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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82. [역경의 열매] 전용대 (1-30) 유년기 병약했던 삶 지탱해 온 힘은 셋째 누나의 기도
무슨 일 있어도 예배 꼭 참석하는 누나
늘 몸이 약했던 날 위해 치료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에 이끌려 교회 나가게 돼
12남매 중 10번째로 태어난 전용대 목사에게 고달팠던 유년은 자신을 주의 종으로 써 달라는 누나의 기도가 가슴에 새겨지게 한 시절이자 찬양하는 종으로 살게 한 동력이었다.
아이 둘만 낳아도 ‘다자녀 가정’이란 이름으로 복지 혜택을 받는 시대다. 하지만 내가 한 가정의 ‘아이’로 태어나던 시절은 달랐다. 5남 7녀. 축구팀을 꾸리고도 1명이 남는 12남매 가정. 그중 나는 열 번째 번호표를 달고 태어났다.
사실 우리 집은 12남매가 아니라 15남매 가정이었다. 부모님은 내 위로 세 명의 자녀를 먼저 하늘나라로 보냈다. 나 역시 태어나자마자 죽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만큼 건강한 아이가 아니었다. 부모님이 생후 7년 만에 비로소 내 이름을 호적에 올려야 했던 이유다.
많은 형제 중에서도 내 마음을 울리는 사람이 있다. 바로 셋째 누나다. 내 신앙고백의 첫 줄은 늘 셋째 누나로 시작한다. 어렸을 적엔 지금처럼 교회 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마을 사람 대부분이 불교나 유교 집안이었고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특히 동네 유지였던 우리 집은 유교가 뿌리 깊게 내린 집안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는 교회 나가는 것을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그런 우리 집에서 가장 먼저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셋째 누나다. 나는 주일마다 누나를 따라 교회에 나갔다. 그런데 교회에 다녀온 날이면 우리는 아버지께 심하게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심지어 한 번은 아버지가 누나의 긴 머리를 잘라 집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누나는 예배를 빼먹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어머니가 매번 아버지께 혼나는 딸이 안타까워 신발을 감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누나는 집에서 교회까지 먼 길을 맨발로 걸어갔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 되면 온 동네가 칠흑같이 어두워지는 동네여서 빛이라고는 촛불과 호롱불이 전부였다. 누나는 매일 밤 그 호롱불 아래서 성경을 읽었다. 아버지 몰래 목소리를 낮춰 내게 읊조려주던 누나의 성경책 읽는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어린 나에겐 누나가 믿는 하나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하나님이 있는 데도 누나는 교회에 나간다는 이유로 매번 혼이 나고 나는 늘 아픈 걸까.’ 그런데도 내가 누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매일같이 나를 치료해 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는 누나를 봤기 때문이다. 누나는 울면서 기도했다.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고, 눈먼 자의 눈도 뜨게 하신 하나님. 제발 우리 용대를 치료해 주세요. 그리고 주의 종으로 써 주세요.”
교회 출석엔 교회에서 주는 선물도 한몫했다. 당시 교회에서는 매주 빠지지 않고 출석하거나 전도를 많이 하면 성탄절이나 연말에 시상식을 해서 학용품을 주곤 했다. 흰 종이 구하는 게 어렵던 시절이었으니 공책과 연필 세트는 최고의 상품이었다. 하지만 이런 교회 생활도 중학생이 되면서 끝났다.
내 건강 상태는 더 안 좋아졌고 툭하면 쓰러졌다. 부모님은 결국 나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처음엔 의사 선생님 말씀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상태는 더 나빠졌다. 몸은 더 아프고 다리는 심하게 절었다. 결국 나는 하나님을 부인하며 교회를 떠나버렸다.
약력=1960년 출생, 대표 찬양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낮엔 해처럼’ ‘똑바로 보고 싶어요’ ‘주여 이 죄인이’, 한국복음성가협회 전 회장, 한국가정사역연구소 이사, 넓은들교회 협동목사, 한국 밀알심장재단 홍보대사
* [역경의 열매] 전용대 (1) 유년기 병약했던 삶 지탱해 온 힘은 셋째 누나의 기도
* [역경의 열매] 전용대 (2) 인문계고 진학 물거품… 방황 시작하며 음악에 관심
* [역경의 열매] 전용대 (3) 연탄가스와 사투 벌이다 출근 첫날부터 지각
* [역경의 열매] 전용대 (4) 꿈처럼 펼쳐진 인기가수의 길 걷다 '소아마비' 날벼락
* [역경의 열매] 전용대 (5) 장애 향한 차가운 시선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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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
***[역경의 열매] 전용대 (2) 인문계고 진학 물거품… 방황 시작하며 음악에 관심
의대 진학 꿈 품고 인문계 가고 싶어
상업 고등학교 진학 시험 일부러 망쳐
가수의 길 꿈꾸다 아버지 반대로 포기
전용대목사가 자신의 신앙적 푯대가 돼 준 셋째 누나(왼쪽 두 번째), 여동생, 넷째 누나와 함께 6년 전 조카 결혼식에서 촬영한 기념 사진.
의사가 되고 싶었다. 의술을 배워 내 병을 고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 생각은 달랐다. 상업계 고등학교에 가서 은행에 취직하면 평생 안정적일 것으로 생각하셨던 것 같다. 게다가 그 시절 초등학교 때 나는 이미 주산 자격증까지 따놓은 상태였다. 이렇게 가다간 내가 원하는 길로 진학하긴 틀려 보였다.
나름의 꾀를 내보기로 했다. 상업계 고등학교 진학 시험 날, 일부러 시험을 엉망으로 봤다. 그렇게 탈락하면 부모님이 인문계 고등학교에 보내주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부모님은 내가 몸도 약하니 차라리 기술학교에 가서 전자 기술을 배워 대리점을 차리라고 하셨고 그렇게 인문계 고교 진학은 물거품이 됐다.
기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의 방황은 시작됐다. 하루는 광주 시내를 돌아다니다 눈에 띄는 현수막을 발견했다. ‘신인가수 선발대회.’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려는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는 문구에 시선이 꽂혔다. ‘1등-컬러TV.’ 동네에 흑백 TV가 있는 집도 한두 집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흑백도 아니고 컬러TV를 준다니. 욕심과 승부욕이 동시에 발동했다.
오로지 컬러TV를 얻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참가 신청을 했고 온 힘을 다해 노래를 불렀다. 그러곤 떨리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순간 귀가 먹먹해지도록 아득한 한 마디가 대회장에 울려 퍼졌다. “1등 전용대!” 어안이 벙벙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가수의 길로 접어드는 것일까 싶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안 형제들이 음악에 소질은 있었던 것 같다. 큰형은 색소폰 연주자, 작은 형은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방방곡곡을 다녔다. 하지만 아버지라는 벽은 크고 높았다. 두 형님이 음악에 빠져 사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시던 아버지는 몸도 불편한 나까지 음악에 관심을 보이자 펄쩍 뛰셨다.
결국 아버지의 반대로 가수의 꿈은 접어야 했다. 그 후 서울의 한 전자 회사에 취업하게 됐고 짐을 챙겨 터미널로 갔다. 서울행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용대야!” 셋째 누나였다. “누나가 여긴 웬일이야?” 당시 누나는 전남 나주 영산포에 살고 있었다. 함께 살 때 누나는 내게 성경책을 읽어주고 늘 내가 교회에 갈 수 있게 독려해주며 내 신앙을 붙들어줬다. 하지만 누나와 떨어져 지내는 사이 내 신앙도 떨어져 나가고 말았다.
“너 서울에 취업해 올라간다면서. 기숙사 생활을 하더라도 주일은 외출이 가능할 테니 꼭 교회에 가서 신앙생활을 해야 돼. 그게 네가 살 길이야.” 순간 짜증이 났다. 오랜만에 만난 동생한테 한다는 소리가 교회에 가라니. 그게 내 살길이라니. 나는 성경책을 쥐여 주려는 누나를 밀쳐냈고 그런 누나는 기도라도 같이하자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곤 터미널이 울리도록 소리 내어 기도했다.
“아이, 정말 왜 이래! 창피해서 못 살겠네. 나는 알아서 잘 살 테니까 누나나 예수 잘 믿어!” 그렇게 한바탕 소동을 벌이고서야 버스에 올랐다. 누나는 내가 자리에 앉아 짐을 정리하고 버스가 출발하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순간 내가 너무했나 싶었다. 서울 기숙사에 도착해 짐을 풀었다. 그런데 가방 속에 내 것이 아닌 물건이 들어 있었다. 누나의 손때 묻은 성경책이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3) 연탄가스와 사투 벌이다 출근 첫날부터 지각
걱정·설렘으로 잠든 기숙사에서 첫날
연탄가스로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로 짐작되는
정체 모를 힘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고된 회사 생활 가운데 만난 도움의 손길들은 훗날 전용대(뒷줄 가운데) 목사의 찬양 사역에도 영향을 줬다. 사진은 1989년 8월 서울 구로공단에서 열린 찬양 집회 모습.
전자 회사 기숙사에서의 첫날 밤. 나는 새로 시작하는 타향살이와 처음 겪게 될 직장 생활에 대한 걱정 반, 설렘 반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한참 곤하게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용대야, 일어나라.” 눈을 떠 보니 아무도 없었다. ‘내가 너무 긴장을 했나?’ 다시 잠을 청하려 하는데 같은 소리가 점점 크게 들렸다. 그렇지 않아도 피곤한데 짜증이 치밀었다. 대체 누구냐고 소리를 치려고 몸을 일으켰다. 순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덜컥 겁이 났다. 도움을 청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두통에 어지럼증까지 밀려왔다.
‘아! 연탄가스구나.’ 어렴풋하게 어릴 적 온 식구가 연탄가스에 중독됐던 사건이 떠올랐다. 아무리 몸을 움직여 보려 해도 옴짝달싹하지 않았다. ‘영락없이 죽었구나. 기껏 서울 올라와 출근 한번 못 해보고 이렇게 죽는구나.’
그렇게 살 희망을 포기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가 나를 번쩍 들어 올렸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 나를 깨우고 죽음에서 끌어올리신 게 아닐까 짐작만 할 뿐이다. 정체 모를 힘에 이끌려 밖으로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고 나서야 조금씩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게 한바탕 사투를 벌이고 나니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부랴부랴 회사로 향했지만 결국 첫날부터 지각하고 말았다.
“야! 너 뭐 하는 놈이야! 어디 첫날부터 지각을 해!” 작업반장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찌를 듯 날아들었다. 나름의 상황을 설명하고 죄송한 마음도 표했지만 작업반장에겐 궁색한 변명으로 들렸는지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나를 세워둔 채 작업반장의 질의가 표적 수사처럼 이어졌다.
“납땜질은 할 줄 알아?” “네. 학교에서 틈틈이 해봤습니다.” “누가 학교에서 연습 삼아 한 걸 물어보는 줄 알아! 경력 하나 없는 게 그 정도 실력 갖고 어디서 해봤다는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이제 막 기술학교를 졸업하고 취업한 신입사원에게 무슨 경험이 얼마나 있었겠나. 그래도 학교에서 착실히 배워둬서 이야기한 것뿐인데 작업반장은 뭐가 그리 맘에 안 들었는지 내가 하는 말마다 윽박을 질러댔다. 그렇게 ‘첫 출근 지각생’에 ‘개념 무(無) 신입’이란 꼬리표까지 단 채 내 위치가 정해졌다. 전문 기술과는 상관없는 생산 라인 끝에서 물건 포장을 맡게 됐다.
차츰 회사생활에 적응해 가며 생산 라인과 검사 파트를 맡아 열심히 했지만 온전하지 못한 다리 때문에 항상 눈총을 받아야 했다. 여전히 나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작업반장은 틈만 나면 비아냥거리기 일쑤였다.
매일 밤 눈을 감을 때 ‘내일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싶었다. 그런 나를 다독여주던 한 분이 계셨다. 사무실에서 근무하시는 선배 부장님이었다. “용대야, 잘하고 있어. 너는 이쪽 일에 타고난 기술력을 갖고 있다. 지금은 좀 힘들겠지만 끝까지 참고 이겨 낸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거야. 힘내라.” 그 몇 마디가 천국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몸도 좋지 않은 데다 정신적 스트레스까지 받다 보니 점점 무리가 오기 시작했다. 머리는 깨질 듯 아팠고 코피가 한번 쏟아지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아 휴지를 갈아 끼우며 코를 막고 일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4) 꿈처럼 펼쳐진 인기가수의 길 걷다 ‘소아마비’ 날벼락
퇴사 후 가장 잘할 수 있는 일 찾다가
실력 인정받았던 노래 부르기로 결정
낮엔 공부하고 밤엔 야간업소서 노래
갑자기 어릴 때부터 겪었던 통증이…
전용대 목사가 1981년 서울 강남의 한 스튜디오에서 앨범 녹음을 하고 있다.
‘아.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 몸에 꽉 조이는 옷을 입어 피가 통하지 않고 숨도 쉬기 힘든 기분이 이어지면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결론을 내야 했다. 내가 힘겨워할 때마다 따뜻하게 격려해주셨던 부장님께 인사할 겨를도 없이 회사를 나왔다.
회사 기숙사는 더이상 내 보금자리가 돼줄 수 없었고 검정고시도 치러야 했다. ‘나는 과연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그때 문득 노래가 떠올랐다. 현실의 벽 앞에서 잠시 잊고 살았지만 노래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길로 한 사람에게 전화했다.
광주 신인가수 선발대회에서 1등하고 컬러 TV를 받던 시절부터 내 노래 실력을 인정해주셨던 노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 막상 회사를 그만두고 나니 갈 곳이 없더라고요.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하는데 연고지도 없고. 그러다 선생님 생각이 났어요. 노래도 부르고 싶고요.”
선생님은 기억에서 잊힐 만 할 때 연락을 해온 철부지 제자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셨다. “용대야. 연락 잘했다. 넌 정말 노래에 소질이 있어. 계속 노래하자.” 회사에서 동네북처럼 모진 핍박만 당하던 나를 따뜻하게 녹여준 난로 같은 말씀이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노랫길이 펼쳐졌다. 낮에는 학원에 다니며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밤에는 야간 업소에서 가요를 부르는 생활이 이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무대는 꽤 인기 좋은 코너가 됐다. 당시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이 고향을 다녀온다는 건 녹록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내가 고향에 대한 향수와 부모님에 대한 노래를 불렀으니 당시 손님들은 눈물을 훔치며 앙코르를 연호했고 술을 더 주문했다. 야간 업소 사장님 입장에선 내가 매상을 올려주는 최고 가수였던 셈이다.
이름이 점점 알려지고 인기가 무르익어 갈 때쯤이었다. 어느 날 새벽, 몸이 너무 아파 견딜 수가 없어 잠에서 깼다. 어릴 때부터 겪어왔던 통증이었지만 이번엔 그 고통이 몇 배로 심하게 느껴졌다. 그러기를 몇 차례, 결국 사달이 났다. 밤무대에서 첫 번째 곡을 마치고 두 번째 곡을 부르려는데 갑자기 눈앞이 희미해졌다. 눈을 떠 보니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업소 관계자 몇 명이 보였다.
“그렇게 아프면 이야기를 하고 하루 쉬지. 노래를 듣던 손님들도 다 놀라게 하고. 이게 뭔가!” “죄송합니다.” 어릴 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다고 말하면 자칫 일을 못하게 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거듭 죄송하다는 얘길 반복할 따름이었다.
계속 병원에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단 퇴원을 하고 하루 쉰 뒤 나는 다시 노래하러 업소에 나갔다. 그러곤 죽을 힘을 다해 견뎌내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그날 새벽, 또다시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찾아왔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엉엉 울음이 나올 정도였다. 내 울음소리를 들은 자취방 주인이 무슨 일이냐며 방으로 들어오더니 깜짝 놀라 황급히 나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 X레이 사진 보이죠? 오른쪽과 달리 왼쪽 다리는 통으로 된 뼈가 없고 마치 가루가 붙어 있는 거로 보입니다. 소아마비입니다. 너무 많이 진행돼서 앞으로는 정상적으로 걷기가 힘들 것 같습니다.”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5) 장애 향한 차가운 시선에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하루아침 장애인 된 내 모습 보며 비관
극단적 시도했다 자취방 주인 의해 구조
마음 다잡았지만 높은 현실의 벽에 좌절
1988년 발매된 전용대 목사의 앨범 ‘장애자를 위한 노래 모음’. 그는 장애인을 향한 사회적 편견으로 힘겨운 시절을 보낸 지난날을 기억하며 이 앨범에 위로와 응원을 담았다.
‘죽을 때까지 온전하게 걸을 수 없다니….’ 너무 기가 막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몇 날 며칠을 다리를 끌어안고 울었다. ‘그냥 이대로 죽을까. 이렇게 살아서 뭐하겠어.’ 목발을 짚고 집 밖으로 나왔다. 이전과 다른 내 모습을 대하는 바깥세상의 시선은 차가웠다. 얼마 전까지는 호흡하듯 탔던 버스가 나를 밀쳐내듯 떠났다. 하는 수 없이 택시를 타려는데 성질을 내는 택시 기사의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절름발이잖아! 재수 없게.”
지나가는 사람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고는 수군거렸다. “저 사람 봐. 못 걷는 사람인가 봐.” “절름발이다. 돌아서 가자.” 식당을 가도 온통 날 괄시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식당 주인들은 내가 밥을 다 먹고 나가면 내 뒤통수를 향해 “하루 종일 부정 탈까 겁나네”라고 막말을 쏟아붓고는 소금을 뿌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밤무대 최고 인기가수였는데 하루아침에 세상 모두가 등을 돌리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평생 목발을 짚고는 도저히 세상을 제대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자취방에서 수면제를 입에 털어 넣었다. 그렇게 잠이 든 날 아침, 주인은 내 방문 앞을 지나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고 한다. 문 앞에 분명 신발이 있는데 늦은 아침까지 인기척이 없는 것을 이상히 여겼던 것이다. 몇 번 나를 불렀는데 대답이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 봤다고 한다.
그렇게 세 번 자살 시도를 했는데 그때마다 신기하게 자취방 주인은 내가 쓰러져 있던 걸 알아내 스러져가던 목숨을 살려냈다. 그래서였을까. ‘그래도 한번 살아볼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취직했다.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매번 일을 시작하고 며칠이 못 되어 쫓겨나기 일쑤였다. 고용주는 내가 실수하면 설명해 주거나 가르쳐 주기보다는 그날로 바로 해고했다.
그 흔한 공사판 일용직도 할 수 없었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제대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쓸 고용주는 없었다. 이런 생활이 지속되자 자연스레 먹고사는 게 힘들어졌다. 어느 날엔 분명 거리에서 눈을 마주친 친구가 나를 피하는 모습을 보고야 말았다. 주변 지인들이 점점 나를 피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배는 곯아도 그건 참기 어려웠다.
결국 나는 네 번째 자살 기도를 위해 수면제를 모으고 보다 치밀하게 계획도 세웠다. 매번 자취방 주인에게 발견돼 실패했으니 이번엔 먼 곳으로 가기로 했다. 강릉행 고속버스표를 끊고 멍하니 주저앉아 버스를 기다리는데 갑자기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열두 남매가 부모님 사랑을 받으며 한집에서 함께 행복하게 살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선 반장에 전교 회장도 했고 교회에선 전도상도 받았으며 신인가수 선발대회 1등에 화려한 조명 아래 밤무대 인기가수 시절도 보냈던 나였다. 그 기억이 가족에 다다른 순간 감정이 복받쳐 올랐다. 눈물이 쏟아지며 꺼이꺼이 울었다. 버스터미널의 모든 시선이 주저앉아 엉엉 우는 청년에게 쏠렸다.
“용대야.” 정신없이 울다 그 목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익숙한 얼굴이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6) “하나님은 언제나 네 편” 목사님의 따뜻한 위로에 눈물
진심 어린 걱정을 해주는 고향 선배와
유년 시절 교회 전도사였던 목사님 만나
서울 올라와 2년여간 겪은 일들 하소연
전용대 목사가 1990년대 초 한 천막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그에게 개척 교회는 자신의 삶과 신앙에 전환점이 된 공간이었다.
고속버스터미널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있던 내 이름을 부르던 사람. 그 사람은 바로 과거 다니던 전자회사에서 가장 친했던 동료였다. “너 용대 맞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 거야? 무슨 일이야?” 나는 힘겨운 몸을 겨우 일으키며 눈물을 닦았다. 그러곤 친구와 그간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이건 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허탈하면서도 헛웃음이 지어졌다.
그렇게 네 번째 자살 기도도 실패로 끝났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나를 지키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생을 포기하려 했던 내 나약한 행동은 번번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 후로 다시는 자살을 생각하지 않았다.
또 다른 어느 날 거리에서 우연히 고향 선배를 만났다. 선배는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에 앞서 내 모습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목발을 짚기 전의 모습만 봐 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형은 어떻게 지내세요? 어디 가시는 길이세요?” “나야 뭐. 나는 신학교를 다니고 있어.” “신학교요?”
선배는 버스를 타고 가다 창밖으로 세상 고달픔을 혼자 다 짊어진 듯한 남자가 보이기에 유심히 봤는데 그게 나였다는 얘길 전했다. 나를 만나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한 정거장을 돌아왔다는 얘기도 함께. “내가 사는 집 주소와 전화번호다. 꼭 한 번 찾아와라. 꼭!”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솔직히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그보다 사람이 더 고팠다. 며칠 전 만났던 고향 선배가 떠올랐다. 그동안 나를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다 외면하고 피했는데 직접 주소까지 적어주며 찾아오라고 했던 고마운 선배였다. ‘정말 한 번 찾아가 볼까.’
주소가 적힌 종이를 들고 물어물어 선배 집을 찾아갔다. 선배가 적어 준 주소는 일반 가정집이 아니었다. 한 건물 3층에 자리 잡은 교회였다. 옛날 건물들이 통상 그렇듯 계단 하나의 높이가 무척이나 높았다. 걸음걸이가 성치 않은 나로서는 숨이 턱턱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젖먹던 힘까지 끌어모아 3층을 오른 뒤 선배 이름을 불렀다.
“윤호 형. 계세요?” “누구세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안에서 나온 사람은 유년 시절 교회학교에 다닐 때 나를 가르쳐 주셨던 전도사님이었다. “윤관 전도사님?” “이게 누구야, 용대 아니냐. 그러잖아도 조윤호 전도사에게 너 만났다는 얘길 들었다. 정말 잘 왔다.”
전도사님은 예전과 다름없이 날 반갑게 맞아주셨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해 윤 목사님으로 사역을 하고 계신다. 목사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윤호 형이 있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앉은 공간은 날 휘감고 있던 일상과 달리 너무도 따뜻했다. 그곳에서 서울에 올라와 겪은 2년여간 이야기를 소설 한 편을 읽어내려가듯 나눴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신 것 같다고 하소연했다. “절 사랑하신다면 이러면 안 되는 거죠. 왜 이렇게 아프고 힘들게 내버려 두고 병신으로 만드냔 말이에요. 건강하게 해주셔야지!”
내 얘기를 듣고 말을 잇지 못한 목사님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용대야.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그런데 하나님은 결코 너를 버리지 않으셔. 언제나 너의 편에 계시지.” 지나온 시간이 필름처럼 스쳐 갔다. 순간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차올랐다. 소리도 못 내고 우는 나를 목사님은 꼭 껴안아 주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7) 고열과 통증에 몰려 무작정 기도 “하나님, 살려주세요”
교회에서 지내며 마음은 안정되었지만
건강 상태 나빠져 통증으로 밤 지새워
안수기도 받으러 오산리기도원 방문
전용대 목사가 1989년 여름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내 신앙을 붙들어 주신 윤관 목사님과 함께 개척 교회에서 지내면서 마음의 큰 위로를 얻었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내 건강 상태였다. 나는 목사님의 가족과 같은 방에서 지낼 수 없어 예배당 한쪽에 칸막이를 놓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사택과 예배당이 아주 가까워 밤마다 나의 끙끙 앓는 소리가 목사님께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럴 때마다 목사님은 일어나 내 곁으로 와 주셨다. 그러곤 싫은 내색 한번 없이 나를 꼭 안고 기도해 주셨다.
한번은 목사님이 내게 오산리기도원에 가서 최자실 목사님께 안수기도를 받고 오는 게 좋겠다고 하셨다. 안수기도가 뭔지도 몰랐다. 그저 목사님이 적어 준 편지를 들고 오산리로 향했다. 편지를 확인한 기도원 관계자는 나를 한쪽 방으로 안내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아주머니 한 분이 들어와서는 불쑥 말을 건넸다. “네가 전용대야?” “네.” “지금부터 금식기도를 해라.” “그게 뭔데요? 윤관 목사님이 최자실 목사님을 만나서 안수기도를 받고 오라고 했는데요?” “밥도 먹지 않고 기도하는 거야. 일단 기도굴로 가라.” “어, 그런데…”
내가 뭔가 이야기하려던 참이었는데 아주머니는 그저 미소만 짓더니 방에서 나가 버렸다. 도대체 이해가 안 됐다. 정작 만나야 할 최자실 목사란 사람은 만나지도 못하고 안수기도는커녕 조용한 곳에 가서 죽으라는 말만 들었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죽을 때 죽더라도 안수기도인가 뭔가 한번 좀 받게 해주지. 내가 장애인이라고 기도고 못 받게 하는 거야 뭐야!”
기도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려는데 차가 끊겨 버렸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까지 기도원에서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됐다. 화낼 기운도 없었다. 기도원 쪽으로 터덜터덜 올라가는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밑져봐야 본전이니 기도굴에 들어나 가보자. 죽어도 기도하다 죽었으니 천국엔 가겠지.’
지은 죄가 많아서였을까. 누군가 튀어나와 내 목을 조를 것만 같아 선뜻 기도굴 안으로 들어가질 못했다. 그렇게 애꿎은 문만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는데 갑자기 온몸에 열과 통증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래!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기도굴로 들어가 무작정 외치듯이 기도를 했다. “하나님, 살려 주세요! 하나님, 살려 주세요!” 기도가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3일을 내내 울부짖듯 기도를 하고 있었다. 여전히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새벽녘에 강렬한 빛이 눈앞에 펼쳐지더니 내 몸을 ‘탁’ 하고 쳤다. 순간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오전 10시였다. 이상했다.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고열과 통증이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 고통을 치유한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게 느껴졌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 문득 금식기도 하라고 시켰던 아주머니를 찾아가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안내자에게 도움을 요청해 아주머니를 만나러 갔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였다.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저 엄청 아팠는데 시키는 대로 금식기도라는 걸 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아주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보고 웃었다. 그때 옆에서 날 지켜보던 기도원 관계자가 내 등을 툭 쳤다. “이분이 최자실 목사님입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8) 최자실 목사 “빚 갚으려면 금요일마다 찬송가 불러라”
병이 나은 것에 대한 빚 갚기 위해서
10년간 매주 금요일마다 찬양 약속
찬양할수록 하나님 알고 싶은 고민에
윤 목사님 “신학교서 공부하라”조언
전용대 목사가 1991년 서울 종로구 100주년기념관에서 열린 가스펠 콘서트에서 찬양하고 있다.
“이 분이 최자실 목사님이라고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늘 남자 목사님만 봐 온 탓에 목사님은 다 남자만 있는 줄 알았다. 목사님에게 당돌하게 아주머니라고 불렀으니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목사님은 웃으며 물었다. “여기 오기 전엔 뭘 했나?” “저는 밤무대에서 노래했습니다. 다리를 절고부터는 노래를 하고 싶어도 못 했지만….” 목사님은 내 얘길 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병이 나은 것에 빚을 갚고 싶다고 했지? 그러면 여기서 찬송가를 불러라.” “무슨 찬송가를 어디에서 부르면 되나요?” “금요일마다 기도원에 와서 찬송가를 부르면 된다.”
조롱하는 사람들 때문에 무대에서 끌어내려지던 내게 그 말씀은 천국에서 내려온 기회 같았다. 너무 기쁜 나머지 목사님께 굉장한 약속을 내뱉고 말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찬송가를 부르겠습니다.” “그래? 분명히 10년이라고 했다. 꼭 약속 지켜야 한다.”
얼떨결에 했던 약속이었지만 나는 그 후로 10년간 매주 금요일마다 오산리기도원에서 찬양을 했다. 외국 집회에 다녀오게 되어도 금요일 전에는 돌아와 자리를 지켰다. 그 10년의 약속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것이라고는 그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부르는 노래와 하나님 앞에서 부르는 노래는 달랐다. 세상은 내 겉모습을 보며 환호했고, 그 겉모습이 보잘것없어지자 내동댕이쳤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잘것없는 절름발이의 노래를 세상 그 어떤 노래보다 기쁘게 들어 주셨다. 날마다 온 힘을 다해 찬양하고 기도하는 내 모습을 지켜보던 최자실 목사님은 내게 기도방을 하나 마련해주셨다. 덕분에 매일 하나님과 조용한 둘만의 시간을 가지며 기도하는 법도 알게 됐다.
찬양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더 궁금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윤관 목사님과 이런 고민을 나누다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용대야. 신학 공부를 한번 해보면 어떻겠니. 성경을 공부하다 보면 네가 궁금해하는 부분을 깨닫게 될 것 같구나.”
목사님 말을 듣고 나니 납득이 됐다. 나는 그길로 신학교에 갈 준비를 했고 이듬해 신학생이 됐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하나님이 더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무작정 시작한 신학생 생활은 그리 평탄치만은 않았다. 오산리기도원에서의 찬양 사역과 더불어 학교에도 나가야 했기 때문에 늘 24시간이 모자랐다.
학교 수업을 마치자마자 오산리기도원뿐 아니라 최자실 목사님을 따라 외부 집회 찬양도 자주 했다. 그러다 보니 숙소로 돌아오면 기진맥진해 바닥에 널브러지기 일쑤였다. 형편도 녹록지 않았다. 어느 날은 학교에 갈 차비가 없어 쓰레기통을 뒤져 토큰(버스표)을 줍기도 했다. 스스로를 향해 한탄했다. ‘전용대, 당장 돈을 벌어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울 판에 이렇게 찬양하면서 공부하는 게 맞냐! 정말 네가 그렇게 목을 매는 하나님이 계신 게 맞기는 한 거냐!’
2학기째를 지나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피곤함에 절어 있었는 데도 무언가에 이끌리듯 성경을 폈다. 여느 때와 달리 구절마다 가슴에 와 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태어나게 하셨고 왜 절망 속 만신창이가 되어 희망조차 없던 나를 불러 찬양하게 하셨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9) 복음성가 ‘신학도 전용대 성가곡집’ 첫 앨범 발매
가요계 작곡가로 활동하다 신학 하게 된
신학교 동문과 함께 성가곡집 앨범 제작
전용대 목사가 신학생 시절 발매한 ‘신학도 전용대 성가곡집’ 앨범.
나의 1집 찬양 앨범은 ‘탕자처럼’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전에 내 이름으로 제작된 앨범이 있었다. 정말 기쁘게 작업했던 ‘신학도 전용대 성가곡집’이라는 앨범이다. 어느 날 신학교 동문 중에 가요계에서 작곡가로 활동하다 신학을 하게 된 분에게 연락이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자리에서 찬양을 한번 불러 볼 수 있겠느냐고 제안을 하는 게 아닌가. “지금 여기서요?” 왠지 긴장도 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나는 진심을 다해 찬양했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생각에 잠기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우리 같이 앨범 작업합시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내 목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앨범을 제작한다니. 그 찬양을 많은 사람이 듣고 혹시라도 하나님을 궁금해하게 되거나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신학도 전용대 성가곡집’이었다. 당시엔 노래와 악기를 동시에 녹음하던 때였기에 음반 작업의 어려움이 지금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녹음을 마치고 나면 며칠씩 앓아누워야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음반을 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러웠다.
‘신학도 전용대 성가곡집’을 마중물 삼아 정식 1집 앨범인 ‘탕자처럼’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엔 상상하지도 못한 조력의 손길들이 숨어 있었다. 앨범의 전체적인 기획을 당시 최고 인기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던 ‘새롭게 하소서’(CBS)의 석송 PD가 맡았고 코러스와 반주를 선교 합창 단원들이 나서줬다. 지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당시 최고의 레코드사 중 하나였던 오아시스 레코드사가 제작했다.
카세트 테이프로 음악을 듣던 그 시절 우리나라 음반 시장엔 찬양 테이프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중가수 중 크리스천 가수인 윤형주 김세환 조영남, 그룹으로 활동하는 정신노래선교단과 늘노래선교단 정도가 앨범을 냈을 뿐이었다. ‘복음성가’라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 솔로 가수로서 내가 첫 찬양 테이프를 낸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대중의 인식에도 ‘복음성가를 부르는 전용대’라는 이미지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집회 현장에서도 무대 위에서 나 혼자 찬양하는 게 아니었다. 내가 찬양할 땐 찬양을 함께 따라불러 주는 성도들이 코러스가 되어 합창을 해줬다.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찌릿해지는 순간이었다. ‘절름발이’라고 손가락질당하며 일터에서 쫓겨나던 내가, 술잔 기울이며 앙코르를 외치는 밤무대에서 세상 노래에 젖어 있던 내가, 수많은 사람과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이따금 ‘내가 어떻게 이런 일들을 할 수 있었을까’ 싶은 순간이 있다. 나 스스로 뭔가 계획하며 만들어온 길이 아니었다. 상황과 환경은 열악했지만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을 찬양하기 위해 꿋꿋하게 성전으로 향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셨고 동역자를 보내주셨으며, 그들의 눈에 나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셨다. 내가 겪는 고난들은 더 나은 곳으로 나를 보내시기 위한 발판이 된다는 것을 하루하루의 경험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0) 내가 한 건 하나님만 바라보며 찬양한 것뿐인데…
본인이 시각장애 갖고 있음에도 불구
시각장애인 자녀 돕는 박 목사님 본 후
가슴 치며 회개, 장애인 돕기 사역 시작
전용대 목사가 1998년 4월 뉴욕의 한 공연장에서 열린 ‘장애인의 날 기념 열린음악회’에서 찬양하고 있다.
한 가지 부끄러운 고백이 있다. 나는 비장애인과 동등한 위치에 서고 싶었다. 그래서 한때 장애인이 있는 시설은 잘 가지 않았다. 심지어 장애인이 있으면 피하려고 길을 돌아가기까지 했다. 장애인이라는 명찰을 달고 나서 그 마음의 상처가 남아 있기에 그랬던 것 같다.
그렇게 살던 내가 장애인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한국맹인선교회 회장이었던 시각장애인 한의사 박중옥 목사님을 만나고부터였다. 한번은 박 목사님께서 강사로 나오는 사흘간의 부흥회 특별 찬양을 하러 갔다. 대뜸 이 생각이 들었다. ‘사흘 동안 한의원 문을 닫으면 수입에 타격이 클 텐데… 그래도 교회에서 사례비 받는 것으로 충당이 되나 보다.’
그런데 알고 보니 목사님은 부흥회에서 받은 사례비 전액을 시각장애인들의 자녀를 돕는 일에 사용하고 계셨다. 그 얘길 듣는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주님, 장애인들을 보면 혹시라도 마주칠까 봐 전전긍긍했는데, 그런 제 모습이 얼마나 얄미우셨습니까.’ 그날로 가슴을 치며 회개를 하곤 장애인 돕기 사역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우선 장애인들을 찾아 나섰다. 전국 각지 장애인 시설과의 연결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중 전북 완주에 있는 ‘작은 샘골 공동체’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 상상도 못 한 인연을 만났다. 이곳은 오갈 데 없는 장애인들과 나이 많은 어르신들, 부모 없는 아이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었다. 나를 본 원장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전 원래 우체국 공무원이었어요. 오래전 밀알선교단이 주최한 한 행사에서 목사님의 찬양과 간증을 들었는데 머리가 쭈뼛 섰습니다. ‘목발 짚은 사람도 저렇게 하나님 일을 하는데 나는 뭘 하고 있나’ 싶었죠. 얼마 후 우체국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게 이 공동체의 출발점이 됐지요.”
한번은 서울 상도동에 있는 교회에서 찬양 집회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네 깡패들이 예배당에 들어와 난동을 피우기 시작했다. 무의식적으로 마음 끈을 잡아맸다. ‘흔들리지 말자. 지금 여기서 내가 흔들리면 성도들도 모두 동요하게 된다.’ 나는 성도들과 눈 맞춤을 하며 최대한 찬양에 집중했다. 한참을 뭔가에 홀린 듯 찬양을 하고는 예배당 입구 쪽을 바라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소란 피우던 깡패들이 사라지고 없었다.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었다.
20여년이 지난 어느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전용대 목사님이시죠? 혹시 상도동에 있는 OO교회 아시나요? 아주 오래전에 목사님께서 찬양했던 곳인데….” “죄송합니다. 기억이 잘 안 나네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죠?” “찬양 집회 할 때 교회에서 난동을 부렸던 동네 깡패가 있었는데 혹시 기억나세요?”
“아! 생각납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이라 아주 오래전인데 그 일을 어떻게 아시나요?” “제가 그때 그 깡패입니다. 당시 교회를 참 많이 핍박했어요. 그날도 한바탕 난리를 치러 예배당에 들어갔는데 웬 장애인 같은 사람이 의연하게 찬양을 하더군요. 그 모습에 얼어붙은 채 제압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 신앙생활을 하게 됐고 지금은 장로가 됐네요.”
내가 한 거라곤 하나님만 바라보며 찬양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나님은 그가 쓰시는 도구로 영혼을 구해내셨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1) ‘주여 이 죄인이’ ‘주를 처음 만난 날’ 등 실은 2집 앨범
찬양 집회 중 들었던 ‘주여 이 죄인이’
가사 곱씹을수록 내 과거와 많이 닮아
작곡한 안 집사 찾아가 곡 달라 부탁
전용대(오른쪽) 목사가 1991년 3월 찬양 집회를 위해 김석균 목사와 홍콩을 방문해 거리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모습.
1집 ‘탕자처럼’ 발매 후 여러 교회에 초청을 받아 찬양 집회를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인천순복음교회에 갔었는데 특별 찬양을 한 자매의 노래가 귀에 꽂혔다. 처음 듣는 복음성가였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찬양 가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나요.’(‘주여 이 죄인이’ 중)
가사를 곱씹을수록 지난날 방황하며 네 번의 자살 기도까지 했지만 하나님께서 찾아와 위로해 주신 내 이야기를 그대로 표현한 곡 같았다. 교회에 수소문해 특별 찬양을 한 자매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저 전용대 전도사입니다. 혹시 특별 찬양했던 곡이 누가 쓴 곡인지 알 수 있을까요?” “아, ‘주여 이 죄인이’요? 교회 관리하는 안철호 집사님이 쓴 곡입니다.”
나는 그 길로 교회에 달려가 안 집사님을 찾았다. 그리고는 어떻게 곡을 쓰게 되었는지, 내가 어떤 삶의 여정을 걸어왔는지, 그 찬양을 들으며 내게 어떤 마음이 찾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훗날 알게 됐지만 이 곡은 극동방송 찬양경연대회에 참가했다가 예선에서 떨어졌던 노래였다.
“집사님, 이 곡 가사가 마치 제 이야기인 것 같아 잊히지 않습니다. 제가 2집 앨범을 준비 중인데 이 노래를 앨범에 실어도 될까요?” “그렇게 하십시오.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나는 전국에서 집회할 때 이 찬양을 부르며 참 많이도 울었다.
사실 이 곡이 크게 사랑받을 무렵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사역비만으로 생활이 힘들었고 도움이 필요한 곳은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넷째 누나네 집에서 살았지만 잠은 교회에서 잘 때가 많았고, 며칠에 한 번씩 씻기 위해 여관을 들러야 했다. 그러다 보니 이 찬양이 더욱 나를 위한 찬양으로 느껴졌다.
2집 앨범을 준비하던 어느 날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용대야, ‘노래하는 어부들’이란 찬양팀이 있는데 거기에 김석균 집사님이란 분이 곡을 쓰신대. 한 번 찾아가 봐.” 수록곡이 더 필요했기에 여기저기 수소문해 집사님이 출석하는 교회로 찾아갔다.
교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예배가 시작돼 있었다. 한 남자가 크로마하프(36개의 줄로 구성된 현악기)를 연주하며 찬양을 하고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며 노래를 들었다. 직감적으로 그 남자가 김 집사님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예배 후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는 말문을 열었다.
“집사님께 곡을 좀 받고 싶습니다. 좀 전에 예배 시간에 부르셨던 찬양은 혹시…” “네. ‘주를 처음 만난 날’이란 찬양입니다. 만들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불렀네요.” “제가 꼭 부르고 싶습니다. 그 곡을 제 앨범 수록곡으로 넣어도 될까요?”
감사하게도 집사님은 내 요청에 흔쾌히 응했다. 당시 집사님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는데 나는 점심시간마다 학교로 찾아가 함께 식사도 하고 곡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동역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목회자이자 찬양사역자로 함께 길을 걷고 있는 김 목사님처럼 당시 만났던 수많은 분이 내겐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사랑이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2) ‘나래선교회’ 열어 척박한 삶 속 방황하는 청년들 돌봐
빠듯한 일상에 지친 구로공단 청년들에
먼저 다가가 하나님 만난 이야기 들려줘
서로의 마음 열고 나서 청년 사역 시작
전용대(뒷줄 왼쪽) 목사가 1994년 11월, 서울 구로공단에 있는 예배 처소에서 청년들을 위해 찬양을 인도하고 있다.
2집 앨범을 준비할 당시 나는 미용실을 하는 넷째 누나의 집 다락방에서 생활했다. 누나 집은 서울 독산동이었는데 나는 일부러 세 정류장 떨어진 가리봉 오거리에서 내렸다. 제법 긴 거리였지만 누나 집까지 걸어가며 길거리 노래 연습을 하곤 했다. 연습하며 거리를 걷다 보면 구로공단 쪽을 지나는데 그때마다 방황하는 청년들이 눈에 띄었다.
‘주님, 저들이 주님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저들을 위해 사역할 수 있게 해주세요.’ 나는 기도만 하지 않고 2집 앨범을 녹음하면서 그 청년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으러 갔다. 구로공단엔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청년들이 많았다. 빠듯한 일상 속에서 개인 시간을 갖는 건 사치였다. 그렇게 일주일 내내 공장에서 같은 일을 하며 똑같은 물건을 만들다 보니 토요일이 되면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닐 만도 했다.
그뿐이랴. 냉혹한 사회에서 그들의 삶은 척박하기 그지없었다. 열심히 일하고도 월급을 떼이는 경우도 허다했고, 일하다 몸을 다치면 제대로 치료를 받기는커녕 일당도 받지 못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주말마다 거리로 몰려나와 방황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 이야기를 들려줬다. 온전치 못한 몸으로 공장일을 하다 쫓겨났던 일, 하루를 채우지 못하고 부당 해고당하기 일쑤였던 아픔들, 결국 술로 나날을 보내다 자살 기도를 네 번이나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던 지난날들. 그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금은 찬양하며 행복한 나날을 살고 있다는 이야기. 그들은 내 이야기에 공감해줬고 나를 도우신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
서로의 마음을 열고 나서는 조그마한 장소를 빌려 찬양 모임을 시작했다. 선교단체 이름은 ‘나래선교회’였다. 제대로 걷지 못하던 내 모습, 제대로 날개를 펴지 못한 청년들의 모습을 털어내고 훨훨 날아가고픈 꿈을 이름에 담았다.
예나 지금이나 청년들은 그들의 청춘을 담아 뜨겁게 노래하길 좋아한다. 그들 중엔 찬양을 하다 하나님을 만나고 회심하는 청년도 있었다. 그런 청년들과 삶을 교제하며 찬양팀, 율동팀을 만들고 매주 토요일이면 청년들을 위한 찬양집회를 열었다. 구로공단에서 정기적으로 펼쳐지는 최초의 찬양집회였다.
우리의 찬양 소리는 한 공간에 머물지 않았다. 온 거리를 울렸고 그 소리가 거리로 퍼지니 그 소리를 듣고 또 다른 청년들이 점점 모여들기 시작했다. 모임이 점점 커지면서 감사함만 커진 건 아니었다. 고정 수입이 없었기 때문에 구로공단에서의 청년 사역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다.
‘주님, 재정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당시 돈으로 30만원이란 큰돈이 후원금으로 들어왔다. 전주에 사는 한 부부였다. 감사하게도 3년 동안 매달 30만원을 보내주셨다.
한번은 외국 집회를 다녀오면서 그 부부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에 작은 선물을 사서 보내드렸다. 얼마 후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우리는 드러나는 게 싫습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 것인데 이렇게 선물을 받게 되면 그동안 한 일이 무의미해집니다.’ 아차 싶었다. 그날로 매달 이어지던 30만원 후원은 멈췄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3) 연예인들과 함께 다양한 문화선교로 전도의 열매 맺어
MBC 연기자 중심 ‘믿음의 선교단’ 구성
한인수 장로 등 배우들 성극 공연 사역
전용대(앞줄 맨 오른쪽) 목사가 ‘믿음의 선교단’ 단원들과 1989년 가수 오방희(현 오애숙, 뒷줄 맨 오른쪽) 목사의 집에서 모임을 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쯤부턴 연예인들과 함께 전도할 기회가 자주 생겼다. 그 첫 단추가 MBC 연기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믿음의 선교단’이었다. 당시 회장을 맡았던 한인수 장로님을 중심으로 정대용 권사님, 이영범 집사님 등이 주역이었다. 지금이야 ‘문화선교’라는 말이 익숙하고 영역도 확장돼 있지만 당시엔 파격적인 사역이었다.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연기자들이 무대에 올라 성극을 펼치고 찬양을 하며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공연을 하는 건 그만큼 특별한 일이었다. 선교단원 중엔 가수들도 있었던 터라 나도 찬양을 하는 가수로서 동역할 수 있었다.
선교단 안에는 공연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사역을 도우며 봉사하는 사람들, 기도와 재정으로 후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중 한 사람이 당시 집사 직분으로 사업을 하던 지금의 윤석전(연세중앙교회) 목사님이다. 목사님은 예나 지금이나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시며 연예인들이 영적으로 바로 설 수 있게 든든한 후원자가 돼주셨다.
당시 선교단은 서울보다는 전국 방방곡곡 지방 도시들을 찾았다. 아무래도 지방은 서울보다 문화 혜택을 덜 받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선교단의 전도 방식은 게릴라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저녁 집회를 위해 우리는 낮부터 어깨에 띠를 두르고 집회 현장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며 거리 전도에 나섰다.
“와! 연예인이다!” “공연을 한다고요? 보러 가겠습니다. 파이팅!” TV에서만 보던 연예인들이 거리에서 손을 잡아주며 공연과 복음을 전할 때마다 상상 이상의 사람들이 집회에 몰려와 공연장이 가득 찼고 그만큼 전도의 결실도 많았다.
단원으로 활동하는 연예인 중에서도 신앙의 모판이 견고해지는 결실을 보기도 했다. 당시 이영범 집사님은 무명 시절이었지만 믿음의 선교단원으로서 최선을 다해 임해주셨다. 그 후 명연기자로 쓰임 받는 모습을 보며 주님의 축복하심을 느꼈다.
어느 날 개인 집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선배 작곡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용대야. 개그우먼 개그맨 가수 영화감독 연기자 등과 함께 선교팀을 하나 만들려고 하는 데 함께하지 않을래?” “어떤 팀인데요?” “어떤 팀이긴. 복음으로 시대를 일깨우는 팀이지. 하하. 임미숙 이경애 김학래 전영호 작가 김현 작곡가 조민희 영화감독에 가수들, 그리고 율동팀도 함께할 거야.”
가슴이 뭉클했다. 이 또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라 생각했다. 팀 이름은 ‘사랑의 하모니’라고 했다. ‘하나님 전하는 일에 이렇게 또 쓰임 받을 수 있구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하모니와 함께하기로 하고 부단장을 맡았다. 문화예술계의 다양한 예술가들과 함께 활동을 하다 보니 전도사역은 물론, 공연과 음악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믿음의 선교단’ ‘사랑의 하모니’를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는 연예인들과 함께 전도 활동을 펼쳤던 건 여러 지역의 다양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는 ‘체험, 삶과 신앙의 현장’이었다.
이 시대를 문화예술인으로 산다는 건 분명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다. 공연 한 번을 하더라도 그 자리에 기독교인은 물론 비기독교인도 함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달란트를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심을 깨닫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4)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심장병 어린이들 수술비 마련
훗날 밀알심장재단 회장 된 이정재 목사
심장 수술비 없어 위태로운 어린이 위해
음악회로 모금할 수 있게 도와달라 부탁
전용대 목사가 2000년 3월 밀알심장재단 주최로 열린 ‘사랑의 음악회’에서 열창하고 있다.
3집을 발매하고 집회 활동을 이어가던 어느 날이었다. 한 청년이 찾아와 대뜸 말했다. “목사님.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위해 무대에 좀 서주십시오.”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심장병 어린이라니. 수술은 또 무슨 이야긴가.’ 청년은 담담하게 자기 이야기를 꺼냈다.
“일을 하다 24층 높이에서 사고를 당했습니다. 떨어지는 순간 죽었다 싶었죠. 의식을 잃었다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데 원망의 기도가 쏟아져 나오더군요. ‘하나님. 저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신앙생활도 잘하고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살았는데 이게 뭡니까. 저 좀 살려주세요.’ 그런데 하나님이 물어보시는 겁니다. ‘너는 네 이웃을 위해 무얼 했느냐’라고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울부짖으며 회개하고 하나님께 약속했습니다.”
건강을 되찾은 청년은 ‘이웃을 위해 살겠다’는 약속을 품고 일상을 살았다. 하루는 검진을 받으러 병원에 갔는데 한 아주머니가 “제 아이 좀 살려 주세요”라며 애원을 했단다. 사연을 들어보니 심장병에 걸려 수술을 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였다.
“계산을 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많은데 200교회에서 10만원씩만 받아도 2000만원은 모을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러곤 실행에 옮겼습니다. 근데 딱 한 교회, 그것도 개척교회에서 10만원이 왔어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받은 보상금에 모금을 해서 수술비를 마련하고 싶어요. 길거리 모금을 하다가 음악회를 통해 모금을 하면 더 좋겠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왔어요.”
청년의 이야기를 듣는데 전율이 느껴졌다. 내겐 충분한 재정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가 있지 않은가. 음악을 통해 아픈 사람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에 당장 음악회를 하고 싶어졌다. 그렇게 심장병 어린이들을 위한 기금 마련 자선 음악회 준비에 나섰다. 청년이 받은 보상금, 개척교회가 보내준 10만원, 길거리 모금, 음악회 모금액을 모으니 심장병 수술을 할 수 있는 재정이 마련됐다.
그때 그 청년이 밀알심장재단의 회장인 이정재 목사님이다. 지금도 전국 각지에서는 ‘사랑의 음악회’란 이름의 기금 마련 자선 음악회가 진행된다. 1987년부터 지금까지 37년에 걸쳐 4600여명에게 새 생명을 줬다. 이웃에게 온기를 전하려는 이들이 모이고 또 모여 지금은 30여명의 찬양 예술인들이 무대에 오른다.
동역자로서 더 큰 감격은 이 일이 어린이들의 육체를 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가족의 영혼까지 살린다는 것이다. 재단은 수술비를 지원하는 어린이를 선발할 때 두 가지 조건을 본다고 한다. 첫째, 수술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안 되는 가정의 어린이들을 우선으로 한다. 둘째, 교회에 다니든 안 다니든 상관없지만, 어느 교회든 담임 목사님의 추천서 1통이 필요하다.
이렇게 지원 사역을 이어오다 보니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목사님의 추천서를 받기 위해 자연스레 목사님과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사랑의 온기를 경험한 이들이 신앙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평생 무당으로 살았던 할머니가 손주의 심장병 수술과 회복 소식에 예수님을 영접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늘 놀랍고 또 놀랍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5) 국내 최초 복음성가 콘서트… 공연장엔 박수와 환호
선교발레단 ‘조승미 발레단’ 소개 받고
발레 생소해 망설이다 올리기로 결정
전용대 목사가 1987년 서울 중구 유관순기념관에서 열린 복음성가 콘서트에서 찬양을 하고 있다.
‘믿음의 선교단’ ‘사랑의 하모니’에서의 사역은 내가 큰 도전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 나보다 대중성 높은 연예인들과 한 무대에서 콘서트를 열고, 그 열매로 신앙을 알게 되는 사람들을 보는 건 상상 이상의 기쁨이었다.
‘나도 언젠가 저 무대와 같이 단독 콘서트를 열어야지!’ 마음속에 품은 비전을 사람들에게 말할 때면 응원보다는 핀잔이 앞섰다. “연예인이 복음성가 가수와 같냐.” “복음성가 가수가 하는 단독 콘서트에 누가 얼마나 가겠어.” 이런 얘길 들으며 마음이 위축될 법도 한데 희한하게 오히려 용기가 샘솟았다. 기독교 문화가 세상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강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짜로 시도하기로 했다.
서울 중구에 있는 유관순기념관을 사용하기로 예약을 해두고 게스트 선정에 나섰다. 어느 날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특별한 은혜가 있는 팀인데 한번 연락해 보면 어때?” 그 팀은 국내 최초의 선교발레단인 ‘조승미 발레단’이었다. 발레가 생소했던 터라 처음엔 마음이 망설여졌지만 조승미 교수님과 말씀을 나누며 발레단과 함께 올리는 무대에 대한 기대가 솟아올랐다.
재정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주변의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음향과 조명을 준비했다. 산 하나를 넘으니 또 다른 산이 나타났다. 가장 큰 산은 역시 홍보였다. 아무리 잘 차려진 잔칫집도 손님이 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그동안 집회를 다니며 알게 된 모든 인맥을 총동원해야 했다.
콘서트 당일. 대기실에 있는 동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국내 최초의 복음성가 콘서트가 열리는 날이 비웃음과 조롱거리로 역사에 남게 할 순 없었다. ‘기도로 준비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이제 남은 건 기도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노라니 절로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께 이 공간이 꽉 차게 해 달라고 목청껏 기도했다. 그리고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이 하나님만을 위해 한마음으로 함께하기를 바랐다.
무대에 올라 객석을 바라봤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선 내 기도에 응답해주셨다. 거짓말처럼 2400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이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날 콘서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조승미 발레단 순서였다. 사실 콘서트를 준비하면서 반신반의했다. 아름다운 춤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기대됐지만 1980년대 우리 국민들에게 발레는 여전히 생소했다.
아니나 다를까 발레단이 무대에 올라서자 객석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복음성가 콘서트를 찾은 관객의 시선에선 발레단 의상이 다소 점잖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조승미 발레단은 기도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팀이었다. 그날 발레단의 주제는 천지창조였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그 인간이 선악과를 따 먹는 죄를 지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 죄를 씻어 주셨다는 내용을 표현한 공연이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관객석을 바라봤다. 처음엔 웅성거리던 관객들이 점점 공연에 빨려 들어가는 게 보였다. 중반을 넘어서자 곳곳에 눈물짓는 관객도 보였다. 무대를 마친 공연장엔 박수와 환호가 가득했다. 마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영광의 박수 세례 같았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6) 재일 동포들 위한 집회 거듭되며 주님의 역사 일어나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생활하던 유학생
직업전선 뛰어들어 몸과 마음 많이 지쳐
집회 찾아 기도하면서 점점 주님께 의지
전용대 목사가 1995년 일본 도쿄의 한 콘서트장에서 찬양 집회를 인도하고 있다.
일본의 한 한인 교회의 초청으로 집회를 하러 가면서 일본 땅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의 삶을 바라볼 수 있었다. 당시 공부를 위해 일본에서 생활하던 유학생들이 많았다. 그중에는 돈이 떨어지자 생계유지와 학비 마련을 위해 간혹 술집에서 시중들며 술을 따라주는 일을 하는 여성들도 있었다.
처음에는 열심히 공부해 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직장생활을 하려는 마음으로 떠났지만, 생각보다 일본의 물가가 너무 비쌌다. 그러다 보니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다 직업 전선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들은 몸뿐 아니라 외로움으로 마음이 많이 지쳐 있었다.
그곳에서 일하는 한국 여성들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일을 마치고 나면 금요 철야예배에 오곤 했다. 한국인들을 만나 모국어로 대화하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나누기에 교회만큼 좋은 곳이 없었던 것이다.
집회를 위해 찾은 교회 금요 철야예배에는 수백 명의 성도가 있었다. 그중 일부는 술에 취해 있었고 예배당 안에는 술 냄새가 깔려 있었다. 그 냄새를 맡으며 간증과 찬양을 하는데 나도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러면서 저절로 기도가 터져 나왔다. ‘주님,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다 주님을 영접하고 술을 끊을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이들에게 다른 직업을 허락해 주세요.’
놀랍게도 집회가 거듭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처음엔 그저 외로움을 달래려고 왔던 사람들이 말씀을 듣고 거듭나 예수님을 의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직장을 옮겼고 또 몇몇은 목회자나 사모가 되기도 했다.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고선 있을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한번은 한 성도가 개업했다며 예배를 인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주소를 보고 찾아간 나는 눈을 의심했다. 개업한다는 곳의 간판을 보니 술집이었다. 성도에게 말했다. “예배를 인도하고 기도하려니 고민이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잘되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아니면 망하라고 기도해야 합니까.”
그 성도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이왕 개업한 거 빨리 끝내십시오. 빨리 돈을 벌어 신속하게 다른 업종으로 바꾸길 바랍니다.” 내 말이 끝나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처음 중국에 갔을 땐 심장이 덜컥 내려앉기도 했다. 중국은 교회에서 집회하거나 종교 활동, 복음을 전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돼 있었다. 입국 심사를 위해 일행과 함께 기다리고 있는데 공안이 나를 따로 부르는 것 아닌가.
“큰일 났네요. 집회하러 온 것을 눈치챈 것 같아요.” “집회 준비는커녕 쫓겨나게 생겼군.” 다들 사색이 되어 가슴을 부여잡았다. 떨리는 마음으로 공안에게 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공안은 장애인인 내가 긴 줄에 서서 기다리는 걸 보고는 입국 절차를 먼저 진행해 주려고 나를 부른 것이었다.
감사 기도를 드리며 도착한 현장에선 더 큰 감사의 제목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해 20시간 넘게 기차를 타고 온 성도 등 수백 명이 모여 있었다.
공안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집회 현장 밖엔 망을 보는 성도도 있었다. 비록 세상의 법으로는 금지돼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 자리에 모였던 모든 이들에게 전할 수 있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7) 봉투 주고 간 남자, 다시 만난 자리서 유서를 꺼내며…
자수를 하고 죄의 대가 제대로 치를 테니
찬양 통해 사람 살리는 일에 써달라 부탁
전용대(왼쪽) 목사가 1981년 서울 강남의 한 녹음실에서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과 함께 앨범 녹음을 하고 있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찾아오듯 내게도 극심한 슬럼프가 불쑥 찾아왔다. 그 배경엔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도 있었지만 믿었던 이들에게 받았던 배신의 상처도 적잖았다. 그럴 때마다 간신히 하나님을 붙들고 회복하기를 반복하곤 했다.
2009년쯤이었을까. 선배 목사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전용대 전도사. 우리 교회 철야예배 강사가 급한 사정으로 못 오게 됐어. 대신 말씀 좀 전해줄 수 없겠나?” “목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지금은 힘겨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중이라….”
몇 번의 거절에도 부탁하시기에 결국 한 시간만 예배를 인도하기로 하고 교회로 갔다. 강대상 앞에 서서 말씀을 전하는데 예배석 중간쯤 점퍼를 입은 남자가 눈에 띄었다. 그는 내 말의 문장이 끝나기 무섭게 연신 “아멘”을 외쳤다. 한 시간 동안 100번도 넘게 외쳤던 것 같다.
집회를 마치고 나서려는데 그 남자가 다가오더니 봉투 하나를 건넸다. “오늘 고마웠습니다. 가실 때 간식이라도 드세요.” ‘은혜를 많이 받으셨나’ 하고 생각하며 감사하게 봉투를 받고는 후배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후배가 배가 고프다기에 건네받은 봉투를 주며 먹을 것을 좀 사 오라고 했다. 그런데 봉투를 받은 후배가 깜짝 놀라며 내게 다시 봉투를 돌려주는 것 아닌가.
“형 혹시 봉투를 확인하고 저 주신 거예요?” 확인해 보니 집회 강사비로 받은 액수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 있었다. 봉투엔 한 장의 편지가 동봉돼 있었다. ‘제 연락처를 남깁니다. 가능하시면 꼭 연락주세요.’ 연락처가 없으면 수소문해서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해야 할 판에 전화번호를 남겨 줬으니 얼마나 감사한가.
전화를 받은 남자는 간곡히 만남을 청했다. 당황스러움과 고마움이 혼재된 상황에 일단 만나기로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남자는 이번에도 봉투를 내밀었다. “필요하신 곳에 쓰세요.” 봉투를 확인하니 이번에도 큰 액수가 들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무 이유 없이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순 없습니다.” 남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또 다른 봉투를 내밀었다. 봉투를 열어보곤 흠칫 놀랐다. 안에는 유서가 들어 있었다.
“사실 어제 사람을 죽였습니다.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동생이 제 사업체를 가져가 버렸습니다. 화를 참을 수 없어 일을 저질러 버리곤 저도 자살하려고 했습니다. 잠시 공원에 앉아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찬양 소리가 들렸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찬양이나 한 곡 듣고 죽자’ 싶은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갔는데 전도사님의 찬양과 말씀을 듣게 됐습니다.”
남자는 자수를 하고 죄의 대가를 제대로 치를 테니 찬양을 통해 사람을 살리는 일에 진력해달라며 내 손을 붙잡았다. 그 후 찬양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의 최용덕 간사와 함께 앨범을 준비할 때 내가 쓴 가사로 최 간사가 곡을 붙여 준 노래가 ‘아무런 이유 없이’다.
‘나를 괴롭힌 그 사람 뒤에 계시는 주님을 생각할 때에/ 내 마음속의 미움은 사라지고 용서의 마음으로 변하였네.’(‘아무런 이유 없이’ 중에서)
시간이 훌쩍 흐른 어느 날, 그 남자에게 기도를 요청하는 연락이 왔다. 한때 동생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그 남자는 한 지역을 돌보는 군수가 됐다. 이 모든 것이 회개와 용서를 가능케 하는 찬양의 힘 아닐까.
***[역경의 열매] 전용대 (18) 아버지 부고 듣고도 집회 마무리… 마지막 무대서 왈칵
미국에서 집회 일정 중 소식 접하고
귀국하려다 형제들 만류에 일정 마쳐
태릉 선수촌에 예배 인도하러 갔다가
피아노 반주하는 자매를 보는 순간…
전용대 목사의 부모님이 1966년 전남 고흥의 자택 옆에서 찍은 사진.
“용대가 저렇게 혼자 나이만 먹으면 어떡하나. 빨리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결혼하는 걸 봐야 할 텐데….” 나를 향한 아버지의 걱정 가운데 가장 애통해하셨던 주제는 다름 아닌 결혼이었다. 아버지의 한숨 섞인 말을 들을 때마다 내 마음도 미어졌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사실 연애를 안 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온전치 않다는 이유는 늘 애정전선에 큰 걸림돌이 됐다. 그런 아픔들을 수차례 겪다 보니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두려웠고 자연히 결혼에 대한 생각도 옅어졌다. 그렇게 마음을 내려놓고 사도 바울처럼 혼자 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다.
2001년 1월 23일. 내 생애 잊히지 않고 가슴에 박힌 날짜 중 하나다. 당시 나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서 집회 일정들을 소화하고 있었다. 그 시절엔 지금처럼 통신망이 좋지 않을 때라 한국에 자주 전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무슨 일인지 하루 종일 집에 전화를 걸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결국 나는 수화기를 들었다.
“용대냐?” “네. 지금 미국에서 집회 중이에요. 별일 없으시죠?” “용대야, 실은…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뭐라고요? 갑자기 왜요? 바로 갈게요.”
형이 들려준 소식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전화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것보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형, 지금이라도 집회 취소하고 한국으로 갈게.”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형이 말을 이었다. “아니다. 오지 마라. 어차피 귀국해서 고향까지 내려오면 장례도 다 끝나 있을 거야. 무대 아래서 널 기다리고 있는 분들과 약속을 지켜야지. 집회는 마무리하고 와라.” “그래도…” “아니야. 그렇게 해.”
형제들의 만류로 나는 결국 집회를 끝까지 마무리하기로 했다. 아버지 소식을 듣고도 내색하지 않은 채 집회 일정을 소화하는 건 뼈를 깎는 고통이었다. 결국 마지막 집회 무대에서 차마 참지 못하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러분, 실은 제가 미국 와서 집회를 이어가던 중에 저희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관객석은 순간 얼어붙었다. 깜짝 놀란 관객들은 넋 놓고 나를 바라봤다. “워낙 정 많고 사랑 많으셨던 아버지는 제가 빨리 결혼해서 손주를 안겨주길 바라셨습니다. 자나 깨나 제 걱정을 붙들고 계시던 아버지셨는데 그 사랑을 받고도 전 아버지 임종의 순간에 손 한번 붙들어드리지 못했네요.” 집회 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그렇게 집회를 마치고 돌아와 가족들과 위로를 나누고 다시 일상이 시작됐다. 당시 나는 종종 국가대표 선수들이 훈련하는 태릉 선수촌에서 예배와 찬양을 인도했다. 대한민국 탁구의 전설 현정화 선수와도 인연을 맺었고, 선수촌에서의 예배가 마중물이 되어 대학과 프로농구팀, 실업축구팀을 위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중엔 선교를 위해 창단한 헤브론 여자축구팀도 있었다.
감독이었던 류영수 목사의 초청으로 예배를 인도하러 갔다가 강단으로 올라가는데 피아노 반주를 하는 자매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정체 모를 음성이 귓가에 들렸다. ‘용대야, 네 여인이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19) 우리 인연은 하나님의 뜻…서로의 귓가에 “네 반려자다”
똑같은 말씀으로 서로의 마음 확인
자매 어머니의 결혼 반대 심했지만
집회 무대 선 모습 본 후 허락받아
전용대 목사와 노강숙 사모가 2001년 11월 목동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내 여인이라고? 하나님의 음성이었을까.’ 나는 피식 웃고는 예배를 인도했다. 피아노 반주를 하던 자매는 잘나가던 국가대표 출신 축구선수였다. 인천제철이란 강팀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스포츠 선교를 하겠다며 기독교 여자 축구팀인 헤브론 축구팀의 멤버가 된 자매였다.
얼마 후 예배 인도를 위해 다시 축구팀을 찾아갔을 때였다. 그 자매가 또 시야에 들어왔다. ‘네 여인이다.’ 귓가에 동일한 음성이 또 들렸다. ‘하나님,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저에게 다시 한번 확신을 주세요. 우리 두 사람에게 같은 마음을 주세요.’
그날부터 자매를 놓고 기도가 시작됐다. 틈이 날 때마다 기도제목을 붙들었다. 그 간절함이 목 끝까지 차올랐을 때 용기를 냈다. 그러곤 자매 앞에 섰다. “이런 말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오해 없이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무슨 말씀인데요?” “하나님께서 자꾸 자매님이 제 반려자라고 말씀해주시는 것 같아요.”
간증인지 고백인지 통보인지 모를 말이었다. 긴장되는 맘으로 자매의 얼굴을 바라봤다. 미소가 엿보였다. ‘뭐지? 비웃는 건가?’ 자매가 말을 꺼냈다. “사실 저한테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어요. 목사님이 강단 위로 올라가시는데 ‘네 남편이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똑같은 마음, 똑같은 말씀. 분명 하나님의 뜻이었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인연은 본격적인 출발선에 섰다. 하지만 꿀 같을 것만 같던 인연 앞에 쓴맛이 찾아오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양쪽 집안의 반대에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나를 데리고 살아왔던 넷째 누나의 반대부터 난관이었다. 내가 어렵게 사역하는 것을 지켜봐 온 누나로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배우자와의 결혼을 내심 바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누나와의 전쟁은 의외로 쉽게 종전을 맞았다. 그간 몇 번이나 하나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몸에 병이 났던 누나는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극심한 고통을 호소할 만큼 탈이 났다. 결국 누나는 백기를 들었다.
그런데 이번엔 자매의 집이 문제였다. 어머니의 반대가 너무 심했다. 이해가 됐다. 어미의 입장에서 딸이 고생하지 않도록 건강한 사위를 얻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때 자매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간청했다. “엄마, 목사님 집회에 딱 한 번만 참석해 보세요. 그러고 나서도 마음에 안 들면 미련 없이 헤어질게요.”
얼마 후 어머니는 집회 무대에 선 내 모습을 보고 결혼을 허락하셨다. 나는 그날의 이야기를 상견례 자리에서 어머니께 들을 수 있었다.
“딸아이 말대로 집회에 참석하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아서 계속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날은 집 근처에서 집회를 하지 않겠나. 더는 핑계를 댈 수 없어서 집회에 참석했지. 그런데 찬양하면서 사위가 손을 드는데 그 손에서 빛이 나는 거야.”
내 손은 늘 거칠다. 항상 목발을 짚기 때문에 겨울엔 찢어져서 피도 자주 난다. 그래서 내겐 다리 다음으로 자신 없는 신체 부위가 바로 손이다. 그런데 그 거친 손이 어머니 눈엔 인생의 어떤 거친 파도도 헤쳐나갈 수 있는 든든함으로 보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역사하신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0) 건강하게 첫딸 출산… 부모 마음 깨닫자 돌아가신 어머니
나의 장애가 아이에게 아픔을 줄까 걱정
결혼 전부터 아이 낳지 말아야겠다 결심
1년쯤 지난 무렵 자녀에 대한 마음 생겨
전용대 목사의 부모가 1992년 7월 부친 생신을 맞아 축하를 받고 있는 모습.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된 결혼 생활이 1년쯤 다다랐을 때 문득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 있다. ‘내게도 사랑스러운 자녀가 있었으면 좋겠다.’ 사실 아내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결혼 전부터 ‘아이는 낳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내가 가진 장애가 아이에게로 이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더군다나 나는 자살하겠다고 먹지 말아야 할 약도 많이 먹은 몸이었다. 둘째, 자녀에게 부끄러운 아버지로 살아가야 할 것에 대한 아픔 때문이었다. 아이를 안아 줄 수도, 업어 줄 수도 없는 아비여야 했고 그로 인해 아이가 놀림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컸다.
그런데 그날따라 자녀에 대한 마음이 간절하게 가슴을 두드렸다. 결국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놨고 그날로 우리 부부는 본격적으로 아이를 놓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무엇이든 하나님의 때가 있는 법, 때가 됐기 때문에 우리 부부에게 기도의 마음을 주시지 않았을까 싶었다. 간절함은 그 열매의 당도를 결정하기 마련이다. 얼마 후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달콤한 기쁨을 느꼈다. 그리고 더 간절한 기도를 이어갔다.
“주님, 귀한 자녀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제 마음에 불안이 몰려옵니다. 혹시라도 저희 아이가 불편함 몸으로 태어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있습니다. 부디 아내와 아이를 지켜주세요.”
2003년 7월 7일 드디어 첫딸 혜나가 세상에 나왔다. 가장 먼저 시선이 간 곳은 아이의 다리였다. ‘정상!’ 다음으로 얼굴을 봤다. 그간 내가 먹은 약에 대한 부작용이 떠올랐다. ‘정상!’ 마지막으로 손과 발 모두 건강한 모습을 확인하고야 기쁨과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아이를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은 진리 중의 진리다. 모든 사람에게 있어 어머니는 사랑 그 자체이자 버팀목일 것이다. 장애인 아빠와 성장을 함께하고도 자신의 든든한 버팀목이라 생각해 준 아이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내게 언제나 건강한 모습으로 곁에 계실 것 같았던 어머니도 노환으로 병상에 눕는 날이 많아졌다. 그날도 어머니를 뵈러 갔는데 발길이 떨어지질 않았다. 왠지 그 순간이 마지막일 것만 같은 두려움이 있었다. ‘예정된 집회를 취소해야 할까.’
이런 사정을 안 셋째 누나는 걱정 말고 집회부터 다녀오라고 했다. 결국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강원도로 향했다. 가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아 수시로 누나에게 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상태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온 힘을 다해 집회를 마치고는 누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어떠셔?” “의식은 없지만 숨은 쉬셔.” “지금 집회 끝났어. 바로 출발할게.” “조심히 와.” 바로 출발한다는 내 이야기를 들은 누나가 의식도 없고 아무것도 듣지 못할 것 같은 어머니에게 큰 소리로 말을 전하는 게 수화기 밖으로 들렸다. “엄마! 용대 출발한대요. 곧 온대요.” 그런데 이 말을 들으셨는지 잠시 후 어머니는 숨을 거두셨다고 한다. 마치 내가 온다는 얘기를 기다리셨다는 듯이 말이다.
내가 집회 때마다 부르는 찬양이 있다. ‘어머니의 성경책’이다. 하지만 이 찬양을 끝까지 불러 본 적이 거의 없다. 찬양할 때마다 목이 메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1) 앨범 알려지며 장례식·결혼식 등 다양한 무대서 노래
임종을 앞둔 사람들이 천국 소망하며
영혼이라도 주님에게 다가서기 위해
병원이나 장례식장에서 찬양 부탁
결혼식장에선 축가로 눈물바다 되기도
전용대 목사가 2018년 여주 소망교도소에서 집회 후 수용자들과 악수하며 인사를 나누고 있다.
경계를 넘어선 다양한 공간들이 내 무대가 되곤 했다. 그중에선 임종을 앞둔 사람들, 특히 주님을 모르고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 앞에서 찬양을 많이 했다. 하나님께선 마지막까지 한 영혼이라도 주님께 다가서게 하려고 나를 사용하셨다.
앨범에 수록된 곡들이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병원에서도 내 찬양을 듣는 사람이 많아졌다. 때로는 임종을 앞둔 사람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갖게 돼 “내가 죽고 난 다음에라도 전용대가 와서 꼭 노래를 불러줬으면 좋겠다”고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임종을 앞둔 환자들이 있는 병원이나 장례식장에 많이 가게 됐다.
장례식장에서 찬양하고 조문객들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이 스쳤다. ‘잘 죽어야 한다.’ 어떤 장례식장은 조문객이 너무 많아 유족들이 조문객에게 인사하느라 쉴 틈 없이 움직이지만, 또 어떤 장례식장은 썰렁하기 그지없기도 하다. 고인을 그리워하면서 지난 추억들을 이야기하는 조문객들이 있는가 하면, 고인의 인생에 남겨진 잘못된 흔적을 안타까워하는 조문객들도 있다.
‘만약 내가 지금 죽는다면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 뭐라고 할까. 나를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으로 기억할까. 그 사랑을 전해보려 발버둥친 여정을 추억할 수 있는 사람일까.’ 이런 생각들이 쌓이면서 내 삶의 목표는 ‘늘 선한 영향력을 끼치자. 그래야 잘 죽을 수 있다’로 정해졌다.
장례식이 S극 무대라면 결혼식은 N극 무대다. 수많은 결혼식 축가 무대 중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한번은 조직폭력배 생활을 하다 예수님을 믿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던 분이 결혼식을 앞두고 나를 찾아왔다.
“목사님, 제가 결혼을 합니다. 혹시 축가를 요청해도 될까요.” “그래요? 정말 축하합니다. 당연히 불러드려야죠.” “목사님께서 꼭 불러 주셨으면 하는 축가가 있습니다. 바로 ‘주여 이 죄인이’예요.” “네? 그 곡은 축가로 부르기엔 좀… ‘사랑의 종소리’는 어떠세요?” “아닙니다. 꼭 ‘주여 이 죄인이’를 불러 주세요.”
너무 간절하게 부탁하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수락을 하곤 결혼식장을 찾아갔다. 예상은 했지만 하객 중에는 검정 양복을 차려입은 주먹잡이들이 식장 한편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주여 이 죄인이’를 불러야 하다니. 그래도 어쩌겠어. 신랑이 그토록 간곡하게 부탁하는데.’
긴장감과 어색함이 혼재된 마음으로 축가를 시작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축가를 부르는데 신랑이 갑자기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워하며 축가를 이어가는데 이번엔 신랑 아버지께서 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까지 축제 같았던 결혼식장이 축가와 함께 눈물바다가 됐다. 축가를 시작할 때보다 더 복잡한 마음으로 무대를 내려왔다.
결혼식을 모두 마친 뒤 신랑의 아버지가 내게 와서는 손을 잡고 인사를 건넸다. “젊은이 고맙소. 내 아들 사람 만들어 줘서.” “아버님, 제가 아드님을 사람 만든 게 아니고요. 아드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들어가셔서 사람다운 사람이 된 겁니다.” 그렇게 ‘주여 이 죄인이’는 죄인이었던 한 사람에게 가장 눈물겨운 축하를 전한 축가로 남았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2) “혈관이 막혀 당장 수술해야…” 의사 말에 눈앞이 캄캄
자각 증세 없었지만 많이 진행된 상태
저축해 놓은 돈 없어 수술비 걱정하다
밀알심장재단 이정재 회장 도움 받아
전용대 목사가 2011년 혈관이식 수술 후 병상에서 웃어보이고 있다.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집회 인도를 하고 오는데 갑자기 가슴에 송곳을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다. ‘내 가슴이 왜 이러지?’ 왠지 그냥 지나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종합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고 초조한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혈관이 막혔네요. 이 정도면 스텐트 삽입 시술을 하기는 너무 늦었고 수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청천벽력이었다. “그간 이상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늦었다니요?” “자각 증세가 별로 없었을 뿐, 진행이 많이 됐습니다.”
눈앞이 캄캄했다. 수술보단 수술비 걱정이 앞섰다. 꾸준히 사역해오면서도 재정을 모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에 저축해 놓은 게 없었다. 당연히 즉각 수술대에 오를 수도 없었다. 의료진에게 수술을 미뤄야 할 것 같다고 얘길 하고 돌아서는데 문득 밀알심장재단의 이정재 회장님이 생각났다. 수화기를 들었다.
“회장님, 사실 제가 심장이 좀 안 좋아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스텐트 삽입 시술은 이미 시기를 놓쳤고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하네요.” “목사님! 걱정 마이소.” 목소리를 듣는 내 가슴이 뻥 뚫릴 정도였다. 회장님이 소개해 준 한 병원을 찾아갔다가 뜻밖의 인연을 만날 수 있었다. 과거 심장병 수술을 받기 위해 온 아이들에게 찬양을 불러주기 위해 병원에 갔을 때 팬이라며 반갑게 맞아줬던 박사님이 계셨다.
현재 내 상태와 수술에 관한 이야기들을 해주던 박사님은 깊이 울림을 주는 한마디를 남겨주셨다. “제가 목사님 수술을 집도한다고 해도 꼭 기억하십시오. 수술은 제가 하지만 치료는 하나님이 하십니다.”
드디어 수술대에 오르던 날. 눈을 떠 보니 중환자실이었다. 혈관이식 수술을 하기 위해서는 의료용 톱으로 갈비뼈를 자르기 때문에 마취가 풀리면서 찾아오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얼마나 아프셨을까. 머리에 가시관을 쓰고 양손과 다리에 못 박혀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이런 고통은 별것도 아니겠구나.’
수술실에 있던 간호사들은 내가 너무 아파서 우는 줄 알고 놀랐겠지만 나는 예수님께 감사하고 죄송해서 울고 있었다. 릴레이처럼 이어지는 집회로 녹초가 돼 예배 시간에 졸다가 담임목사님이 나를 소개하는 소리에 깜짝 놀라 깬 일, 겉으론 겸손한 척하면서 모든 게 하나님 영광이라고 하면서도 그 영광을 내가 가로챈 일, 매월 말일이 되면 내야 할 공과금 때문에 집회를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려는 마음보다 사례비 생각이 앞섰던 일. 하나씩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따름이었다.
다른 환자에 비해 빠른 회복을 보였던 나는 하루 만에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내 28번째 앨범엔 ‘나는 할 수 없지만’이란 찬양이 수록돼 있다. 수술 후 몸이 회복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하나님께 보고를 드리려고 기도원에 갔다가 쓴 곡이다. 그동안 100개 넘는 곡의 가사를 썼다. 하지만 가사와 곡을 동시에 쓴 건 이 곡이 처음이었다.
‘나는 할 수 없지만 주님이 잡아 주시면/ 나는 할 수 있네 일어서리라 뛰어가리라.’ 하나님은 그렇게 부족한 종에게 고난은 축복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말을 가슴 깊이 진리로 새겨넣게 하셨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3) 카네기홀 초청 공연 후 아빠에 대한 자긍심 커진 혜나
장애인 아빠 둔 딸 걱정에 가슴앓이하다
뉴욕 카네기홀 솔로 가수 게스트로 초청
딸에게 좋은 추억 만들어 주기 위해 동행
전용대 목사가 2014년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앞두고 리허설을 하고 있다.
한번은 딸 혜나가 내게 말했다. “아빠! 수영장에 같이 가요. 다른 친구들은 엄마 아빠랑 수영장 다녀왔다고 자랑한단 말이에요.” “혜나야. 미안하다. 아빠는 몸이 불편해서 수영장을 갈 수가 없단다.”
딸은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후론 수영장 얘길 꺼내지 않았다. 하루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혜나야. 아빠가 몸이 이렇게 불편해서 같이 수영장 가질 못해 많이 속상하지. 미안하다. 그런데 아빠를 좀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혜나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속상했으면, 또 얼마나 참아왔으면 저렇게 서럽게 울까 싶어 더 속상했다. 그런데 진짜 염려했던 건 따로 있었다. ‘혹시라도 학교에서 아빠가 장애인이라고 놀림을 받지는 않을까.’ 외부 일정을 마치고 밤늦게 귀가했던 날, 거실에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아빠께 드려요. 아빠, 오늘은 학교에서 친구들이 아빠가 절름발이라고 놀렸어요. 화가 나고 속상했지만 참았어요. 저 꼭 의사가 되어서 아빠 다리 고쳐 줄게요. 조금만 참으세요. 그리고 아빠! 꼭 100살까지 함께 살아요.’
편지를 붙들고 혹시라도 울음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 봐 이불을 겹겹이 둘러쓰고 울었다. 고난 중에도, 감옥에서조차 한밤중에 찬송했던 사도 바울을 생각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다음 날 아침, 혜나의 얼굴을 보는데 미안한 마음에 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감정을 진정시키고 물었다.
“편지 잘 봤다 혜나야. 근데 혹시 그 친구랑 싸웠니?” 걱정이 앞서는 걸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목사 아빠였다. “아니요. 오히려 자랑했어요. 우리 아빠는 목사님이고 방송도 하고 언니 오빠들도 가르치는 훌륭한 분이라고요.”
어느 날 혜나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줄 기회가 생겼다. 가수라면 한 번쯤 서보고 싶어하는 꿈의 무대,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 솔로 가수 게스트로 초청을 받은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모인 오케스트라와 함께하는 공연장 모습은 생각만 해도 흥분됐다. 그곳에 혜나를 데리고 가기로 했다. 나는 지인에게 항공료를 빌려 혜나와 함께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리허설을 위해 도착한 카네기홀은 그 명성만큼 크고 웅장했다. ‘이곳에서 내가 노래를 할 수 있다니.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숨이 턱 막혀올 때마다 기도의 끈으로 마음을 붙들었다. 드디어 시작된 공연, 내 모습을 보고 있을 혜나를 생각하니 더 기분이 좋았다. ‘주님, 이 시간을 통해 장애인 아빠를 둔 혜나가 받았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아빠에 대한 자긍심이 생기게 해 주세요.’
공연을 마친 후 대기실에서 만난 혜나는 무척 흥분한 상태였다. “아빠! 살결이 검은 아저씨가 아빠 노래를 따라 불렀어. 그것도 한국말로. 우리 아빠 정말 멋져!” 말없이 눈물이 흘렀다. 마치 내가 세상 최고의 가수가 된 것 같았다.
다음 날 혜나와 함께 맨해튼의 노숙인들이 있는 곳을 찾아가 음식을 나눠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빵을 건네며 흥겹게 찬양을 했는데 노숙인들이 “소울이 있다”며 칭찬을 해주는 것 아닌가. 혜나의 눈빛이 또 빛났다. 무대를 가리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거리에 뿌려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4) CMTV서 오랫동안 꿈꿔왔던 진행자의 꿈 이뤄
내 몸으론 복음 전파에 한계 있지만
전파와 문서로는 어디든 갈 수 있어
복음 전하기 위해 늘 진행자 꿈꾸다
국내 최초 기독교 음악방송 진행 맡아
전용대(왼쪽) 목사가 2015년 7월 개국한 씨뮤직텔레비전(CMTV) 방송에서 진행을 하고 있다.
집은 ‘사는 것’이 아닌 ‘사는 곳’이라고 했다. 네 식구가 오손도손 기도하며 찬양하고 사랑을 피울 수 있는 환경 속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새로운 사명을 그려 갔다. 그러다 감사하게도 20년을 지낼 수 있는 장기 전세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좋았고 KTX가 지나는 기차역, 공항과도 가까워 국내외 집회를 다니는 데 그만한 환경이 없었다.
사역 환경을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껴가던 어느 날 오랜 시간 꿈꿔왔던 TV 진행자의 꿈이 성큼 다가왔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라디오 방송 진행은 매주 빠지지 않고 오랜 시간 진행했지만, TV 프로그램 진행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2014년 어느 날 모 방송국의 새로운 진행자를 찾는 과정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는 소식에 나도 모르게 부푼 꿈을 가슴에 품었다. 하지만 소중한 알처럼 품고 있던 꿈이 부화하진 못했다. 그 과정에서 가슴 할퀴는 말까지 들어야 했다.
“제정신입니까. 수많은 사람이 TV로 지켜보는 방송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내보냅니까.” 진행자를 결정하는 최종 회의에서 내가 목발 짚고 다니는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게 또 한 번 좌절을 겪었다.
‘자리에 앉아서 진행하는 데 무리도 없고 긴 시간 서서도 집회를 인도해왔던 나다. 오랜 시간에 걸친 라디오 진행 경력도 있는데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복음을 전하는데 장애가 무슨 문제가 될까.’
깊은 상실감을 안고 경기도 파주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을 찾아갔다. 주님의 뜻이 궁금했다. 나는 기도굴에 들어가 눈물 콧물로 범벅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곤 평안이 찾아왔다. 주님의 위로는 간결했다. ‘용대야. 네게 예비된 시간이 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시간이 오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듬해 7월 국내 최초 기독교 음악 방송인 씨뮤직텔레비전(CMTV)이 개국했고 드디어 나는 꿈꿔왔던 TV 진행자로 쓰임을 받게 됐다. 지금도 당시 방송국 관계자가 들려줬던 이야기가 생생하다. “복음을 전하는 방송에 장애·비장애가 무슨 장벽이 될 수 있습니까. 어떤 장애물도 없어야 합니다.”
돌아보면 무엇 하나 나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고 주님이 하셨는데 좌절의 순간마다 울컥하며 “왜”라는 외침이 마음에 가득 차 있는 나를 발견했다. 교만 속에 있던 나 자신을 회개하며 감사와 행복, 기쁨으로 방송에 쓰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라디오나 TV 방송 진행자의 꿈은 복음에서 시작됐다. 많은 날 그토록 바쁘게 주님이 정하신 일정을 순종하며 준비하면서도, 내 몸 상태로는 도저히 가기 어려웠던 곳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선 전파와 문서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까지 찾아가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하셨다.
그동안 찬양 앨범으로 발표했던 주님을 향한 고백들이 국내외에 전달돼 위로와 소망 감사 복음의 고백을 낳고 신앙의 열매를 맺게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찬양 사역자 전용대 아닌가. 하나님은 그렇게 내가 인생의 다양한 통로를 걸으며 그의 계획하심을 피부로 느끼도록 하셨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5) 교만 가득한 내 마음에 큰 깨달음 주신 하나님
미 집회서 누워서 예배보던 청년 만난 후
눈에 보이는 모습만으로 판단하지 않고
철들어 가는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 고백
전용대 목사가 지난 2018년 미국 뉴욕의 한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며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2010년대 중반을 지나며 한국교회에 차츰 부흥회와 간증 찬양 집회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 사명도 여기까지일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찬양 사역자로서의 전용대를 멈추게 할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예상치 못하게 해외 집회의 문을 열어 나를 인도하셨다.
부끄럽지만 돌아보면 너무 분주해서 기도하지 못하고 집회에 나섰을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이 들어 설 때가 많았다. 집회의 현장에선 늘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생각, 집회 참석자들의 태도와 겉모습으로 그 신앙을 판단하려 하는 생각들이 사탄처럼 파고들었다. 미국에서의 집회는 주님께서 그런 나를 강하게 채찍질 하신 현장이었다.
미국 일정 중에 뉴욕에서 주일 오전 11시 집회를 인도한 뒤 메사추세츠주에서 오후 4시 연합집회 강사로 무대에 서야 하는 상황이 있었다. 11시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완전히 누운 자세로 예배를 드리는 젊은 성도 한 분이 자꾸 눈에 거슬렸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미국이라지만 이건 아니지 않나.’
언짢은 마음에 금방이라도 한마디 하고픈 심정이었지만 꾹 참았다. 집회를 마치고 서둘러 다음 일정을 위해 문을 나서는 순간 바로 그 청년이 다가왔다. “목사님. 정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음 목적지까지 가시려면 식사도 못 하실 것 같은데 햄버거라도 사드시고 가세요.”
청년은 거듭 거절하는 내 손에 200달러가 든 봉투를 쥐어줬다. 그 순간 머리에 망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200달러가 수억 달러보다 크게 느껴졌다. 집회 중에 혹 그 청년의 자세만 보고 내 기분대로 지적질을 했다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을까 싶은 생각에 운전을 하는 내내 눈물이 흘렀다.
나는 목발을 짚는 장애인 아닌가. 상대방의 일방적인 판단으로 무시당하며 살아온 시간이 한 세월인데 정작 나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모순적인가. 그날 이후 제자들에게 기회가 될 때마다 말하곤 했다. “하나님은 단 한 영혼을 위해서라도 우리를 무대에 세우시는 분이다. 은혜받았다 표현 못 해도 은혜받은 분이 계시기에 어떤 자리든 마음을 다해 찬양드려야 한다.”
많은 성도들 앞에 서다 보니 자신이 그렇게 살지도 못하면서 가르치려 하는 못된 마음이 불쑥불쑥 삐져나올 때도 있다. 그 또한 교만이었다. 어느 날 칼럼으로 접한 박종순 원로목사님의 말씀이 정곡을 찔렀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주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완주자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끝까지 완주하지 못한다면 그동안의 신앙과 믿음, 사역은 헛것이 되기에 이전보다 더 열심히 기도하며 겸손하게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씀이 내게 새로운 출발점을 제시했다. 주님 부르시는 그날까지 매일 주님 앞에 철들어 가는 종이 되게 해달라는 다짐 앞에 섰다. 2018년 발표한 앨범에 수록된 ‘내가 부르는 노래’가 그 고백의 결과물이 됐다.
‘예수님은 나의 생명 예수님은 나의 사랑/나의 노래 내 모든것 되시네/내가 부르는 내 노래에 예수님이 없다면 아무 의미 없습니다/내가 부르는 이 노래에 복음이 없다면 아무 가치 없습니다/내가 부르는 이 노래는 주를 향한 나의 고백 주를 향한 나의 감사/노래하리 영원토록 주만 찬양하리라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역경의 열매] 전용대 (26) 용기 내 준비한 40주년 콘서트에 기적으로 답하신 주님
모든 준비 맡은 후배 목사의 수술 소식에
포기하려다 ‘찬양은 주님의 무대’라 생각
스스로 준비하자 많은 선후배 가수 동참
전용대 목사가 2019년 9월 서울 CTS아트홀에서 열린 40주년 콘서트에서 찬양사역자 송정미와 함께 찬양하고 있다.
2019년. 주변에서 얘기가 들려왔다. “목사님, 찬양 사역을 시작하신 지 40주년인데 기념할 수 있도록 콘서트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처음엔 반갑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이런저런 생각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1986년부터 매년 정기 콘서트와 집회 일정 외에도 크고 작은 콘서트를 해왔다. 하지만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교회 안에서 부흥회, 특별 집회 등이 서서히 자취를 감춰갔다. 콘서트를 할 수 있는 여건도, 큰 무대를 마주할 자신감도 들지 않았다. 즐거운 마음으로 찬양을 감당해야 할 콘서트가 마음에 부담으로 누적되는 건 결코 원치 않았다.
망설임의 시간이 길어질 때쯤 오래전부터 동역했던 후배 목사님에게 연락이 왔다. “목사님, 콘서트 꼭 하셔야지요. 다른 준비는 제가 할 테니 찬양할 채비만 해주세요.” 그렇게 용기를 내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모든 준비를 맡아서 하기로 한 후배 목사님이 갑작스레 큰 수술을 받게 돼 콘서트 준비를 할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주님 어떻게 해야 하나요. 콘서트를 취소해야 하는 건가요.’ 간절한 기도 끝에 가슴 치며 결론을 냈다.
‘콘서트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다. 주님을 찬양하는 무대다. 콘서트는 주님 것이다. 그 무대를 주님이 쓰실 것이다.’ 더 이상 망설이고 지체할 수 없었다. 곧장 스스로 준비에 나섰다. 무대에서 들려줄 선곡을 마치고 장소는 서울 노량진의 CTS아트홀로 정했다. 연주팀은 신구 조화를 이루도록 준비했다. 오랫동안 무대를 함께했던 동역자들에 더해 부모님 세대가 나의 찬양을 묵상하듯 들었던 청년 세대 연주자가 힘을 보탰다.
감사하게도 송정미 김용학 김한나 제이밴드 등 많은 동료 선후배 가수들이 게스트로 함께해 주신다는 연락을 줬다. 연습에 열중할 때 우연히 만난 최선규 아나운서는 재정적 어려움이 있어 내가 직접 사회를 보며 콘서트를 할 거라는 얘길 듣곤 “우리 사이가 어떤 사이냐”며 직접 MC로 마이크를 잡았다.
찬양 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사람 숫자 보지 말자. 거리와 강사비 따지지 말자’고 다짐했던 나였는데 정작 콘서트 날짜가 다가오면서 밀려오는 인간적 생각에 주님 앞에 부끄럽기만 했다. 주님께 영광인 무대인데 얼마나 모일지를 걱정하고 있는 연약함이 창피했다. 답은 기도뿐이었다.
드디어 40주년 콘서트 날. 긴장과 떨림, 설렘 속에 막이 올랐다. 주님은 내 간절한 기도를 기적으로 답하셨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트홀 1,2층, 복도까지 관객으로 꽉 들어차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티켓 판매 대신 무료로 진행된 40주년 콘서트는 또 하나의 특별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콘서트 현장에서 모인 후원금으로 나처럼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들을 위해 목발과 휠체어를 전달하기로 한 것이다.
하나님은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콘서트를 통해 나를 또 깨우쳐 주셨다. 40년 동안 한없이 부족한 나를 이끌어 주신 하나님의 은총 그리고 기도와 사랑으로 함께해 주신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눈물겨운 복음의 현장 속에서 주님 앞에 철들어 가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7) 코로나 여파로 ‘셧다운’된 찬양, 유튜브 방송으로 이어가
대중음악에 비해 작은 생태계의 CCM
재정적 돌파구로 ‘유튜브’서 찬양 시작
전용대 목사가 2021년 9월 서울의 한 교회 예배당에서 기도하고 있다.
2020년 어느 날 베트남 선교 일정을 마치고 귀국 항공편에 올랐는데 승무원이 마스크를 나눠주고 있었다. ‘갑자기 무슨 상황이지?’ 코로나19 팬데믹의 시작이었다. 얼마 안 가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란 기대는 꽤 오랜 기다림을 필요하게 했다. 그리고 그 기다림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를 건드렸다.
수십 년 동안 집회에서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나누며 함께 찬양해왔다. 때로는 내 찬양을 필요로 하는 이들의 요청에 응답하려 전국은 물론 해외까지 분주하게 오갔다. 또 때로는 무대에 설 기회가 드문드문 들어와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야말로 ‘셧다운’은 처음이었다.
대중음악에 비해 생태계가 작고 견고하지 못한 CCM 가수들은 현실적 고민을 달고 살기 마련이다. 무대에 임할 때마다 내가 주님을 찬양하기 위함인지 먹고 살기 위함인지를 두고 스스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40년 넘게 무대에 서 온 나 역시 집회의 강사비, 음반 수입, 성도들이 소중한 옥합을 깨서 주시는 후원들로 기적 같은 ‘복음 행전’을 이어온 게 사실이다.
늘어나는 숫자는 마이너스 통장뿐인 상황, 장기전세 대출 이자를 상환하는 것마저 버거운 재정, 오랫동안 도와왔던 터라 후원을 멈출 수 없는 공동체들. 무엇보다 찬양 사역자로서 영적으로 흐트러져 있는 상황이 나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때와 장소에 맞게 주님의 종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하셨다. 도구는 바로 ‘유튜브 방송’이었다. 전문적인 장비 하나 없이 방 안에서 방송을 켜놓고 입술을 열어 주님을 찬양했다. 이렇게라도 찬양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했지만 아파트 주거환경 특성상 찬양 소리마저 작게 내야 하는 답답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안타까움이 더해갈 때쯤 주님께선 동역자들을 보내주셨다. 오랜 인연을 맺어 온 ‘수와 진’ 스튜디오와 연결돼 방송을 이어갈 수 있었고, 여러 가지 비용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땐 윤석전 연세중앙교회 목사님의 배려로 찬양이 멈춰지지 않을 환경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유튜브의 바람을 타고 방송이 전달될 때마다 관객석 대신 찬양의 자리를 지켜 준 구독자들이 댓글로 나를 찾아와 주셨다. 특히 1980~90년대 큰 사랑을 보내주셨던 성도님들을 방송을 통해 만날 수 있었다. ‘사실 저는 목사님 싫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기도로 함께 하는 팬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목사님 찬양을 켜두고 계셔서 어느샌가 팬이 되었어요’ ‘힘내세요. 기도로 함께합니다’ 등의 고백들이 댓글 창에 새겨지며 큰 위로를 줬다.
한 번은 주님께서 ‘1만원 찬양 사역 동역 후원자 200명을 모아보자’는 마음을 주셨다. 사역에 전념할 수도 있고 기도 동역자들과 더 가까워질 기회라 생각했다. 여기엔 또 하나의 교만함을 깨우쳐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었다. 솔직히 쉽게 채워 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수십 일이 지나도 50명 선에 머물렀다.
‘주님 뜻 품으며 함께하는 1원이 이토록 소중하구나.’ 나는 이렇게 함께해주신 후원자님들을 열방에 주님을 찬양하라고 파송해 주신 분들이라 표현하고 싶다. 그렇게 세상의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를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8) 직장암 투병 중 일본 집회 강행… 탈장으로 실신까지
암 판정 후 방사선 치료 날짜 기다리던 중
일본 노숙자 선교 단체 희망선교회 집회
투병 중이지만 도저히 포기가 안 돼 참석
전용대 목사가 지난해 5월 1차 항암 치료를 받은 뒤 서울의 한 병원에서 회복 중인 모습.
“다리도 불편한데 암까지. 하나님이 너무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직장암 투병 소식이 알려진 후 사람들에게 종종 듣게 되는 질문이다. 내 답변엔 주저함이 없었다. “하나님 성전인 몸을 관리하지 못한 제 잘못인데 하나님께 어떻게 원망을 합니까. 그저 매일 매 순간 감사입니다.”
가족력도 없었기에 암이 내게 찾아올 것이라곤 상상도 못 했다. 건강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가족을 향한 미안함, 준비돼 있지 않은 재정이 늘 마음에 쓰였다. 그동안 주의 종 아내로 많은 어려움 중에도 묵묵히 기도로 살아온 아내, 장애가 있어 불편한 몸 때문에 제대로 놀아주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것도 못 해줬는데 투병 생활에 대한 아픔을 줘야 했던 두 딸이 가슴에 사무쳤다.
지난해 3월 초, 암 판정 후 방사선 치료를 먼저 하기로 하고 치료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집회들은 다 내려놓을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 열리는 노숙자 선교단체 희망선교회의 초청 집회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었다.
기도로 준비한 집회를 무사히 마친 후 귀국을 앞둔 아침,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숙소에서 기절했다 깨기를 네 차례나 반복하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연락이 닿지 않아 위급하게 숙소로 들어온 스태프들의 도움으로 다행히 몸을 추슬렀다. 직장암 여파로 탈장이 일어난 거였다.
극적으로 비행기에 탑승한 뒤 고통을 참으며 김포국제공항에 마중 나온 아내와 함께 곧바로 신촌 세브란스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의료진은 탈장된 부분의 원상 복귀를 시도했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나는 수술대에 올라야 했다. ‘주님, 주의 종의 몸은 주님 것이니 예비하신 계획대로 보살펴 주소서.’
수술 후 병실로 옮겨진 내가 천천히 눈을 뜨자 집도하신 교수님이 말했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잘 됐습니다. 일본에서부터 탈장된 부분에 상처 없이 귀국한 것이 기적이었습니다.” 생명에 치명적인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지만 결국 영구적으로 항문을 닫고 장루를 설치해야 했다.
소식을 들은 주변에선 걱정이 앞섰다. 영구 장루를 설치하고 나면 오랫동안 밖에 나가지 못한 채 요양생활을 해야 한다는 얘기도 들렸다. 이번에도 주님은 내게 당면한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과 가족을 향한 미안함은 별개의 문제였다.
한쪽 다리에 힘이 없어서 회복에도 어려움이 따르는 병실에서의 생활은 고스란히 아내의 고생으로 이어졌다. 묵묵히 병간호하며 병원비 걱정까지 하는 아내를 바라볼 때마다 그동안 사역자의 아내로 뭐 하나 제대로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에 눈물만 쏟아졌다.
일반 환자보다 다리가 불편한 나의 회복 시간은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치료에 임하는 내게 의료진들은 용기와 위로를 줬다. 그리고 부족한 종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 주시는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 특히 전용대를 응원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 ‘나 주와 살리, 쾌유를 위한 콘서트’를 준비해 준 CCM 찬양 사역자들을 생각하면 말로 못다 할 감격을 느낀다. 퇴원이 가까워오며 병원비 걱정을 붙들고 있을 땐 이번에도 윤석전 연세중앙교회 목사님이 해결사로 나서주셨다. 그렇게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지고 퇴원을 했다.
***[역경의 열매] 전용대 (29) 라이브 찬양 방송으로 나와 같은 환우들에게 위로를
죽음의 문턱까지 오가던 항암 치료 중
후배 찬양 사역자로부터 큰 위로 받고
찬양과 복음을 콘텐츠로 전하기로 결심
전용대(가운데) 목사가 지난해 9월 유튜브 채널 ‘드림의 시간’에서 찬양하고 있다.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암과의 사투가 시작됐다. 어느 정도의 고통을 내 몸으로 막아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첫 항암치료부터 응급실에 실려 가 받았다. 사투는 상상했던 것보다 고된 일이었다. 1차 항암치료를 마친 후 나흘 동안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구토만 쏟아냈다. ‘하나님, 제발 손톱만큼이라도 고통을 줄여주세요.’ 매일 아침 하소연하는 기도가 하염없이 나왔다.
2차 치료 때는 아예 입원을 했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채 치료를 받고는 담당 교수님의 진단을 들으러 갔다. “혈액 검사 결과가 잘 나와서 항암치료를 예정대로 할 수 있겠네요. 구토 완화제를 더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1차 치료 때보다 좀 수월할 겁니다.”
환자가 예정대로 치료받는다는 얘기이고 구토로 고생했으니 증상을 완화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해준다는 이야기였다. 누군가에겐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얘기일 수 있겠지만 그 말이 마치 죽음 문턱에서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들렸다. ‘아, 이게 암 투병 환자의 마음이겠구나’ 싶었다.
1차 치료 때와는 사뭇 나아진 상황 속에 치료를 이어가던 어느 날 후배 찬양 사역자 송정미 사모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시 후 영상으로 전환된 화면에는 최미 선교사님, 최명자 손영진 송정미 사모님까지 네 사람의 화음이 어우러진 찬양이 뮤지컬처럼 펼쳐졌다. 하염없이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암 투병 과정에 있다고 해서 신앙과 찬양의 리듬을 잃지 말자. 나 같은 환우들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고민의 결과는 유튜브 라이브 방송으로 이어졌다. 복부에 장루를 설치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찬양할 순 없었지만 동료들의 도움으로 찬양과 복음을 콘텐츠로 전할 수 있었다.
유튜브 라이브 찬양 방송 ‘드림의 시간’이 진행되는 동안 댓글 창에선 놀라운 반응들이 샘솟았다. 암 환자들은 물론 여러 상황으로 고난 중에 계신 분들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자신을 무당이라고 소개한 한 시청자의 고백은 지금도 생생하다.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태어나 처음 예수님이 궁금해졌습니다. 귀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우울해하며 무기력한 모습으로 삶을 포기한 자입니다. 무너뜨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귀신들은 목사님을 참 싫어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쓰러질 뻔한 나를 또 새롭게 복음의 도구로 쓰셨다.
그런 중에도 주님은 내게 감사의 제목을 또 찾게 하시며 주위를 보게 하셨다. 나는 조금 알려져서 이렇게 큰 사랑을 받지만 가족도 없는 소외된 분들은 그 누구보다 사랑이 갈급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유튜브 방송을 할 때마다, 또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서 부탁을 드린다. 가장 가까이 있는 분들에게 힘내시라고 한마디만 해달라고 말이다.
건강할 때는 주변에 연락을 잘하다가도 병들면 연락을 끊고 마는 게 현실이다. 환자는 누구에게든 연락 한 번 하기가 쉽지 않다. 부담이 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하나님 은혜로, 많은 분들의 기도로 항암치료를 잘 마쳤다. 지금은 방사선 치료가 이어지고 있다. 또 다른 고민이 생긴다. ‘더 회복한 뒤엔 주님 주신 사명에 충성하며 어떻게 주님을 찬양하면 좋을까.’
***[역경의 열매] 전용대 (30·끝) 오직 주님만이 내 세상… 복음 전파는 주님의 명령
복음가수로 46년 한 길만 걸으며
감당하지 못할 큰 사랑 받아 감사
주님 향한 고백을 찬양에 담아서
구원받는 역사를 위해 달려갈 것
46년 복음가수로서의 ‘외길 인생’을 살아온 전용대 목사의 삶은 ‘주님만이 내 세상’이라는 고백으로 요약된다.
육체적 장애인으로 사는 건 여전히 갈 길이 먼 사회적 인식으로 인해 정신적 고난을 감당해야 하는 현실과 맞닿아 있다. 사실 장애인에 대한 인식과 환경이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일상 속 차가운 시선들은 순간마다 감사를 찾게 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쉬이 극복하기 어렵다.
어떤 이들은 때로 내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당연히 천국이라는 결승선까지 완주자로 살아가는 것이고,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주어진 사명에 충성하며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고백한다.
물론 현실적인 부분도 없지 않다. 나도 이 시대의 가장(家長) 중 한 사람임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집 한 칸이라도 내 이름으로 허락되길 바라는 마음, 사역을 위해 묵묵히 희생해 준 가족의 건강, 지속 가능한 수입원을 창출해 복음 사역에 임할 수 있는 여건 등 다양한 상황들이 원만하게 해결되길 바라는 소망이 간절하다.
사실 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신학 공부를 한 사람이 아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 속에서 나를 찾아와 주신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그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 공부했었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 크고 작은 교회의 청빙부터 교회 개척 제안을 받기도 했다. 교만한 마음에 나 자신이 부족한지도 모르고 마음이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기도할 때마다 주님은 오직 당신에게 찬양하는 삶을 재촉하셨다.
그렇게 찬양 사역을 시작한 이후로 늘 가슴에 품었던 공간이 있었다. 언제든 지친 마음을 안고 찾아가도 가슴을 위로하는 찬양이 흐르는 공간이다. 그동안 부족함 투성인 내게 과분한 사랑을 보내주시고 무대 위에 세워 주신 한국교회와 성도님들께 작은 밀알이 되어 빚진 사랑을 갚을 수 있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돌아보면 주님이 아니었다면 이미 이 땅에 존재하지도 못했을 삶, 살아있다 해도 소망이라곤 없이 호흡만 달린 삶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기도의 끈을 놓쳐 버릴 땐 여전히 다시금 교만을 걱정해야 하는 연약한 존재다. 생각지도 못했던 암 수술과 항암치료를 잘 마칠 수 있도록 지켜주신 주님이 남은 방사선 치료까지 방패막이 같은 손길로 함께해 주실 것이라 믿는다.
복음가수로 46년째 한 길만 걸어온 나는 한국교회에 ‘빚진 자’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여정이었다. 한국교회 처소마다 예비하신 주님의 종들이 기도와 사랑을 덧대어 주셨기에 가능했다. 감당하지 못할 큰 사랑을 받았기에 더 많이 엎드려 기도하며 겸손히 나아가며 최고의 것으로 주님께 찬양드리는 종으로서 살아야 함을 고백한다.
오직 주께서 길을 내시고 가지를 쳐주신 삶을 ‘역경의 열매’란 이름으로 성도들과 나눌 수 있었음 또한 기적이며 과분한 행복이었다. 오직 주님만이 내 세상이었던 인간 전용대의 삶은 죽음 가운데 복음 덕분에 살아났기에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는 삶이었다.
복음 전파는 주님의 명령이다. 그 길을 순종하며 주님을 향한 나의 고백을 찬양에 담아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찾으며 구원받는 역사를 위해 달려갈 것이다. 오늘도 고백한다. “나는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주님이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