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엥 고원은 자바 중부에 있는 평평한 고지대인데, 유황이 섞인 진흙을 뿜어대는 카와 시키당(까와 시끼당. Kawah Sikidang)을 비롯한 활화산들과 7 세기에 세워진 인도네시아 최초의 힌두 사원군인 아르주나 단지로 유명한 관광지다.
족자카르타에서 묵으면서 당일 코스로 다녀올 만한 곳이고 (자동차로 4 시간) 자정 무렵에 출발하는 일일 투어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푸르워케르토와 족자 사이에 있는 워노소보에 호텔을 잡고 디엥 고원을 갔다 오기로 했다.
2024.1.1
푸르워케르토에서 워노소보까지는 버스(에어컨 없는 중형 버스)로 3 시간 정도 걸렸다. 요금은 60리부. 워노소보 터미널은 시내를 지나 한참 더 가야하는 곳에 있는데, 다행히 혹은 당연히(?) 시내 중심부에서 세워 주었다. 세워 달라고 일어섰던 우리뿐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있던 다른 승객들도 거의 다 내리더라는.
예약해 둔 호텔(Front One Harvist Hotel)은 이 작은 도시에서 최고를 다툰다는 3성 호텔, 하루 4만원씩 주고 편히 묵었다. 리셉션에 내일 새벽 투어를 문의했더니 프라이빗 지프 투어가 120만 루삐아라고 한다. 괜찮아 보여서 구두 예약을 해 두고 점심을 먹으러 나섰다. 가까운 곳에 이 도시 최고의 쇼핑몰이 있다는 정보(구글 지도에서)를 믿고 찾아가 봤는데 전설의 쇼핑몰이라던 Rita Pasaraya는 낡은 3층 건물에 분위기가 완전 도때기 시장이다. 변변한 식당이 있을 것 같지가 않아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살피는데, 한두 평짜리 허름한 가게에 테이블이 한두 개 뿐이거나 아예 없어서 바닥에서 먹는 음식점들 뿐이다. 로컬 음식점을 선호하기는 하지만 선뜻 들어가기는 어렵다. 지도에서 보면 분명 여기가 워노소보의 중심 거리인데 변변한 식당 하나가 없단 말인가?
일방통행 2차로인 중심 거리(?)를 따라 북쪽으로 좀 더 올라가니 큰 공원이 나오는데 근처에서 드디어 식당다운(^^) 곳을 만났다.
큰 건물 앞에 오토바이가 그득한 걸 보면 분명 맛집이겠지? 들어가 보니 넓은 홀에 사람이 그득하다. 겨우 빈자리를 찾아 앉아서 보니 여러 식당들이 입점해 있는 푸드코트다. Allure Square.
역시 사람이 많다. 빈 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 친절한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자리를 잡고 둘러 보니 여러 부쓰에서 떡볶이를 비롯해 글로벌한 음식들을 팔고 있다. 우리는 이 지역 특색 음식이라는 미옹끌록(Mie ongklok)을 선택했다. 걸쭉한 끈적국수 계열?
맛있게 먹음.
2024.1.2
약속 시간 새벽 3시 반에 호텔 로비로 내려가니 이미 지프 기사가 와서 대기중이다. 1시간 가까이 산길을 달려서 일출 포인트(유명 포인트가 두 군데 정도 있는 모양인데 우리가 간 곳은 부킷 아완 시카푹 - 시카푹 바람의 언덕?)에 도착했는데, 너무 일찍 온 걸까, 입장료 부쓰가 비어 있다. 언덕을 걸어 올라가 보니 멋진 방갈로 몇 채와 매점이 있는데 문이 열린 매점에는 아무도 없다. (일단 음료수 하나 꺼내 마시고)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자니 서서히 날이 밝아지면서 관광객들이 올라오고 매점 주인도 나타난다. (입장료와 음료 등 37리부 지출함)
차를 타고 좀 더 올라가니 고원 정상부, 혹은 약간 분지 같은 곳에 시가지(라고 썼지만, 작은 동네)가 있고 식당과 기념품 매장들이 모여 있다. 지프는 계속 올라오는데 문을 열지 않은 가게가 많네? 아직 일러서일까, 아님 비수기라서? 기사가 데려간 허름한 나시짬뿌르 식당에는 관광객들이 바글바글하다. 다들 이 식당에서 아침을 먹나? 우리도 무리에 끼어서 이런 저런 반찬을 골라 한 접시씩 먹고 기사 몫까지 60리부를 냈다. 이번 여행 중 제일 저렴한 식사(일인분에 1,700원)였지만 한끼 때우기로는 손색이 없다.
아침을 먹고 차를 돌려서 출발한 지프 기사는 뜰라가 와르나(Telaga Warna) 방향 갈림길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달려서 '바람이 울부짖는 바위'(Batu Pandang Ratapan Angin)라는 긴 이름의 전망대로 올라갔다. 역시 경치는 높은 곳에서 봐야 제맛이지. 녹색 호수 뜰라가 와르나와 시키당 분화구가 내려다 보인다. 입장료 15리부.
전망대에서 내려와 7세기에 세워진 인도네시아 최초의 힌두 사원군인 아르주나 단지를 구경하고 (호수에 잠긴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다시 한번 뜰라가 와르나 입구에서 멈칫 거리다가 바로 카와 시키당으로 향했는데, 나중에 들어 보니 비싼 입장료 내고 호수 근처에 들어가도 전망대에서 보는 경치만 못하다고 한다. 기사가 알아서 패스한 듯.
1981년 폭발로 생성되어 지금도 유황과 진흙이 펄펄 끓고 있는 분화구 카와 시키당은 아르주나 입장권(20리부)으로 들어갈 수 있다. 꽤 먼 곳인데 왜 여기만 통합 입장권인지는 모르겠지만 돈 안 달라니까 일단 좋지. 기분이 좋아져서(?) 구경하고 나오는 길에 이 지역 특산물인 까리까 (노랗고 작은 파파야. carica라고 써 놓고 짜리짜가 아니라 까리까라고 발음한다.) 과자를 세 봉지나 샀다. (세 봉지 50리부)
디엥 고원이여 안녕~~ 산을 내려가던 지프가 샛길로 들어서더니 어마어마한 내리막길이 나온다, 과연 지프가 아니면 시도조차 할 수 없겠구나 하는 아찔한 길 중간에 주차장이 있고 지프들이 모여 있다. 시키림 폭포 입구다.
폭포를 구경하고 내려오다가 야자나무와 엔젤트럼펫이 멋진 배경이 되는 지점에 멈추더니 지프 투어 기념 촬영을 해야 한단다. 그래서 이제 마지막인가 했더니 아니었다. 아직도 두 코스나 남아있었다.
지프가 멈춘 곳은 커다란 칼데라 호수인 믄즈르 호수, 유람선도 있고 산책로도 있었지만 그냥 편안히 앉아 있기만 해도 기분이 좋은 곳이다.
마지막으로 간 곳은 차밭. 입장료(10리부)를 받길래 응? 했는데, 들어가 보니 시음장이나 차 판매장이 보이지 않는다.
저렴한 입장료를 내고 편안하게 사진찍고 놀다 가라는 컨셉인가 보다.
(먼 곳에 공장 건물 같은 것이 보이기는 하는데 관광객용 동선과는 연결이 안 되는 듯) 작은 매점이 하나 있을 뿐, 거기서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요청한 다음에야 차를 맛볼 수 있었다.
관광은 여기까지. 호텔로 돌아오니 점심 무렵이다. 이날 우리를 데리고 다닌 지프 기사가 정말 친절했는데 어물쩡 팁을 못 주고 헤어진 게 조금 아쉽다. 호텔에 도착해서 약속한 투어비를 주려고 했더니 리셉션에서 계산하라길래 팁 생각을 못하고 그냥 내린 것.
친절한 정도가 아니라 그 젊은 기사는 내가 직접 만나본 사람 중에 텐션이 최고로 높은 사람이었다. 그는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운전 기사들과 가게 주인들과 주차장 직원들과 심지어는 밭에서 일하고 있는 농부들까지 관광객을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것도 그냥 인사가 아니라 격한 인사다.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거나 찌르거나 하이파이브, 어쩌다 조용해서 보면 친구와 눈싸움을 하고 있다. 운전 중에는 아는 차를 만날 때마다 빵빠레를 울린다. (클랙션으로는 부족했는지 차 안에 핸드폰에 연결된 별도 장치가 있었다.) 그리고 아는 차가 모르는 차보다 훨씬 많다. 이 정도면 연예인이나 정치인이 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어쩌면 이미 이 동네 연예인이고 이 동네 정치인인지도 모르겠다.
2024.1.3
오늘은 여유있게 잘란잘란 동네 산책을 했다. 고지대라 그런가 모처럼 최고 기온이 30도를 밑도는 만만한 날씨다.
어제 처음 받았던 인상과는 달리 골목길들이 제법 깔끔하다. 쇼핑몰 근처만 도때기 시장이었나 보다. 한적한 골목 인도 위에 두리안을 늘어놓은 젊은이에게서 두리안을 하나 사 먹었다. 열대 과일의 천국이라는 베트남과 태국에서도 겨울에는 두리안과 망고스틴이 귀하고 비싸서 아쉬웠었는데, 이곳 인도네시아에는 두 과일이 모두 흔했다. 겨울에만 여행을 다니는 우리에게는 태국이나 베트남이 아니라 인도네시아가 진정한 열대 과일의 천국이었다. 모처럼 두리안과 망고스틴을 마음껏 사먹었는데 오늘이 그 시발점이 되었다.
길거리 좌판 할머니에게 망고스틴 까는 법(칼 필요 없이 양 손바닥으로 누르면 된다. 이렇게 해서 잘 안 가지는 건 불량품)을 배우고 그 자리에 서서 1킬로그램을 먹어치우고 1킬로그램을 더 샀다. 2킬로에 30리부 - 이 가격도 정말 싸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반유왕이에서는 1킬로에 6리부까지 하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