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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69, 이단사이비의 불가사의 (Ⅱ) - 환상
지옥 같은 노원 교회 대기발령 생활 3개월이 다 되어 가는 1982년 12월30일에 협회에서 가평 교회와 화성 교회(오산교회) 중 선택하여 목회를 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가평이나 화성(오산)은 교인이 몇 명에 불과하여 생활을 할 수 없고, 이재남 한국 협회장이 약속을 어겨서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억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노원 교구 예배 수준과 재정 수준으로 수평 이동이라도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선명의 잔악상을 보면서도 그때는 문선명의 뜻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1982년 1월 4일 밤 꿈에 문선명이 나타났습니다. 전국 통일교 목회자들에게 강의를 하던 중에 산봉우리 5개를 보여주면서 이 산을 개발할 사람이 없느냐고 했는데 한 사람도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문선명이 제 앞에 오더니 "박준철! 네가 이 산 5개를 개발하라" 고 명령했습니다. "네가 임자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삽과 낫을 주었습니다. 꿈을 깬 후 생각을 해보니 산봉우리 5개는 화성(오산)이었습니다.
사명감이 충만한 목회자가 없어서 화성교회 (오산교회)가 발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까지 목회자들이 화성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경기 교구에서도 제일 어려운 교회였습니다. 전국 통일교에서도 제일 가난한 교회 중 한 곳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사람이 없으면 이 못난 사람을 문선명 재림주 참부모가 또 한번 꿈에 현몽을 하셨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화성교회로 가라는 명령 인줄 알고 순종하는 맘으로 죽더라도 오산교회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오산교회로 부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82년 1월 17일날 배신과 불신 속에서 그동안 닦아놓은 기반을 송두리째 남겨두고 어린 3남매와 처를 데리고 오산교회로 왔습니다. 그리고 1982년 2월 17일에 취임식을 했습니다. 교회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가는 목사마다 잠시 있다가 떠나버렸습니다. 오죽하면 문선명은 집회를 하면서 오산교회는 사단역사를 하는 곳이니 이름을 진산 교회로 바꿔야 한다고 할 정도엿습니다. 전임목사는 제직당시 승공 연합의 돈 1천2백 만원 때문에 오산교회 교인들과 승공 연합 회원들이 큰 시험에 들었습니다.
전임목사는 오산교회 사택에서 살지 않고 수원에서 살면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 있던 목사도 교인이 얼마 되지 않고 헌금도 몇 만원에 불과하여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유치원을 개설하여 그 수익금을 생활비로 썼는데, 이를 알게된 전도 대원 몇 사람이 협회에 올라가 목사를 나쁜 사람으로 매도하여 문책 인사이동을 시켜 버렸습니다. 피골이 상접한 통일교 목사들이 문선명을 재림주, 참 부모를 믿고 순종하며 목숨을 바친 죄밖에 더 있겠습니까? 저 자신도 불쌍하지만, 너무나도 처절하게 불쌍한 사람들이 통일교 목사들 입니다.
저는 경기 화성교회로 가면서 각오를 단단히 했습니다. 사단 마귀가 역사를 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정성을 들여 빠른 시일 내에 발전을 시키겠다고 굳은 각오로 다짐했습니다. 저는 취임하는 날부터 100일 기도, 릴레이 조식 금식 기도, 수요예배 개설, 금요 속회예배 개설, 주일학교 개설,중고풍부 예배 개설, 전도, 심방 등을 중심으로 교회의 발전에 온 몸과 마음을 다 쏟았습니다. 노원교구 본부에 있을 때 자전거도 없이 걸어 다니면서 심방과 전도를 하며 봉사 했었습니다. 나중에 오인천 영화 출연료로 받은 2만원으로 중고 자전거 1대를 사서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심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속회예배와 전도를 하니 신바람이 났습니다. 노원구 상계1 · 2 · 3 · 4동, 도봉구, 중계동, 하계동, 공릉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심방 전도 활동을 했듯이 화성교회에서도 자전거를 활용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화성 관내 17개 읍 면 동에 심방 전도를 다녔습니다. 이렇게 자전거를 계속 타니 새 팬티라도 한 달이 못 가서 엉덩이 부분에 구멍이 나고 헤어져 매달 팬티를 구입해야 했습니다. 여름에는 양쪽 엉덩이에 물집이 생기고 터져서 바지까지 버리는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에 문선명 통일 교주를 위해 매일 밤 12시까지 심방 전도를 했습니다. 새벽 I~2시가 되는 때도 허다하게 많았습니다.
문선명에게 목숨을 걸고 한국 최고의 실적과 공적을 쌓는 한국 통일 교회의 푯대가 되고자 몸부림을 치며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문선명은 집회 때마다 "나는 호랑이니 너희들은 고양이 새끼가 되지 말고 호랑이 새끼가 되어라" 라고 강조했습니다. 그 말이 그 당시에는 꿀같이 달게 느껴졌습니다. 죽더라도 뜻을 위해 죽고 문선명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굳은 각오와 결의를 매일 기도로써 다짐했습니다. 저는 너무나 많은 활동을 하여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고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며 의식 불명이 될 정도로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새로운 교인을 전도할 때나 교인을 심방 할 때면 저는 굶더라도 과자나 음료수를 사 가지고 심방을 했습니다.
화성교회에 교회 총무로 세웠던 추진복 집사가 있었는데 신앙을 바르게 하지 못하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 이었습니다. 그는 두 번째 합동결혼식을 하고 갓난 아들 하나를 낳아서 기르고 있었습니다. 튀김집을 운영했는데 저는 매일 그 집에 가서 축복 기도를 해주며 그 날 심방할 집에 가지고 갈 튀김을 샀습니다. 그 날 심방을 하는 집이 10집이면 10봉지를 사서 자전거에 싣고 다니며 전도하고 심방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다른 가게에서 사지 않고 그 집에 가서 튀김을 사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사랑과 정성을 알아주기는 커녕 추진복 집사는 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추진복 집사 집에 가서 조용히 신앙적인 교육을 시키려고 했는데 첫마디가 욕 이었습니다. 왜 욕을 하냐고 했더니, 자기 가게 식탁을 저를 향해서 밀어 버렸습니다. 그순간 오른손 약지가 식탁에 끼어 큰통증을 느꼇습니다. 어처구니가 없고 당황하여 교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손가락이 크게 부어 올랐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뼈를 수술했어야 했는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20일 동안을 방치했습니다. 손가락은 벌겋게 부어 올라 움직일 수 없었고 뼈까지 아팠습니다. 손가락 겉에만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습니다. 20일이 가도 손가락의 부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이후에 조금씩 부기가 빠지고 괜찮아 졌지만 그날 다친 손가락 하나가 휘어진 채로 굳어 버렸습니다. 즉시 병원에 가서 X-ray 촬영을 하고 손가락을 고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이 손가락을 제대로 펼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추집사는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었습니다. 저는 추집사가 성격 때문에 그런 것으로 알고 용서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추집사는 제가 그 날 다쳐서 일생동안 손가락이 구부러진 채로 사는 것을 지금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은 후 추집사는 집에서 닭튀김을 할때 나오는 창자를 그날 그날 모아서 개를 기르는 이건숙 집사에게 주었습니다. 이건숙 집사는 개35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한 마리에 300만원도 넘는 좋은 개도 있었습니다.
하루는 추집사가 쥐를 잡는다고 닭 창자에 쥐약을 버무려서 여러 군데 놓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무의식 중에 쥐약으로 놓았던 닭 창자를 새벽에 일어나 모아가지고 쥐약을 안 넣은 창자와 같은 그릇에 담았습니다. 그것을 몰랐던 이건숙 집사는 아침에 창자를 가져가 35마리 개에게 끓여서 먹였습니다. 그 창자를 먹었던 개들이 한 마리 한 마리 쓰러져 갔습니다. 이건숙 집사가 추진복 집사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냐고 물었을 때 닭 창자에 쥐를 잡으려고 쥐약을 섞었다고 했습니다. 순간의 실수로 이건숙 집사의 고급 개 35마리가 죽었습니다. 그 일로 추집사는 몇 십 만원을 이건숙 집사에게 보상금으로 물어주고 튀김집을 정리하고 서울로 이사 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100일 기도를 마치면 2차 100일 기도, 3차 100일 기도로 숨돌릴 여유도 없이 교인들과 합심하여 기도드린 결과 1982년도에 교회가 급성장을 했고 전도 우수 교회로 협회장 상을 받았습니다. 1983년 4월과 9월에는 협회 우수 교회상을 분기별로 수상을 했습니다. 1985년도에도 전국 최우수 협회장상을 교회 우수상과 전도상 까지도 저는 받았습니다. 화성교회에서도 많은 이적기사가 있었습니다. 이준영 씨는 독자였는데 딸만 3명을 낳고 몇 년 동안 아기가 없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한다고 이준영씨에게 말했습니다. 얼마후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나 주위 사람들은 태몽이 또 딸이라고 아기를 지우려고 했습니다.
10달 동안 많은 시험과 시련이 있었지만 저의 말을 믿고 이준영씨는 아기를 지우지 않았습니다. 10달이 되어도 아기가 출생하지 못했는데 11개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건강한 아들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교인들 전체 앞에서 이준영 씨가 아들을 낳는다고 했는데 11개월이 지난 후 그 가정에 행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몇 대 독자인 강호길 씨도 아들을 낳은 후 통일교에 나오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기독교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는데 악령이 3,000명이나 들어와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정신병원으로 갔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안수 기도도 받았지만 악령이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결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한 것 같았습니다.
저는 모든 친척과 가족들이 오산 통일교로 나오는 조건으로 악령을 물리쳐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그 동안에도 제가 악령을 많이 물리쳤기 때문에 그 가족들과 이종수 씨를 불러다 놓고 찬송가를 부르며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이종수씨는 교회 강대상 앞에서 기도를 받은 후 쓰러졌습니다. 한참후 이종수 씨가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오랜 악령의 시달림과 고통이 끝이 났습니다. 회사에도 복직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독실한 통일교 교인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통일교에 모두 나오고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이종수 씨는 점점 더 헌신과 봉사로 충성을 다하여 화성 교회 재정 담당 총무까지 수행을 잘 했습니다. 문흥기라는 사람은 수원 빈센트 병원에서도 포기한 병자였습니다. 이제는 살 수 없다고 집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제가 문흥기 씨를 보았을 때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고 몸에서 악취가 심하게 났습니다. 의식이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상태로 임종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이미 부인과 자녀들은 교회를 다니고 있었고 문흥기씨만 교회에 안 나오는 상태여서 의식이 돌아 왔을 때 교회에 나을 것을 간절히 권했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저는 기도를 했습니다. 문흥기 씨는 매일 고통으로 아우성 치던 사람이었지만 기도를 받은 그 날 밤에는 편안히 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부터 기적같이 기력을 회복하여 걸어 다닐 수 있었고 일주일 후 건강을 회복하여 예배도 참석을 했습니다. 처음 2달은 열심히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나 석 달째는 되는 주일부터는 일요일마다 막노동일을 나가거나, 교회를 오지 안기 위해 술을 마시고 취해 있었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으로 문흥기 씨에게 말을 했지만 말을 듣지 않고 예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문흥기 씨는 석달 후 금요일 막노동을 잘 다녀오고 토요일 새벽에 이세상을 떠났습니다. 교회에서 적은 정성을 모아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외에도 제가 가는 개척 교회마다 이적, 기사, 신유 은사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저는 그 당시 문선명 재림주를 위해 목숨을 걸고 가는 곳마다 스스로 희생 제물이 되어 전심전력을 다했습니다. 그 결과 화성교회도 전국 최하위에서 최상위 교회로 부흥,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네이버/검색-박준철著 빼앗긴30년 잃어버린3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