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신씨(昭媛辛氏)는 조선의 제15대 왕 광해군의 후궁이다.
무관 가문의 딸로, 부친은 판관 신현(辛鉉)이며 모친 수원 김씨는 김한우의 딸로 선조의 후궁 인빈 김씨의 언니이다. 앞서 인빈 김씨가 명종의 후궁이 된 이종 언니 경빈 이씨(문정왕후의 여시 출신)의 시중을 들기 위해 궁녀로 입궁했듯, 신씨 역시 이모 인빈 김씨에 의해 궁녀가 되었다가 당시 왕세자였던 광해군을 모시는 동궁(東宮) 나인이 됐다. 용모가 아름답고 총명한데다 한문(漢文)을 알아 서적및 문자해독을 할수 있었다 인빈 김씨의 의도대로 곧 광해군의 총애를 얻게 되어 승은을 입었으며, 광해 1년에 숙원(淑媛: 내명부 종4품)이 됐다. 공기록엔 남아있지 않으나 숙종 때 동평위 정재륜(효종의 부마)이 지은 《공사견문록》에 그녀를 신소원으로 언급하고 있어 이후 소원(昭媛: 내명부 정4품)으로 진봉한 것으로 보인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신씨 역시 폐서인이 됐으나, 인조에게 있어 신씨가 곧 부친의 이종누이였고 실제로 신씨의 오빠인 신종술 등이 인조반정 후에도 멀쩡히 관직 생활을 유지하고 승봉을 거듭해 서인의 공분을 얻었던 것에 비춰 광해군의 여느 비빈들과는 달리 화를 피한 채 여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숙원신씨의 父 辛鉉의 가계(초당공파)
-9세 신혁(초당공 영산 부원군 좌찬성사 묘 실전 配 천안전씨가 경남 창녕군 마고리에 사셨으니 마고리변이 유력)
-10세 신원경(양절공신 좌정승도첨의 영산부원군 묘 실전 어머니 봉양을 위해 창녕군 마고리 귀향 마고리 유력)
-11세 신부(판개성부사 축산군 묘 실전 개성부 외성 현 북한의 개성)
-12세 신유정(시호 무절 평안도도안무사 묘 파주시 광탄면 내화산)
-13세 신인손(시호 공숙 형조판서 묘 파주시 광탄면 내화산 )
-14세 2자신계조(호조참판 묘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15세 2자신후담(충익부도사 묘 예산 예산에 처음으로 정착하심)
-16세 신의정(사재감직장 묘예산 묘가 경기도 파주 현 통일동산자리에 위치했으나 1992년 정부에 수용되어 예산으로 이장)
-17세 4자신현(군자감판관 묘 예산 경기도 파주 현 통일동산 자리에서 1992년 이장)
성명:신현(辛鉉)
생년:1525년생~1609졸 수 84세
관직: 현령,군자판관
配:안동권씨(수 21세 ) 자:종적
配:전주이씨(양원군 憘(성종의 막내아들)의 녀 수 45세 ) 자:종괄
配:수원김씨(김한우의 딸 동생은 인빈김씨 선조의 후궁 ) 자:종술.종형.숙원신씨
1자:신종적(辛宗迪):관직-봉렬대부,사옹원제검,연기현감
2자:신종괄(辛宗适):관직-통덕랑
3자:신종술(辛宗述):관직-오위장,사복시내승,월곶첨사,백령첨사,곡산군수,진도군수,벽동군수,
4자:신종형(辛宗逈)
1녀:숙원신씨(淑媛辛氏) -아버지 - 신현
어머니 - 수원김씨
남편 - 광해군
이모부 - 선조
이모 - 인빈김씨
이종질 - 인조
족보(임술보 자료)의 내용
有文名當 庶妹 光海朝 淑媛 傳 龍弟 宗述 憾濟崇顯 公知時事作亂 棄擧業還鄕
글을 잘하여 명성이 있었다. 서매가 광해군 때 숙원으로 (광해의) 총애를 받아 동생인 종술이 외람되게 높은 벼슬을 하였는데, 공은 당시의 세태가 어지러워질 것을 알고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숙원신씨
입궁배경:이모인 선조의 후궁 인빈김씨가 표질녀인 신씨를 입궁 시켰는데
우선 그 당시의 상황이 선조의 정실엔 아들이 없었고 후궁의 공빈김씨는 임해군,광해군이 있고 인빈김씨에는 의안군,
신성군,정원군,의창군이 있었다. 그중에 광해군과 신성군이 경쟁상태였고 총애하는 인빈김씨로 인해 신성군이 유리한
입장 이었다.하지만 임진왜란으로 피난중 1592년 신성군이 죽게된다.그리고 선조의 건강도 급격히 악화되고 있어
광해군이 집권하게 될 상황이 된다.
인빈김씨는 화를 면할 계책으로 질녀인 신씨를 궁으로 끌어들여 광해군의 후궁으로 만든다.또한 광해군을 적극도와
자식과 가계의 안위를 지키게 된다
입궁생활:폐희신씨라 했으며 미색(美色)이 있는 데다 총명했고 서적을 읽고 해석할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한다
그러니 왕의 총애를 독점 하였다 하고
광해군이 바둑을 좋아 했는지 숙원신씨와 왕이 날마다 함께 돈내기 바둑을 두면서 정사를 팽개치고 보지 않은
탓으로 안에 계류된 공사가 무려 수백 건에 이르렀다 이렇게 실록에 기록해 놓은것을 보면 숙원신씨의 바둑 실력
또한 상당한 수준 이었던것 같다.
정치상황:계축옥사(광해5 1613년 영창대군 역모사건)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는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다
1614년 광해6 영창대군 강화도에서 죽임을 당하다.
인빈김씨는 안정된 처신으로 광해군과의 별다른 마찰 없이 지내다가
1613년 10월 29일 광해5년에 생을 마감한다.
광해5년은 많은 일이 벌어진 해이다.게축옥사로 숙원신씨의 오빠 신종술도 무고를 당해 귀향가게된다.
인빈김씨의 죽음은 불행한 일이었다. 정원군을 비롯한 그녀의 자손들에게 광해군의 편집증적인 성격과 왕위에
대한 불안감이 점차 작용하기 시작했다. 1615년(광해 7년) 정원군의 3남 능창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가 있었다는 고변이 있었다. 능창군은 16세의 어린 나이에 강화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고 자살을 선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정원군은 술로 매일 세월을 보내다 홧병으로 죽었다. 이후 백부 광해군 때문에 아버지와 동생을
잃은 정원군의 장남 능양군이 직접 인조반정을 일으킨다.
인조시대:광해군때의 집권세력 대북파와 소북파 인목왕후 폐모론자들의 핵심 권력은 사형을 당했고 200여명이 유배된다.
인조반정을 방조하고 인정한 남인은 간신히살아 남는다.그리고 서인의 집권시대가 시작 된다
숙원신씨는 인조가 이모의 손자 이종질 관계여서 였을까 하여튼 화는 면했던것 같다
오라버니 신종술은 곡산군수,내사복시내승,벽동군수,진도군수,백령첨사,오위장등을 역임하게된다.
또한 5촌 종질 신계영이 45세 나이로 늦게 출사를 하게되는데 첫 출사가 1620년 광해 12년 이었다.
그래서 그동안의 역모사건 폐모사건 등을 피해갈수 있었고 광해 인조 효종 현종 4대 왕조까지 천수를(수 93세)
누리셨으며 종 1품 판중추부사까지 오르셨다.현재 107매의 교지가 예산문중에 보존되어 내려오고 있다
잠시생각:선조,광해,인조 시대 임진왜란을 겪어야 했고 병자호란을 겪어야 했던 외침으로 온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던
시대 끊임없는 왕권 다툼에 허위 고변 중상모략 당파싸움에 바람 잘날 없던시기 예산에 정착하신 선조들
께서는 이러한 여러 위기 속에서도 당파에 크게 휩쓸리지 않고 슬기롭게 극복하고 대를 이어 오셨다.
이번에 예산 선조중의 숙원신씨의 자료를 찾아 정리를 해보았다.
2002년 대동보에는 아무런 자료가 실려있지를 않아서 아쉬웠고 임술보를 보다보니 辛鉉의 二子신종괄 配
기록 끝에 숙원신씨와 신종술 내용이 몇줄 있었다.그리고 母 (수원김씨 김한우의 여)에 대한 내용은 없고
父 辛鉉의 이름자 鉉을 鏡으로 표기가 되어있다 족보 편찬할때 이름을 실수로 잘못 찍어 낼수가 있을까
그리고 신종술은 선조말년에 이미 월곶첨사 였고 광해군 집권 하자마자 사헌부의 청으로 파직되었고
궁을 재건 하는데 공을 세워 2년여 벼슬을 하던중 대북파의 파직 상소가 있따랐고 1613년 계축옥사에
무고하게 몰려 왕의 친국을 받고 멀리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족보에는 세태가 어지러울것 같아 벼슬을 포기하고 고향에 내려갔다 되어있다
하여튼 족보는 이렇게 여러군데가 이상하고 기록도 미천한데 왕조실록에 자세한 내용들이 많았다
그 당시의 상황은 알수 없지만 추측으로 광해군과의 관계로 인한 불편한 상황에 대비코져 한게 아닐까
생각된다.그리고 숙원신씨의 묘는 예산에 세거지를 마련해서 내려오신 15세 辛厚聃묘 바로 위에 위치해 있다
전에부터 옹주묘라 전해져 내려오는데 태종의 후궁 신빈신씨가 신녕옹주로 봉작되기도 했으니 비유해서
그랬는지 어른은 아이들 한테 기억에 남을수 있게 이 묘는 옹주묘다 라고 알려주며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