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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바꾸라.
성경본문 : 잠언 18: 20-21
20.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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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호 목사
탈무드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임금님이 광대인 시몬과 바보인 요한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명을 내렸습니다. “여봐라! 시몬은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을 가져오도록 하라. 그리고 요한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을 구해 오도록 하라.” 오랜 시간이 흘러 광대 시몬과 바보 요한이 돌아왔습니다. 먼저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을 구해 온 광대 시몬의 상자를 열어 보자, 사람의 혀가 나왔습니다. 다음에 세계에서 가장 나쁜 것을 구해 온 바보 요한의 상자를 열었더니, 역시 사람의 혀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 <탈무드>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사람의 혀는 세상에서 가장 유익한 것이 될 수도 있고, 가장 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함부로 내뱉는 말은 싸움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잔인한 말 한마디가 다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쓴 말 한마디가 돌이킬 수 없는 비수가 되어 다른 사람의 가슴에 꽂힐 수도 있습니다. 무책임한 구설수가 한 사람을 매장시킬 수도 있습니다. 반면에 부드러운 말은 앞길을 환하게 만듭니다. 격려하는 짧은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기쁨에 넘친 한 마디가 즐거운 이웃을 만듭니다. 좋은 말 한마디는 약보다 낫습니다. 이처럼 말에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말에는 미래를 좌우하는 힘이 있습니다. 말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실 때, 어떻게 하신 줄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손으로 주물럭거려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아니면 발로 차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어떻게 창조하셨습니까?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절을 보면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아노니”라고 하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우리에게도 언어를 통해 미래를 열어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첫 사람 아담으로 하여금 모든 만물의 이름을 짓도록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창2:19~20)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한 모든 만물들의 이름은 첫 사람 아담이 말한 대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말한 대로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결국 아담에 의해 모든 생물의 미래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을 창조하실 때부터 아담에게 말의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권세를 아담에게만 주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로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6장19절에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매고 푸는 것이 우리의 혀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혀를 사용하여 여러 가지 것들을 맬 수도 있고, 풀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말에는 엄청난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이 달라지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말에는 어떤 능력이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말에는 크게 네 가지의 능력이 있습니다.
1) 성취력(Achieving Power)
첫째로 말에는 말대로 이루어지는 성취력이 있습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말이 씨가 되어 싹이 나고 자라나서 결국에는 열매로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말은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아침 일찍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에 시장하셨기 때문에 드실 열매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한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셨습니다. 하지만 아직 열매 맺을 시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열매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막11:14) 그리고 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날이 저물어 아침에 갔던 그 길로 다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였습니다. 아침에 본 그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아 뿌리부터 말라있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대로 성취된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마가복음 11장 23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고 깜짝 놀라는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진실로’라는 말은 무엇을 강조할 때, 쓰는 어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산을 보고 “바다로 들어가라”고 말하고, 자기가 한 말이 그대로 될 줄 믿으면 그대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단어가 있는데, ‘누구든지’라는 단어입니다.
여기 ‘누구든지’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신앙생활 오래 한 사람을 가리킵니까? 아니면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을 가리킵니까? 아니면 능력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까? 목사나 장로나 집사나 직분을 받은 사람을 가리킵니까? 아닙니다.
누구든지’란 말은 말 그대로 누구든지 입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1주일이 되었든지, 6개월이 되었든지, 제자훈련을 받았든지, 받지 않았던지 상관없이 누구든지 믿음으로 말하면 그 말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어느 수학선생님이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을 두 팀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교실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한 그룹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머리로 이 문제를 풀 수 있다. 이 문제는 그리 어렵지 않다. 자 한 번 풀어봐라!” 그러나 다른 그룹의 학생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문제는 너무나 어렵다.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번 시도해 보아라.” 나중에 어떤 결과가 나온 줄 아십니까?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학생들은 100% 그 문제를 풀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도 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학생들은 단 한 명도 이 문제를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말은 말대로 이루어지는 성취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믿음의 고백은 역사하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말대로 이루어집니다.
2) 각인력(Engraving Power)
둘째로 말에는 우리의 생각에 박히는 각인력이 있습니다.
박힌다는 말은 도장을 팔 때, 혹은 상패나 감사패를 만들 때, 판에 깊이 새겨 넣는 Engraving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119편 11절에서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기 ‘마음에 두었다’는 말은 ‘마음에 각인해 놓았다’는 의미입니다.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각인해 놓으면 그 말씀으로 인해 행동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범죄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겼을 때, 얻는 유익입니다. 미국의 의사협회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의 뇌세포의 98%는 자신의 말에 의해 지배를 받든지, 다른 사람의 말에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입이 말하면 그것을 뇌 속에 새겨 두었다가 그 말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꾸 ‘피곤하다, 피곤하다’라고 말하다보면 피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피곤해진다는 것입니다. 자꾸 ‘기분이 좋다. 기분이 좋다’고 말하다보면 기분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진짜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입니다.
한때 세계 복싱계를 주름잡았던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조 프레이저와의 경기에서 미화로 1천만 달러를 벌었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하던 주먹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주먹으로도 유명했지만, 말로도 유명했습니다. 알리는 링 위에 올라가자마자 상대방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링 위를 마구 돌아다니며 혼자 말로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합니다. “이번 경기에서는 나비처럼 날라서 벌처럼 쏘겠다. 이번 경기에서는 소련 전투기처럼 공격하고 독일 전차처럼 빠져 나오겠다. 이번 경기에서는 일본군이 하와이를 기습 공격한 것처럼 기습작전을 쓰겠다....” 그는 은퇴하면서 승리의 비결을 털어놓았습니다. “나의 승리의 반은 주먹으로, 나머지 반은 말이었습니다.” 그는 말로 자기 생각에 승리를 계속 각인시켰고, 상대방의 생각에 각인시켰습니다. 그러다보니 알리의 생각 속에는 기필코 승리한다는 생각이 가득 찬 반면, 상대방은 알리의 허풍 때문에 패배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미 경기를 하기도 전에 승부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말에는 우리의 생각 속에 깊이 박히는 각인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에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게 하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3) 견인력(Towing Power)
셋째로 말에는 견인력이 있습니다. 견인한다는 말은 끌고 간다는 의미입니다. 말에는 우리를 끌고 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내 말이 내 삶을 끌고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자로 ‘언행일치’라고 하는데, 반해 ‘행언일치’라고 하지 않습니다. 말이 행동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3장을 보면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가 어떻게 했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6) 그렇게 입술로 선포하면서 그의 오른 손을 잡아 일으키니 그가 걷기도 하고 뛰면서 성전 안을 이곳저곳으로 마구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은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으로 나타났습니다. 이와 같이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다른 사람을 끌고 갈 뿐 아니라, 나를 끌고 가기도 합니다.
오래 전에 한국의 강원도 태백에서 탄광이 매몰되어 6명이 갱도에 갇힌 적이 있습니다. 92시간 만에 구조대원들이 무너진 갱도를 다시 뚫고 들어가서 보니 5명은 이미 죽었고, 서종엽이라는 광부만 살아 있었습니다. 구조된 그에게 기자들이 “다른 5명은 다 죽었는데, 어떻게 당신만 살아남을 수가 있었습니
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나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칠흑같이 어두움 속에서 목까지 차올라온 물속에서 공포와 추위 뿐 아니라, 이미 흙이 무너질 때 흙에 깔려 죽은 동료들의 시체를 보면서 절망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나는 살아야 한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아내와 두 아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리며 ‘나는 살아야 한다. 나는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하며 이를 악물고 견뎠습니다. 그리고 내가 배설한 똥과 오줌을 먹었습니다. 의식이 가물 가물거려 곧 죽을 것만 같을 때에도 ‘나는 기어코 살아야 해, 그래서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나야 해’ 다짐을 했습니다.” 결국 의식을 잃으면서도 계속해서 고백한 그 고백대로 그는 구조되어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말에는 우리의 삶을 끌고 가는 견인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말에는 우리의 끌어당기고, 환경을 끌어당기는 능력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무엇이든지 끌어주는 능력이 믿음의 말 속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4) 추진력(Driving Power)
넷째로 말에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말이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말이 일을 추진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세상을 떠날 때, 열 두명의 아들을 모아놓고 축복 기도를 하던 중, 유다에게는 이렇게 축복하였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창49:11~12)
그 후 나라가 어려움을 겪으면서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레위인들이 성전을 버리고 도망쳤을 때,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열심히 드릴 지파는 유다 지파 하나뿐이었습니다(느13:12). 그런데 놀라운 것은 야곱이 축복 기도를 한 것처럼 유다 지파는 다른 지파와 달리 포도주 장사가 나타날 정도로 풍부한 포도주를 가지게 되었습니다(느13:15). 그러니까 야곱이 유다 지파를 축복한대로 1,400년이 훨씬 지나서 그대로 추진된 것입니다. 말대로 진행된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경부고속도로를 누가 만들었습니까?“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는 줄 아십니까? 박정희 전대통령이 만들었다고 대답합니다. 사실 박정희 대통령은 기공식 할 때 첫 삽을 뜬 것밖에 없습니다. 경부고속도로는 현대건설이라는 회사 직원들이 불철주야 땀을 흘리면서 일을 함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전대통령이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그가 직접 현장에서 일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일하게 해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현대건설의 정주영씨가 직원들을 동원하고 수많은 장비를 움직여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말에는 일을 추진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우리의 혀가 큰 배의 방향을 결정하는 키와 갔다고 한 것처럼, 우리의 말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줄로 믿습니다.
정리해보면 말에는 네 가지 능력이 있습니다.
무슨 능력이 있습니까?
말대로 이루어지는 성취력,
우리의 생각에 박히는 각인력,
우리를 끌고 가는 견인력,
그리고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혀의 능력, 즉 말의 능력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영어로 보면 이해하기가 더 쉽습니다. NIV 영어 성경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The tongue has the power of life and death" 혀에는 두 가지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혀에는 살리는 능력이 있을 뿐 아니라, 죽이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 지혜의 왕 솔로몬은 잠언서 6장 2절에는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고 말씀하며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로 우리가 올가미에 걸릴 수도 있고 함정에 빠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대로 우리가 얽히고 잡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이 우리의 환경과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요?
어떻게 우리의 말을 바꿀 수 있을까요?
많은 부분이 있겠지만, 저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1) 긍정적인 말을 하라
첫째로 우리는 부정적인 말보다 긍정적인 말을 해야 합니다. 물론 살다보면 어렵고 힘들고 낙심이 되는 환경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과 손에 만지는 것이 절망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우리가 살수 있는 비결입니다.
한 농부가 늦가을에 타작을 하며 ‘올해 벼농사는 망했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하며 몹시 상심해 하는 것을 들은 이웃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 감자 농사도 망했는가?” “아니.” “채소 농사도 망했는가?” “아니, 잘 되었다네.” “그럼 옥수수는?” “그것도 잘 되었지.” “그럼 됐구먼. 딴 사람보다는 낫군 그래. 벼농사 하나만 안 된 거잖아. 왜 자네는 성공한 일, 감사히 여겨야 할 일, 기쁜 일부터 먼저 생각하지 않는가? 생각이 잘못되었어.” 현명한 이웃의 충고를 들은 그 농부는 그 이후부터 부정적인 말을 긍정적인 말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재능이나 돈이나 기회가 부족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보는 관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 때문에 스스로 부정적인 말의 올가미에 걸려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민수기에 나오는 가데스 바네아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40일 동안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왔습니다. 똑같은 장소를 똑같은 기간 동안 보고 왔습니다. 그런데 보고는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보고를 한 반면, 다른 10명의 정탐꾼들은 악평을 하며 부정적인 보고를 하였습니다. 열 명의 부정적인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며 소리를 지르고 밤새도록 울고불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민수기 14장 27절과 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원망하는 이 악한 회중을 내가 어느 때까지 참으랴 이스라엘 자손이 나를 향하여 원망하는 바 그 원망하는 말을 내가 들었노라.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가리켜 맹세하노라 너희 말이 내 귀에 들린 대로 내가 너희에게 행하리니”
결국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약속의 땅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부정적인 보고를 하며 악평하고 원망을 한 10명의 정탐꾼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조금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부정적인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며칠 전 새벽기도회에서 소개한 적이 있는 이해인 시인의 <나를 키우는 말>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행복하다고 말하는 동안은
나도 정말 행복해서 마음에 맑은 샘이 흐르고...
고맙다고 말하는 동안
고마운 마음 새로이 솟아올라 내 마음도 더욱 순해지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동안
나도 잠시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마음 한 자락이 환해지고...
좋은 말이 나를 키우는 걸 나는 말하면서 다시 알지...”
이 시에서 고백한 것처럼 비록 행복한 환경은 아니라 할지라도,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하면 우리의 마음에 행복한 마음이 생깁니다. 그리고 행복할 수 있는 환경까지 주어집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보면 부정적인 결과를 거둡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면 삶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정적인 말은 제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말을 할 때, 그 고백대로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들이 ‘힘들다’, ‘죽겠다’, ‘안 된다’라고 말하더라도, 실패하거나 우울한 소식들만 보지 말고, 시선을 긍정적이고 잘 된 일들을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힘들어, 난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대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살리는 말을 하라
둘째로 우리는 죽이는 말보다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혀는 작지만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말을 잘 해야 합니다. 영국의 어느 지방에서 12 그루의 나무를 심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나무에 예수님의 12제자들의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첫 번째 나무는 베드로, 두 번째 나무는 요한, 세 번째 나무는 야고보... 이런 식으로 이름을 적은 팻말을 나무 앞에 세워놓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1년 후에 가서 보니 가룟 유다 나무가 죽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조사 해보니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가룟 유다 나무에 계속 저주하다보니 그 말대로 말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는 이야기입니까? 말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야고보서 3장 4절부터 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수많은 사람의 생명이 희생되는 전쟁은 사람의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최고 사령관의 공격 명령에 따라 전쟁은 시작됩니다. 절친한 친구관계도, 행복한 부부관계도 가시 돋친 말에 의해 깨어집니다.
이처럼 혀는 1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것에 불과하지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아이들이 수다쟁이를 “빅 마우스“(Mr. Big mouth)라고 부르는 것이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빅 마우스“라는 말은 입이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작은 입이지만,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그것을 빗대어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헬라 속담에 “혀는 뼈 하나 없고 아주 약하고 작지만 많은 사람을 찌르고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터키 속담에는 “혀는 짐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면 진찰할 때 의사들이 혀를 봅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혀를 진찰해보면 그 사람의 건강을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상태는 우리의 혀를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혀는 어떻습니까?
병나지 않았습니까?
혹시 함부로 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혹시 다른 사람에 대해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구누구가 소파를 바꿨다느니, 어떤 집사가 식탁을 새것으로 교체했다니, 어떤 형제가 자동차 시트커버를 비싼 돈 들여 했다느니, 어떤 자매 네는 집값이 오르는 바람에 재미를 보았다느니, 하며 이 기쁜 소식을 온 세상 전하세“하며 여기 저기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벌이 침으로 사람을 쏘면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지만은 벌은 그 자리에서 죽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남의 험담이나 비방하는 것은, 마치 벌이 침을 쏘는 것과 같아 상대방에게도 아픔과 고통을 주지만, 내 영혼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행위는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죄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무슨 계명입니까?
아홉 번째 계명인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기는 것이 됩니다.
또 남에 대해서 중상하거나 악담하거나 시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냥 놓아두세요. 남이야 식탁을 바꾸든지, 남이야 벤츠를 타든지, 남이야 집값이 올랐든지 왜 그런 걸 동네방네 전하려고,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합니까? 저는 남의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 사명이다‘,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은사다‘라는 것을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밤낮 모여서 다른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합니까? 말을 많이 하는 사람치고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나도 모르게 과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을 자꾸 하다보면 없는 사실에 살을 더 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언제든지 말로 실수하고, 말로 범죄 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을 멸망으로 이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혀는 사람을 살리는 ‘이기’(利器)가 될 뿐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흉기’(凶器)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의 불행은 혀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낚시를 다니다보면 등에 낚시 바늘이 끼어 올라오는 멍청한 고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물고기는 항상 입으로 낚입니다. 우리가 마귀의 낚시 바늘에 걸리는 것은 바로 입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범죄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대로 말을 적게 하시기 바랍니다.
마귀에 낚이지 않기 위하여 헛소문이라든지 자신도 확실히 모르는 풍설은, 아예 입에 담지도 말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다른 사람뿐 아니라,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죽이는 말 대신에 살리는 말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3) 믿음의 말을 하라
셋째로 우리는 불신의 말보다 믿음의 말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특징입니다.
고린도후서 4장 13절을 보면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말은 따로국밥이 아닙니다. 믿으면 믿음대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가, 아니면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입술에서 나오는 말을 보면 그 사람의 믿음 상태를 어느 정도까지는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합니다. “가로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마8:7) 백부장의 간청을 들은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8:13) 무엇을 교훈하고 있습니까? 믿음의 고백이 기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고백이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는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수년 전, 한 책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건국대의 류태영교수님이 쓴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라는 책입니다. 그분은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가정환경이나 배경 등에 도전하여 결국에는 자신의 꿈을 이뤘습니다.그 분은 구두닦이를 하고, 신문배달을 하고, 각종 행상, 등을 하면서 야간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예수님을 믿으며 항상 외웠던 한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3절 말씀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 분은 이 말씀을 외우며 돈도 없고 빽도 없었지만, 유학에 대한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이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며 13년 동안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유학을 가기 위해 고민하다가 도서관에서 자료를 확인하여, 무작정 <프레데릭 9세 국왕.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겉봉투에 주소를 쓰고 편지를 보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편지를 보낸 지 40일 만에 답장이 왔고, 또 얼마 후에는 왕복 비행기 표까지 보내와서 결국에는 덴마크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덴마크를 거쳐 이스라엘로 유학을 가서 공부한 후에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를 받은 후, 한국으로 돌아와 박정희 전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실 새마을 담당관으로 발탁되어, 우리나라 농촌발전을 위해 헌신했다는 것입니다. 13년 동안의 믿음의 고백이 찢어지게 가난한 구두닦이 청년으로 하여금 대학교수가 되게 한 원동력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말이 우리의 미래를 새롭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우리와 우리 가정과 우리 공동체를 살릴 수도 있고, 우리를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러므로 부정적인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기를 바랍니다. 죽이는 말 대신에 살리는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불신앙의 말을 삼가고 믿음의 말을 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말씀을 다같이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