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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에 다녀와서
홍경남
방학이 시작될 무렵 부여에 사는 황금성 선배한테서 전화가 왔다. 겨울방학에 ‘황토’졸업동인들이 함께 고성에 다녀오자는 이야기였다. 작년 대전 엑스포에서 하는 고성오광대 공연을 보러갔던 권종만 선배가 허종복 선생님을 만나 이번 겨울에는 반드시 고성에 가겠노라고 철석같이 약속을 한 모양이다. 여기저기서 서로 통화를 하여 결국 1월 26일부터 2박 3일로 고성에 다녀오기로 약속이 되었다. 날짜가 맞지 않아 전채린 선생님이 함께 가지 못하게 된 것이 애석하지만 두 차례의 편지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인천 부근에 사는 동인들은 영등포에서 아침 일찍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점점 더워져 겉옷을 하나 벗고 말았다. 군데군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떨고 있는 산과 들을 지났다. 배추가 똥값이라 아예 추수는 안한다더니 겨우내 들판 그대로 말라 얼어버린 배추가 곳곳에 보였다. 앙상한 나뭇가지가 그 작은 몸조차 감당하기 어려운 듯 비스듬히 서있는 언덕배기 아래로 길을 만드느라 언덕을 잘라 내버린 흙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 옆에 수린이 하린이가 없구나. 결혼 십일 년에 아이들을 모두 두고 길 떠나긴 처음이다.
마산역 부근은 십몇 년 전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역사의 모습이 폭발사고 이후에 새로 지은 이리역과 비슷했다고 기억된다. 마산은 황시백, 김수희 두 선배의 결혼에 가보고 처음이었다. 그 때 허종복 선생님이 주례를 섰고 이영래 선배가 사회를 보고 내가 축가를 불렀다. 밤에 역 근처 포장마차에서 구운 꼼장어를 먹었는데 나는 그 장어의 살 조직이 섬뜩해서 한 입만 먹고 그만두었다.
시외버스 터미널 위치를 묻다가 택시를 탔는데 한참을 갔다. 이상하게도 기사는 미터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내리면서 요금을 물으니 “삼천 팔백 원쯤 나오는데 알아서 주세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얼마 드리면 되는데요?” “오천 원 주세요.” 내려서 무슨 일인가 하고 물었더니 그 차가 콜택시였다고 한다. 왠지 차안이 보통택시와 다르다고 생각했더니 그랬구나. 4월 항쟁의 진원이 된 3.15봉기와 부마항쟁의 도시. “내 고향남쪽바다…”의 고향 마산에서 물정모르고 콜택시부터 타고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고성 가는 차표를 사고 근처 식당에 들어가 먹는 점심은 차갑고 맛이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운 탓인지 장이 아픈 탓인지 식당 문을 나오며 왼쪽 검지를 심하게 부딪쳐 손톱이 까맣게 죽었다.
십팔 년 전 가던 길은 포장이 안 되거나 굽이굽이 도는 길이 많았지만 이제는 길이 넓고 편하여 시간도 40여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고성도 오랜만에 보니 많이 달라진 듯했다. 터미널의 위치도 낯설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니 전에 보던 길이 눈에 들어왔다. 고성오광대 전수소가 옮겨졌다는 이야기를 언젠가 들었기에 우선 길부터 물었다. 한상룡의 아이 예은이가 힘들까봐 택시를 탔다. 이전 같으면 택시는커녕 버스도 안탈 텐데 또 세월이 느껴진다.
고성오광대 전수소는 햇볕이 잘 드는 낮은 산 아랫자락에 새로 세워져있다. 각 방마다 전수는 받는 대학생들의 동아리 이름이 붙어있고 여러 명이 춤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귀에 익은 풍물소리건만 춤사위는 좀 생소하다. 아직 우리밖에 도착 못한 모양이다. 2층으로 새 나무를 깎아지은 전수관을 바라보다가 두 사람은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들의 얼굴에도 세월이 지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고성 읍내를 한 번 돌아볼까. 예전 전수소를 한 번 돌아보고 올까 망설이는 사이에 하얀 연습복을 입은 젊은이가 어디서 오셨느냐고 묻더니 얼굴이 환해지며 허종복 선생님이 기다리고 계신다고 2층으로 올라가잔다. 허종복, 이윤순, 허현도, 허판세 선생님 모두 계셨다. “아이고! 느그들 왔나? 이게 얼마만이고!” “다들 늙었다!” 서둘러 우리들 하나하나의 손을 모두 잡으시는 선생님들도 많이 늙으셨다. 하기야 그 때 오십이 채 안되셨던 허종복 선생님이 지금은 일흔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 십팔 년 전에 계시던 선생님들 중에 최규칠, 이금수, 조용배 선생님은 이미 세상을 뜨셨다. “저희가 너무 늦게 찾아왔습니다.” 불효자처럼 우리는 몸둘 바를 몰랐다. 허현도 선생님은 세월에 비해 변한 것이 별로 없어 보였고 허판세 선생님은 머리가 더 하얗고 많이 빠진 듯 했다. 제일 많이 변하신 분은 허종복 선생님이였다. 훤칠한 키에 풍채 당당한 미남인 허 선생님은 여전히 키 크고 멋있는 분이지만 많이 마르셨고 얼굴 모습도 좀 달라져 보였다.
다섯 시가 넘어가며 선배들이 하나둘 들어섰고 어두워질 때까지 한상균 선배를 빼고는 모두 모였다. 식당으로 옮겨 저녁을 먹고 있는데 전수소로부터 한상균 선배가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상균 형의 어머님이 위독하여 집을 떠날 처지가 아닌데도 무리를 해서 왔던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나무람 받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함께 있어야 살 것 같았다. 더구나 이번에는 십팔 년 만에 가는 고성이라서, 선생님들 살아계실 때 다시 뵐 수 없을 것 같은 절박감 때문에 그렇게 했으리라.
선생님들은 십팔 년 전의 일을 어제처럼 기억하셨다. 전수를 받다가 돈이 떨어져 부식당번인 홍경전 선배가 시계를 잡히고 돈을 마련해 오던 일, 전채린 선생님이 고성으로 오시겠다는 전화를 했을 때 “선생님 돈 좀 가지고 오세요.” 라고 부탁했던 일을 선생님들은 몇 번이나 얘기하셨다. “우리 집에서(허종복 선생님) 학생들 저녁이나 한 번 대접하고 싶어서 오라켔드니 고마 못 오고 말았제. 그기 우리 집에 오고 나면 집에 돌아갈 차비가 없어서 그랬다는 기를 후에 알고 내 가슴이 얼마나 씨리던지…” 그랬다. 허종복 선생님은 우리를 보내놓고 앓아 누우셨다고 들었다. “느으 봇물 터졌어, 그거 한 번 더해라.(허현도 선생님). 겡남이 네 꼼실네 그거 안 잊어삐맀나?”
그 때 고성에서 어느 날 밤 선생님들 앞에서 함께 술자리를 하며 천승세작 ‘봇물은 터졌어라우’라는 단막극도 했다. 그 때 내가 맡았던 꼼실네 연기를 그렇게 좋아라 하시더니 여전히 그 말씀이다. 선생님들은 기억하시건만 나는 꼼실네를 다 잊었다. “시백이하고 수희하고 세 시간이나 걸리는 우리 집을(허종복선생님) 걸어와 갖고 주례를 부탁하는데 고마 주례는 못한다고 캐도 ‘선생님, 저 수희하고 결혼하게 해 주실 랍니까 못하게 하실 랍니까’ 그래서 해주꾸마 카고 말았다. 그때 니 왔제?” “가아, 경상도 아 있잖나. 그 누고?” “아, 말순이요?” “아, 그래 말순이, 가는 어디 있나?” “예, 인천에 있어요. 선생님.” “말순이는 전에 시백이하고 어무이가 만든 음식까지 들고 길을 몰라 몇 시간을 걸려서 우리 집에 왔드라.” 허 선생님은 건강 때문에 함께 오지 못한 말순이 언니 이야기도 하셨다. “전 교수는 느그가 돈 가져오라고 전화로 그라자 참말로 오드라. 우찌 그런 일이 있겄노?” 정말 그랬다. 그 때 1학년으로 전채린 선생님과 선배들을 잘 모르고 있던 나도 놀랍고 이상했다. 선생님께 학생들이 돈 가져오라고 말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다고 선생님이 화를 내기는커녕 ‘그래 니들 고생 많지?’ 하면서 정말 가지고 오신 것도 희한했다. 선생님은 그 때 이후 지금까지도 아니 영원히 우리의 선생님이다.
저녁을 마치고 전수받고 있던 각 대학 후배들이 모두 이층강당에 모인 자리에서 허종복 선생님은 우리를 소개하신 후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난 황토 졸업동인들의 오광대 춤이 벌어졌다. 말뚝이 춤을 추는 권종만 선배나 원양반춤을 추는 이영래 선배도 나이든 탓인지 예전 같은 힘이 없었다. 내가 추는 문둥이 춤도 내가 볼 수는 없지만 뜨겁지 않다고 느꼈다. “공주사대 선배님들이 춘 춤과 학생들이 추는 춤이 좀 다를 기다. 십구 년 전에(허 선생님은 우리가 고성에 간 것은 75년으로 기억하셨다.) 느으가 배울 때는 우리도 우찌 전수를 할지 방법을 잘 몰라서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가르칠 때가 많았다. 그런데 전국 여러 대학에서 자꾸 전수를 받으러 오다보니 배우기 어렵다고 하는 아이들도 많고 해서 춤의 순서와 모양을 정했다. 저번에 서울에서 고성오광대 연희를 했더니 전수를 받고 간 외국어 대핵교 학생이 ‘선생님, 와 선생님 추시는 춤이 우리한테 가르쳐 준 것과 다릅니까?’ 카는데 우리는 그때그때 흥에 따라 춤을 다르게 추지마는 전체의 맥은 같다.”(허종복선생님)
“겡남이 니 문둥이 춤 잊어뿌리지 마라. 니가 추는 거는 돌아가신 조용배 씨가 추던 기라. 그러나 지금 이들이 추는 거는 이전의 홍성락 옹의 춤과 조용배씨의 춤을 합해서 허종복 선생이 복원한기다. 어느 것이 좋고 나쁨이 없는 기다.”(허현도선생님) 서울에서 대학까지 졸업하고서 전수를 돕겠다고 와있는 전수생과 서울예술전문대학에서 춤을 전공하고 고성 말뚝이 춤으로 최우수상을 받았다는 전수생의 춤이 이어졌는데 그 젊은이들은 정말 춤을 잘 추었다. 그러나 춤사위의 맛은 예전과 너무나 달랐다. 말뚝이 춤을 예전보다 섬세한 동작과 박과 박 사이를 절묘하게 활용하는 기교가 많아지고 힘차게 뛰어 끊듯이 연결하는 부분도 많아보였다. 어찌 보면 좋기도 하고 어찌 보면 기계적인 느낌도 들었다. 문둥이 춤은 조용배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고성오광대를 지켜내고자 하는 허종복선생님의 피땀이 어려 있어 눈물겨웠다. 문둥이의 일그러진 손의 떨림이 덜 긴장된 듯하고 북을 잡기 전의 한탄이 전보다 길고 보는 사람의 감성에 호소하는 면이 많다. 조용배 선생님의 문둥이 춤은 심장이 멎는 것 같은 충격을 준다면 이번 문둥이 춤은 누그러진 듯하면서 자연스럽게 아픔을 견디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이 춤이 좋은 면도 많다.
선생님들은 건강 탓인지 옛날처럼 우리와 함께 계시지 못하셨고 우리는 전수소 부근의 여관에 들었다. 우리들의 술자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새벽 두시쯤 어렵게 달려온 한상균 선배에게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오고 한상균 선배는 이영래 선배와 함께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의논 끝에 우리는 계획을 바꾸기로 결정을 내렸다. 어렵게 만나 뵙는 선생님들 또 언제 올 기약할 수도 없고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고성을 하루 만에 떠난다는 것이 가슴이 무너지도록 아쉬웠다.
아침식사를 하던 우리를 찾아오신 허종복 선생님은 이야기를 듣고 크게 실망을 하셨다. “내 어제는 몸이 아주 안 좋아서 느으들과 함께 못 있었는데. 오늘은 우리 춤도 보여주고 느으들과 놀라고 계획까지 세웠구마는 오늘 가겠다고 하나?” 몇 번이나 만류하시던 허종복선생님은 마지막으로 부탁을 하셨다. 아침 전수를 11시까지 마칠 테니 곧바로 선생님 집에가서 점심이라도 함께 먹고 가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상균 선배의 집은 내 고향 이리 부근에 있는 익산군이었던가? 오산면이었던가에 있는 모산평이라는 마을로 고성에서 여덟 시간 가량 걸린다. 결국 의논 끝에 허종복 선생님의 간절한 부탁을 들어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한편 상룡이 가족과 우리는 마산에서 돌아갈 차표를 미리 끊어 놓았기에 차표를 반환하러 갈 시간이 필요했다. 그 일도 결국 차를 가지고 온 황금성, 황시백선배가 맡겠다고 자청하여 마산으로 떠나고 내 마음은 ‘차라리 차표를 버리지’ 싶은 생각이 들만큼 미안했다. 수희언니는 작은 선물이라도 사드린다고 고성 시장에 나갔다. 남은 사람들은 허종복 선생님이 전수를 하는 동안 18년 전의 전수소 자리를 다녀오기로 했다.
예전의 전수소는 낮은 산 한 구비를 넘으니 바로 나타났다. 지금 전수소에 비해 그곳은 햇볕이 들지 않고 어두워 싸늘한 기운이 돌았다. 전수소 옆 건물을 그대로 서있건만 전수소는 깨끗이 치워져 중간에 네트를 친 배구코트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작았나 싶었다. 전에 전수생들의 방이 있던 자리, 불 때던 자리, 화장실, 강당이 있던 자리를 짚어보면서 마음이 스산했다. 그 앞은 남산자락의 낭떠러지였다. 전수소 위의 절은 스님이 없는 듯한 인공적인 모습으로 바뀌고 그 앞 공터는 공원이 되었다. 얼음에 미끄러지며 물 긷고 빨래하던 동네 우물은 없어지고 집이 들어차 있었다. 하지만 입구과 옆길은 그대로였다. 새삼 옆에 걷고 있는 하늬를 바라보게 되었다. 하늬의 키는 벌써 내 키를 훨씬 넘어서 나를 내려다본다. 그 애는 ‘인간의 길’을 읽고 있다. 언덕위에 올라보니 아, 거기구나 싶은 예전의 고성이 가슴을 메운다. 이렇게 맑은 날 우리와 함께 허종복 선생님이 풍물을 울리며 두루마기자락을 휘날리며 춤추며 이런 구비들을 지나 고성 바닷가에도 나갔다. 왠지 가슴이 아파 와서 “아…” 숨을 토했더니 하늬가 왜 그런지 묻는다. “하늬야, 네가 태어나기도 전에 네 엄마, 아버지, 그리고 여기 있는 이모와 삼촌들이 이런 언덕들을 돌며 춤을 추었단다.” 뜬금없는 말에 하늬는 말이 없다. 이런 아이는 생각이 깊지 싶다.
돌아오는 길에 잔디밭에서 전수를 하고 있는 고성오광대 총무님을 만나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총무라는 분은 4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데 선생님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그 분을 칭찬하는 것을 들은 터다. 총무님은 농사와 과수원일을 하시면서 오광대 전수와 일상 업무를 책임지고 계시다고 했다. 요즘 학생들은 탈춤을 배우는 것이 기교에 치우치는 일이 많고 깊은 맛이 없다며 걱정하셨고 자신도 생활해가기 힘들다보니 먹고 살 걱정이 없다면 모를까 이런 상태로 고성오광대를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많다고 하셨다.
‘여기서 30분만 들어가면 된다.’던 허종복 선생님 댁은 여러 구비를 돌아 들어가 멀고 먼 길이었다. 지금은 차를 마련하여 다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길을 걸어 다니셨단다. 연습을 끝내고 밤이 늦어지면 세 시간이나 걸리는 그 길이 무서워 아예 밤을 보내고 새벽에 들어가시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양식을 많이 하는 바다가 보이는 허 선생님의 집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게 되어있다. 본채 앞에 마루를 만들어 비닐장판을 깔고 그 마루를 따뜻이 쓰려고 집 전체를 감싸는 벽과 유리문을 다시 만들어낸 모양이다. 선생님이 쓰시는 방은 우리가 모두 들어가 앉기도 좁았다. 한쪽 벽에 장삼 비슷한 두루마기를 입고 밀짚모자를 쓴 커다란 선생님의 사진이 걸려있고 다른 벽에는 선생님이 만드신 탈이 여럿 걸려있었다.
“내가 5년 전에 영 소화가 안 되고 속이 이상해서로 진찰을 받아보니 위암이라고 하더라.” 아, 그랬구나! 그제야 선생님이 그렇게 많이 상하신 이유를 알았다.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걸 뿌리치고 대사님을 찾아갔더니 몸에 칼을 대지 말라카면서 피마자기름만 먹으라 카더라.” 그 대사님의 가르침대로 선생님은 따랐고 점차 몸이 나아져 그 뒤에 부산대학교 부속병원에서 재검사를 하고 난 의학박사는 자신이 의학을 한다면서 이런 비과학적인 일을 입증할 수가 없다며 검사결과를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 선생님은 불심으로 병을 이겨내고 계신 것 같았다. 5년 전만 해도 죽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는데 지금은 밥을 드시고 계시니 기적이라 할 만하다.
우리가 들어올 때 반색을 하며 따뜻이 맞던 예쁘고 서글서글한 눈을 한 며느리는 벌써 밥상을 차려놓고 분주하게 고기와 국을 데우고 있었다. “내 전에는 병들어 고생만 하는 할멈 보고 살았지만 십삼 년 전에 할멈은 돌아가고 지금은 우리 며느리하고 손주들 보는 맛에 산다.” 부산에서 직장생활도 했던 며느리는 살림이 알뜰할 뿐 아니라 시아버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힘들죠?”하고 물으니 “왜예. 아버님이 다 도와주셔서 힘들지 않아예.” 우리에게 대접하려고 허 선생님이 아침 일찍 시장을 보아 반찬거리를 사다 놓으셨다고 한다. 또 집 앞에 있는 제법 넓은 텃밭을 허 선생님이 다 가꾸다시피 하시고 며느리에게 손이 가지 않도록 하신다고 했다.
음식은 모두가 깔끔하고 맛이 좋았다. 선생님은 연방 “묵으라.” 며 맛있는 반찬을 떠밀어 주셨다. 선생님의 정이 깊은 마음으로부터 뜨겁고 거침없이 쏟아져 나오는 느낌이 들었다. 뒤에 오토바이를 타고 오신 허현도 선생님은 “점심은 여기서 하고 저녁에는 우리 집에서 하는 기다.” 하며 또다시 붙잡았다. 사실은 아침부터 허현도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겨우 말을 더듬어가며 우리 사정을 몇 번씩 이야기하고 나서야 포기를 하셨다.
마지막으로 전수소에 들러 선생님들께 작별인사를 드렸다. 선생님들은 떠나려는 우리를 붙잡고 한상균 선배에게 보내는 조의금 봉투를 주셨고 이윤순 선생님은 가면서 차 한 잔이라도 하라며 또 다른 봉투를 주셨다.
황시백 선배가 몰고 온 작은 차에는 황금성, 홍경전, 수희언니, 영미, 하늬가 타고 떠났고 남은 사람은 시외버스를 타기로 했다. 우리를 배웅나온 허종복 선생님은 불현듯 우리가 탄 버스 위로 올라오셨다. 그 때 우리들 하나하나를 바라보시던 선생님의 눈빛은 서운함과 절망과 간절한 바램이 담긴 처참할 만큼 가슴을 저미는 눈빛이었다. 우리는 그 눈빛을 보기 두려워 애써 웃었다. 선생님은 내려가서도 얼굴을 비스듬히 아래로 돌린 채 그 절망어린 허전한 표정 그대로 거기 서 계셨다. 한 선배가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십팔 년 만에 고성에 와서 우리는 또 죄만 짓고 가는 모양이었다. 허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또다시 뵐 수 있을까? 머릿속에서 맴도는 생각이 그랬다. 허 선생님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진주에서 내려 행로를 다시 논의하였다. 처음 계획은 진주에서 남원까지 기차를 탄다는 것이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전주까지 다시 버스를 타기로 했다. 버스에 오를 때 황시백 선배는 술 한 병을 사고 권종만 선배는 구운 오징어 몇 마리를 샀다. 다들 가슴이 스산한지 술 한 병은 머지않아 바닥이 났다. 술이 더 필요했다. 버스가 쉬는 어느 정류장에서 서너 병을 더 샀다.
황시백 선배가 한사람씩 저 앞자리로 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자면서 먼저 말을 꺼냈다. 상룡이는 쓸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전에는 황토가 모인다면 며칠 전부터 설레었는데 이번에는 하루 전날까지도 올까말까 망설였어. 왜 그러지?” 상룡이의 심정을 모두 이해하고 있었다. 몇 년 전부터 황토 동인들은 방학 때마다 모이곤 했지만 서로에게 벽이 있었고, 모였다 헤어질 때는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서로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이미 아니었다.
권종만 선배가 뜻밖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학 때 무대에 올리려 한 적이 있던 아누이 작 ‘앙띠곤느’를 다시 손보고 있고 번역이 안 된 부분은 불어과 선생님한테 부탁을 해서 이미 끝내놓았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갑자기 반전되어 우리 졸업동인들이 ‘앙띠곤느’를 할 수 없겠나 하는 것으로 번졌다.
한상균 선배의 집에는 밤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몇 사람이 문상을 하고 한상균 선배가 형이라 부르는 분의 집으로 안내되어 밤을 보냈다. 방은 따듯하고 몸은 피곤하여 방에 들어서자마자 하나둘씩 눕기 시작하여 결국 마지막 소중한 밤도 깊이 있는 이야기 한마디 못한 채 보내고 말았다.
이튿날 아침 한상균 선배의 집을 떠나 이리역 부근에서 겨우 서양식 음식점을 하나 찾아 모여 앉았다. ‘앙띠곤느’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하는 것부터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권종만 선배는 “죽기 전에 앙띠곤느를 꼭 해보고 싶다.” 했고 황금성 선배는 “전국 각지에 떨어져 있어서 방학 때 집중적으로 연습을 해야 할 텐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했다. 이영래 선배는 “나한테 예전과 같은 열정이 남아 있나? 그게 문제야.” 라고 했다. 황시백 선배는 가능하다고 할 경우를 생각해서 스텝, 연출, 배우까지 짚었다. 홍경전 선배는 말없이 앉아 있다가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라고 했다.
어느 새 이야기의 결론은 ‘하자’는 쪽으로 나고 있었다. 모여 있을 때는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뿔뿔이 흩어져서는 절망에 빠지는 것이 달라지지 않은 우리들 모습이라 지금 나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황토가 함께 연극을, 더구나 ‘앙띠곤느’를 할 것이라 생각하면 설사 무대에 올리지 못하게 된다 해도 희망에 찬다. 사정 때문에 고성에 다녀오지 못한 순옥이도 황금성 선배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얼굴이 환해지더라고 했다. 우리는 제대로 결론을 내린 걸까? 현실성이 있든 없든 “연극을 하자.” 그것이 우리의 희망인 것은 분명하다.
마산에서 문에 부딪힌 손가락은 퉁퉁 부으며 온종일 아팠다. 그날 밤 참을 수가 없어 진통제와 소염제를 먹었지만 이미 손톱 밑으로 곪아있었다. 고성에서 돌아온 다음날 외과에 가서 마취제를 맞고 손톱을 뜯어내고 한없이 피고름을 뽑았다. 차라리 손가락이 아픈 것이 아무데도 아프지 않은 것보다 나은 것 같았다. (1994. 2)
첫댓글 이젠 어렵겠구나~ 앙띠곤느.
앙띠곤느, 어렵겠지ㅜ 그래도 떠듬떠듬 해볼 수 있으면 좋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