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9일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예배
성경: 갈1:6-10절
제목: 주 안에서 거하라(진영섭 목사)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수십 수백 가지의 길이 있습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방법 또한 우리가 셀 수 없는 수천수만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를 빗대어 구원에 이르는 방법 또한 어떤 특정한 한 가지가 아니라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인생길로 가든 그 길에서 돌이키거나 낙오하지만 않는다면 동일한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을 종교 다원주의자라고 합니다.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단지 구원에 이르는 길이 다를 뿐 구원이라는 목적지는 같다는 것입니다.
WCC는 1961년 제3차 뉴델리 총회 때부터 타 종교를 ‘다른 신앙’으로 표현합니다. ‘다른 신앙’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며 성령님께서 역사하신다고 인정합니다. 혹,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림이 없이도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힐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지 않아도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을 방법이 수십 수백 가지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 형벌을 받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렇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성경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4장12절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분명하게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럴진대 바울의 전도로 세워진 갈라디아 교회에서 다른 복음을 얘기합니다.
구원이 주님이 아닌 다른 방법을 더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얘기에 훅 넘어가 버렸습니다.
6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자신이 전한 복음을 너무나 쉽고도 빠르게 포기하고 다른 복음을 찾아갔는가에 대한 바울의 깊은 탄식과 책망이 담겨있습니다.
구약성경에도 갈라디아 교회와 같이 속히 떠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32장8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430년간 애굽에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셨건만, 그들은 속히 떠나 버렸습니다. 금송아지를 예배합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이고는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사사기 2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였던 여호수아가 수명을 다하여 하나님 품으로 갑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기 시작합니다. 여호와를 떠나 바알들을 섬기는 악을 행합니다.
이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사사기 2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그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며 그들에게 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순종하던 그들의 조상들이 행하던 길에서 속히 치우쳐 떠나서 그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였더라.”
이스라엘 백성은 속히 치우쳐 떠나고 맙니다. 사사들에게도 순종하지 않습니다. 다른 신들을 따라가 음행하고 절합니다. 이렇게 어리석을 행동을 했던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겹쳐 보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회심하여 주님을 믿었지만 이후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들은 돌아서고 맙니다. 바울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전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 한국교회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자 전국에서 들불처럼 일어나 성장하고 또 성장했습니다. 선교사의 복음 전파로 이렇게 빠르게 성장한 교회는 전 세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물질을 탐합니다. 교회 내에서 정치를 합니다. 탐나는 것을 취하려고 갖은 수단을 부립니다.
그 불길이 꺼져서 한국교회는 다 타고 남은 재처럼 사그라지고 있습니다. 그 많던 성도들이 다 어디로 갔습니까? 교회마다 다음 세대는 찾아 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는 어르신들만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빠르게 몰락한 현상도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상히 여기노라.”
사람은 어떤 비정상적인 일을 보면 이처럼 이상하게 여깁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쫓는 모습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주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율법주의자들이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접근합니다.
구원을 얻는데 믿음만으로는 불가능하고 믿음에다가 율법도 준수해야 하고 할례를 해야만 가능해...
갈라디아 성도들은 혼란 가운데 빠집니다.
7절입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거짓 사도들이 전한 복음으로 인하여 혼란에 빠진 갈라이다 성도들은 그들로 인하여 복음이 변질되기에 이릅니다. 바울은 단호하게 질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복음은 없다.”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시며 그분 외에 구원을 주실 분이 없음을 명확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산의 정상에 오르는 방법은 분명 여러 가지가 존재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구원에 이르는 방법은 다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 이외에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가르침이나 사상도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그 이외의 것을 전하면 이렇게 된다고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8-9절입니다.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자신이 전한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사람이든지 심지어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모두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거짓 복음은 성도들을 율법의 굴레로 다시 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들의 영혼을 주님으로부터 다시금 멀어 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처럼 과격한 표현으로 저주가 내리기를 선언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에 관해서는 양보가 없습니다. 고린도전서를 보면 이방인의 문화, 음식에 대해서는 양보했습니다. 물론 ‘덕이 되지 않는 것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뭐 이런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복음에 관해서 만큼은 양보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의 생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복음을 내가 사랑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전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아 마땅했습니다. 바울이 보기에는 그랬습니다.
회심하여 주님의 복음을 믿은 성도는 마땅히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복음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라면은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 복음에 머물러 있는 것이 당연합니다.
1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말은 사람들의 지지와 환심을 사려고 복음을 왜곡시킬 수 없다는 바울의 강한 의지를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종’이라는 단어는 나의 옛 자아를 죽이고 오직 주님만 남아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나의 삶인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위해,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지지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지 않습니다.
내 자아가 완전히 죽어서 나의 판단이나 나의 의사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 복음의 유익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주 안에 거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회심한 후에 지금까지 어느 때도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사람을 기쁘게 듣기 좋은 말을 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면, 구약의 율법에 익숙했던 유대인들의 귀에 거슬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에 의하여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좋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었기에 그들에게 과감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갖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매를 수없이 맞았습니다. 감옥에 착고를 차고 갇히기도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 자신이 복음의 진리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좋게 하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복음의 진리를 믿었기에 그 복음을 위한 모든 고난을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선한 목자 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우리의 기준입니다. 세상의 기준에 맞춰서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기를 소망하십니까? 주위 사람들에게 관심받고 인정받는데 초점을 맞추고 살아가십니까? 그것을 위해 속히 하나님을 떠나 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으십니까? 아니면 바알들과 음행하며 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에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지는 않습니까?
고린도후서 2장 1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우리가 복음의 진리에 따라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보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사람을 좋게 하려고 복음의 진리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빼려고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그의 복음을 믿는 자가 아닐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복음을 오직 믿고 그 복음을 우리의 삶에 기초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교회에서 섬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에 따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주님을 위해서 다른 성도들을 종으로 섬김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거짓으로 갈라디아 성도들이 주님의 은혜의 복음을 떠나도록 유혹하였던 거짓 선생들과 같이 오늘날에도 우리 주위에는 복음의 진리를 혼잡하게 하는 수많은 거짓 선생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로 믿고, 그 복음 진리에 따라 오직 주 하나님만을 기쁘게 하시는 삶을 위하여 주 안에서 항상 거하시기 바랍니다.
찬송 314장을 부르신 후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