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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유일한 피난처 삼상21:10-15 시34:1-17
2000년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뭔가 더 좋은 날이 오기를 맞이하면서 새해를 맞이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밀레니엄을 맞이하면서 지구 곳곳에서는 재앙들이 들어닥치고 있었다. 2004년 12월에는 동남아에서 발생한 9.0에 달하는 쓰나미는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의 북단을 강타했다. 2004년 12월 26일, 인도양을 건너온 지진파는 25만명의 인명 피해를 입혔다. 그 다음해 2011년 3월 11일 일본 동북부 해안에서 일어난 동부쓰나미에서는 10m높이의 지진해일(쓰나미)로 인한 사망자 및 실종자가 1만 1천명 넘어섰다. 바다에 있어야 할 배들이 육지까지 밀려오고 공항은 비행기와 차들로 뒤엉켜 있던 모습들이 떠오른다. 시속 700km로 밀려오는 쓰나미를 누가 피할 수 있겠는가? 지진이나 쓰나미 하면 바닷가에서만 밀려오는 줄 알았는데 2016년 여름 경남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양지마을에서 산사태가 난 집은 해발 560m의 신곡산 자락에 있었다. 앞으로는 낙동강으로 이어지는 개천이 흐르고 주변에는 외지인들이 지어 놓은 전원주택이 여러 채 들어서 있어서 마을 주민들은 이곳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 지형으로 살기 좋은 곳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곳 주민들 이야기는 "60여 년을 살았지만 평생 홍수네 뭐네 그런 사고 한 번 없이 평온하게 살았다"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산사태로 일가족이 참변을 당하였는데 68살 오 모 씨의 집을 덮쳐지는 산사태가 발생하면서 순식간에 집들과 사람들이 쓸려 내려갔다. 이 사고로 오 씨와 오 씨의 손자 17살 박 모 군과 손녀 4살 박 모 양이 숨졌고 함께 있었던 며느리 2명과 손자 한 명은 구조됐다. 떠밀려 내려온 가옥은 형채를 알아보기가 힘들 정도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날 낮 12시 조 씨는 이곳 시댁에서 10년전 돌아간 조 씨 시아버지의 제사를 위해 전을 부치고 있었고 시어머니는 마루에서 마늘을 다듬고 있었다. 마루 옆 안방에는 큰 조카 민규(15)가 조 씨의 딸 정은이(3)를 업고 TV를 보고 있었고 작은 조카는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있었던 시골집의 평화로운 풍경이며 전과 산적의 진한 냄새가 온 집안을 휘감고 있었다. 다만 그날따라 유달리 굵은 장대비가 쏟아졌던 그때였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르륵… 스르륵…" 소리가 들려오는 부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이미 그곳엔 부엌이 없었고 그 대신 거대한 흙더미가 벽을 부수며 들어오고 있었다. 주변의 모든 게 순식간에 암흑으로 변했다. 집이 두 동강 난 사이로 흙탕물과 함께 산더미 같은 흙이 쏟아져 들어왔다. 뒤돌아 피하지도 못하고 순간 흙더미에 휩싸인 조카의 몸이 하늘로 붕 떠올랐다. 작은 소년의 몸은 흙과 물에 휩쓸려 개천 쪽으로 100m가량 떠내려갔다. 조 씨의 시어머니는 집이 있던 자리에서 200여m 떨어진 마을 정자 주변까지 휩쓸려가다가 나무 기둥에 깔려 숨을 거뒀다. 안방에서 세 살배기 사촌 여동생을 업고 있던 민규도 인근 개천에서 혼자 숨진 채 발견됐다. 조 씨도 흙더미에 매몰된 채 집에서 150m가량 떨어진 길목까지 떠내려가다 멈췄다. 그곳 사람들은 그 때까지만 하여도 산사태, 지진은 남의 일로만 생각했다는데 그런 일을 당하고 나니 언제 또 그런 일이 닥칠지 마음이 늘 불안하다는 것이란다. 2000년대 밀레니엄으로 전세계가 흥분하면서 맞이한 세기였지만 이상기온으로 말미암아 장마 산불 그리고 태풍이 불어오면서 많은 재앙을 가져오는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가장 강력한 쓰나미는 2004년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쓰나미로 사망자만 25만명이었고 태풍은 2005년 미국 뉴올리안주의 카트리나 태풍이라고 생각한다. 카트리나는 최대풍속이 무려 270KM/H에 달하고 하루에 비가 500mm-600mm까지 왔던 너무나 큰 태풍의 피해면적이 우리나라 전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켰다고 보면 되는데 그 카트리나 태풍으로 세계 최강국 미국에서 사망자만 무려 5000명과 100만명 이상의 이재민을 냈던 카트리나의 위력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이런 태풍이나 지진이나 쓰나미가 미국이나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개인의 삶속에도 어느 날 갑자기 이런 태풍이 불어올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풍이 불어올 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인생 태풍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자 이런 가장 강력한 인생 태풍을 경험하고 그 태풍을 극복한 인물이 성경에 나오는 한사람인 다윗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베들레헴 목동이었을 때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가 베들레헴 집에 까지 와서 어린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면서 그 날 이후로 주의 영께서 다윗에게 임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삼상16:13). 그 후 다윗은 아버지 이새의 심부름으로 전투하는 형들에게 식사할 것을 가지고 갔다가 그 전쟁터에서 하나님을 모욕하는 블레셋의 적장 골리앗을 보면서 참을 수 없어 어린 소년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골리앗의 칼로 골리앗의 목을 벤 것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하루아침에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그날에 사울왕은 다윗이 그의 아버지 집으로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고 사울이 다윗을 보내는 곳마다 다윗이 지혜롭게 행동하매 사울이 다윗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다스리게 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용맹한 다윗이 블렛셋 사람을 살육하고 돌아오는 날에는 이스라엘 여인들이 기뻐하며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의 죽인 자는 만만이라 하는 말로 사울왕은 여인들이 다윗을 찬양하는 소리에 시기와 질투가 가득해서 다윗을 죽일려고 합니다. 다윗을 시기하는 사울은 블레셋을 통해 다윗을 죽이고자 다윗은 드디어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지난 날 한 낮 양치기에 불과했던 다윗이 드디어 한 나라의 정치와 군사의 중심에 서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또 다윗이 전쟁터에 나갔다 올 때마다 사람들의 민심이 사울왕이 아니라 다윗에게 점점 더 쏠리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로 인해 사울의 시기와 질투가 급기야는 사울이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거듭하게 됩니다.
(삼상18:10-11) 10 그 다음 날 하나님으로부터 온 악한 영이 사울에게 임하매 그가 집의 한가운데서 대언을 하더라. 다윗이 다른 때와 같이 손으로 하프를 켜더라. 사울의 손에 창이 있었으므로 11 사울이 그 창을 던졌으니 이는 그가 말하기를 내가 창으로 다윗을 쳐서 벽에 박으리라, 하였기 때문이더라.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사울이 이렇게 돌변하는 것은 마귀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마음을 넣어 주었기 때문인데 사울이 다윗을 향해 창을 던졌던 일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미친 왕으로 말미암아 다윗은 하루아침에 나라의 군대장관이며 왕의 사위의 신분에서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인간이 권력을 한번 맛보고 나면 사위아니라 자기 자식이라도 죽이고 하는 일들이 역사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은 인간이 물리치기 정말 어려운 탐욕입니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측전무후를 아시나요?
《황후가 되기까지》
측천무후는 당(唐) 고종(高宗)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 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이다. 그녀는 본래 고종의 부친 태종의 궁녀였으나 아들 이치(李治: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 버렸다. 649년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무측천은 감업사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무측천이 다시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王氏)가 고종에게 무측천의 입궁을 적극 부추켰다. 황후 왕씨의 보살핌 속에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간 무측천은 정성을 다해 황후 왕씨를 모셨다. 그러다가 자기가 자신의 딸을 살해한 후 황후 왕씨에게 뒤집어 씌우므로 무측전은 황후를 제거하고 결국 자기가 황후가 된다. 무측천은 자신의 권세와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친자식도 가만 놔두지 않았다. 무측천에게는 이홍(李弘), 이현(李賢), 이철(李哲), 이단(李旦)이라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656년 태자 이충(李忠)이 폐위되자 무측천의 장남 이홍이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권력이냐 자식이냐? 이 양자택일의 중대한 기로에 선 무측천은 비정하게도 675년 무측천은 24살의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서 죽여 버린다. 이홍이 죽은지 한 달 후에 둘째 아들은 다른 사람을 교사하여 태자가 여색을 탐한다고 모함하게 하였다. 680년 8월 이현은 태자의 신분을 박탈당하고 684년 무측천은 중종 이철을 폐위시킨 사흘 후에 파주로 사람을 보내어 이현을 죽였다. 이현이 폐서가 된 이튿날 셋째 아들 이철이 태자에 책봉되었다. 683년 고종은 황위를 태자에게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으며, 이로써 태자 이철이 황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중종을 폐위시켜 궁궐 깊숙한 곳에 유폐시켰다. 중종을 유폐시킨 후 무측천은 자기의 막내 아들 이단, 즉 예종을 황제로 옹립하였다가 무측천은 마침내 예종을 폐위하고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라 스스로 성신황제(聖神皇帝)라 칭하였다. 그리고 국호를 주(周)연호를 천수(天授)라 하고 준비해 둔 도읍지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이로써 그녀는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무측천이 황제에 등극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이미 67세였으니, 중국역사상 황제에 즉위한 나이가 가장 많은 황제가 되었다. 세상권력을 한번 맛보면 자신의 자녀들도 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역사는 증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다윗으로 가면 다윗은 졸지에 군대장관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리고 이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잃어 버렸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다윗은 한 순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권력이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큰 태풍이 불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다윗 인생가운데 태풍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더 큰 인생 태풍이 겹겹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1. 도망자가 된 다윗
도망자가 된 다윗의 이야기는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사울왕의 아들 요나단으로부터 들으면서부터 시작합니다. 다윗은 사울의 왕궁을 떠나려 하다가 그래도 자신과 의형제까지 맺은 요나단에게 만은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해야겠다 싶어 요나단을 만납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것을 요나단에게 알리니, 요나단은 그럴 리가 없다며 펄쩍 뜁니다. 그래서 마침 다음날이 월삭(초하루 축제일)이니 그때 요나단이 사울의 속마음을 떠보기로 합니다. 월삭 이틀째가 되자 사울은 다윗이 어찌하여 그 식사 자리에 참여하지 않았느냐고 묻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가족의 매년제에 참여하기 위해 바쁘게 갔다고 말하자 사울은 그 죽일 놈을 빨리 잡아오라고 호령합니다. 이에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 같은 충신이 어디 있냐고 왜 그러시냐고 다윗을 두둔하는 말을 하자, 사울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기 아들 요나단을 향하여 창을 던집니다. 이에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일 결심을 한 줄 알고 다윗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은 이제 그 어디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도망자의 신세가 됐습니다. 요나단이 월삭 때에 아버지 사울이 정말 다윗을 죽이려는지 그 속마음을 확인해보겠다고 한 날부터 사흘이 넘도록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정처 없는 방랑의 삶을 시작합니다. 우리는 이 기간이 10년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때의 다윗의 입장에서는 이 고통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어쩌면 영영 그의 삶에 평안이란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옵니다. 사무엘은 분명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후부터 왜 이렇게 자기의 인생이 꼬이기만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절박한 시련이 후일 다윗에게 정금 같은 순전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사울에게 너무 갑작스럽게 왕이 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번 다윗에게는 아주 강한 훈련을 시키셔서 그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이끄는 참된 지도자로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시련의 기간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믿음으로 그 기간을 잘 이겨냈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는 나를 잊으셨거나, 내 고통은 돌아보지 않으신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련에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습니다.
2.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인 다윗
요나단과 헤어진 다윗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도망가는데,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왕궁으로부터 남동쪽으로 4km 떨어진 놉에 있는 성막으로 갑니다. 요나단과 처음 만날 때부터 계속 굶었으니 다윗은 거의 사흘을 굶은 채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갑니다. 이미 다윗이 사울의 미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아히멜렉은 두려워 떨면서 어찌하여 군사들 없이 혼자 왔느냐고 묻습니다.
(삼상21:1-2) 1 그때에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이멜렉에게 이르니 이멜렉이 다윗을 만나 두려워하며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아무도 너와 함께하지 아나하느냐? 하매 2 다윗이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되, 왕이 내게 일을 명령하고 내게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보내어 하게하는 일과 또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을 아무에게도 전혀 알리지 말라. 하시기에 내가 내 종들을 이러이러한 곳으로 가라고 지정하였나이다.
다윗은 왕의 비밀 명령을 수행중이라, 군사들에게는 따로 약속 장소에서 만나기로 했으므로 혼자 다닌다고 말하고는 먹을 것과 칼을 구합니다. 이에 안심한 아히멜렉이 제사장이 먹는 거룩한 떡 진설병을 내주고, 다윗이 죽였던 골리앗의 칼을 내어줍니다. 천하의 거인 골리앗 앞에서도 당당했던 다윗이었으나 사울에게 쫓겨 정처 없는 방랑자의 신세가 되자 그만 두려움이 엄습하여 제사장 아히멜렉을 속이고 진설병을 받아먹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일어날 비극의 씨앗이라는 것을 모르고 다윗은 유대땅 어디에도 피할 곳은 없으므로 블레셋 땅으로 들어갑니다.
(1) 아히멜렉 제사장을 포함 놉땅의 85명의 제사장들이 살륙당하다
다윗이 블레셋 가드왕 아기스로부터 추방되면서 다윗은 아굴라굴로 오니 사람들이 400명쯤 모이면서 사울왕도 다윗의 소식을 듣고 다윗을 추척하던 중 에돔 사람 도엑으로부터 다윗이 놉에 와서 아빌멜렉 제사장을 만났던 이야기를 듣고 아히멜렉 제사장이 다윗을 도와줬다는 죄목으로 아히멜렉 제사장과 놉땅의 85명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버리는 참극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놉땅에서 도망쳐나온 아히멜렉의 아들 중 하나인 아비아달로부터 듣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아히멜렉에게는 어떤 잘못도 발견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히멜렉의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아야 하는 상황임에도 다윗을 도와줬던 아히멜렉에게 돌아온 것은 아히멜렉은 그의 모든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놉땅에 있는 85명의 제사장들까지 자기 때문에 살륙당했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는데 아히멜렉의 일은 그렇다고 쳐도, 다윗의 거짓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다윗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짓말에 좋은 거짓말과 나쁜 거짓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거짓말 그 자체는 나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디도서 1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6장 1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지금 내가 남을 속이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아니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 비참했습니다. 결국 다윗도 자신의 거짓말이 비극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깨닫게 된 후에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고백합니다.
(삼상22:22 ) 다윗이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그 날에 에돔 족속 도엑이 거기 있기에 그가 반드시 사울에게 고할 줄 내가 알았노라. 내가 네 아버지의 모든 사람을 죽게 하였도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다고 우리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착한 거짓말입니다. 저도 제 삶을 돌아보니 착한 거짓말은 둘째 치고 온갖 거짓말로 점철된 삶이었기에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과연 거짓말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이 가능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생각나는 것이 과연 우리 주님도 선한 거짓말을 하셨냐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5장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5:37). 우리 주님은 조금도 좋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진실을 위해 발버둥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적으로는 이해가 잘 안되지만 다윗이 속인 이 일로 말미암아 제사장 85명이 사울에게 죽임을 당하고, 제사장들이 살던 놉 성읍 사람들이 완전히 진멸을 당합니다(삼상22:9-22). 그들은 단지 도망치는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것만으로 놋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연대책임을 지었고 특히 에봇을 입은 하나님의 제사장들만 85명을 죽였으니 엄청난 살륙이 그렇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중에 간신히 살아남은 한 사람이 다윗에게 와서 놉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이야기를 하면서 다윗은 자신 때문에 죄없는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 몹시 마음아파합니다.
여기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아히멜렉과 같이 선한 사람이 악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선한 자의 고통문제는 우리의 생각과 시각으로 해결하기엔 켤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순되는 문제는 우리의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문제는 우리의 생각 보다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분명 오늘 제사장 아히멜렉과 85명의 제사장의 죽음은 사울의 죄악과 도엑의 사악함으로 인해 일어난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히멜렉과 놉의 85명의 제사장의 죽음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한 번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아히멜렉은 누구입니까? 사무엘상 22장 11절에서 아히둡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히둡은 누구입니까?
(삼상14: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는데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 있던 주의 제사장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아히야는 비느하스의 손자라고 합니다. 비느하스는 엘리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경고가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장:22절의 말씀을 보면 엘리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과 동침함을 엘리가 듣고 엘리가 아들들에게 경고하였음에도 그 아들들이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주께서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다고 했습니다(삼상2:25)
지금 누구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저주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으로 인해 엘리 가문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히멜렉의 이야기는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잘 납득할 수 없는 일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은 그게 우리에게 좋든, 좋지 않든,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아히멜렉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고 경외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그리고 내 상황이 불리해 지고 어려워진다고 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굳건한 믿음 위에 서야만 합니다.
후일 다윗은 이 일을 크게 후회합니다. 자기의 배고픔을 면하자고 거짓말을 한 것이 제사장 85명은 물론 놉 성읍의 모든 사람들을 죽게 했으니 그 후회와 마음의 고통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 또한 다윗이 훌륭한 임금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의 과정이었습니다.
다윗은 이 일로 순간의 어려움을 벗어나고자 적당히 꾀를 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확실하게 배웁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는 습관을 갖게 됩니다.
3. 가드 왕 아기스에게 도망한 다윗
집요하게 추격해오는 사울왕의 추격 때문에 다윗은 다급한 나머지 다윗은 사울을 피해 놉땅에 있는 제사장 아히멜렉의 집으로 도망을 하여 게서 거룩한 떡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받아가지고 나온 다윗은 그곳에는 사울의 사람 도엑이 있었음을 알고는 여전히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다윗은 사울의 영향권에서 조금은 더 멀리 떨어질 수 있는 곳으로 피신을 했는데 하필 피신을 한다는 곳이 놉에서 남서쪽으로 40km 정도 떨어진 블레셋의 한 성읍 가드였습니다. 사실 다윗이 블레셋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다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자신이 이끄는 군대도 없었고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이 쉽게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드로 들어갔습니다.
(삼상21:10) 그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였으므로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가니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가 추격해 오니 도망치던 누우나 얼룩말들이 급한 김에 강으로 뛰어들지만 강에는 악어떼가 득실 거리는데 밖으로 나오면 사자 밥이 되고 강에 가만이 있으면 악어의 밥이 되는데 그런 경우처럼 다윗도 사울이 추격해 오니 도망치다 들어간 곳이 이스라엘의 적들이 살던 블레셋 가드라는 곳입니다. 그 미친 사울 왕이 추적해 오니까 가드왕 아기스에게로 숨어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선택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다윗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 준 사건이 골리앗을 죽인 사건이었는데 다윗이 숨어 들어갔던 곳이 원수들의 나라인 불레셋의 가드왕에게로 들어갈 수 있었을까? 이것은 정말 총알을 피할려다가 대포알을 맞은 격이고 오토바이를 피할려다가 대형 트럭에 치여 죽는 그런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었다기보다는 다윗의 인간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다윗도 사람이었기에 허물이 있었고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말하되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삼상21:11). 아기스왕이요 이자가 우리의 장군 골리앗을 죽여서 우리에게 처절한 패배를 안겨준 그 자가 아닙니까? 무리들이 노래할 때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한 그 다윗이 아닙니까? 라고 알아 낸 것입니다. 아기스에게 들어간 다윗은 아기스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란 기대를 가지고 들어갔을 때 아기스왕은 처음엔 다윗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 육중한 두려움이 엄습한 순간에 다윗은 본능적으로 반사적인 행동을 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선택은 미친 사람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서 대문짝에 그적거리고 그 지저분한 침을 그 수염에 흘려 내립니다.
(삼상 21:12-13) 12 다윗이 이 말을 그의 마음에 두고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13 그들 앞에서 그의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이 순간이 다윗의 전 인생을 통틀어서 가장 위급한 순간이 아닌가 생각 합니다. 여우를 피하다 사자를 만나고, 총알을 피하다가 대포알을 만난 꼴입니다. 이제는 꼼짝없이 죽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가드왕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 하여 그 앞에서 자신이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그의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이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이 자를 데려다가 내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아기스왕이 미친 다윗을 내 쫓아 버리도록 하면서 위기를 넘기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이 일어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두려움을 어떻게 대처해 나가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게 되면서 그는 좌충우돌하는 상황속에서 연약한 모습을 드러냈지만 그러한 일들을 계기로 하나님을 더욱 찿게 됐습니다.
(시34:4) 내가 주를 찾으매 그분께서 내말을 들으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다윗이 아기스에서 좇겨난 후 지은 시를 보면 그가 아기스앞에서 얼마나 두려움 가운데 있었는가를 잘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얼마나 하나님께 간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 가운데 나타나는 연약함과 허물은 나를 어렵게 할 때가 있습니다만 때로는 그 연약함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찿고 의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악하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을 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연약함 가운데서도 자신과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유다 광야에서 훈련받는 다윗을 통해 오늘은 그때 다윗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었는지, 그리고 그 시련을 어떻게 지혜롭게 극복했는지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과 이삭도 다윗과 같은 실수를 범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면서 이 땅이 장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줄 약속의 땅이니 이 땅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으나 가나안에 흉년이 들자 아브라함이 흉년을 피하여 애굽으로 갔다가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한 일을 당합니다. 다윗 역시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에 갔다가 졸지에 적군의 손에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리판단을 잘 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에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능력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안전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다윗 역시 이런 직진 본능에 따라 아히멜렉에게 가서 거짓말로 빵조각을 얻고, 다시 가드 왕 아기스에게 가는, 말하자면 사자 입 안으로 머리를 넣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늘 항상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요나단과 헤어진 후에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지부터 물었어야 했습니다. 기도를 하여야 했는데 어려서부터 늘 하나님과 동행해왔던 다윗이었으나, 이렇게 두려움에 빠진 순간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오직 두려운 일만 보여서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연이어 두 번이나 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의 때는 또한 내가 가장 연약해진 때이기도 합니다. 위기의 때는 한자의 뜻 그대로, 나락으로 떨어질 위험과 더 놀라운 은혜의 세계로 나아갈 기회가 동시에 주어진 때입니다. 그러므로 어렵고 두려운 일일수록 더욱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4.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의 탄생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래도 한때는 이스라엘의 군대장관이었고 한때는 사울왕의 사위였고 그 로얄패밀리였던 다윗이 지금은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그렇게 미친 사람짓을 하는 다윗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너무나도 슬퍼서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는 코메디와 같은 그런 장면입니다. 그래서 아기스가 이렇게 얘기합니다. 가만히 보니까 미친놈이군 내 칼로 죽여야 마땅하겠지만 미친놈의 피를 내 칼에 묻힐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만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기스왕에게도 다윗에게 유리하도록 역사하시니 내쫒다 버려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정말 하나님은 다윗을 이렇게 까지 훈련시키실 필요가 있으셨을까요 그렇게 아기스에게 사로잡혔다가 미친 체하여 겨우 쫓겨난 다윗은, 가드에서 15km쯤 떨어진 아둘람 동굴로 도망합니다. 그곳은 석회암과 사암 지대여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동굴과 함께 사람이 인공으로 만든 동굴들도 많은 곳입니다. 그러나 워낙에 산지가 험하고 황량한 곳이라 사람이 다니지 않는 곳이어서, 다윗이 은신하기에는 오히려 좋은 곳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조용히 이 황량한 동굴 속에 은신하였는데, 어떻게 이 소식이 알려져서 그의 형제들과 아버지의 온 집안 식구들이 그곳에 왔었고, 이어서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모든 자들이 다윗 주변에 몰려들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사울의 폭정에 시달려 마음에 한이 많은 자들이었습니다. 사울이 폭정에 고통당하는 자들이 다윗에게 몰려들었습니다. 다윗 주변에 모인 자들은 한이 많고 상처투성이이며 거칠은 자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어려울 때는 다윗을 돌로 쳐 죽이자고 까지 했습니다(삼상30:6). 이렇게 형편없는 오합지졸들이 함께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훈련을 받습니다. 다윗은 이들에게 군사훈련과 물론 신앙의 훈련도 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후일 명실공히 다윗 왕국의 훌륭한 인재들이 됩니다. 그들 중에서 다윗 왕국의 훌륭한 장군들이 나옵니다. 그들 중에서 다윗 시대의 신령한 세계를 열어갈 제사장과 성가대가 나옵니다. 다윗과 함께 그들이 쓴 시들이 우리가 보는 시편의 대부분입니다.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이스라엘 역시 형편없는 오합지졸이었으나 그들이 광야 40년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었듯, 다윗과 함께 한 이 아둘람 공동체 역시, 세상에서 이리저리 찢기고 상처받아 그 마음에 원망이 가득한 오합지졸들이었으나 그 아둘람 동굴 속에서의 훈련으로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찬란한 역사를 이루는 인물들이 됩니다. 그러나 이들이 아둘람 동굴 속에 있을 때에는 그들의 삶의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야말로 한숨과 절망 외에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동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고, 그래서 위대한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에게 있는 어려움과 시련도 다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믿고 넉넉히 이기는 자들이 되십시오. 시련 중에도 감사할 줄 아는 자가 되십시오. 그들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당신도 인도하십니다.
5. 아둘람 공동체의 중심에 다윗이 있다
다윗 평생에 가장 힘들고 어려운 시련과 고통 속에서 다윗의 믿음이 빛이 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미친 척하다 쫓겨난 후 아둘람 동굴에 돌아왔을 때의 일입니다. 다윗은 당시는 나라의 군대장관이니 오늘날로 치면 군사령관이나 총리까지 지낸 정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 까닭 없이 미움을 받아 이제 그 어디에서도 반겨줄 사람이 없어 황량한 사막의 동굴 속에 몸을 피해 있습니다. 그때의 심정이 아마도 견딜 수 없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헤어 나오기 힘들 것입니다.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 삶을 마감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때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노래합니다. 이때 다윗이 부른 노래가 바로 시편 34편입니다. 시편 34편의 표제어에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하다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비멜렉이란 블레셋 왕의 직함의 명칭입니다. 우리나라의 최고 통수권자를 대통령이라 하듯, 블레셋은 최고 통수권자를 아비멜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때의 블레셋 왕 아비멜렉의 이름이 아기스인 것입니다.
(시34:4-10) 4 내가 주를 찾으매 그분께서 내말을 들으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그분을 바라보고 빛을 받게 되었으며 그들의 얼굴은 부끄움을 당하지 아니하였도다. 6 이 가엾은 자가 부르짖으매 주께서 그의 말을 들으시고 그의 모든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셨도다. 7 주의 천사가 그분을 두려워하는 자들을 둘러 진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하지만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었다기보다는 다윗의 인간적인 수단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다윗도 사람이었기에 허물이 있었고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9 오 주의 성도들아 너희는 그분을 두려워하라 그를 두려워하는 자들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주를 찾는 자들에게는 모든 좋은 것이 부족하지 아니하리로다.
시편 34편은 다윗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서 쫓겨난 후 아둘람 굴에 피하여 숨을 돌린 후에, 자기를 도우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쁨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비록 황량한 동굴 속이지만 이제 숨을 돌릴만한 여유가 생기니 자신을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온 몸을 감쌉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둘람의 사람들이 아둘람 동굴에서 고생했다고 해서 저절로 훌륭한 인재가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 오합지졸들 속에 믿음의 사람 다윗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둘람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위대한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일꾼들이 된 그 핵심에 바로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는 다윗이 있습니다. 다윗의 믿음이 거친 오합지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심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을 심었습니다.
6. 유다의 광야에서 훈련받는 다윗
아둘람 동굴이 비록 거칠고 황량한 사막 속에 있는 것이기는 해도 다윗의 두려운 마음을 조금 안정되게 한 곳입니다. 그래서 삼상 22:4에서 곳을 ‘요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선지자 갓이 와서 다윗에게 여기에 머무르지 말고 다시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말합니다. 지금 다윗에게는 그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습니다. 유다 땅도 블레셋 땅도 다 위험합니다. 겨우 겨우 숨 돌릴 만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다시 그 무서운 사울이 있는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그동안 다윗이 얼마나 두려워했습니까? 그 두려움에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에게는 거짓말로 양식과 칼을 얻었고,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도망하였다가 거기서는 미친 체하여 겨우 쫓겨오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운 사울이 있는 곳으로 다시 가라니요.
그러나 다윗은 선지자 갓의 권면을 즉시 따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는 순간 다윗은 주저하지 않고 두려움의 소굴로 다시 들어갑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갓을 통해서 다윗에게 주시는 말씀은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말씀에 의지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따지면 사울의 마음이 진정이 될 때까지 그곳에서 은신하고 있는 것이 낫다고 하겠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두려움과 고통의 현장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도우시는지를 실제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에 의지하여 사는 자들을 어떻게 도우시는지는 보고 느끼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선지자 갓의 권유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기고 곧바로 유다 땅에 있는 헤렛 수풀로 들어갑니다. 그러자 역시 다윗이 염려한 일이 곧바로 일어납니다. 사울이 군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온 것입니다. 이때부터 다윗의 삶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습니다만, 그 긴장 속에서 다윗은 날마다 자신을 도우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말씀’과 ‘광야(廣野)’ 두 가지로 훈련시키십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고, 광야의 고통스러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도우시지는 배우게 하십니다. 가령 감기를 앓다 나으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실감하기 어렵지만 의사들이 손을 놓을만한 중병에서 나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셨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더욱 고통스럽고 두려운 현장으로 몰아넣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두려운 현장에서 하나님께서 결코 다윗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 하나님은 지금도 다윗을 기억하시며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때의 다윗의 경험이 평생 그를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고 섬기는 자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어렵고 힘든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결단코 놓지 않는 자라야 이런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쁘고 분주하다고 해서, 조금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다고 해서 말씀 기도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중단한다면 결단코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절망과 고통가운데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속으로 피해 들어갔던 것이 승리의 비밀이라는 것입니다. 환난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고 응답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대책없이 이런 태풍가운데 홀로 내 버려둬도 되는 것일까요 다윗의 지위 친구 아내 부모 형제 다 빼앗기고 자신 때문에 살육당한 85명의 제사장들과 놉의 그 수많은 생명들 그리고 이방왕 아기스 앞에서 생명을 연명하고자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면서 수염에 침을 흘리는 인생의 존엄성 마처 박탈당하던 인생의 태풍이 다 지나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다윗이 그 인생의 무지막지한 태풍 그 비극의 쓰나미를 감당해 냅니다. 그리고 결국 놀라운 승리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하신 독생자 우리주 예수그리스도를 일컬어 다윗의 자손이라고 부를 정도의 전무후무한 하나님의 인물이 되어서 거룩하게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다윗만이 가지고 있었던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낼 수 있었던 그 비밀은 무엇 이었을가요?
오늘 그 비밀을 찾아보고자 시편 34편을 살펴보게 될 것인데요 이 시편 타이들은 다윗이 블레셋왕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척하다가 쫓겨나 지은 시라고 하는 타이틀이 있는 시입니다. 여기서 아비멜렉은 애굽의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아비멜렉역시 블레셋 왕가의 칭호입니다. 여러분 목숨구하겠다고 다른 사람앞에서 쫓겨 났다면 어떤 글을 남기시겠습니까? 그런데 정말 그 일을 당했던 다윗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시34:1, 8) 1 내가 언제나 주를 찬송하리니 그분을 찬양함이 항상 내 입에 있으리로다. 8 오 주께서 선하신 것을 맛보고 알지어다. 그분을 신뢰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러한 다윗의 모습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었다기보다는 다윗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면 다윗도 사람이었기에 허물이 있었고 연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비참한 가운데 다윗은 주를 찬양하겠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울에게 쫓겨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했으나 거기서 죽음의 위기에 처하자 그 위기에서 벗어나자 다윗이 그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구원받은 은혜에 크게 감동하여 주를 항상 찬양할 것이라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하나님을 그냥 추상적으로 신학적으로 알지 말고 그 하나님의 선하심을 직접 체험하고나면 그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직접 체험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비참한 순간에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찬양의 노래를 드릴 수 있었을 까요 우리가 깨달아야 할 비밀 그 비밀이 8절 하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다시한번 읽습니다ㅡ너희는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이 비밀입니다. 다윗은 피할 곳이 있었습니다. 인생의 엄청난 쓰나미가 몰려올 때 인생의 엄청난 태풍(두려움)이 몰려올 때 다윗에겐 피할 피난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이겨낼 수 있었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대적으로 인해 받은 숱한 환난과 고통을 한 마디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면서 주께서 자신의 기도에 응답하사 이같은 두려움에서 건지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특히 젊은이를 향하여 주를 경외하기를 배우라고 촉구하며(9,11)
실로 불의가 가득한 이 세상속에서 사는 성도들은 숱한 두려운 일을 만나게 됩니다. 경제의 두려움 질병의 두려움 지진의 두려움 전쟁의 두려움 그러한 두려움들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주를 경외하며 주께 피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시입니다. 이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하신 주님의 말씀과 일맥 상통하는 말씀이십니다. 인생의 태풍이 몰려오고 비극의 쓰나미가 몰려올 때 다윗은 좌절하거나 절망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유일한 피난처가 있었는데 주 하나님이 내 피난처이십니다. 그는 전지전능하시고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영원한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이십니다. 오히려 나는 이런 하나님을 찬양할 것입니다. 이 고난의 날에 내 인생의 삶을 통해 나는 오히려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경험하였음을 고백하는 다윗의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을 진정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눈물과 고통과 아픔과 고난시간들이 하나님이 자신을 아름답게 사용하시려고 훈련시키시는 시간들로 인식하였다는 것입니다.
주님 어렵고 두려운 때일수록 더욱 더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옵소서. 두려움에 빠졌을 때에도 분별력을 잃지 않게 하옵소서. 알 수 없는 시련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믿고 다윗처럼 끝까지 이겨서 승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시련과 고통 중에도 다윗처럼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하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