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었다.
우선 “우리나라 헌법은 일본이 독일 것을 번역한 것을 다시 우리말로 번역한 탓에 오역이 많고 문장도 매끄럽지 못하다. 또 헌법은 어렵고 긴 문장을 쓰면 유식하다고 착각하는 대표적인 사례이기도 하다.”고 말씀하셨던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
둘째로, 문과 친구들이 근현대사 수행평가로 헌법 전문을 외우던 모습. 그리고 헌법 전문을 ‘이해’하면 됐지 굳이 ‘외워야’ 하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천상 이과생이라던 친구의 대답.
셋째는,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라는 제목의 노래를 다함께 부르던 시위 현장.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을 잘 모르지만 헌법에는 참 좋은 말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
그래서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을 별다른 고민 없이 읽기 시작했던 것 같다. 단숨에 읽어 내려가기가 아까워 일주일동안 나누어 아껴 읽으면서, ‘헌법’하면 떠오르던 나만의 이미지가 조금씩 달라졌다.
우선 헌법이 읽기 어려운 까닭은 ‘오역’과 ‘어렵고 긴 문장에 대한 동경’ 때문이라는 첫 번째 이미지에 ‘그들만의 특권의식’이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법률가들이 어려운 표현을 써가며 유식해보이려는 가장 큰 이유는 일반인들에게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고 큰소리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성경의 해석 권한을 사제가 독점하는 모습에 빗대어 설명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둘째로 헌법 전문을 외우던 문과 친구의 이미지에 조사 하나만 틀려도 오답으로 간주하는 사법 연수원의 풍경이 겹쳐졌다. 이해보다는 암기가 우선하는 교육 풍토가 비단 중고등학교의 문제가 아니라, 대학 교육을 넘어서, 실무를 가르치는 사법 연수원에까지 이어진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내가 충격을 받는 이유는 내가 ‘천상 이과생’이어서가 아니라, 자유로운 토론과 해석으로 수업을 이끌어가는 미국 대학의 모습에 비교하면 놀라울 정도로 기형적인 우리 나라 현실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 1조’라는 노래를 다함께 부르던 시위 현장의 모습을 떠올리며, 헌법 1조 1항, 2항뿐만이 아니라 다른 조항들도 익숙해지기를 바랐다. ‘법’이라고 하면 통제와 처벌이 가장 먼저 떠올랐는데, 국가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국민을 보호하는 수단이 ‘법’이라니, 신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하는 게 기본권이며, 어쩔 수 없다고 묵인해 온 갖가지 차별들이 법률상 금지되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저자는 어깨에 띠를 두르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는 캠페인만으로는 의식을 바꿀 수 없다고 말한다. 장애인을 들어오지 못하게 한 목욕탕 주인이 5만원, 10만원이라도 벌금을 내어 뉴스에 보도되어야 의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심 있는 법률가들이 발 벗고 나설 수 있도록 국가가 여건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저자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졌다. 앞으로 집필활동을 계속 하셔서 법에 대한 나만의 이미지들을 더 풍부하고 견고하게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대한민국 헌법사에 큰 획을 그을만한 소송에서 승소한 변호사는 아니지만 책 한 권으로 이미 독자들의 의식을 몰라보게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참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