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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사역의 세가지 법칙
성경본문 : 느헤미야 3: 1-7
1. 때에 대제사장 엘리아십이 그 형제 제사장들과 함께 일어나 양문을 건축하여 성별하고 문짝을 달고 또 성벽을 건축하여 함메아 망대에서부터 하나넬 망대까지 성별하였고
2. 그 다음은 여리고 사람들이 건축하였고 또 그 다음은 이므리의 아들 삭굴이 건축하였으며
3. 어문은 하스나아의 자손들이 건축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4. 그 다음은 학고스의 손자 우리아의 아들 므레못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므세사벨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였고 그 다음은 바아나의 아들 사독이 중수하였고
5. 그 다음은 드고아 사람들이 중수하였으나 그 귀족들은 그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아니하였으며
6. 옛 문은 바세아의 아들 요야다와 브소드야의 아들 므술람이 중수하여 그 들보를 얹고 문짝을 달고 자물쇠와 빗장을 갖추었고
7. 그 다음은 기브온 사람 믈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이 강 서편 총독의 관할에 속한 기브온 사람들과 미스바 사람들로 더불어 중수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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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레토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백 년 전 이탈리아인 경제학자 빌프레도 파레토(Vilfredo Pareto, 1848-1923) 가 처음 발견한 법칙으로, 오늘날에는 ‘80대 20’ 이라는 책으로 출판되기도 했습니다. 빌 프레도 파레토는 19세기 영국의 부와 소득의 유형을 연구하던 중에 소수의 국민이 대부분의 소득을 벌어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즉 인구의 20%가 전체부의 8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도 경제와 사회에 매우 중요한 일반법칙으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리면, 우리교회에 많은 성도들이 있지만 성도 중 20%만이 능동적으로 움직이고, 여러 조직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의 힘만이 동안교회를 움직이는 가용 힘으로서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다른 조직체나 혹은 개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쓰고 있는 힘의 20% 외의 나머지는 낭비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파레토 법칙과 관련하여, 리처드 코치라는 사업가가 자신이 옥스퍼드 대학을 다닐 때에 한 권의 책의 가치를 20% 정도의 페이지에서, 그리고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통독하는 시간의 20%이내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리에 착안한 리처드 코치는 세계적인 호텔경영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고, 1980년대 세계에서 가장 성공했던 비즈니스 전략회사인 ‘엘이케이 파트너십(The LEK Partnership)’의 창업주가 되었습니다.
리처드 코치는 버려지는 80%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하여, 개인과 기업이 활성화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개인 뿐 아니라 교회와 국가도 20%만 쓰고 80%를 그냥 버리고 있다면, 얼마나 많은 낭비입니까? 만일 나머지 80%를 다 사용할 수 있다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일들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도 새로워질 것입니다.
계속해서 몇 주간 묵상하고 있는 느헤미야를 생각해보면, 여러 사람이 시도했다가 실패했고 현실적으로 봤을 때 불가능한 일이었던 예루살렘 성의 재건축은 20%의 힘만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가지고 있던 모든 힘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함께 참여하여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람들은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많은 인원에, 예산과 조직의 낭비 없이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파레토의 법칙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느헤미야는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정이 매우 안 좋습니다. 개인도 경제와 정치도 너무 어려워 이제는 우리 힘으로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혼율이 30%가 넘어가면 사회 자정능력을 상실한다고 했는데, 훌쩍 뛰어넘은 지가 오래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나라와 가정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내 삶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내 자녀의 문제요, 우리 미래가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 이 땅을 통해 우리 조상들을 축복하셨고, 여전히 축복하실 통로로 삼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 앞에 너무나 무기력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전에, 느헤미야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했던 원리를 배워보지 않겠습니까?
그럴 수만 있다면 개인의 삶 속에서도, 교회 속에서도, 국가 속에서도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을 쌓을 수 있었던 원리는
첫째, 동기부여의 원칙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이 건축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백성들이 자기 문제로 받아들여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일이 좋고 필요하다고 해서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않습니다. 이해관계가 얽혀있지 않고, 자기 생존과 연관이 없으면 그리고 자기 일이라고 생각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참여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이 성전을 짓는 일도 아니고 특별한 일도 아닙니다. 그저 성을 쌓는 일입니다. 성을 쌓음으로 인해서 이익을 보는 사람 손해를 보는 사람 등, 이에 따라 얽힌 이해관계가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느헤미야는 모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했다는 것입니다.
1장 10절에서 왜 이 일을 하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께서 일찍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의 종이요 주의 백성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습니다.
2장 3절 “열조의 묘실 있는 성읍”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축복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허락하셨기에 어렵고 힘들지라도 민족의 미래를 펼쳐나갈 땅이라 믿고 있는 느헤미야의 믿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장 17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예루살렘 성을 이제 중건합시다. 중건하여 다시 수치를 받지 맙시다.’ 한마디로 성을 중건하는 일은 너와 나의 일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헌신할 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될 때 움직입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너와 나의 일 일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라면 선택된 자녀답게 사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3장에는 여러 지역과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도 ‘드보아 사람’이 나옵니다. 드보아 사람은 예루살렘 남쪽으로 16㎞ 떨어진 해발 850m에 사는 고지대 마을 사람들입니다.
또 기브온 사람 몰라댜와 메로놋 사람 야돈은 행정적으로 볼 때에 유다의 예루살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지역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은 성을 중건하는 일이 바로 하나님의 일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정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아내와 남편을 섬기고, 이웃을 돌아보는 것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로 받아들인다면 포기하고 싶다 해서 쉽게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또 어떻습니까?
이 나라를 포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주신 땅,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계획과 섭리가 머물러 있는 곳이기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내 일이 아니라고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나 당회원이 알아서 하겠거니 생각하며 그냥 예배만 드리고 가면 안 됩니다. 교회에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오면서 기도하시는 것, 때로 화장실 청소하고 먼지를 닦아내는 것, 교사와 성가대 또 구역장으로 섬기는 모든 일이 특정인만 하는 교회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대할 때 임하는 자세는 달라집니다.
골로새서 3장 17절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3장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옆 사람과 인사할 때도 ‘주께 하듯’ 하라고 하십니다. 이제껏 어떻게 인사하셨습니까? ‘웬 이상한 사람이 옆에 앉아있지?’가 아니라, 주님이 옆에 앉아 계십니다. 주님께 인사한다면 반갑고 따뜻하게 할 것입니다. 바로 우리 자세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내게 맡기신 일이라 믿고 나갈 때 임하는 우리 자세는 자연히 달라집니다. 이런 확신 없이 일 할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성경은 주의 일이 따로 있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주어진 일이 주의 일이라 믿고 주님과 교제하는 가운데 인도하심 따라 진행해 나간다면 그것이 곧 주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또한 느헤미야가 동기부여를 얼마나 잘했던지 1절을 보면,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양문에서 어문에 이르는 성을 수축하도록 했는데, 양문이라고 하는 것은 두 개의 문이라는 뜻이 아니라 ‘ship gate’, 즉 양들이 지나다니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물을 가지고 바로 양문을 통과해서 들어갔습니다.
그렇다면 양문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제사장들이었습니다. 양문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제사장들에게 건축을 맡겼으니 얼마나 정성껏 했을까요? ‘하나님, 이 성을 세웁니다. 백성들이 드리는 많은 제물들 중에 흠 없고 죄 없는 재물이 드려지게 하시고, 재물이 지나갈 때 우리 죄가 사하고, 우리 민족의 죄가 사하여져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백성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뜨거운 마음으로 성을 건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각자가 맡은 일을 보면 모두 ‘내 일’로 여길 수 있도록 잘 분담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집 앞에 있는 성을 쌓도록 하여 성을 쌓는 모두가 ‘내 일, 하나님 일’로 여길 수 있도록 동기부여가 잘 되었습니다.
찬송가 371장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 이 있습니다.
이 찬송은 1907년도 남궁억 선생이 작시한 곡입니다. 당시에 한일 합방을 앞두고 사람들 마음속에는 좌절감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한반도를 삼키기 위해서 우리 민족에게 이 땅은 버려진 땅,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으며 따라서 일본이 돕지 않으면 안 될 땅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 불어넣었습니다. 이 때 남궁억 선생이 곡을 지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입니다. 이 동산에 할 일이 많습니다. 그래서 사방의 일꾼을 부르고 있습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 주신 동산입니다. 지금은 절망하고 포기할 때가 아니라 봄 돌아와서 밭 갈 때니 사방의 일꾼이 필요할 때입니다.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은 하나님이 주신 동산입니다. 지금은 곡식이 익어 거둘 때니 사방에 일꾼이 필요한 때입니다. 우리 모두 이 주님의 부름 앞에 대답합시다. 그리고 일하러 갑시다. 하나님 주신 이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말입니다.’
한반도는 버려진 땅, 절망적인 땅이라 생각하던 젊은이들이 이 가사에 감동을 받고 농촌으로, 만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이런 정신이 3.1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남궁억 선생의 찬송시는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아름다운 3.1 운동으로 이어졌고,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러 조국을 찾기 위한 동기를 부여하고도 남았습니다. 일본은 1937년 3월에 이 노래를 중단시켜 버립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한민족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놔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과 이 민족을 통해서 하고 싶으신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할 목적과 목표가 있습니다.
이제는 낙심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왜 스스로 포기하십니까?
하나님도 가능성 없다 절망하지 않는 이 민족을, 왜 우리 스스로 포기하여 떠나기도 하고 가망이 없다고도 합니까?
오늘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있다면 도리어 주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다시 일어서야 하는 이유를 느헤미야의 사건을 통해서 찾게 됩니다.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었던
두번째 원리는 연합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15가지 이상의 직업이 나옵니다.
그리고 75명의 사람 이름이 등장합니다. 사람마다 고유하게 맡은 일이 있고 각각의 일이 다른 일과 모자이크처럼 연결되어 완성되게 되어 있습니다.
전체성벽을 42구역으로 나누고, 10개의 문과 4개의 망들을 세워 그곳에 필요한 사람들을 배치했습니다.
3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다음은(next)’인데, 원어로 ‘웨알’이라고 합니다. ‘웨알’이란 계획과 분담과 책임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구역마다 사람들은 맡은 구역에서 할 일을 분담했고, 맡은 일에 대해서는 책임지도록 했던 것입니다. 75명의 이름이 다 등장하고 있다는 것은 한 사람도 소외됨 없이, 연합해서 일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혼자 힘으로는 완성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다양한 인물과 직업 중에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이 있는데, 제사장들은 예배가 우선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성 쌓는 일에 동참했습니다.
할해야의 아들 웃시엘은 직업은 금장색이었습니다.
금을 세공해서 장신구를 만드는 일을 합니다. 직업상 손이 무척 귀하기에 함부로 험한 일을 하여 손을 쓰면 안 되었음에도 성 쌓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이건 내 전공이 아닙니다. 내가 언제 건축하는 일을 했습니까? 금세공하는 일을 더 잘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냐는 향품 장사들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성을 쌓든 말든 큰 영향이 없는데도 함께 참여했습니다.
후르의 아들 르바야는 또 어떻습니까?
르바야는 예루살렘 지방의 절반을 다스리는 높은 관리였는데 평민들과 이방인들과 함께 성 쌓는 일에 참여합니다.
할로세스의 아들 살롬과 그 딸들도 등장합니다.
유대지방에 있어서 여성의 지위는 정말 보잘 것 없어 이렇게 언급되는 일이 드물 뿐 아니라, 남성들과 달리 고되고 험한 일을 잘 하지 못했지만 함께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이유를 달지 않았고, 자기 입장과 생각을 주장하지 않았으며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이라 믿으며 연합했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내무반 책임자로 있을 때에, 본부에서 불조심 포스터를 그리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마침 내무반에 홍대 미대 다니다가 온 신병이 있어서 그리라 했더니 “못합니다.”합니다.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때만 해도 좀 살벌할 때인데, 아주 당당하게 대답하는 것을 보고 간 큰 신병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니까 자기는 서양화 전공이기 때문에 포스터를 그리고 나면 그림 감각이 다 죽는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군대에서 이런 이유가 먹힙니까? 고참들이 야단치려다가 뭘 모르는 신병이려니 싶어 그냥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나중에는 벌 받더라도 다같이 하지 말자고 분위기가 흘러가는 것을 보고 한 사람의 영향력이 참 크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참 신병, 별로 영향력 없을 것 같던 사람이 전체 연합에 영향을 주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46년의 역사가 있는 오래된 교회입니다.
오래된 교인은 교회에 무엇이 부족한지 잘 모르지만 새로 온 분들은 금세 압니다. 본당 앞쪽에 달려있는 스피커가 얼마나 위압적입니까? 스피커 바꾸자는 메일을 여러 통 받았습니다. 또 안내하는 분들 표정이 너무 굳어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사로 서 있는데 새로 오신 분들은 그것이 보입니다. 시골에서 장작에 불을 피울 때, 밑불이 안 살아나면 밑에 불만 자꾸 넣는 것이 아니라 장작으로 넣습니다. 그러면 밑에 불도 같이 살아납니다. 우리가 전통과 옛것만 자랑하고 우리끼리 이대로 살 생각만 한다면 같이 썩어 버릴 것입니다. 새 신자, 새 생각이 들어올 때 옛 전통도 새롭게 거듭나 옛 삶의 틀이 깨져 하나님께 헌신되고, 변화되고, 개혁되고,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회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낡고 오랜 것은 다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루어지기까지 많은 성도들의 눈물과 희생 그리고 땀이 있습니다. 남들은 모르는 사연들이 여기저기 있습니다. 이것이 함께 존중될 때 연합의 역사,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가정의 경우를 한번 살펴볼까요?
요즘은 너무 자녀 중심이라 문제지만, 자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면 한밤중에라도 난리가 납니다.
우리 자녀들이 집에서 하는 일이 있습니까?
볼일 봐놓고 뒤처리 해 달라 하고, 밥 혼자 못 먹으니 먹여 달라 하고, 가는데 마다 어질러 놓습니다.
남편 아내 사이에 대화라도 할라치면 아이가 방해 놓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당당한지 모릅니다.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러나 정말 가치가 없습니까?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을 줍니까?
그렇다고 연세 많으신 어른들의 당당한 삶의 자리가 없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저는 상담을 공부했기 때문에 압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자란 자녀들은 정신 질환이 없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인해 얻는 인생의 풍성함이 있기 때문에 그런 아이들은 훨씬 부드럽고 이해심도 많으며 자존감도 높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가족 구성원이 제각각 해야 할 역할이 있습니다.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자녀는 자녀대로 부모님이 고생하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아내는 아내대로 알뜰하게 살고, 남편은 남편대로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 되어 연합할 때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 나타나게 됩니다.
전도서 4장 9절부터 12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연합의 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어 한 목적을 이루어 가는 조화입니다.
일본사람을 밀가루라 한다면, 한국 사람은 모래입니다.
밀가루는 물만 부으면 딱딱하게 뭉쳐집니다.
일본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는 약한데 뭉쳐지면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모래는 물을 부으면 흩어집니다.
반드시 시멘트 같은 것, 이해관계라든지, 학연이나 지연 등을 집어넣어야 단단해지지 그냥은 뭉쳐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이 가장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연합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러분 모두의 힘이 다 필요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 자리에 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하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할 때에 본래 가진 것 이상의 놀라운 결과를 얻게 될 것이고, 버려지던 나머지 80퍼센트의 힘도 얻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가정과 교회, 그리고 우리나라에 이 연합의 원리가 가장 필요한 때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느헤미야가 현실을 극복하고 불가능해 보였던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수 있었던
셋째 원리는 격려와 칭찬의 원리입니다.
느헤미야 3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행한 일들이 나옵니다.
문짝, 문고리 달아 놓은 것까지 기록이 다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까지 다 적어 놓았습니다.
찰스 스윈돌 목사님은 느헤미야 3장을 강해할 때 의미가 없다고 하여 3장을 빼고 강해하셨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수많은 사람들을 왜 여기에 나열했을까 생각해보면 의미 없는 부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고한 사람들을 격려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특히 20절, 바룩을 가리킬 때에는 ‘힘써’라는 단어를 넣고 있습니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서도 힘써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격려와 칭찬을 한 것은 아닙니다.
5절 말씀에 드고아의 귀족들은 주의 역사에 담부치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이 일을 완성하게 하는 것은 바로 격려와 칭찬입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은 받은 은혜가 은혜 되게 하고, 그리스도인들이 말씀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중요한 원리는 서로 격려하고 피차 권면하는 것이라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도록 하는 것은 서로 격려하고 끊임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원리를 몸소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역사를 기록한 사도행전 서두에 바나바를 소개하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나바가 했던 역할은 사람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사울까지 격려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이 바나바, ‘위로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었을 때, 바나바는 바울이 이 사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고향 다소에 내려가 바울을 데리고 왔고 지도자 위치에 세웁니다.
사도행전 처음에는 ‘바나바와 바울’ 해서 바나바가 먼저 나오다가, ‘바울과 바나바’, ‘바나바와 바울’로 순서 없이 나오다가, 뒤로 갈수록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나중에 바나바는 소리 없이 사라집니다.
사라져야 될 때를 알고, 소리 없이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던 바나바는 놀라운 사람입니다. 자기가 세워야 될 사람을 세워 격려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빠져야 될 때가 언제인지를 알고 조용히 사라질 줄 알았던 바나바가 그리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러기가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가는 것은 멋있어 보이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류학자들이 밝혀냈습니다. 갈매기 모양으로 날아갈 때 71%를 더 날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맨 앞에 날아가는 새가 뒤 따라오는 새가 받을 공기 저항을 줄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러기가 날면서 우는 이유는 뒤에 따라가는 새가 앞서 가는 새를 격려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한참 날다가 힘들면 앞서 가던 새와 자리를 바꿔 먼 여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
\한 마리가 이상이라도 생기면, 다른 두 마리가 같이 내려와 있다가 다른 떼에 흡수되어 다시 날아갑니다. 격려하고 위로할 때 본래 역량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얼마나 격려하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자녀를 격려하는 아버지입니까?
또 어머니들은 어떻습니까?
격려와 사랑이 없는 가정이 얼마나 살벌할까요?
못할 때 마다 징계하고, 잘 할 때만 상주는 딱딱하고 두려운 가정에서 격려와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은 자라서도 열등감 속에서 삽니다.
비판과 분석을 10% 한다면 90%는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비효율적인 언어와 삶의 모습을 갖고 살아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주님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주님 격려를 받고도 남을 격려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리석고 완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스터 홀랜드 오퍼스(Mr. Holland oppu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석하면 ‘홀랜드 선생님의 교향곡’입니다. 글렌 홀랜드의 실화를 영화화 한 것입니다. 홀랜드는 브로드웨이에 진출하여 유명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이름을 날리고 싶은 꿈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했고 가족들을 부양해야했기에, 조그마한 시골 학교에서 잠시 위기만을 넘기려고 교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만 30년간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재정문제가 생겨서 학교를 떠나야만 되게 되었습니다. 지난 온 날들을 돌아보니 꿈은 다 깨져 버렸습니다. 브로드웨이에 가서 훌륭한 교향곡을 작곡하여 심포니를 연주해서 유명해지고자 하는 꿈도 이루지 못했고,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청각 장애인이었고, 남은 것이라고는 주름진 이마와 초라한 퇴임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학교를 걸어 나가는데, 강당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강당으로 뛰어가 봅니다. 가서 보니 자신이 가르쳤던 제자들이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홀랜드가 감격해 있을 때, 무대 휘장이 걷히며 제자들로 구성된 오케스트라가 있었고 홀랜드에게 지휘봉이 넘겨졌습니다.
선생님이 연주를 인도합니다. 맨 앞자리에는 클라리넷을 연주하지 못해서 좌절했던 학생이 앉아있습니다. 이 학생은 홀랜드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으로 클라리넷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직 주지사로서 있을 만큼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연주가 끝나고 난 다음에 주지사인 제자는 인사말을 합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저와 많은 학생들에게 영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혹시 후회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부와 명예를 안겨줄 심포니 작곡을 하셨지요. 하지만 선생님은 부자도 아니고, 이곳에서만 유명할 뿐입니다. 따라서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홀랜드 선생님은 부와 명예를 초월한 성공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선생님께 영향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훌륭하게 성장했습니다. 우리가 선생님의 심포니입니다. 우리가 선생님 작품의 음표이자 음악인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은 선생님의 작품입니다. 오늘 나는 선생님이 작곡하신 심포니의 음표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있는 제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 음표입니다. 아름다운 인생의 음을 연주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격려와 사랑을 받고 하나님 앞에서 새 인생을 살아가는, ‘저 사람은 오늘 내 삶의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시대에 여러분 가정의 자녀와 아내와 남편, 여러분이 섬기고 사랑했던 교회 식구, 직장과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여러분을 말해줄 수 있는 작품은 어떤 것입니까?
여러분이 살아오신 삶을 말해주는 여러분의 음표와 음악과 같은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나아가서 우리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아름다운 음악의 음표와 같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불협화음과 분쟁과 다툼 그리고 고통과 괴로움의 상징으로 남아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포기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줄 압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가정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자신의 삶을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는 분, 이제는 직장, 사업, 미래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한 분들이 혹시 계십니까?
포기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동의를 구하십시오.
여러분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성공하기를 원하십니다.
일이 이뤄지도록 도와주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흩어진 여러 가능성을 다시 찾아보십시오.
80%가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느헤미야의 원리를 기억하고 적용하는 것도 훨씬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그 나라를 위하여 내 가정과 교회 그리고 민족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멋진 삶, 가치 있는 삶을 함께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 일에 헌신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응답하시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