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3년, 나에게 기쁨을 준 것은 무엇인가?”
한 목자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습니다. 대개 이십 마리에서 이백 마리 정도를 갖추고 있었던 아라비아 유목민遊牧民과 삼백 마리 정도를 대규모로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관례에 비추어볼 때 그리 많이 치고 있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양을 치기 위해서 품꾼을 사서 거느릴 정도로 넉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 가운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습니다. “잃다ἀπόλλυμι”는 “파멸하다, 죽다, 손상되다.” 등의 뜻입니다. 일부러 또는 악한 마음으로 양떼로부터 벗어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악한 길로 뛰어 들어간 것도 아니었습니다. 연약했습니다. 무지했습니다. 미련했습니다.
양이 가진 두드러진 특성이 그렇습니다. 양떼는 물론 목자를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목자는 오던 길을 하나씩 되짚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양의 경제적인 가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으로부터 건져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구원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종파를 열렬히 신봉할 사람을 얻기 위해서 바다와 육지를 두루 찾아다니던 당시의 타락한 종교 장사치들의 열심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어렵게 찾았습니다. 목자는 “즐거워χαιρω”했습니다.
단순한 기쁨이나 즐거움 정도가 아닙니다. 벅찬 기쁨입니다. 벅찬 즐거움입니다. 환호성을 지르며 노래를 부르고 춤까지 덩실덩실 추고 싶을 정도로 홍분 된 상태입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라는 증거에 따르면,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에 대한 여호와의 지극한 마음을 가리킵니다. 목자는 찾은 양을 어깨에 메었습니다. 세상을 정복하고 돌아오는 승리자라도 된 것 같았습니다. 성대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가까운 벗과 이웃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어버렸던 나의 양을 찾았다.”(눅15:6b)라고 외쳤습니다. 함께 기쁨을 나누자고 외쳤습니다. 한 여인이 드라크마 하나를 잃어버렸습니다. 드라크마는 데나리온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했습니다. 그리 많은 금액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간과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항이 있습니다. 유대 여인들에게 있어서 열 드라크마는 남편 될 사람에게 받은 결혼 지참금이었습니다. 결혼반지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줄에 꿰어 머리를 장식했습니다.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소홀히 여길 수 없었습니다. 유사시에 사용할 수 있는 비상금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라도 없어지게 된다면 의미가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로 풀어놓지 않았습니다. 잠을 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여인은 즉시 등불을 켰습니다. 구석구석 샅샅이 찾았습니다. 찾은 다음에는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벗과 이웃들을 초청했습니다. “나와 함께 즐기자! 잃어버렸던 (나의) 드라크마를 찾았다.”(눅15:9b)라고 외쳤습니다. 자신과 함께 기뻐하며 즐거워하자고 외쳤습니다. 경제적인 가치로 계산해 볼 때 쉽게 이해하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손해가 분명해보입니다. 의미로 볼 때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찾은 드라크마 하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습니다. 다른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소중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모양과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의 가치가 그렇습니다. 한 아버지가 둘째를 잃었습니다. 처음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염없이 동구 밖을 바라보았습니다. 둘째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상거지 차림의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아버지는 단번에 둘째라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로 달렸습니다.
둘째가 미리 생각해 두었던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도무지 용서 받을 수 없는 아니 용서를 구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많은) 품꾼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삼아주십시오. (그것으로도 충분합니다.)”(눅15:18b-19)라는 말을 미처 꺼내기도 전에 와락 끌어안았습니다. 아니 둘째의 말을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둘째가 회개하기도 전에 이미 용서를 끝내버렸습니다. 입을 맞췄습니다. 무조건적인 용서, 끝없는 용서, 영원한 용서, 완벽한 용서를 선포했습니다.
집에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혔습니다. 많은 품꾼들 가운데 하나 정도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가장 귀한 사람으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둘째의 죄를 기꺼이 탕감해 주었습니다. 둘째가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었던 모든 지위와 권리를 완벽하게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었습니다. 자신의 권위와 권한 전부를 둘째에게 위임해 주었습니다. 절대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해 두어야할 정말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미 두 아들에게 재산을 모두 나눠준 상태였습니다. 남아 있는 권한은 첫째가 소유하고 있던 재산에 대한 사용권뿐이었습니다.
첫째가 살찐 송아지를 잡아서 동내잔치를 벌이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쏟아놓았던 이유입니다. 자신의 몫으로 보고 싶지도 않은 둘째를 위한 잔치를 베풀어주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맏아들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는 다르십니다. 지체 곧 둘째인 저와 여러분이 당신의 권한 전부를 누리도록 기꺼이 허락해 주십니다. 아무튼, 아버지는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권한까지 둘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아버지는 또 둘째의 발에 신을 신겨주었습니다. 둘째가 그토록 원했던 자유를 허락해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옷과 가락지와 신을 통해 둘째를 존귀케 해주었습니다.
살찐 송아지 곧 둘째가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사전에 미리 준비하고 또 잘 키우고 있었던 바로 그 송아지를 잡았습니다. 벗과 이웃들을 불러 잔치를 벌였습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3b-24a)라고 외쳤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하고 화를 참지 못하는 첫째에게는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15:32)라고 말했습니다. “마땅하다ἔθει”는 미완료입니다. 필연성과 긴급성the necessity and urgency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잔치를 베풀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이 아닙니다. 반드시 환호하고 기뻐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책망입니다. 첫째도 잔치에 참여해야 할 당위성과 함께 돌아온 둘째를 뜨거운 가슴으로 맞아들여야 한다는 요청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세 가지 비유를 통해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핵심 사실입니다. 잃어버린 양, 잃어버린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은 가깝게는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 나아왔던 세리들을 가리킵니다. 죄인들을 가리킵니다. 멀게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를 가리킵니다. 곧 저와 여러분을 가리킵니다. 잃어버렸다 다시 찾았습니다.
둘째는 핵심 감정입니다. 기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다른 그 무엇보다도 기뻐하십니다. 수고와 희생과 봉사와 헌신보다 더 기뻐하십니다. 당신과 하나 된 것만으로 기뻐하십니다. 마지막으로는 반드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핵심 행위입니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잔치는 목자가, 여인이, 아버지가 다 준비했습니다. 기쁨에 겨운 그 마음에 공감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잃었다가 다시 찾은 영혼입니다. 기쁨에 겨운 하나님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어야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온 영혼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어야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잃어버렸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거룩한 희생 제물로 세상에 나타나신 날을 구별하여 기념하는 성탄축하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b)라는 천사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인류에게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쁨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소식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저와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고 있습니까? 2023년, 저와 여러분에게 기쁨을 가져다 준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행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가져다주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한 영화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본 영화를 상영하기 전에 먼저 국제 영화상을 수상한 단편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습니다. 관객들은 전혀 예상치 않았었던 기대감을 가지고 단편영화가 상영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단편 영화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스크린은 온통 흰색뿐이었습니다. 일분이 지났습니다. 그대로였습니다. 이분이 지났습니다. 그대로였습니다. 삼분이 지나고, 사분이 지났지만 마찬가지였습니다. 스크린은 여전히 흰색뿐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국제 영화상을 받은 단편영화라고? 스크린 전체가 단지 흰색뿐인데? 영화를 시작하기는 한 거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생각을 드러내지는 않았습니다. 더 기다렸습니다. 팔분이나 지났습니다. 관객들은 지쳤습니다. 하나둘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이 영화에 국제 영화상을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멍청해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불편한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습니다. 구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카메라가 천천히 아래로 움직였습니다. 카메라가 이제까지 천정에 초점을 맞춘 상태로 움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크린에는 한 병실이 나타났습니다. 병상에는 스무 살 청년이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전신이 마비된 상태였습니다. 손과 다리는 물론 얼굴까지도 전혀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눈만 유일하게 기능이 살아 있었습니다. 십 분이 지났습니다. “청년은 흰색 천장을 평생 바라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단지 팔분 동안 바라보다 지쳤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말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들을 수 있습니다. 기쁠 때는 얼마든지 웃을 수 있고, 슬플 때는 얼마든지 울 수 있습니다. 원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습니다.
조금만 꼼꼼히 살펴보게 된다면 기뻐할만한 이유를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라고 외쳤습니다. 평안할 때는 물론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도 똑같은 마음으로 기뻐하라고 외쳤습니다. 조사에 따르면, 아프지 않고 산다는 전제하에 사람은 평생 이십육 년은 잠을 잡니다. 이십일 년은 일을 합니다. 구년은 먹고 마시며 보냅니다. 오년은 화를 내면서 소비합니다. 삼년은 기다리면서 소비합니다. 놀랍게도 웃으며 보내는 시간은 겨우 이십일밖에 되지 않습니다. 웃는 시간이 기쁨의 시간이라고 한다면 겨우 이십일뿐입니다.
인생을 팔십으로 잡았을 때, 전체 칠십만 팔백 시간 가운데 겨우 사백팔십 시간 곧 인생의 0.07% 밖에는 기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에서 “희喜”는 기쁨입니다. “락樂”은 즐거움입니다. 둘 다 “쾌快”입니다. 곧 상쾌하고 즐거운 느낌입니다. “락樂”은 고통과 불편이 동반하지 않는 순수한 차원의 쾌입니다. 감각적인 차원의 쾌입니다. 짐승도 얼마든지 느낄 수 있습니다. “희喜”는 정신적인 쾌입니다. 반드시 고통과 불편이 동반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쁨은 순수한 차원의 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드시 불쾌를 거치고 난 후의 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고해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수없이 많이 찾아오는 불쾌를 기꺼이, 얼마든지, 자발적으로 선택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하는 이유입니다. 특히, “락樂” 곧 즐거움은 지극히 작은 문제만 발생해도 쉽게 휘발揮發됩니다. 산산이 흩어집니다. 허무하게 사라져버립니다. 반면, “희喜” 곧 기쁨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불쾌를 통해 한층 깊어집니다. 환난과 시험 속에서도 전혀 변하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기쁨은 영원히 이어집니다.
이런 의미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피지 않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의 수확이 실패하고 밭에 양식이 없으며, 양 떼가 우리에서 끊어지고 소 떼가 없어도, 나는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라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리라.”(합3:17-18)라는 선지자의 외침은 진정한 “희喜”입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선지자와 같이 외쳤던 경험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농사꾼의 육남매 가운데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 소아마비를 앓았지만, 너무 가난해서 치료시기를 놓쳤습니다. 후유증 때문에 앉은뱅이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그의 장애를 부끄러워했습니다. 술에 취한 날이면, 저런 쓸모없는 놈은 제발 좀 갖다버리라고 외쳤습니다.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혼자 설 수 없는 그는 기어 다녔습니다. 비료 포대 위에 엎드려 한 손으로 땅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포대를 잡아끌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는 병아리들, 강아지, 마당에 지천으로 피어있던 꽃들이 전부였습니다. 초등학교는 장애인이란 이유로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날, 어머니와 그는 교문 밖에서 한없이 울었습니다. 돌아오던 길, 어머니는 등에 업은 아들의 꽁꽁 언 발을 만져주며 따뜻한 말로 “아가야 춥지?”라고 물었습니다.
그날 어머니의 그 한마디는 다른 어떤 말보다 값졌습니다. 어둠 가운데 생명과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 같았습니다. 힘이 났습니다. 그날 이후 어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았습니다. 열한 살 때 집을 떠났습니다. 재활원에 들어갔습니다. 굳을 대로 굳어버린 다리를 펴서 보조기를 끼우고 목발을 짚고 걷는 방법을 배우는데 꼬박 2년이 걸렸습니다. 공부는 언제나 일등이었습니다. 추천을 받아 중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입학 연합고사에서는 만점을 받았습니다.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습니다. 서울대학교 수학과에 입학했습니다.
3학년 초, 목발을 짚고 무거운 가방을 맨 상태에서 많이 걷다보니 갈비뼈와 폐가 부딪쳤습니다. 폐에 구멍이 났습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죽을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을 들은 그는 기도원 구석에 엎드렸습니다. “하나님 왜 저에게만 이렇게 가혹하신가요? 항상 아프기만 하고 쓸모도 없는 저를 (차라리) 데려가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동시에 누군가가 부르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아주소서.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아주소서.”라는 찬송 소리가 들렸습니다. 순간, 자아가 완전히 꼬꾸라지며 회개가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처럼 연약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했습니다. 버클리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카이스트와 서울대학교 교수를 거쳐서 현재는 고등과학원KIAS 교수로 재임 중입니다. 온갖 냉대와 차별 속에서도 자신의 인생을 기쁨공식으로 풀어낸 그는 “나는 아파서 누워있는 동안 기도하는 법과 성경 읽는 법을 배웠다. 고통 속에서는 찬양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육신의 나약함에 끊임없이 노출되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약한데서 강해지는 법을 배우게 하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에게 세상의 모순과 절규를 알려주셨고, 과거와 현재를 바라보는 방법을 알게 하셨다. 세상이 나를 죄인 취급할 때 하나님은 나를 변화시키시며 당신이 하실 일을 계획하셨다. 나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질그릇이 되게 하셨으며 나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을 나타내셨다.”라고 고백했습니다. 특히 그는, 가난한 부모를 만나서 자립심을 배웠다며 감사했습니다. 초등학교 입학을 거부당해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배웠다며 감사했습니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모든 순간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며 감사했습니다.
시인인 그Ryu Shiva는 “날개 달린 기쁨이여, 어디에 내려앉을까? 나무 위에서 두리번거리는 기쁨이여,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모든 감각, 모든 동작에서 기쁨이 우리를 발견하기를!”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Jack Gilbert는 “변론 답변서”라는 자신의 시를 통해서 “우리는 기쁨을 받아들여야 한다 / 쾌락 없이는 살 수 있지만 기쁨 없이는 즐거움 없이는 살 수 없다 / 이 세상의 무자비한 용광로 속에서 / 기쁨을 받아들이려는 고집이 있어야 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누구에게든지 단 한 번 밖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인생은 무엇보다 소중합니다.
충만하게 살고 싶다면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고집스러운 기쁨을 가져야합니다. 자신의 모든 감각과 모든 동작을 통해 기쁨을 나타낼 수 있어야합니다. 사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을 만나든지 항상 기뻐하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큰 기쁨이십니다. 이 기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고집스럽게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의 모든 말, 모든 감각, 모든 동작 속에서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한 기쁨을 드러내는 놀라운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 비록 저절로 눈물이 흐를 정도로 어렵고 고달프며 서럽기까지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나타나심과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주어지는 참된 기쁨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다른 어느 해보다 “기쁜 마음으로Laeto Animo”으로 성탄 절기를 지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결코 쉽지 않았던 2023년을 기쁨으로 마무리하는 복된 성탄, 새롭게 다가오는 2024년을 기쁨으로 맞는 복된 성탄, 무엇보다 2023년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을 주신 분은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구원을 위해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복된 성탄을 보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