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란 때로 바람처럼 불쑥 떠나는 즉흥극이 되기도 하고, 오래 묵혀둔 약속을 찾아가는 설레는 의식이 되기도 한다. 이번 1박 2일의 여정은 후자였다. 동행한 바이크 손대장이 무려 2년 전부터 마음에 품어왔던 길, 경북 울진의 답운재와 불영계곡, 그리고 동해안 강축도로를 향해 달리는 여정이었다. 경북 울진은 예로부터 '등 허리를 긁어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라 불리던 오지 중의 오지다. 가닿기 힘든 만큼 깊고 푸른 심산유곡을 품고 있으리라. 설레는 호기심을 안고 네 명의 친구가 밴 차량에 몸을 실었다.
새벽 6시, 원거리 거주지부터 차례로 탑승하고 붉게 물들어가는 가을의 품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미지의 길은 언제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여주휴게소에서 든든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답운재로 향하는 길목에서 먼저 봉화 닭실마을을 들렸다. 안동 권씨 충재 권벌 선생의 고택을 중심으로 고풍스러운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500년 역사의 마을. 산자락에 아늑하게 안긴 마을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금계포란지국)'이라는 명당답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한 폭의 진경산수화처럼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권벌 선생이 학문을 닦던 청암정의 고즈넉한 풍경을 눈에 담은 뒤, 솔봉 숯불갈비집에서 향긋한 돼지숯불구이로 풍성한 오찬을 즐겼다. 그리고 마침내 라이딩의 시발점인 옥방밸리휴게소로 향했다. 휴게소에서 답운재 정상까지는 약 4km의 가파른 오르막이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업힐 구간이지만, 길가에 곱게 옷을 갈아입은 단풍나무들이 지친 라이더들을 반겨주었다. 붉고 노란 단풍잎들의 유혹에 이끌려 자전거를 멈추고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땀방울 뒤에 마주한 답운재 정상, 진조산 자락, 늘 안개가 자욱해 '구름을 밟고 넘는 고개'라는 그 이름처럼,
백두대간 낙동정맥의 웅장한 기운이 발아래로 굽이쳤다. 답운재를 넘어서자 선물같은 내리막길이 펼쳐졌다.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신나게 내달리니 36번 국도와 광천의 맑은 물줄기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 물줄기를 따라 펼쳐진 곳이 바로 '한국의 그랜드 캐니언'이라는 불리는 불영계곡이다. 깎아지른 절벽과 기암괴석, 깊은 협곡 사이로 흐르는 옥빛 물줄기는 과연 '울진의 소금강'이라 불릴 만한 비경이었다. 쌍전 교차로를 지나 통고산 자연휴양림 입구에 다다랐다. 옛 실질국의 안일왕이 피난길에 재가 너무 높아 통곡하며 넘었다는 애달픈 전설이 깃든 산이다.
광천교에서 후곡천을 따라 올라가니 붉고 곱게 뻗은 금강송(황장목) 군락지가 위용을 드러냈다. 여의도 면적의 일곱 배에 달하는 소광리 금강송 숲은 역사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숨이 멎을 듯한 감동을 선사했다. 벼랑에서 약초를 캐다 떨어진 오라비를 사흘 밤낮 통곡하며 그리워하다 바위가 되었다는 오누이 바위(사랑바위)에 얽힌 애틋한 전설을 지나, 우리는 마침내 신라의 천년 고찰 불영사로 들어섰다. 불영사(佛影寺)는 계곡만큼이나 아늑하고 단아했다. 보물로 가득한 도량에서 감사하게도 전인구의 안내로 불영사 주지이신 일운 스님과 차담을 나누는 귀한 인연을 얻었다.
따뜻한 찻잔을 사이에 두고 스님께서는 인과응보(因果應報)와 겸손, 그리고 자비에 대해 조용히 일러주셨다. 우주의 모든 존재는 태어나 머물고, 깨어지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가르침이 찻잔 속 잔잔한 물결처럼 마음에 번졌다. 스님께서는 손수 집필한 책 한 권과 다시마 식초, 뽕잎차와 단주를 선물해 주셨고 전인구 불자 역시 정성스례 보자기에 싸 온 음식으로 답례를 표했다. 따스한 온기가 오간 시간이었다. 대웅전 앞에서 스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기고 돌아 나오는 길, 불영지(연못)에 서서 산 위를 바라보았다.
산꼭대기의 부처바위가 잔잔한 연못 위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었다. '부처님의 그림자가 비치는 절'이라는 그 이름의 유래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순간, 묘한 경외감이 온몸을 감쌌다. 불영사를 나서며 선유정과 불영정이라는 두 정자에서 내려다본 계곡의 풍광은 이번 여정의 백미였다. 깊은 협곡과 소나무,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경치는 눈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였다. 언제 다시 마주할지 모를 그 비경을 오래도록 가슴에 쓸어담았다. 행곡리에 이르러 만난 왕피천은 광천과 합류하여 동해로 흐르고 있었다.
왕피천과 매화천이 만나는 길목에는 지하 금강이라는 불리는 성류굴이 숨어있었고, 우리는 물길을 따라 신포리에 위치한 망양정에 올랐다. 망양정에 서자 끝없이 펼쳐진 동해의 만경창파와 망양해변의 백사장, 그리고 바다와 몸을 섞는 왕피천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조선의 숙종 임금이 왜 이곳을 '관광제일루'라 극찬했는지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파도소리를 이정표 삼아 오늘의 감격스러웠던 라이딩을 마무리했다. 산포별장민박에 짐을 풀고, 성유식당에서 얼큰한 해물탕으로 고단한 몸을 달랬다.
하루 동안 흘린 땀방울과 여정의 피로가 시원한 국물 한 숟가락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바람도 쉬어가는 첩첩산중, 세파에 찌든 먼지를 말끔히 씻어내 주는 치유의 땅 울진,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를, 벗삼아 가을의 정취로 가득했던 불영계곡에서 난 잠시나마 세상 시름을 다 잊은 무심도인(無心道人)이 된 듯했다. 자연의 깊은 심장 속에서 보낸 이 경이로운 시간은 언제까지고 지워지지 않을 그리움으로 마음 한구석에 머물 것이다. 밤이 깊어가고, 전인구가 나지막이 틀어놓은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방 안을 채운다.
10월의 마지막 밤을 노래히는 서정적인 선율을 자장가 삼아, 가슴 벅찬 하루의 기억을 품고 깊은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