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3장 7-13절
설교제목 : 작은 힘으로
한가로워질 수 있는 여유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제법 날씨가 따뜻하지만, 아침 기온은 여전히 쌀쌀합니다. 환절기에 건강하시길 빕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1》에 보면 훌륭한 학자가 되기를 소원하는 학생과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지상의 일뿐 아니라 천상의 일까지 다 터득하여 학문과 자연에 통달하고 싶다는 학생의 말에 악마는 바른 길을 찾았다고 치켜 세웁니다. 그러면서 말합니다. “시간은 빨리 흐르는 것이니 아껴쓰도록 하게나.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 시간을 벌게되지.”[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정서웅 옮김, 파우스트 1, 민음사, p.105]
악마는 시간을 이용해야 하고, 시간을 벌기 위해 질저정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시간을 이용하지 못하고 허비하는 것은 죄라는 것입니다. 악마가 가진 지혜는 시간 속에 살아가는 인간의 제한성을 잊지 말라고 일러줍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전적으로 부정적이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악마는 시간 속에 속박되어 잠시 멈추어 삶의 기쁨과 환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효율성과 생산성, 경쟁력만이 인간 삶의 척도가 된 세상에서 사랑하는 일, 나의 힘과 시간을 들여 누군가를 섬기는 일, 더디게 쉬엄쉬엄 놀아서는 안된다고 속삭입니다. 조급증과 중독증에 걸린 피로 사회에서 허허로이 배회하고, 내 감정이 원하는 길로 잠시 곁길로 가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 사순절의 시간동안 잠시 멈추고, 한가로이 거닐며 나를 살피는 시간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열쇠를 가진 분
밧모섬에서 요한은 소아시아 일곱 교회중 여섯 번째로 빌라델피아 교회에서 편지합니다. 편지의 발신자인 주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합니다.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3:7)
주님을 가리켜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분으로 소개합니다. 열쇠는 문을 닫고 열 수 있는 능력, 힘을 가리킵니다. 다윗의 열쇠는 다윗의 집은 성전을 상징하며, 그 열쇠는 하나님의 나라를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위를 상징합니다. 마태복음 16장 18-19절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교회의 반석이 되고, 천국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따라서 천국의 문지기로서 그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이로 많은 성화에 등장합니다.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분이라고 다시 강조하는 것은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결정권자가 바로 주님이심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마치 계속되는 문을 통과하는 여정과 같습니다. 하나의 문을 통과하면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하고 이런 문들을 잘 통과한 자는 궁극적으로 영원한 나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런 문을 통과하는 일은 궁극적으로 나의 힘이 아닙니다. 그 열쇠를 가지진 분을 통하여 열려질 때 가능합니다. 때로 많은 사람이 하늘의 빛나는 별을 보는 꿈을 보고합니다. 그 꿈의 의미를 간결하게 이야기합니다. 별을 보게 하는 것은 운명의 배정을 주목하게 하는 것이고, 위대한 힘이 당신의 삶을 배열하고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에 든 열쇠가 우리의 삶의 문을 열게 하고 운명의 배정을 이끌어가게 하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작은 힘으로
주님은 필라델피아 교회를 칭찬합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3:8)
작은 힘을 가지고도 배반하지 않았음을 칭찬합니다. 작고 약한 힘이지만 자신의 중심을 지키고 그리스도와 연결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외적 힘과 자랑, 화려한 스펙과 배경이 삶을 지탱하고 미래의 문을 여는 것은 결코 아님을 우리에게 반증합니다. 오늘 우리 앞에 놓은 가장 큰 화두는 AI입니다. 경제, 사회 전반의 변화의 핵심은 AI에 방점을 찍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인생의 길과 물음을 찾기 위해 이제는 AI에게 묻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기계가 인간에게 답을 제시하고 그 길을 맹목적으로 신봉해야하는 시대가 가까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위대한 별 속에서 우리의 길을 물으려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에게 우리의 삶을 묻지 않습니다. 신적 능력을 지닌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을 혁신적으로 바꾸어갈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삶의 길을 여는 것은 작은 힘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보잘것 없어 보이는 일상의 태도가 우리의 내일을 여는 것입니다. 작은 나의 에너지를 가지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수놓아 만든 삶만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나만의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이란 고유한 것이며, 데이터로 집약된 평균적 집단적 내용으로 환원되고 측정되고 통계될 수 없는 법입니다.
5000명이 광야에서 배고파할 때 한 아이가 드린 작은 빵 5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오천명을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가 남은 기적을 낳았습니다. 작은 힘이 주님과 연결되어질 때 위대한 삶의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힘과 능력이 있습니까? 비록 작지만 그 힘을 주님과 연결시키며 살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성전의 기둥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인내하라는 나의 말을 지켰으니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 너를 지켜주겠다고 하십니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고 견디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겸손히 따른 자는 어떤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안전할 수 있습니다. 이미 그 안에 삶의 지탱할 수 있는 강력한 인내의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이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보상을 말씀하십니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의 몸에 써 두겠다.”(3:12)
이 말씀은 요한계시록 21장의 새 예루살렘의 환상과 중첩됩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새 예루살렘, 새로운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고, 새로운 이름이 그 몸에 각인됩니다. 새로운 시대에 맞이하게 될 새 성전으로서 성도의 모습을 예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둥이 된다는 것은 이기는 자, 곧 개성화된 인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변환의 내용을 시사합니다. 어쩌면 우리 시대를 향하여 강력하게 제시하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더 이상 문명사회 현대인을 떠받칠 수 있는 신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모든 신들은 황혼으로 저물어 더 이상 인간 세계와의 접촉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종교와 전통, 신화의 상실은 현대의 개인과 사회의 고통의 뿌리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구심점이 될 새로운 신화를 발견하고, 새로운 성전의 기둥으로 지어가야 할 운명 속에 처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융학파 분석가인 한 사람이 다음과 같은 꿈을 꾼 적이 있습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사원이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내가 볼 수 있는 데까지 – 앞, 뒤, 오른쪽 그리고 왼쪽 – 믿을 수 없이 많은 수의 사람들이 거대한 기둥들을 짓고 있었습니다. 나 또한 그 중 한 개를 짓고 있었습니다. 사원을 짓는 과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나, 기초는 이미 조성되어 있었습니다. 건물의 나머지 부분이 올라가기 시작했고, 나와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일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융은 이 꿈을 듣고서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시다시피, 그것은 우리 모두가 짓고 있는 성전입니다. 내 말을 믿으세요, 사람들이 인도와 중국, 러시아 그리고 온 세상에 짓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에 대해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종교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이 지어지는데 얼마나 걸릴지 아십니까? ... 600년 정도 걸릴 것입니다.”[에드워드 에딘저지음, 김진숙, 김소영옮김 : 의식의 창조, 돈화문, p.13-14] 이것을 생각하면 유대인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고 그들은 성전의 신앙, 선민사상을 포기하며 새로운 전환을 맞이했고, 그 후 근 500년 뒤에 그리스도가 나타났고, 350년 쯤후에 새로운 종교적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새로운 종교를 만들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적 전통이 가진 내용을 새롭게 재구성하고 이해하기 위해 새로운 틀에 주조해야만 합니다. 이제 개인의 정신 안에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성전을 구축해야 하는 시대적 부름 앞에 놓인 것 같습니다.
유명대학에 다니는 유능한 한 대학생은 원인 모를 통증으로 분석을 받았습니다. ...
......
자신을 떠받치고 추동하고 지탱했던 아버지의 세계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그것과 결별해야 하고, 심지어 자신의 자아조차도 고태적 본능 속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함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온전히 이 내용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의 인생은 원시적 충동의먹이로 전락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 인생에 새로운 토대를 구성하지 않으면, 그의 인생을 고통 속에서 전전긍긍할 수 밖에 없음을 시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자신과 이 시대에 새로운 성전이 지어져야 함을 알아차리고 이기는 자가 되어 새로운 성전을 지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