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감록
중국 주나라 말기부터 성행하기 시작한 도참(예언을 믿는 사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갖가지 비결서의 형태로 그 모습을 잦추었는데 조선 중기 이후 민간에 성행하였던 국가 운명에 관한 대표적인 예언서가 정감록이다.
민간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뿌리깊은 계룡산 천도설은 이 책과 불과분의 관계를 맺고 있어 정부가 대전 수도이전론을 제창하면서 부터는 그 진가(?)가 더욱 확실해 졌다고 볼 수 있다.
그 효력이 있어 정부 제3 청사가 들어서고 지금도 세종시 문제로 시끌 시끌....
민감한 정치,사회 문제여서 노 코멘트지만. 정감록이란 이름의 뜻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李心(이심)과 조선 멸망후 들어설 정씨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눔면서 조선 이후의 역사를 얘기하는 감결(鑑訣)이고 이 감결에다 의상대사의 산수비기, 도선국사의 도선비결,무학대사의 무학비결, 남사고 선생의 남사고 비결, 용호대사 정염선생의 정북창비결, 이 토정선생의 토정가장결과 그 밖에 원효대사, 서산대사,유형원, 이율곡등 수십명이 저술한 비결들이 합쳐진 한국비결의 완전 집대성판이 정감록이다.
그 감결의 핵심 내용은 이씨의 한양 백백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 수백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의 가야산 몇백년 또 그 다음은 범씨의 완산(完山) 몇백년이 이어지며 재차 왕씨(王氏)의 송악(개성) 시절이 온다.
그 중간에 갖가지 재난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지러울 것이다.
난리가 나면 십승지 이름 붙혀진 보은의 속리산, 안도의 화산, 남원의 운봉, 전북 무안의 호암, 무주의 무풍, 강원도 영월, 경북의 예천, 풍기의 금계촌,공주의 계룡산, 합천의 가야산 등의 열곳으로 피난가면 살수 있다고 했다.
정감록은 명칭도 다양하다.
정이 감여론, 정이 문답, 정감록, 감결, 정인록 등이다.
혹자는 우물정자로 바꿔 정감여록이라 하기도 한다.
명칭이 다양한 만큼 그 속에 숨어있는 내용도 다양한 각도로 해석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
비기 혹은 비결은 비밀 스러운 기록을 말한다.
일반 민중들은 알아선 안되는 내용이기에 대개 통치권을 장악한 군주들에게만 몰래 전달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 도선국사가 저술한 도선비기도 왕건에게만 전해졌다는 설이 있다.
따라서 민중에게 널리 유포된 비결들은 가치의 측면에서 그다지 논할 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런데도 몇백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까지 숨을 쉬는데는 그 나름대로 까닭이 있다.
대개의 비결서들은 일반인들이 지식체계를 뛰어 넘거나 혹은 거스르는 야릇한 상상체계로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비의는 뜻을 알 수 있는 사람에게만 보이도록 고안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보부의 암호체계가 자폐아동의 눈에 띄는 이치와 비슷하다고 할까
정감록에도 이러한 면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문적으로 이를 연구한 학자들의 견해는 보잘것 없는 후대의 위작이라는 것으로 중론이 모아진다.
고려를 얘기하며 조선초기에 개명한 지명이 등장하기도 하고 조선초기에 이루어진 도참서의 분서갱유때 정감록이 보이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가바로 그런 결론을 뒷바침 한다.
광해군이나 인조이후의 모든 혁명운동에는 빠짐없이 정감록의 에언이 거론 되었다.
곧 국정의 문란과 끊임없는 전쟁 그리고 당쟁의 틈바구닝서 허덕이던 백성들에게 쇼펜하우어식 새로운 생의 의지를 불어 넣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점에서 높이 평가 될 수 이다.
그러나 반면 우매한 백성들이 이 책의 예언에 따라 십승지의 피장처를 찾아 나서고 사이비 종교들이 악용한 점은 분명한 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참서(讖書)의 하나인 이 책은 여러 비기(祕記)를 모은 것으로, 참위설(讖緯說)· 풍수지리설·도교(道敎) 사상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졌다.
조선의 선조인 이담이란 사람이 이씨의 대흥자가 될 정씨의 조상인 정감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라는 말도 전한다.
이런 까닭에 그 종류가 40∼50종류에 이르며 정확한 저자의 이름과 원본은 발견되지 않았다.
현재 이 제목이 붙은 책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① 규장각본 《정감록》:필사본. 1책,
② 김약술(金若述) 소장본《정감록》:필사본. 1책,
③ 김용주(金用柱) 발행 《정감록》:활자본. 국판. 163면. 1922년 발행,
④ 《비난정감록진본(批難鄭鑑錄眞本)》:활자본. 4×6판. 100면,
⑤ 자유토론사 장판(自由討論社藏版) 호소이 하지메[細井肇] 편저 《정감록》:4×6판 등을 들 수 있다.
내용은 조선의 조상이라는 이심(李沁)과 조선 멸망 후 일어설 정씨(鄭氏)의 조상이라는 정감(鄭鑑)이 금강산에서 마주앉아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엮어져 있는데, 조선 이후의 흥망대세(興亡大勢)를 예언하여 이씨의 한양(漢陽) 도읍 몇백 년 다음에는 정씨의 계룡산(鷄龍山) 도읍 몇백 년이 있고, 다음은 조씨(趙氏)의 가야산(伽倻山) 도읍 몇백 년,
또 그 다음은 범씨(范氏)의 완산(完山) 몇백 년과 왕씨(王氏)의 재차 송악(松嶽:개성) 도읍 등을 논하고, 그 중간에 언제 무슨 재난과 화변(禍變)이 있어 세태와 민심이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차례로 예언하고 있다.
현재도 전해오고 있는 것은 이 두 사람의 문답 외에 도선(道詵)· 무학(無學)·토정(土亭)·격암(格庵) 등의 예언집도 있다.
이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85년(정조 9) 홍복영(洪福榮)의 옥사사건 기록에서 나온다.
비록 허무맹랑한 도참설·풍수설에서 비롯된 예언이라 하지만,
당시 오랜 왕정(王政)에 시달리며 조정에 대해 실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