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면적인 약속
사람들의 생긴 모습이 천태만상이듯이 살아가는 방식도 역시 헤아릴 수 없이 각양각색이다. 인간의 관계 또한 정말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우리는 약속 속에서, 그것도 수없이 많은 약속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이미 약속이다.
탄생은 자연적인 약속이다. 탄생은 이미 인간을 이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자연적으로 구속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부모와 형제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그것 역시 자연적인 약
속이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아는 이름을 가져야 하고 출생신고가 되어야 하고 어린이로 성장하면 학교에 가야 하고, 소년으로 그리고 청년으로 성장하면서 온갖 약속의 홍수를 헤엄치면서 살아가야 하는데, 이러한 모든 것은 사회적인 약속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자연적인 약속과 사회적인 약속은 겉으로 너무나도 분명하게 나타나므로 그것은 외면적인 약속이고, 이에 반하여 이간의 자발적인 결단에 따라 성립하는 약속은 내면적인 약속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우선 수없이 많은 사회적 약속 속에서 숨가쁘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오늘도 학교나 직장에 때맞추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한 달 후에는 동료나 상사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
내일은 은행에서 빌린 돈을 갚아야 한다.
어디 이와 같은 예들뿐이랴. 명절이다, 성묘다, 생일이다, 기업이다…. 사는 방식 자체가 약속일진대 어떻게 일일이 모든 형태의 약속을 열거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들은 현재 우리의 사회를 좌우하고 있는 몇 가지 약속을 분석함으로써 보다 밝은 미래를 향한 길을 마련할 수 있다고 믿는다.
긴밀한 가족관계, 어른에 대한 공경 그리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것 등은 건전하고 긍정적인 약속의 형태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약속들이 너무나도 우리의 주변을 장식하고 있다.
부정적인 약속은 겉치레뿐인 인간관계를 가져오고 결국에 가서는 폐쇄된 사회를 만들기 마련이다. 사회적인 약속이 극단적으로 굳어지게 되면 그것은 병든 사회 그리고 신음하는 삶을 초래한다.
돈을 벌기 위하여, 오직 돈만을 벌기 위하여 일하는 삶, 필요할 때 쓰지 않고 절약만 하는 삶.
권력과 명예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 자식과 가정마저 돌보지 않고 오로지 권력과 명예만을 위하여 질주하는 삶.
자신의 쾌락만을 위하여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삶, 과거와 미래를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순간의 쾌락만을 추구하는 삶.
위에서 말한 삶들은 외면적, 형식적, 사회적인 약속 속에서 괴물과도 같은 거대한 겉치레를 지니지만 드디어는 인간을 질식시키고 만다. 외면적인 약속이 난무하면 인간의 평등과 자유는 숨 쉴 곳이 없다. 겉치레만 화려한 곳에는 약동하는 생명이 자리할 곳이 없다. 남들도 회사의 돈을 조금 빼내는데 나도 조금 빼낸다고 죄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남들도 청탁하는데 나도 청탁한들 어떻겠는가, 남들도 가정교사를 몰래 두는데 나도 둔다고 무슨 이 있겠는가, 남들도 돈을 쓰고 대학엘 들어가는데 나도 그렇게 한다고 나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러한 약속들은 말하자면 인간의 내면을 망각한, 흘러가는 무의미한 타율적인 삶을 장식한다. 타율에만 의존하여서 한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편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삶은 자유가 없다. 배부른 돼지는 살기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살겠다는 말이 있다. 살찐 바보보다는, 가난하지만 생각하는 인간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외면적인 약속에만 질질 끌려갈 때 삶은 비참해지고, 타락해 버린다. 형식적인 약속이 사회를 좌우하게 되면 삶은 부패해 버리고 인간성은 마비된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이 있다. 외면적인 약속, 겉치레에 지나지 않는 혀로만 하는 형식적인 약속이 난무하는 사회는 종말에 가서는 썩어버리고 만다. 정치란 사회가 그리고 문화나 종교가 또는 경제가 개방되어 발전할 줄 모르고, 형식에 얽매어 꼼짝하지 못하고 고여 있기만 하다면, 정치도 사회도 경제도 종교도 그리고 인간도 세계도 모두 썩어버리고 만다. 형식적, 외면적인 약속만이 춤추는 사회는 썩은 냄새가 난다. 썩은 냄새는 인간의 영혼마저 부패시켜 버린다.
무엇보다도, 청년이 외면적인 약속에만 매달릴 때 청년은 이미 청춘을 상실한다. 청춘을 상실한 청년에게는 미래가 없다. 미래가 없는 청년은 허무를 배회하는 한 마리 짐승에 불과하다. 짐승은 단지 이기심과 지배욕에 물들어 자연적 약속, 사회적 약속을 더욱더 확고하게 함으로써 인간을 쇠사슬에 묶어 신음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