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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 최강(最强)의 지장(智將)
[영한대역 만화 삼국지(三國志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국내 및 세계 최초
- 출처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21st C.E.T.A.)
- 출판사 : (주)파우스트 칼리지
삼국지(三國志) 최강의 지장(智將)은 누구인가?(랭킹 8위까지)
지장(智將)이라 함은 지력(智力)으로 군(軍)을 이끌어 적(敵)을 격파하는 장군을 뜻한다.
여를 들어 장요(張遼)와 조인(曹仁)은 적은 병력으로 대군을 맞아 싸웠지만, 전체적인 전투의 기획은 조조(曹操)의 머리에서 비롯되었고 또한 계략이 아닌 그들의 뛰어난 무력에 의지하여 이룬 승리였기 때문에 지장(智將)의 랭킹에서 제외된다.
또한 우수한 지장(智將)이라면 적은 병력으로도 적(敵)의 대군을 맞아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맞아 싸운 전공(戰功)을 중시하여 평가한 것이고, 스스로의 무용(武勇)과 담력에 의존했던 인물보다는 주변 지형과 지세의 흐름을 살펴 적(敵)을 격파한 병법가를 우선으로 선발한 것이다. 그 리고 철저히 정사(正史)를 근거하여 평가하였다.
1. 1위 조조(曹操)
삼국지 정사(正史)에서 자신의 뛰어난 두뇌 플레이로 군(軍)을 움직여 적(敵)을 격파한 전공(戰功)이 가장 많은 인물로 조조(曹操)를 따라잡을 위인은 없을 것이다. 특히, 스스로 관단력이 뛰어난 군주였다는 점과 적은 병력으로 여포(呂布)를 물리치고 원소(袁紹)를 격과한 일은 그의 탁월한 병법 실력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정적 유비(劉備)의 세력을 항상 격파하여 그를 매 번 달아나게 하였고 마등(馬騰)을 주살하고, 그의 장남 마초(馬超)의 진공(進攻)을 이간책으로 물리쳤으며, 허도에서 손바닥 보듯 합비전을 지휘하여 장요(張遼)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 외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도 뛰어난 전투 감각과 임기응변식 병법으로 자국의 세력을 삼국 중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비록 그의 모사(謀士)들과 합작한 공동작품이지만, 그 중심에 조조(曹操) 맹덕(孟德)이 있었고 최종 결정과 작전의 실행은 모두 조조(曹操)가 지휘한 것이다.
2. 2위 육손(陸遜) -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정치가로 승상을 지냈다
유비(劉備)의 70만 대군을 맞아 화공(火攻)으로 무찌르고 나라를 구한 구국공신이다. 노련한 유비의 진공(進攻)을 지구전으로 맞아 계략을 써서 그를 격파하고, 다시 조비(曹丕)의 도발을 예상하고 군대를 돌려 위(魏)나라와 맞서 영토를 지켜냈다. 유비는 그의 정적 조조가 너무 뛰어난 인물이었기 때문에 빛을 못본 것이지, 군단을 다루는 실력과 병법 운용 능력은 손권(孫權)이나 원소(袁紹)보다 더 뛰어났다. 그런 유비의 대군단을 육손(陸遜)이라는 젊은 병법가가 화공(火攻)으로 격파해 그의 대군을 괴멸시키고 유비를 달아나게 한 것은 삼국의 세력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은 사건이다. 특히, 육손(陸遜)이 군권(軍權)을 갖고 있던 시절 조비(曹丕)와 유선(劉禪)이 감히 동오(東吳)를 침범하지 못하였고, 크고 작은 여러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였다는 기록을 보면 그의 지력(智力)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케 한다. 참고로 육손(陸遜)이 어목포에서 제갈량(諸葛亮)이 설치한 팔진도에 갇혀 구사일생한 내용은 정사(正史)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3. 3위 제갈량(諸葛亮) - 제갈공명(諸葛孔明)
군단의 장으로써 군영을 설치하는 실력이 탁월했다는 제갈량(諸葛亮)은 정사(正史)의 기록으로 볼 때, 군(軍)의 수장으로 전공(戰功)을 세운 시점이 유비(劉備)가 죽고 난 다음 맹획(孟獲) 세력을 진압하면서부터이다. 따라서, 그때부터 제갈량이 지휘관으로써의 실력을 보이는 것이다. 직접 군(軍) 총사가 되어 남만(南蠻)으로 출정하여 맹획을 추포하였고, 그들의 항복을 받아 조공 정책을 폈으며, 국력을 모아 대적 조비(曹丕)를 겨냥해 북벌을 감행했다는 것은 상당히 진취적이고 스스로의 병법에 자신이 있음을 뜻한다. 병귀신속한 조조(曹操)와 같은 임기응변의 전술적 능력은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에게 3위의 랭킹을 주는 것은 그가 삼국중 가장 영토가 작고 국력이 약했던 촉(蜀)나라를 이끌어 외교와 전쟁의 상황에서 초지일관 공세로 일관해 주도했던 사실이다. 비록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병사하였으나, 그의 생전에 강대국 위(魏)나라 또한 함부로 촉(蜀)을 침범하지 못하였다고 하니 그가 군사를 부리고 군단들 배치하는 능력이 탁월했음을 입증한다. 게다가 기록에 보면, 위(魏)나라의 맹장 왕쌍(王雙)을 죽이고, 장합(張郃)을 활로 쏘아 죽였다한다. 직접 쏘아 죽였다면, 제갈량의 무술 실력도 어느 정도 인정이 되는 바, 필부(匹夫)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4. 4위 사마의(司馬懿) - 서진(西晉) 건국의 기초를 세움. 자(字)는 중달(仲達)
제2의 조조(曹操)라 불릴 만큼 조조의 능력을 빼어 닮았다. 임기응변예 능하고 정치적 안목이 탁월했던 사마중달(司馬仲達)은 특히, 그의 전투기록에서 실패와 패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제갈량(諸葛亮)의 북벌을 저지하였고, 엄달과 공손연의 반란을 차례로 진압하였으며, 동오(東吳)와 맞서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국가를 잘 보존하였다. 비록 강대국의 대장이었으나, 동시에 두 나라를 방어했다는 점과 내부의 반란을 신속한 군사적 대응으로 제압하고 무찌른 것은 그의 병법 실력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특히, 당시 촉(蜀)나라의 실력자 제갈량(諸葛亮)과 싸워 그의 공격을 잘 막아내었고, 그에게 진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정사(正史)의 기록에서는 제갈량의 화공에 걸려 위기를 맞거나 그의 목상에 놀라 달아난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실패한 전적이 없는 사마의가 번번히 북벌에 실패한 제갈량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가 제갈량보다 더 유리한 국력과 병력을 갖고 있던 맞수였고, 제갈량을 막았지만 그를 제압하고 촉(蜀)나라를 압박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5. 5위 주유(周瑜, 175년 ~ 210년) - 오(吳)나라의 명장으로 적벽대전에서 위군(魏軍)을 대파함.
동오(東吳)의 창업 공신이자 적벽대전 승리의 주역인 주유(周瑜)는 항복론을 일축하고, 주전론(主戰論)을 앞세워 당대의 영웅 조조(曹操)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한다. 순책을 도와 여러 크고 작은 군현을 계략으로 평정하여 복속시키고, 훗날 손권이 조조와 맞상대를 할 수 있도록 세력을 구축한 병법가이다. 그가 순전히 지력에 의지하여 조조처럼 작은 군세로 출발한 손책을 도와 동오(東吳)의 대부분을 평정한 것은 그의 병법실력이 뛰어남을 말해준다. 그러나 육손 보다 낮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적벽에서 조조를 크게 격파한 것도 아니거 니와 특히 형주를 공격함에 있어서 적(敵)의 지휘관 조인(曹仁)을 누르지 못하고 부상을 당해 실패하는 불운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벽대전 이후 오(吳)나라가 실질적으로 얻은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6. 6위 유비(劉備)
유비(劉備)는 거병의 지형을 잘못 선택해 조조(曹操)라는 대적을 맞서 싸웠기에, 그의 일생에 실패가 많았고, 빛을 보지 못하였을 뿐, 만약 손권 같은 무능한 자가 저음부터 적수였다면, 그가 강동(江東)을 다스렸을지도 모른다. 동탁 (董卓) 토벌전에 공손찬을 따라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조조를 속여 그에게 군사를 빌려 떠나 원술을 격파하고, 서주를 습격하여 취하였다. 특히, 그의 병법실력이 돋보이는 것은 유표에게 의지해 신야 성주로 있을 때, 위(魏)나라의 대 장 하후돈의 공격을 매복 전술로 격파한 사건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이 화공으로 무찌른 것으로 나오지만, 사실 이것은 순수 유비의 지력으로 이룬 매복전술의 승리였다. 이 후, 손권과 연합하여 난을 모면하고 형주 일대를 평정한다. 익주를 공략하여 성도로 들어간 뒤, 국력클 재정비하여 조조를 공격하였다. 이 때, 역시 유비(劉備) 스스로 군단을 편성하고 지휘하여 한중(漢中)을 점 령한 것이지 제갈량의 조언 따위는 없었다는 것이다. 당시 제갈량은 성도에 남야 후방에서 유비군의 군수품과 식량을 지원하든 보급관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처음으로 유비 스스로 군단을 지휘하여 대적 조조로부터 한중이라는 중요한 길목을 빼앗아 크게 승리한 사건이라 하겠다. 하후돈과 조조를 자신이 직접 군을 지휘하여 무찌른 역사적 기록은 유비(劉備)가 단지 신하의 말을 잘 따르는 유약한 군주가 아니한 걸 입증한다.
7. 7위 여몽(呂蒙, 178년 ~ 219년) - 중국 후한 말 오나라 손권 휘하의 장수
여몽(呂蒙)은 관우(關羽)의 형주를 급습하여 삼국의 세력구도를 바꾼 사람이다. 동오(東吳)는 형주를 얻음으로써 명실상부 삼국 중 두 번째로 강한 나라가 된다. 관우는 항상 중원을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여몽이 신경 쓰여 감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관우의 심중을 파악한 여몽은 일부러 병상에 누워 관직에서 물러나 육손이라는 무명의 젊은 장수를 대신 내세워 관우를 속이는데 성공한다. 이후 회유책으로 미방과 부사인을 끌어들여 형주군의 봉화대를 무력화시켰고, 이 때문에 관우는 강현이 모두 점령되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여몽이 계략으로 형주를 취한 사건은 뛰어난 모사인 제갈량조차 예측할 수 없었고, 미처 순을 쓰기도 전에 일어난 대단한 전공(戰功)인 것이다. 어떤 소설에서는 이를 두고 육손의 계략이라고 하는데, 형주 습격 작전은 순수하게 여몽의 머리에서 나온 작전이다.
7. 7위 장비(張飛)
장비(張飛)가 승리한 전적의 기록을 보면, 장요처럼 무력예 의지했면 경우는 거의 없고, 오히려 그 스스로의 지력을 짜내어 승리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장판파에서 노련한 조조군을 상대하여 몇 십기의 기병으로 먼지를 일으켜 복병이 숨어 있는 것처럼 가장한 뒤, 조조를 속여 멈추게 한다. 유비의 명을 받아 익주를 공격할 때는 성안에서 거세게 농성하는 엄안을 거짓 정보로 유인하여 그를 사로잡아 아군으로 만들고, 위(魏)나라의 명장 장합이 군을 이끌고 서촉(西蜀)을 침범하였을 때, 군단들 인솔하여 맞서 싸워 그를 격파사키고, 다시 화공으로 그의 진지를 불살랐다. 이 때에도 장합의 기습을 간파하고, 미리 작전을 세워 거꾸로 장합을 유인해 그의 본군을 크게 무찌르고 그의 본영을 우회하여 불을 지른다. 장합은 전장의 상황에 따라 병법을 운용하고, 군세를 변형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가정에서는 마속을 격파하였고, 제갈량마저 두려워했던 명장이었다. 그런 그를 계략으로 무찌른 장비의 지력을 높이 평가하는 바이다. 특히, 정사(正史)에서는 장비(張飛)가 술로 인해 실수를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후세의 추측 평론에서 다시 장비(張飛)클 재평가하길 바란다. 장비는 문장에도 일가견이 있고, 큰 눈에 준수한 외모를 갖고 있었으며, 지력과 용맹을 겸비한 명장(名將)이었다.
8. 8위 등애(鄧艾 197년 ~ 264년) - 중국 삼국 시대 위나라의 장수
실질적으로 촉(蜀)나라를 열망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아무도 예상지 못했던 검각을 우회하여 성도를 곧바로 공격하는 황도 습격 작전을 세워 강유를 따돌리고 유선의 항복을 받아낸다. 한 국가를 군대를 동원하여 계략으로 열망시켰다는 점에서 가장 큰 점수를 주고 싶다. 하지만, 9위에 머무는 이유는 그 후의 행보에서 이렇다 할 큰 전과가 없었고, 처음부터 많은 병력들 동원하여 약소국을 공격해 이룬 전공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으로 강대적을 맞아 역전시킨 위 랭킹의 지장(智將)들에 비하여 낮은 평가를 받을 수 밖에 없다.
9. 평론 후기
만약 9위 다음의 랭킹을 계속 매긴다면, 아마도 관우나 손견이 포함될 것이다.
하지만 가급적 크게 실패한 전적이 없고, 불리한 상황여서 기적을 창출한 역전요 용사를 우선으로 선발하다보니 여러 가지 뒷맛이 남는다.
우선 적벽대전의 경우 조조가 특정 소설에서 매도하는 것처럼, 크게 패해 달아나거나 화용도에서 관우에게 목숨을 빚진 사실이 어느 사서의 기록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걸 증명하듯, 적벽대전 이후, 조조는 다시금 군을 재정비하여 서량 일대를 공략한다. 그처럼 빨리 회복할 수 있었다는 것은 조조의 대군이 적 벽에서 크게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근거이다.
정사(正史)의 기록에 보면, 조조가 단지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을 다시 돌려 허도로 귀환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황개가 조조의 수군에 불을 질러 공격했다는 내용은 찾아볼 수 있다.
따라서 똑같은 화공술을 구사하여 적국의 군주를 격파한 경우라도 약간의 피해만 준 주유의 경우와 유비의 칠십만 대군 태반을 죽인 육손의 경우는 그 평가가 동일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육손은 성을 공격하고 방어하는데 있어서 실패한 전례가 없지만, 주유는 적벽대전의 승리에 이어 사기가 높은 대군을 이끌고서도 조인이 지키는 성클 함락하지 못하고 부상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니,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여 평가 절감된 것은 유감스러운 부분이다.
제갈량은 뛰어난 전략을 구사한 모사(謀士)이기도 했지만, 유비 사후 군사령관으로써 활약하기도 하는데, 모사의 능력과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을 두루 갖춘 인물이기에 비록 병법 능력이 조조나 사마의에 비하여 떨어지는 면이 있지만, 후세 사람들에게 능력있는 군사(軍師)로 평가받는 이유다.
관우 역시 수공(水攻)으로 적(敵)의 대장 우금의 군단을 몰살시키고, 우금을 사로잡고 방덕을 참수한 뒤, 산적을 이용하여 번성의 후방클 교한시킨 전과는 그의 지력(智力)을 유감없이 보여준 부분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 후 서황의 구 원군에게 패하여 달아났고, 끝내 번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여몽에게 패하였으니 그의 병법 실력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만 전반적인 능력으로 평가할 때, 그는 뛰어난 무장(武將)이었으며, 당시 제후들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있던 용장(勇壯)이었다는 것이다.
종회와 강유 또한 지장(智將)에 가까운 지휘관의 성격이 짙으나, 특별히 크게 부흥하여 성공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제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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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명작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출생 – 사망 : 1162 ~ 1227
재위 기간 : 1206 ~ 1227
지역 : 아시아 대륙
왕조 : 몽골 제국
거대한 몽골 제국은 동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유럽 세계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사에 공포의 상흔을 남긴 징기즈칸, 그리고 몽골은 어떠한 존재였을까?
(1) 배경 - 동방 왕의 전설
리처드 왕의 십자군도 만족스러운 전과(戰果)를 올리지 못하고 유럽 세계가 이슬람과의 오랜 싸움에 염증이 났을 무렵, "적국 이슬람의 동쪽 저편에 기독교도들의 나라가 있는데 그 나라 왕은 프레스터 존(Prester John), 즉 '사제 요한'이라고 한다"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방에서 이슬람과 싸우면서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노리고 있다는 이 왕의 이름은 서방의 '십자군' 사이에 하나의 구세주의 전설로서 사실인 양 퍼져 나갔다. 전설의 근원이 된 것은 당시 위구르와 몽골 고원의 일부에서 널리 퍼져 있던 네스토리우스파(派) 기독교(景敎)의 일부인데 그 실체는 전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 허상을 바라고 있었다. 페쇄된 시대에 성스러운 왕이 동방에서 나타나 이슬람군을 격파해 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국 희망대로 동방에서 전설의 왕이 왔다. 하지만 그 왕의 이름은 징기즈칸이었다.
(2) 태생 - 몽골의 고아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 초이다. 당시 몽골 고원에서는 위구르 유목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 3세기 반에 걸쳐 분열과 할거(割去)가 이어졌다. 요(遼)를 비롯한 주위 국가들은 모두 몽골의 유목 부족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두려워했는데 그 이유는 과거의 흉노(匈奴), 돌궐(突厥)같이 하나가 된 부족 연합은 틀림없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유력한 부족이 나타나면, 그 대항마(對抗馬)를 지원하여 서로 싸우게 했고 그래도 안 될 때는 대군을 북벌(北伐)하게 하여 직접 격파했다. 경연(硬軟) 양면에서 간섭한 결과 유목 부족들이 통일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요(遼)가 금(金)에 쓰러지고 멀리 중앙 아시아에서 서요(西遼)가 된 이 당시에는 몽골 고원에 대한 압박도 다소 느슨해져 있었다. 사실, 이 시대에 이르면서 몽골 부(部)는 통일되었고, 칸도 3대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유목 부족 사이에서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몽골 고원 전체를 하나의 군단(軍團)으로 통일할 사람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징기즈칸, 그의 어릴 때 이름은 테무진이었는데 초년 시절은 그리 평탄치 않았다. 아버지 에스게이는 쿠트라 칸의 뒤를 이어 몽골 부의 제4대 족장에 오를 것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테무진이 어렸을 때 숙적(宿敵) 타타르 부(部)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러자 에스게이를 따르던 타이치우트 씨족은 손바닥 뒤집듯이 테무진을 배신했고, 테무진의 복수를 염려해 어린 그를 죽이려고 계획했다. 난세에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을 배척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각별히 사악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테무진이 어리고 힘이 없을 때 제거하려 한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테무진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호에른의 엄한 교육 때문에 테무진은 아주 가혹하고 격렬한 성격으로 자라났다.
이런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테무진을 비롯한 4형제가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이때 에스게이의 또 다른 아내의 아들, 이복형제 두 명이 찾아와서 그들이 낚은 고기를 빼앗았다. 테무진은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어머니는 형제끼리 싸워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테무진은 남동생 카사르와 활을 들고 집을 나가 이복형제를 앞뒤에서 공격하여 활로 쏘아 죽였다. 집으로 돌아온 두 아들을 보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어머니는 "같은 집안 사람끼리 싸워서 어떻게 하느냐"고 테무진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런 성격의 소유자가 조용히 참으며 살 리가 없었다.
테무진은 보르테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눈에 불이 있고 얼굴에 빛이 있는' 소년 테무진과 소녀 보르테를 약혼하게 한 것은 아버지 에스게이였지만 정식 결혼은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성사되었다. 이때 보르테가 갖고 온 결혼 선물 크로텐(검은담비) 가죽옷이 테무진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당시에 크로텐 가죽옷은 매우 고가품이었고 유목민 사이에서 진귀한 옷이었다. 테무진은 이 털가죽을 가지고 케레이트 부(部)의 군주 토오릴 칸에게 찾아갔다. 토오릴 칸은 선친 에스게이의 친한 친구였고 그를 같은 편으로 만들면 100만의 우군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테무진은 몽골 고원 최대의 군주를 우군으로 받아들여 그것을 이용하려는 과감한 도박에서 결국 이겼던 것이다. 크로텐 모피에 기분이 좋아진 토오릴은 기뻐하며 말했다.
"답례로 너의 해산된 씨족 사람들을 모아 주마."
(3) 인격 - '유린하라'고 초원은 말했다
유목민의 생활은 가혹한 편이다. 으레 초원이라고 하면 초목과 바람, 끝없이 높은 하늘을 떠올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기후는 1년 중 짧은 여름에 불과하며 이 시기를 제외하고는 혹독한 추위 속에 갇힌다. 1월의 평균 기온은 영하 26.1도. '눈에 방목된 소의 머리가 얼어서 깨지거나' '쇠꼬리가 얼어붙어서 뚝 잘려 땅에 떨어지기도' 하는 가혹한 환경 속에서 유목민들이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정확한 판단력과 단호한 행동력이 없으면 유목 생활을 해나갈 수 없으며 그것이 몽골 제국 전체의 특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는 "남자가 쾌락과 기쁨으로 삼는 것은 모반인(謀叛人)을 유린하고 적을 정복하여 재산을 박탈하고 그 시종들의 눈, 코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며, 그들의 살진 말을 타고 그들의 아내를 나의 침상으로 삼아 그 장미 같은 뺨을 애무하고 진홍빛 입술에 입맞춤하며 끌어당기는데 있다"고 말했다.
징기즈칸의 이 잔학성은 젊을 때 겪은 여러 굴욕적인 사건이 원인인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죽음을 당하고 가난의 밑바닥에서 허덕이며 아내를 빼앗기고 아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의 아들을 낳은('징기즈칸의 큰아들' 박스 글 참조) 데 대한 분노는 마음 속 깊이 앙금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징기즈칸이 단순히 어두운 분노에 자극받아 행동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떤 분노에도 좌우되지 않는 냉철함, 그것이 징기즈칸이 무서운 진짜 이유였다. 그의 냉철함과 지략(智略)은 원정(遠征)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4) 징기즈칸의 큰 아들
징기즈칸의 아내 보르테는 결혼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메르키드족에 의해 납치당했다. 그녀는 토오릴 칸이 9개월 동안 교섭을 벌인 끝에 징기즈칸에게 돌아올 수 있었는데, 돌아온 직후에 사내아이를 낳는다.
징기즈칸은 아들의 이름을 주치[朮赤]라 했는데, '객인(客人)' 즉 '이방인'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을 붙인 이유는 보르테가 남편에게 돌아오는 도중에 뜻하지 않게 태어났기 때문이라는 설과 사실은 징기즈칸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5) 대서정(1) - 호레즘 샤와의 대립
1219년, 징기즈칸은 서양 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그때까지의 10년 동안 그는 몽골을 강력한 통일 국가로 통합하고 중국 북부의 금(金)을 침략하여 정복했다. 당초에는 유목민 특유의 약탈 행위로 시작된 이 침략은 해를 거듭하면서 토지를 제압하고 항구적으로 지배하는 정복 행위로 그 성격이 바뀌어 갔다. 혹독한 자연 속에 자란 유목민들에게 정착민들의 토지는 처분하기에는 너무 풍요로웠던 것이다. 지배를 하게 되면서 몽골 유목민들의 성격도 바뀌어 많은 나라를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 서쪽으로 눈을 돌렸다. 몽골의 서양 정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당시에 서아시아 최대의 이슬람 국가이던 호레즘 샤 왕조는 1210년에 국력이 쇠퇴해 있던 서요(西遼)를 멸망시키고 북쪽은 카스피해 연안으로부터 남쪽은 페르시아, 동쪽으로는 힌두쿠시로부터 서쪽은 코카서스(카프카스)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징기즈칸은 몽골의 접경 지역에 위치한 호레즘 샤와 당초에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215년에 징기즈칸은 호레즘 샤가 보낸 사절단에게 말했다.
"내가 동방의 패자가 될 것이니 샤는 서방의 패자가 되시오. 우리는 서로 평화와 우호를 유지하여 상인들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소?"
그러나 징기즈칸의 진의는 다른 데에 있었다. 『집사(集史)』에 의하면 1216년에 대금(對金)침략에 일단락을 지은 징기즈칸은 몽골 전군에게 2년간 휴식을 명령했다. 부족 전체적으로 대원정 준비가 진행되어 서방으로 첩보(諜報)·조략(調略)을 목적으로 통상단이 보내졌다. 표면상의 우호 관계는 적의 내정을 다 살필 때까지의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1219년에 호레즘 영(領)인 오트라르(시르다리야 강의 동안, 그 지류 아리스 강 남쪽에 있었으며 옛 명칭은 파라브. 호레즘 왕국 시대에는 그 국경 도시가 되고, 태수가 몽골의 대상을 살해했기 때문에 징기즈칸이 서부 정벌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에서 몽골 통상단이 첩자 혐의로 학살을 당했다. 문명국 사이에서 통상단이 파견되는 경우 그것은 보통 스파이로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며,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상태에서 받아들일지 아닐지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 방식이었다. 호레즘이 취한 방법은 그다지 문명적이지 못했다. 징기즈칸은 분노했고, 이것은 침략을 개시할 아주 좋은 빌미였다.
(6) 대서정(2) - 중앙 아시아에서 러시아로
용의주도한 첩보 활동을 벌인 결과 호레즘에 대한 조사가 끝났다.
골 왕조, 아바스 왕조를 누르고 이슬람 세계의 최대 패자(覇者)로 알려졌던 서방의 강국은 실은 겉보기보다 실속은 없었다.
호레즘 샤 왕조가 갑자기 대두하게 된 것은 아랄해(海) 북방의 사나운 유목 민족인 터키계 캉글리족(族)의 무력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직접 충성을 맹세한 것은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의 생모, 캉글리족 출신의 테르켄 하튼이었고, 호레즘 왕조에서는 어머니와 아들이 대립하고 있었다. 캉글리족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것을 염려한 무하마드는 병력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몽골측에 바로 누설되었다. 몽골의 철저한 내부 교란(攪亂)의 결과, 공격의 손길은 무하마드의 어머니 테르켄 하튼에게까지 뻗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결국 호레즘 군대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개별적 도시 방위군으로 몽골 군대 전체와 싸워야 했고, 마침내 모조리 패하고 만다.
1219년, 징기즈칸이 이끄는 원정군은 오토라르 시를 공격하고, 이어서 마와라 안나르 지역을 침공했다. 나중에 제왕 티무르에 의해 번영하는 이 지역은 옛날부터 중앙 아시아에서 가장 비옥한 지대였고 수도 사마르칸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탐내던 곳이었다.
오아시스 여러 도시를 공격, 함락시킨 몽골군은 공성전(攻城戰)에도 뛰어났다. 오토라르를 공략하는 데는 5개월이 걸렸지만 부하라는 며칠 만에, 그리고 사마르칸트는 4일 만에 함락되었다. 금(金)과 서하(西夏)에서 등용한 기술자에게서 습득한 공성전 기술이 주효했음은 물론이고, 몽골군(軍)이 두려워 자진해서 문을 여는 도시들도 많았다. 사전에 조사한 대로 호레즘 샤 왕조의 행동은 전혀 통일되어 있지 않았다. 또한 몽골군은 강력하고 잔학한 군대임을 알려 전쟁 전부터 정보전에서 상대방의 사기를 꺾어 놓았다. 사마르칸트에 몽골군이 오기 직전에 국왕 무하마드는 도시에서 도망쳐 버렸다.
서양 세계에 이 사태는 전설의 구현으로 전해졌다. 프레스터 존은 다윗 왕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르시아를 석권하고 바그다드 근처까지 육박했다는 정보가 로마 교황청을 통해 유럽에 퍼졌다. 환상의 구세주가 나타났다는 데 힘을 얻은 십자군은 아이유브 왕조의 수도 카이로를 공격했으나 물론 동방으로부터의 원군(援軍)은 오지 않았다. 십자군은 참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서양 세계에 동방에서 온 군단이 루시(러시아)를 향해 올라오고 있다는 새로운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7) 진격 - 러시아 공략전
사마르칸트에서 도망친 호레즘 국왕 무하마드는 서쪽으로 달아났다. 무하마드가 도망친 것은 몽골군을 내지(內地)로 유인, 공격하려는 책략이었다는 설이 있지만 이미 때늦은 일이었다. 국왕의 추태가 호레즘 샤 왕조의 해체를 앞당겼다는 설도 있다.
이 시기에 니샤푸르에서 징기즈칸이 낭독한 선언문에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사령관, 대관, 평민들이여. 신이 동에서 서에 이르는 지상의 제국을 짐에게 준 것을 알라. 항복하는 자는 목숨은 살려 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는 자는 불행을 당하여 처자(妻子), 평민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풍요로운 마와라 안나르를 제압한 징기즈칸은 세계 제패의 실현을 계획했는지도 모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이란 서부 여러 지역을 공략하는 한편, 장군 제베와 스베테이가 군대를 이끌고 루시로 향했다. 무하마드를 쫓아간다는 것이 명목이었지만 사실은 새로운 땅을 정복하기 위한 침략 행위였다.
무하마드는 추격을 피해 카스피해 남안의 쿠르간까지 달아났다. 그러나 결국 몽골군에게 발견되어 카스피해 앞바다의 아바스쿤 섬으로 다시 탈출했으나 폐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이것이 1220년 12월의 일이다.
제베와 스베테이의 진군은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그대로 카스피해 서안에서 북진하면서 도시들을 함락해 나갔다. 카프카스 지방을 지나 흑해 연안으로 들어간 원정군은 곧 칼카 해반(海畔)에서 루시군(軍)과 일전을 벌인다.
몽골군은 당초에 남러시아 초원에 분포하는 터키계 유목민 부족 킵차크족(族)을 정복하려는 계획도 있었는데, 킵차크족은 예전의 징기즈칸의 숙적 메르키드족과 교류하는 부족이기 때문에 제압해야 할 적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킵차크의 족장이며 루시와 인연이 있던 코치아는 루시측에 협력을 요청했고, 루시의 대공 게오르규는 몽골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게 된다.
루시 제후들로 이루어진 연합군은 드네프르 강 우안(右岸)에 진을 치고 몽골군을 기다렸다. 연합군은 8만 정도였고, 이에 비해 몽골군은 훨씬 열세였다. 첫 전투에서는 연합군의 가리치 공(公)이 몽골군을 압도했다. 기세등등해진 연합군은 후퇴하는 몽골군을 추격했고, 몽골군은 연합군을 방어하면서 칼카 강 동안(東岸)까지 후퇴했다. 그러나 그것은 몽골군의 책략이었다. 몽골에 비해 기동력이 뒤떨어지는 루시군(軍)은 추격전에 지쳐 있었는데, 가루치 공은 혈기만을 믿고 칼카 강을 건너는 작전을 감행했다. 때를 기다리고 있던 몽골군은 일제히 반격에 나섰고 루시군은 꼼짝없이 격파당하고 말았다.
가루치 공의 군단과 그것을 지원한 킵차크 군대는 괴멸되었고 몽골군은 제후들을 추격하여 그들을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키에프 공, 체르니고프 공은 붙잡혔고 공전승(共戰勝)의 연회석상에서 함께 처형되었다.
칼카 강의 결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후 원정군은 동쪽으로 전진하여 징기즈칸의 본군대와 합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루시 남쪽에 몽골군의 직접적 영향이 미치지는 않았지만, 이 패배는 루시 제후, 그리고 흑해 건너편의 비잔틴 제국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상흔(傷痕)을 남기고 몽골은 이렇게 떠났다. 1227년 징기즈칸은 서하 정복전이 한창일 때 죽었는데, 그가 만든 제국과 정복에 대한 야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서양 세계는 다시 한번 징기즈칸의 그림자에 떨게 된다.
(8) 재방문 - 유럽 침입
1236년, 루시인들이 몽골을 거의 잊어갈 무렵에 몽골은 다시 동쪽에서 왔다. 징기즈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의 명령하에, 죽은 징기즈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인 바투 칸이 군을 이끌었다. 이번 원정의 목적 또한 킵차크족 지배, 호레즘 잔당의 괴멸, 그리고 서양 세계의 정복이었다.
바투 원정군은 우선 가까이 있는 킵차크족을 공격했다. 유목민 집단에 불과하며 몽골처럼 군단으로서 통일되지 않은 킵차크족은 몽골군의 적수가 못 되었다. 어떤 자들은 서쪽으로 도망치고 어떤 이들은 투항하여 대부분이 몽골의 지배하에서 몽골군의 일원으로 재편성되었다.
새롭게 킵차크군을 얻게 된 바투 원정군은 그 다음으로 루시를 침공했다. 카스피해에서 북상하여 모스크바, 블라디미르 여러 도시를 장악하고 노브고로드를 위협한 후에 방향을 바꾸어 폴란드, 헝가리 방면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겁에 질린 두 나라는 동유럽의 비잔틴 제국과 로마 교황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는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의 전쟁에 패해 그 호소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9) 압도 - 발슈타트 전투
유럽의 권력자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몽골군 별동대는 폴란드에 침입하여 폴란드 대공은 국내가 수습되지 않은 채 이를 맞아 싸우게 되었다. 1241년 4월, 양군은 리그니츠 평원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이고 몽골군은 폴란드군을 괴멸했다. 이곳은 훗날 발슈타트라 불렸는데 독일어로 '시체의 도시'라는 뜻이다. 이는 전투 후에 시체가 많이 나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 전투의 규모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지만, 몽골군의 가차없는 살육은 러시아인들에게 이질적인 모습으로 비쳤을 것은 확실하다.
그 무렵 바투가 이끄는 본대(本隊)는 헝가리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군대는 유럽 최강으로 알려져 있었고, 국왕 베라 4세가 이끄는 헝가리군은 전력상 몽골군에 뒤지지 않았다고 한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현 부다페스트)로 진로를 잡은 몽골군과 헝가리 국왕군은 사요 강의 하반(河畔)에서 대치했다. 몽골군의 노궁포(弩弓砲)가 빗발치듯 쏟아져 헝가리군 내부에서는 참전한 수도원장과 국왕 사이에 균열이 생겼다. 이 혼란을 틈타 몽골군은 헝가리를 격파했다. 참패한 헝가리군은 몽골군의 추격을 받아 퇴로에는 여정 이틀에 걸쳐 시체가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10) 공포의 전설 - 타타르의 멍에
유럽은 위기에 처해 있었고, 몽골군이 어디까지 공격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헝가리에서부터 서쪽으로 향하면 그곳은 독일, 프랑스와 평원이 이어져 있었다. 라인 강 이외에 몽골군의 진격을 저지할 요충지는 없었다. 그대로 대서양에 도달하고 마는 것이다. 바투군은 헝가리 평원의 목초 지대에 주둔하며 전진에 대비하고 있었다. 만약 몽골군이 유럽을 정복했더라면 라인 강가의 구릉지대는 목초지대로 모습을 바꿔, 훗날 유럽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유럽을 구한 것은 1241년 12월의 오고타이 칸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정복 명령은 본래 오고타이 칸이 내렸으므로 그것을 계속할 것인지는 대회의를 열어 결정할 문제였다. 바투 칸은 빈을 눈앞에 두고 군사를 돌려 유럽을 떠났다. 그후에 몽골군이 유럽을 공격하는 일은 없었지만, 루시 땅에서는 제후와 각 도시, 그리고 정교회(正敎會)가 몽골의 지배를 완전히 받아들여 이후 수백 년간 루시는 킵차크 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를 러시아인들은 '타타르의 멍에'라 불렀고, 이 말은 지금도 불행을 뜻한다.
몽골인들의 지배는 몽골군의 가혹함과 잔학성에 비하면 훨씬 온후한 편이어서 기독교는 보호되었고 국내의 치안은 양호했다. 하지만 그들은 러시아인으로부터 10분의 1세(稅)를 거두는 한편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했는데, 거역할 경우에는 가차없이 학살했다.
러시아 제후는 이 타타르의 멍에 아래에서 단결을 결의했다. 1380년에 모스크바 대공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주위의 제후에게 킵차크한국의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호소하여 크리코보 전투에서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대군을 이끌고 역습한 킵차크한국에 패하여 모스크바는 황폐화되었고 1만 내지 2만 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결국, 러시아가 타타르의 멍에에서 탈출하려면 이반 뇌제(雷帝) 시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11) 몽골 제국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양 제국에게 몽골, 그리고 징기즈칸은 파괴와 약탈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몽골에 관한 저서들은 대부분 그들의 파괴와 약탈, 폭력과 살육만이 묘사되어 있다. 그들이 서양 세계에 던져준 공포를 생각하면 당연하겠지만, 몽골이 서양 세계에 준 또 다른 영향 ― 몽골이 동서의 교통을 활발하게 만들었다 ― 에 대해서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몽골의 지배자들은 '초원의 길'이라 전해지는 동서의 교통로에 역과 말과 숙사(宿舍)를 마련했고 그 때문에 외국 사절과 여행자들은 안전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또한 금과 은으로 된 파이자라는 여권이 발행되어 이것이 있으면 외국인도 여행할 때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멀리 중국을 여행하다 돌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영향이 크다. 파이자는 현재의 러시아 영(領)에서 여러 장 발견된 바 있다.
몽골인들은 통상을 통해 얻는 이익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결국은 육로뿐 아니라 해상로도 열렸다. 몽골 제국의 지배하에 통일을 회복한 중국 남부 항구에서 3층 갑판의 큰 배가 인도를 향해 항행(航行)했다. 몽골 제국의 보호하에 중국, 페르시아, 인도, 중앙 아시아, 흑해 주변에서 러시아까지를 포함한 거대한 통상 시장이 나타나 세계는 동과 서가 서로 통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쇄술, 항해자의 나침반, 화기(火器), 사회생활의 매우 중요한······이것들은 유럽에는 없는 것들이며 몽골의 영향에 의해 극동(極東)에서 유럽에 이입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몽골 고원의 한촌(寒村)에서 태어난 소년 테무진, 징기즈칸은 세계를 공포에 떨게 한 상징으로서, 또 한편으로는 세계를 발전으로 이끈 공로자로서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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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읽는 영한대역 세계 명작 칼라 만화]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1)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은 영국의 작가 에밀리 브론테가 필명 엘리스 벨(Ellis Bell)로 출간한 유일한 소설이자 유작 소설이다. 아버지 패트릭 브론테 신부가 성공회 사제였던 가정환경상 에밀리는 어린시절을 사제관이 있던 영국 요크셔의 황량한 벌판에서 보내면서 작가로서의 상상력을 길렀으며, 어른이 된 후 요크셔 벌판의 폐가(TopWithens)에서 영감을 얻어 《폭풍의 언덕》을 썼다. 캐서린(Catherine Earnshaw)과 히스클리프(Heathcliff)와의 불멸의 사랑을 우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뛰어난 게 장점이다. 출간당시에는 비윤리적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20세기에 토머스 몸 등에 의해 재평가되었다. 한국어판은 범우사 등의 문학전문출판사들에 의해서 역간되었다.
(2)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줄거리
1801년 황량한 벌판에 위치한 폭풍의 언덕에 세입자인 락우드씨가 찾아온다. 자신이 세든 집인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주인인 히드클리프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거칠었고 잘 곳도 변변하지 못하여 감기에 걸려서 돌아온다. 집에 돌아온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과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역사를 잘 알고 있는 가정부 넬리 딘에게 그동안 있었던 두 집안의 역사에 대해서 듣는다.
이야기 1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었던 언쇼는 리버풀에 갔다가 거지꼴을 한 소년을 데려온다. 가족들은 출신을 알 수 없는 소년에게 경계심을 갖고있었는데, 특히 아들 힌들리는 히스클리프를 미워한다. 죽은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줄 정도로 히스클리프를 편애하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은 후, 아내 프랜시스를 데리고 집에 돌아온 힌들리는 결국 히드클리프를 머슴처럼 가혹하게 학대한다. 게다가 어린시절부터 같이 자랐던 친구이자 애인인 캐서린까지 드러시크로스 저택의 아들인 에드거에게 사랑을 품자, 이에 상심한 히드클리프는 가출한다.
이야기 2
몇 년후 부자가 되어서 돌아온 히드클리프는 몸이 약했던 아내 프랜시스의 죽음이후 폐인이 된 힌들리를 도박으로 빈털털이로 만들어버린다. 알코올 중독으로 힌들리가 죽자, 그는 힌들리의 아들인 헤어턴에게 자신이 당한대로 앙갚음을 하여, 무식한 머슴으로 키운다. 새끼 뻐꾸기가 다른 새의 알들을 내치는 것처럼, 폭풍의 언덕의 주인이 머슴이 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애인을 뺏어간 에드거의 여동생 이사벨라를 유혹해서 결혼한 뒤, 인권을 짓밟는다. 히드클리프와의 만남이후 결혼전부터 갖고 있던 정신착란이 심해져서 죽은 캐서린만 찾는 무관심과 학대를 견디지 못한 이사벨라는 런던으로 달아나서 아들을 낳는다. 한편 에드거는 죽은 아내가 남긴 외동딸 캐시를 곱게 키운다.
이야기 3
여동생이 병으로 죽자 에드거는 런던에 가서 조카를 몰래 데려오지만 12살의 철없는 꼬마 캐시의 말실수로 발각된다. 히드클리프가 아들을 데려갈 것이 분명하자, 에드거는 마지못해서 조카를 폭풍의 언덕에 데려다 준다. 까다롭고 버릇없는데다가 허약하기까지 한 아들이 마음에 들리 없었지만,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서린과 결혼시켜서 드러시크로스를 먹어치울 생각을 한다. 결국 히드클리프는 아들을 캐시와 강제로 결혼시켜, 탐욕을 채운다. 딘은 셋방을 구해서 어릴적부터 모셔온 캐시 아가씨를 다시 모시고 싶어하지만 그건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이야기 4
1802년 친구의 초대를 받아서 가던 락우드는 폭풍의 언덕에 다시 온다. 전세 문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였는데, 딘 아주머니는 히드클리프가 죽었다고 했다. 비가 몰아치는 날, 눈도 못 감고 죽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헤어턴과 캐시 사이에서 사랑의 감정이 싹트고 결혼을 앞두면서, 폭풍의 집과 드러시크로스저택의 불행한 역사는 끝나고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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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돈키호테 Don Quixote / 세르반테스 (Miguel de Cervantes)
(2) 걸리버 여행기 Gulliver's Travels / 조나단 스위프트 (Jonathan Swift)
(3) 우주 전쟁 The War of The Worlds / H.G. 웰즈(H.G. Wells)
(4) 폭풍의 언덕 Wuthering Heights / 에밀리 브론테(Emily Bronte)
(5) 로빈슨 크루소 Robinson Crusoe / 다니엘디포우(Daniel Defoe)
(6) 파우스트 Faust / 괴테(Goethe)
(7) 로미오와 줄리엣 Romeo and Juliet /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8) 왕자와 거지 The Prince and the Pauper / 마크 트웨인(Mark Twain) - 사무엘 클레멘스(Samuel Clemens)
(9) 보물섬 Treasure Island / 스티븐슨(R.L. Stevenson)
(10) 백경(白鯨) Moby Dick / 허만 멜빌(Herman Melville)
(11) 슬리피 해로우의 전설 The Legend of Sleepy Hollow / 워싱톤 어빙(Washington Irving)
(12) 노트르담의 꼽추 The Hunchback of Notre Dame /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3) 정글 북 The Jungle Book / 루드야드 키플링(Rudyard Kipling)
(14) 지킬박사와 하이드씨 Dr. Jekyll and Mr. Hyde / 스티븐슨(R.L. Stevenson)
(15) 크리스마스 선물 A Christmas Carol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6) 80일간의 세계일주 Around The World in Eighty Days / 쥴 베른(Jules Verne)
(17) 해저 2만리 20,000 Leagues Under the Sea / 쥴 베른(Jules Verne)
(18) 위대한 유산 Great Expectations / 촬스 디킨즈(Charles Dickens)
(19) 모히칸족의 최후 The Last of the Mohicans /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James Fenimore Cooper)
(20) 죄와 벌 Crime And Punishment /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evskii)
4. 영한대역 칼라 만화 징기즈칸((Genghis Khan) : 5권(각권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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