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실 결전에 임하자 구양봉 자신도 긴장했었다. 그는 자기의 무공이 이처럼 놀라울 정도로 발전했음을 처음으로 확인한 것이다. 자기의 타격 한 번에 두 녀석이 당장 쓰러져 숨을 거두자 그는 너무나도 놀랍고 기뻤다. 그는 예전과는 달리 사람을 죽인 데 대한 자책감 같은 것은 전혀 느끼지 않고 처참한 모습으로 쓰러진 두 시체를 태연하게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가 막 자리를 뜨려는데 두런대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왔다.
"아까 그 낮선 자식이 괴상한 술법이라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그 자식이 부르니까 두 형제가 즉시 따라 나섰어. 도대체 뭐하는 놈일까? 두 형제의 하인이라고 했지만 그런 것 같지 않아. 방주님께선 아마 이상한 기미를 느끼신 것 같아. 안 그러면 왜 우리더러 나가서 찾아보라고 하셨겠어 ?"
말소리가 점점 가까워 오자 구양봉은 급히 몸을 감추었다.
두 사람은 공지에서 시체 둘을 발견하자 놀라서 소리를 질러 댔다. 한참 소리를 질러 대던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뭔가를 의논하더니 허겁지겁 그들의 방주에게로 달려갔다. 개방의 두 장로가 비명횡사했으니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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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게 즐독하구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즐감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