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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마 19:23-30)
지난 시간에 어리석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지키는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부모의 유산을 많이 받았는지 부자였고 관직도 받아 권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부족함이 전혀 없는 성공가도를 달리는 유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영적인 갈증과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십계명을 지키라고 하자 이 청년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충격적인 도전을 합니다.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이 청년의 실체를 건드리는 가장 큰 도전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어떻게 했습니까? 이 부자 청년에게 물질은 그야말로 우상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십계명을 행했다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고백인데 정작 이 청년의 깊은 곳에는 물질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 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물질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깨트리라고 명령하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22절,"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물질이 더 소중했습니다. 무엇보다 더 소중했습니까? 영생보다, 하나님보다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청년의 감추어진 실체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돌아 섰습니다. 이것이 이 청년의 마지막입니다. 재물과 영생을 바꾼 사람이었습니다. 돈과 하나님의 기로 앞에 돈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어리석은 선택이었습니다.
이러한 사건을 곁에서 보았던 제자들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이 청년처럼 근심하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렇게 신실한 청년이 왜 영생을 얻을 수 없느냐는 것입니다. 저러한 부자청년도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나같은 가난한 사람은 어찌 영생을 얻을 수 있겠느냐는 고민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부자 청년의 사건에서 배울 수 있는 영적인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여기서 예수님은 같은 내용의 말씀을 두 번 강조해서 말씀하십니다. "부자는 천국 가기가 심히 어렵다." 아주 고민스러운 말씀입니다.
돈 좀 있다고 하는 사람은 천국 가기가 굉장히 어렵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하나의 관용구입니다. 당시에 어떤 곳에서는 낙타 대신 코끼리라는 말을 썼다고 합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진리를 말씀하실 때 강조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또 하나의 증거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이 표현을 특별히 강조하실 때 사용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부자는 모두 다 구원받을 수 없고 천국 갈 수 없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이 의문이 왜 우리에게 직접 관계가 있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은 우리 가운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면 천국 가기가 어렵다니,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우리의 갈등을 제자들도 똑같이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고 싶은 질문을 제자들이 합니다. 25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심히 놀랐다는 걸 보면 제자들이 충격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를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중요하게 강조하셨고, 우리가 그처럼 이 말씀을 받기가 어렵다면 분명히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가만히 묵상해 보면, 부자라고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 다음 구절에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로 보아 부자라고 다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자'라는 것이, '물질의 소유'라는 것이, 우리가 천국 백성이 되는데 얼마나 장애가 되는가를 보여 주시는 말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부자란 무엇입니까? 돈을 얼마만큼 가지고 있어야 부자라고 말합니까? 세상에는 가짜 부자들이 참 많습니다. 당장 사업을 정리하면 부도날 사람들 많습니다. 그런 사람도 바깥에서는 재벌이라고 합니다. 또 겉보기에는 별로 돈이 없는 것 같은데 속을 파 보면 돈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 누가 부자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부자라는 말을 좀 해석해 봐야 합니다. 여기서 부자라고 하는 것은 돈의 위력을 아는 사람,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돈이란 하나님 다음가는 능력이 있는 어떤 실체입니다. 요즘은 북한에서도 돈으로 다 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돈을 주면 안될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돈의 힘, 이것은 때로는 권력보다도 큽니다. 이 사실을 예수님이 인정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4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는 돈이 하나님 못지 않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하라는 것입니다.
같이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있는 신이 있다면 그것은 재물의 신일 것입니다. 자본주의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이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통일이 된다면 제일 두려운 것은 자본주의의 가장 나쁜 점, 바로 돈의 위력이 먼저 북한을 침범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공산주의 체제가 사라지고 있다고 해서 자본주의가 완벽하게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본주의의 치명적인 약점인 물질주의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물질을 초월할 수 있다는, 물질과 비교할 수 없는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한 자본주의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질은 그렇게 위험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8:36-37에서 예수님은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37]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온 천하'란 바로 물질 세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창고에 수많은 재물을 쌓아 놓았다 하더라도 오늘 하나님이 내 생명을 거둬 가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물질이 얼마나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을 주고라도 물질을 택하려고 합니다. 죽어 가면서도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여러분, 요즘 일어나는 범죄의 대부분은 다 돈과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부모든 형제든 상관없습니다. 어쩌튼 손해가 되면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더라도 괜찮습니다. 어느 분이 몇 달 전에 경기도에 살다가 로또 1등에 당첨되어 40억을 받고 부산에 있는 어머니 집으로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여동생 등 가족들과 로또 당첨금 분배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가족들에게 떠나겠다고 말한 뒤 양산으로 거주지를 옮겼습니다.
그러자 79세 된 할머니와 가족들은 양산의 아들 집에 찾아가 문을 두드리는데 아들이 열어 주지를 않자 열쇠기술자를 불러 열쇠를 따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아들이 이들을 무단으로 주거지에 침입했다며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아들 대신 손주들을 돌봐줬기 때문에 로또에 당첨된 아들이 할머니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집 한 채 정도는 마련해줘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아들은 앞으로 가족들에게 일절 대응하지 않겠다는 계획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세계는 돈에 의해 양심도, 인정도 없습니다. 그저 자기 욕심을 따라 돈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세상을 보는 것 같습니다. 물질 만능시대, 물질이 하나님인 시대를 사는 것같아 씁쓸하지 않습니까? 돈이 얼마나 좋으면 한 인간을 그렇게 인격적으로, 육체적으로, 가정적으로 파괴시키는 것입니까? 이런 극단적인 경우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돈 때문에 양심을 팔고, 신앙을 파는 사례가 얼마나 많습니까?
디모데전서 6:9-10에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은 좋은 것, 귀한 것, 필요한 것, 능력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돈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게 되면 일만가지 악이 그것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돈의 본질적 속성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돈의 위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마약을 팔면 그 사람이 폐인이 되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돈 몇 푼 벌려고 어떻게 해서든지 마약을 쓰도록 유혹합니다. 생명을 돈과 바꾸는 이런 것들이 오늘 이 세상의 철학이요 가치관인 것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교회에 올 때는 괜찮다가 예배 끝나고 나가면 세상의 질서에 쉽게 젖어 버립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통렬하게 지적하고 계십니다. 부자란 돈이 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돈을 하나님처럼 생각하는 사람, 돈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겸손해질 수 있을까요? 이런 사람이 애통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정말 신뢰할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돈을 가진 사람은 심지어 예수님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원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헌금 좀하지' '개척 교회하나 지어 주지' 하면서 은연중에 '그러면 하나님이 좀 봐주시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서운 함정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나는 돈에 목마릅니다. 돈을 갖고 싶습니다'는 생각이 얼굴에 쓰여 있습니다. 모든 것에 이해 타산이 앞섭니다. 돈이 얼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까? 세상에서 그렇게 좋아하는 돈을 포기할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목마름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돈을 다스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회복한 사람입니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회개에 대해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머리의 회개와 가슴의 회개 그리고 돈 지갑의 회개입니다. 머리의 회개란 지적인 변화로 복음과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의 회개란 사랑과 정의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돈 지갑의 회개입니다. 돈을 어떻게 모으고, 또 돈을 어떻게 쓰느냐가 회개의 중요한 척도입니다."
돈지갑의 회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진정한 회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도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간교한 사람들은 자기가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삽니다. 실제로는 돈의 노예지만 그게 자존심이 상하니까 아닌 것처럼 숨기면서 열심히 돈을 찾습니다. 교회에도 다니고 직분도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교회를 잘 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지 않습니다.
문제는 돈의 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을 생각하는 태도에 있습니다. 돈보다 하나님을 더 가치 있게 생각하느냐, 아니냐에 있는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런 시각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충격을 받은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놀라운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이 말씀은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도 되지만, 다른 여러 가지 일반적인 원칙에 있어서도 적용이 되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인간의 본질로 보면 돈의 위력과 유혹에서 벗어날 인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덕과 윤리가 탄탄해도 다 돈에 넘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부자들에게 성령이 임하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귀하게 여기는 부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부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하나님을 위해 잘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말씀 때문에 일부러 가난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또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돈의 함정에 빠진다면 돈을 안 버느니만 못합니다. 돈이 있으면서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고 욕심의 터널에서 헤매지 않는 사람, 하나님을 경외하고 겸손히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자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1)철저한 돈의 노예로서 구두쇠형입니다. 돈이 한 번 들어가면 죽어도 안 나오는 사람, 가난한 자에게나 불쌍한 사람에게 전혀 냉정한 사람, 철저하게 돈을 우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2)돈의 위력으로 다른 사람을 조종하려는 사람입니다. 아주 교활하고 사특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돈의 위력을 알기 때문에 겉으로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잘 씁니다. 그러나 그의 동기는 돈의 힘으로 모든 것을 조종하려는 것입니다.
3)하나님 앞에 붙잡혀서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잘 관리하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충격을 받아서 한동안 말을 잊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27절에서 베드로가 굉장히 유치한 질문을 합니다.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바로 전에 베드로는 부자 청년이 고민하며 떠나는 것을 봤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신앙적 우월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지, 나는 안 떠났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주여,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런 유치함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놀라운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예수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포기한 사람, 주님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 사람은, 열두 보좌에 앉게 해 주시고 열두 지파를 심판하는 지위에 있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비록 물질의 부요와 세상의 권력과 명성과 지위는 없을지라도, 세상적으로는 박수받는 사람이 아닐지라도 주님을 위해 자기 삶을 헌신한 사람에게는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 똑같이 축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가난함이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이요, 세상의 고난이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인 것을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택할 것입니까? 세상에서 부요하게 살고 하늘 나라에서 비참하게 살겠습니까?
세상에서는 가난하게 살고 하늘 나라에서 영광스럽게 살겠습니까? 고통스러울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며, 복음을 위해 핍박을 받을지라도 그것을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이 말은 해석이 중요합니다. 부모, 형제, 자식, 전토, 이 부분은 우리 보통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대상들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부모 형제, 재산, 돈 그 무엇보다 주님을 더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모든 삶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부모형제를 사랑하고 공경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더 사랑할 때 돈을 다스릴 수 있는 권세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을 버린 자는 현세에서고 여러 배를 받고, 겸하여 영생을 얻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부자는 현세 지향적인 애착 때문에 영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의를 버리지 못하여서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서기관은 자기 지식에 만족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제사장들은 자기 기득권을 쥐고 있는 한 예수를 영접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다 버려야 얻는다는 이 주님의 역설적인 진리속에 십자가의 도가 있는 것입니다. 죽지 아니하면 부활의 영광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아직까지 자기 속에 자기로 충만해 있습니다. 자기 욕심과 자기 고집과 자기 생각으로 충만해 있는 한 주님을 모실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버릴 수 있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이 마가복음에도 있습니다. (막 10:29-30) [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30]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이것이 역설의 진리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거기에 십자가의 진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주님을 믿고 따라간다고 하면서도 너무 붙잡은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적인 욕심과 육신적으로 믿을 수 있는 것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신 이인 예수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무엇을 버리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아직도 포기하지 못하고 붙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그것을 버려야 하나님의 부활의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이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었던 것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베냐민이었습니다. 베냐민을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라고 하는데 굶어 죽어가면서도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은 그것을 포기하라고 섭리하셨습니다.
결국 창세기 43장 14절에 보면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하면서 마지막까지 품고 있었던 베냐민을 포기하자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보게 됩니다. 죽었다고 생각하면 잃어버렸던 아들 요셉을 찾습니다. 그리고 지긋지긋한 기근에서 벗어나 풍요의 땅 고센땅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따라가면서도 아직까지 자기 생각, 자기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붙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주님은 이 시간 주님을 위해서 네가 마지막까지 쥐고 있는 그것을 내어놓으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고통이 있고 희생이 있습니다. 자기 부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로부터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한 알이 밀알이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지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십자가의 도를 머리로 이해하는 정도로 족하지 말고 실천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일으킬수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30절)을 보십시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우리는 과연 먼저 된 자입니까? 아니면 나중 된 자입니까? 먼저 되었다고 자만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주님앞에 어떤 모습으로 서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내가 십자가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전에 내가 충성했는데 오늘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고 자기 욕심과 자기 생각으로 가득차서 더 하나님께서 쓸 수 없는 교만한 자가 되어 있다면 하나님은 그들로부터 돌아서는 것입니다. 당시에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같은 교인들로부터 왜 예수님이 돌아서셨습니까?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면서도 내면을 들여다 보면 자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말씀을 대적하는 저들에게서 하나님은 돌아서신 것입니다.
먼저된 자가 나중됩니다. 나중된 자라 할지라도 이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면 먼저 될 수있음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물질이, 그 어떤 것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어 하나님의 말씀을 거절하고 대적하고 자기 고집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돌아봅시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바로 서 있습니까? 내 십자가를 바로 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있습니까?
물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명예와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십자가를 경험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