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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지식/성품
제목 : 하나님을 앎으로 ‘신적 성품’에 참여함
성경 : 벧후 1:3~4
찬송 : 299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625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지난 주일에 이어서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지식은 우리의 영적 생명과 실제의 삶 속에, 하늘에 속한 은혜와 평강 그리고 신령한 생명과 경건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알고 있느냐,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예수님이 과연 ‘어떤’ 분이냐가 결정적입니다. 성경 계시의 말씀이 가르치는 그대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오직 그것을 배워야 합니다. 거기에서 세상을 넉넉히 이기는 은혜와 평강, 생명과 경건이 솟아납니다.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게 되는 근거
벧후 1: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정말 그럴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2절에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게’되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통상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해결될 때 은혜와 평강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결되지 않던 문제가 해결되면 은혜를 경험하고 평강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본문은 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2절)가 그 답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어떻게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더 풍성히 누릴 수 있게 될까요? 여기서 ‘주’는 단순히 우리가 ‘주여, 주여’ 할 때 마치 우리 문제의 해결사로 생각하며 부르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원래 ‘주’(큐리오스)라는 칭호는 시편 110편을 근거로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셔서 어떻게 되셨을까요? 성경은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어떻게 되셨는지를 시편 110:1을 인용하여 밝히 드러냅니다.
행 2:34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이르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행 2:35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그러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라는 말씀에서 ‘주’는 부활하셨을 뿐 아니라,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등극하여 앉으신, 지극히 높아지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칭호입니다. 이런 분을 아는 일이 우리에게 충만한 은혜와 평강이 되는 이유가 더 있습니다. 주께서 승천하셔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을 때, 혼자만 앉으신 것이 아니라 그와 연합된 모든 신령한 성들과 함께 앉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복음을 확고하게 선언합니다.
엡 2: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엡 2: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엡 2: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여기서 하늘에 ‘함께 앉히시다’라는 표현은 ‘이미 일어난 확정된 사건’을 가리킵니다. 신자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믿어 그와 연합된 표시로 세례를 받았다면,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았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존귀함이 성도에게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통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는’존재입니다. 그보다 더 높고 큰 영광을 구할 수도 얻을 수도 없는 존재입니다. 그 지극한 영광과 존귀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함께 얻은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세상에서 바랄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을 위하여, 세상 사람들이 하는 아귀다툼과 경쟁과 높아지려는 싸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단연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더 높아질 수 없는 영광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도, 장관도, 회사 회장도, 사장도, 박사도, 그 무엇도 부러울 것이 없는 최고의 높은 자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은혜와 평강을 누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은 사람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그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부터 ‘내려오는 일밖에’ 할 것이 없게 됩니다. 내려오면서, 주님처럼 낮아져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많이, 가장 낮게 내려오는 성도가 주님을 가장 닮은 성도일 것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셔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죽기까지 복종하며 섬기신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빌 2:6-8). 그것이 가장 자유롭고, 가장 은혜롭고, 가장 평강한 삶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가장 정상적인 삶입니다. 예수 믿고 복 받아서, 세상 적으로 무엇이 많아지고 높아져서 간증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와 함께 하늘 보좌에 않은 성도의 자유와 안식 가운데서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 주 뜻을 이루는 성도가 가장 성공한 신앙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을 풍성하게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 성도들은 하늘 보좌 우편에 함께 앉아 있는 축복을 이미 받은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보다 더 큰 은혜와 평강은 없습니다. 이제 높은 보좌에서 내려와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사십시오. 여기에 더 큰 은혜와 평강을 누리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벧후 1: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그를 믿은 성도에게 놀라운 영적, 심령적, 인격적, 성품적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3절에서 소개하는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후회하심도 실패하심도 없습니다. 결국 성취된 것이나 다름없이 확실한 부르심입니다. 베드로후서 1:1-11절은 종말의 구원, 최후의 구원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자의 최종적 구원, 그의 구원의 결정적인 요소는 결국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합니다. 우리가 믿는 구원의 서정 가운데 첫 번째가 ‘소명(召命)’ 즉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셨다는 사실 만큼 확실한 부르심은 없습니다. 신자는 그의 견고한 부르심에 의지해야 합니다. 신자에게 맡겨진 역할은 그분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하게 하는 일’이며 그것에 더욱 ‘열심을 다하는’ 일입니다(1:10). ‘부르심과 택하심’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써’ 하신 일입니다.
‘자신의 영광과 덕으로써’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영광과 덕으로 말미암아’ 혹은 ‘영광과 덕에 근거해서’라는 의미입니다.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당신이 누구에게 어떤 사람을 불러오라고 시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응, 물어보면 내가 불렀다고 해!” 만일, 당신이 지위가 높은 사람이고 그렇게 할 권세가 있다면, 요청 받은 사람은 당장 달려올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말을 무시할 것입니다. 혹은, 당신이 권세는 없어도 상당히 덕이 있고 존경받는 사람이라면, 그런 당신이 누군가를 불렀을 때 그는 사람들이 당신의 덕을 기리고 존경한다는 것을 알기에 그 요청을 무시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른 누구도 다른 무엇도 아닌, 오직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자신의’ 영광과 덕을 근거와 수단으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그 부르심의 성패(成敗) 여부에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덕’을 걸어 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부르심은 이렇게 차원이 높은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그 부르심과 택하심에 부응하지 못하거나, 실제로 부르신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를 부르실 때 근거와 수단으로 걸어 두신, 그 하나님의 영광과 덕 즉, 그분의 명예와 인격적 능력이 의심받고 손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함이 없습니다(롬 11:29).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덕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부르신 자리, 그 부르심의 종착지인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게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며(참조, 나사로의 부활, 요 11:40), 동시에 오직 하나님께서 지혜와 사랑에 있어서 ‘덕이 있으시다’는 증거입니다.
‘영적이고 전인격적인’ 지식
하나님의 이런 후회 없는 택하심과 견고한 부르심을 진실로 ‘안다면’, 이 고귀한 지식은 그것을 가진 사람에게 얼마나 큰 은혜이며 얼마나 놀라운 평강이 되겠습니까! 문제는 진실로 ‘안다’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는 변함없는 그대로이십니다. 언약을 성실하게 성취하셨으며 이제 그 아들을 통해 종말의 복, 하늘의 복을 넘치도록 풍성히 주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하나님을 ‘알고’ 있는가?”입니다.
베드로후서에는 ‘안다’는 표현에는 두 가지 단어가 쓰입니다.
1)‘에피기노스코’(2:21)라는 동사와 그 명사형인 ‘에피그노시스’(1:2,3,8;2:20)
2)‘기노스코’(1:20;3:3)라는 동사와 그 명사형인 ‘그노시스’(1:5,6;3;18)
넓게 보면, ‘안다’라는 사전적 의미에 있어서 두 종류의 용어가 큰 차이점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노스코’에 비해 ‘에피기노스코’는, 단순한 사실에 관한 정보나 지식을 얻는다는 뜻 외에도 대상의 본질을 깨닫거나 체험하며 그에 따른 감정이나 의지가 수반되는 식의 지식을 지칭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베드로후서에서도 이런 구분이 눈에 띱니다. ‘기노스코’는 1:20절(먼저 알 것은)이나, 3:3절(먼저 이것을 알지니)에서처럼 단순한 사실이나 정보를 안다는 의미로 쓰였지만, ‘에피기노스코’는 1:2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이나, 1:3절(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그리고 1:8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또한 2:20절(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2:21(의의 도를 안 후에/알지 못하는 것)에서처럼, 일관되게 하나님과 예수님 또는 복음에 대한 영적이고 인격적인 경험을 전제로 한 지식을 가리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안다든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부르신 자를 안다는 것은, 곧 그 앎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와 평강, 하늘의 생명과 경건의 능력을 맛보고 체험하고 그로 인해 그의 존재 자체가 변화되는 경험과 성장을 이룬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지식이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존재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지식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강조하는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은, 특별히 그 언약의 성취를 통해 주어지고 이제 그의 교회를 향해 쏟아지는 하늘의 능력, 곧 하늘에 속한 생명과 경건과 영원에 속한 은사들을 얼마든지 누리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앎으로 그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베드로는 이것보다 더 강력하게 주의 교회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과 부패한 삶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방법은 없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적 성품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의 결과는 성도의 ‘신적 성품’입니다. 만일 ‘교회 성장’이라는 것이 있다면 성경적 교회 성장이어야 하고, 성경적 교회 성장이란 교회의 성도가 신적 성품에서 성장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결정적이고 이것보다 신약 성경이 강조하는 바는 없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 그 나라를 다스릴 백성의 특징은 그 하늘에 속한 ‘새로운 성품, 신적 성품’을 가진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벧후 3: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벧후 3: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과가 신적 성품이라는 베드로의 가르침은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교회에서 베푸는 설교와 성경공부의 결과도 성도의 신적 성품의 성장이 열매여야 합니다. 물량 지상주의가 신앙이 되는 오늘날의 교회에서, 이런 말씀의 주장은 크게 매력이 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참된 교회의 모습이고, 장차 오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아 누리며 다스리는 새 언약 백성의 성경적 특징인 것입니다.
왜 신적 성품이 답입니까?
‘성품’(푸세오스)이란 원래 ‘타고난 본성’으로서 다른 존재와는 본질적으로 구별되는 존재적, 형태적 특성을 가리킵니다. 비둘기나 독수리는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종(種)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적 성품’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께 속한 영적 생명, 성도가 믿음을 통해서 받은 영적 생명을 전제로 하는 표현입니다. 믿음을 통해 그 안에 중생하게 된 영적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성장하는 모습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이 영적 생명은 하나님을 ‘앎으로써’ 그 하늘에 속한 모든 생명과 경건의 신적 능력을 공급받고 누리며 성장하게 됩니다. 이로써, 그 안에 본질적이고 존재적인 성품적 변화가 일어납니다. 오직 이런 존재적 변화만이 거짓 교사들의 거짓 가르침과 부패한 행실과 삶의 미혹을 이겨낸다는 것입니다.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신성한 성품 즉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세상의 우선적인 특징이 ‘썩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지배 아래서는 모든 것이 썩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썩어짐의 종노릇합니다(롬 8:21). 그래서 썩어짐은 뚜렷한 현상이고, 하나님을 떠난 가장 본질적인 특징입니다. 반대로 3절에 나타난 생명(조에)은 하늘의 생명, 곧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생명입니다. 성도는 이 부활 생명을 이미 받았고 더욱 충만하고 온전하게 받음으로써, 신적 성품에서 자라게 되며, 그로 말미암아 죽음 곧 썩어짐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이길 수 있게 됩니다.
베드로후서가 제시하는 ‘신적 성품’은, 구원의 보배로운 약속을 받은 성도들이 장차 종말에 온전히 성취될 신천 신지의 생명과 거룩과 영원함을 지금 여기 세상 속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 영적이고 내면적으로 누리는, 주요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의 실재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장차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갈 성도는 지금 여기에서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일 수밖에 없으며, 지금 여기 죽음과 죄와 허무가 판치는 세상 한복판에서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아니면 능히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 것임이 자명합니다.
신적 성품의 성장이란?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서 생깁니다. 훈련과 경험 이전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말씀에 따라 바른 내용이어야 합니다. 말씀이 계시하는 그대로의 하나님, 우리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교회가 성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의 선물입니다.
베드로후서 1:3-4절은 사실 한 문장인데, 결국에는 마지막에 오는 접속사(히나)에 의해 이끌리는 목적절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과 덕을 걸고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믿게 하셔서, 하늘에 속한 모든 생명과 경건에 속한 신적 능력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또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곧,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성품들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 목적절의 유일한 동사는 ‘되게’(기노마이)입니다. 성도의 존재와 성품이 그렇게 영적으로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생명과 경건의 본질을 따라 변화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그 지식을 가진 사람이 신적 성품을 따라 그런 성도가 ‘되는’데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신적 성품에 참여하는 길일까요?
‘참여하는 자들’(코이노노스)이란 단어에 ‘코이노니아’(교제)로 번역 되는 단어의 형태가 숨겨져 있습니다. 코이노니아가 뭡니까? 예배 후에 커피마시며 삶을 나누고 대화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불타는 건물에 머물러 있지 말고, 밖으로 뛰어 나오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 아래 있는 세상 안에서, 그 더러움과 썩어짐과 함께 뒹굴지 말고, 뛰어 나와 하나님의 신령한 능력, 하늘의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지식과 사귐 속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대립적이고, 양자택일이고,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교제인 셈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코이노니아는 엄밀하게 말하면 ‘연대(連帶)’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연대하여 사귀는 그 대상과 같은 길, 같은 운명, 같은 목적지를 향해 가게 되어 있는 관계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부르신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분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담지 않고 옆집 아저씨를 닮았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닮아가는 우리 성도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