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고보서 강해
심 상법 목사(총신대 교수)
야고보서의 서론과 개요
1. 서론
현재의 한국교회의 신앙과 윤리의 불균형과 이원론적 모습은 ‘성경적인 영성’과는 매우 거리가 먼 모습이라고 여겨진다. ‘윤리 없는 영성’으로 인해 때론 사회의 지탄이 되고 있는 한국교회의 상황 속에서 야고보서 읽기는 우리에게 참된 경건과 성숙을 일깨우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1;26-27): 성숙한 언어생활; 자비(돌봄)의 행위; 세속에 물들지 않음. 야고보 서신은 우리 시대의 ‘지푸라기 서신’이 아니고 분명 ‘정경’(Canon)으로서의 읽혀져야 할 복음이다.
1) 저자(약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
* 여기에 언급된 저자 야고보(James)는 누구인가?
- 요한의 형제며 세베대의 아들인 사도 야고보(막 1:19; 5:37; 9:2; 10:35; 14:33; 행 12:2[순교])
-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행 1:13; 막 3:18; 15:40): 제롬
- 사도 유다의 아버지(눅 6:16; 행 1:13)
- 문학적 인물(?)
- 예수님의 동생(갈 1:19)인 ‘의로운 야고보’(James the Just)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첫 감독인 야고보(막 6:3; 행 12:17; 15:13-21[13]; 21:17-26[18]; 고전 15:7; 갈 2:9)는 성령의 특별하신 은혜와 사역으로 급속히 성장하는 교회의 담임이자 지도자로서 아마 그 당시 흩어진 전체 유대 기독인들의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문제를 회신한 것 같다.
* 자신에 대한 언급(“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dulos]”): 우리의 현실과 너무나 대조적이다
- 어떤 사람에게 소속되고 그를 섬기는 자
-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에 영원히 복종하는 관계
-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자
- 위대한 왕을 섬기는 직무의 권위를 나타내는 이름 곧 기독교 지도자를 가리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에 대한 위의 고백은 이 세상 한 복판에 서서 ‘정함이 없이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신자들(교회)에게 중대한 결단을 촉구한다. 세상에서의 안전과 보장을 얻기 위하여 물질(부)에 빠져있다던가 세상과 짝한 자의 삶에 ‘주되심’에 대한 교훈은 큰 도전이 된다. 무엇보다도 주의 형제인 야고보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큰 귀감이 된다. 우리 같으면 얼마나 뽐내고 거만할까?
2) 수신자(약 1:1):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the twelve tribes in the Diaspora)
구약성경(1:25; 2:8-13)과 회당(2:2)에 대한 언급과 구약과 관련된 은유들을 많이 사용한 점등으로 미루어 ‘디아스포라(Diaspora)의 유대기독인들’(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들)이 아닌가 추정한다(역사적/문자적 의미). 그리고 은유적 의미로서는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고향을 잃은 실향 유대기독인들(주로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 혹은 확대적 해석으로서는 ‘세상에 흩어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3) 쓴 시기: AD 62년 전(62년에 순교).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대제사장(Ananus II)을 위시한 산헤드린이 로마총독 Albinus의 부재 時(AD 62년경)에 야고보를 돌로 쳐죽임(후에 대제사장이 실각됨). 그러므로 쓴 시기를 62년 이전으로 간주한다.
4) 역사적 상황
- 행 8:1-4의 대 핍박으로 인해 흩어짐
- AD 49년 로마의 추방령(행 18:2)
- AD 62년 야고보 감독의 순교와 64년 네로 황제의 대화재(大火災) 사건.
5) 교회의 상황: 한 세대를 지니면서 교회는...
- 핍박과 시련가운데 있는 교회: 사회적 안전, 정착 그리고 동화심리가 형성되어 교회는 물질화.
- 죽은 정통으로 굳어지는 교회: 삶(행위)이 없는 신앙고백과 시기와 비방의 미성숙한 설전(舌戰).
- 이기적인 종교로 정착해 가는 교회: 귀족화, 차별과 외모, 이기적 교회(2:1-13)로 교회내의 연합 과 사랑과 자비가 깨어진 모습.
- 세속화되어 가는 교회(1:27).
6) 야고보서의 특징
- 강력한 설교체로 구성: 목회(설교)자로서의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야고보(‘새 언약의 아모스’)
* 108구절 중 59구절이 명령문( imperative)으로 사용.
* 강한 주의집중이 요구: “보라!”(3:4, 5; 5:4).
* 교회주변의 실제적 모습을 제시(2:2-3; 2:15-16; 4:13).
* 많은 직유적 표현들: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물결(1:6);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1:10-11);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1:23-24); 말의 재갈(3:3); 배의 키(3:4);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3:6);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3:8); 샘(3:11);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4:14); 농부의 기다림(5:7).
* 예화들: 구약의 아브라함과 라합(행함이 있는 믿음), 욥(인내), 그리고 엘리야(기도).
- 사랑 어린 호소: “사랑하는 형제들아!”(1:2, 16, 19; 2:1, 5, 14; 3:1, 10; 4:11, 5:7, 9, 10, 12, 19)
7) 중심단어들: 반복되는 단어들에 의해 중심주제들을 전달.
- 시험(1:2, 3[시련], 12-14[6x]);
- 기도(1:5-6[지혜를 구함]; 4:2-3[응답 받지 못하는 기도]; 5:13-18[고난과 병중에서]);
- 지혜(1:5; 3:13, 15, 17);
- 행함(12[+3]x)과 믿음(13[+1]x)(2:14-26; 1:25; 2:1; 3:13; 4:17);
- 율법(1:25; 2:8-12[5x]; 4:11[4x]);
- 말/혀(1:19-20, 26; 3:1-12);
- 부자와 가난한 자(1:9-10; 2:2-6; 15-16; 5:1-6);
- 인내(1:3-4; 5:7-12);
- 온전함(1:4[인내로]; 2:22[행함으로]; 3:2[말로]).
2. 서신의 개요와 중심내용
↘ ↓ ↙
흩어진 외부적 시험 기도가 요구(엘리야) ↗연합
(diaspora) - 여러 가지 시험들 -> 행함의 신앙(아브라함과 라합) -> 참된 경건(온전)→사랑
크리스천들 내부적 시험 인내가 요구(욥) ↘긍휼
↗ ↑ ↖
흩어진(Diaspora) 유대기독인들이 로마의 지배 하에서 받는 많은 외부적인 시련들과 시험들(핍박과 차별로 인한 사회적 안전의 위협)이 내부적(공동체와 개인) 시험들을 야기함으로써 여러 가지 시험들을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자는 인간적인 방법(세상적 지혜)을 추구하여, 세상과 짝하게 되고, 부(富)를 추구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안전을 보장받는 유일한 길로 남는다. 이 경우 외적 시련은 내적 갈등을 야기하여 공동체 내에서 서로간에 불평과 시기와 비방과 저주와 싸움의 모습(언어적 불경건)을 갖게 되며, 부(富)를 안전으로 삶기 때문에 서로(가난한 자들)를 돌보는 자비와 봉사의 삶이 없어지고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인내가 바닥나게 된다. 결국 세속적인 기회주의나 물질만능주의와 위선적 신앙으로 참된 경건을 상실하게 된다.
2) 중심내용
- 믿음(faith)과 시련(testing/temptation):
믿음의 시련은 인내(참음)를 통해 온전한 성품을 완성해 간다(1:2-4).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시험(유혹)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시험은 사탄과 세상과 정욕으로 나오며 시험의 승리는 우리의 파괴적인 잘못된 정욕으로부터 자신을 제어하는 것으로서 시험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께로부터 받는다.
- 믿음(faith)과 행함(action): 실천적인 믿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산 믿음이 되기 위해서는 행함으로 나타나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란 죽은 믿음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단순한 지적 동의(텅빈 종교적 고백)를 의미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진 실천적 고백(살아있는 고백)을 의미한다. 이 믿음은 아브라함과 라합의 믿음의 역사(2:23-25)와 욥의 믿음의 인내(5:11)와 엘리아의 믿음의 기도(5:17)를 의미한다. 이들이 보여준 믿음의 모습은 시련(시험)가운데서 보여진 행동하는 실천적 믿음의 모습으로서 희생의 실천적 믿음(아브라함)과 자비(돌봄)의 실천적 믿음(라합), 그리고 인내의 실천적 믿음(욥)과 기도의 실천적 믿음(엘리아)을 의미한다.
* 하나님의 지혜는 기도로 주어지지만(1:5) 그러나 행함으로 나타남(3:13-18).
*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지킴으로
* 세상과 짝하지 않음으로(세속이 물들지 않음)
- 율법(Torah)에 대한 이해
야고보는 율법을 ‘자유의 율법’(2:12) 또는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1:25)으로 부르며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범이며 척도가 된다. 이것은 주로 십계명을 내포하는 것으로 온전하게 지켜져야 한다. 이 율법은 ‘이웃사랑의 율법’을 중심 축으로 하여 제시된다(2:8). 특별히 야고보서의 실천적 믿음의 내용이 레위기 19장의 율법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레 19:15(차별[2:1, 9]); 레 19:16(중상모략과 악한 말[4:11-12]); 레 19:13(임금착취와 지체[5:4]); 레 19:18a(복수 혹은 원망[5:9]); 레 19:12(맹세[5:12]); 레 19:17(이웃에 대한 미움과 돌이킴[5:20]). 이러한 율법의 실천에 대한 이해는 복음서(주로 마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교훈)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결국 (이웃)사랑의 율법의 의미는 토라(Torah)의 본문 속에 표현되었고 예수님의 말씀 안에서 확인된 것이다.
- 말(speech)과 행위(behavior)의 일치:
말씀을 듣는 자는 말씀을 실행하는 자가 되어야한다(1:22-25). 이것은 모든 율법을 온전하게 준수함을 요구한다(2:8-11). 언행의 일치와 혀의 통제는 참된 경건을 유지하는 길(1:26; 3:2-8)로서 신자는 한 입으로 축복(하나님께 대해서)과 저주(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들에 대해)를 해서는 안된다(3:9-11). 특히 공동체 내에서 시기와 비방과 비평의 악한 말들로 서로 상처 입혀서는 안되며(4:11-12), 거짓된 맹세나 약속을 하지말고, 바르고 진실한 언어생활을 유지해야 한다(5:12).
- 공동체적 상호배려와 관심: 진실한 언어생활과 형제사랑과 긍휼(자비)
야고보가 말하는 ‘참된 경건’은 단지 언행의 일치와 인격의 성숙을 의미하는 개인적 경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경건은 공동체(사회)적인 관심(이웃에 대한 관심) 속에서 잘 나타난다. 야고보가 언급하는 이웃은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공동체에 속한 형제와 자매들(2:2, 5)로서 가난한 자들에 대한 관심과 돌봄, 그리고 형제사랑의 실천가운데 진행되어야 한다(2:15-16). 그러므로 교회(신앙공동체)는 상호 돕고 돌보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지도자로부터 모든 성도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교회는 언어(말/혀)의 폭력과 남용을 피하고(3:1ff) 서로 사랑과 자비가운데 서로 죄를 고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 세속에 물들지 않고 진리로부터 낙오되지 않게 돌보는 진실한 교제를 이루어야 한다(5:16-20). 특히 장로들은 병든 자를 돌보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중에 특히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와 부자에 대한 편파적 사랑은 지양되어야 할 점이다(2:1-7). 그리고 이 이웃사랑은 신앙공동체의 경계를 넘어서 주변의 이웃(사회)으로까지 나아간다; 고아와 과부의 돌봄(1:27); 신분에 대한 차별금지(2:1-7); 전쟁과 살인의 금지(3:18-4;3); 세상의 부자들에 대한 경고(5:1-6).
3) 서신의 구조
구조를 이해하기 전에 먼저 야고보서가 일관성(통일성)있는 서신인지 아니면 다양한 도덕적 권면들을 모아놓은 도덕적 교훈집(디벨리우스)인지에 대한 장르적 논란이 요구된다. 특별히 약 1장은 ‘구조가 없는 구조“의 모습을 띄는데 여러 주제들이 뒤에 에세이 형식으로 확대되어 취급되는 일종의 주제적 색인(index) 형태로 나타난다. 약 1:2-4, 12-15의 인내에 관한 주제가 5:7-11에 나타나며, 약 1:5-7의 믿음의 기도가 5:13-18에 나타나며, 1:9-10의 부자와 가난한 자의 대조가 2:1-6과 4:13-5:6에 다시 나타나며, 1:12-18의 악한 욕심과 하나님의 은사(은혜)의 대조와 1:5-8의 참된 지혜의 본질이 3:13-4:10에 나타나며, 1:19-20의 혀의 사용의 주제가 3:1-12에 나타나며, 1:22-27의 도를 행함의 주제가 2:14-26에 다시 나타난다. 한 마디로 1장(2-27절)은 전체 구성의 요약(epitome)이다. 그리고 약 5:19-20은 전체 서신의 결어이다.
제 2 과: 언어생활과 참된 경건(약 1:19-2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이제 야고보는 ‘시련’(시험)에서부터 주제를 중생한 크리스천의 ‘언어생활과 경건 생활’로 전환하고 있다(18-27절). 소위 구원받은 일도 중요하지만 ‘구원 그 이후’의 삶을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심은 더 이상 우리가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고 의(義)의 도구(cf. 롬 6:18)가 되기 위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다(cf. 딛 1:14). 중생의 변화된 삶에 있어서 특히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점에서 본문은 중생으로 이끄는 ‘진리(하나님)의 말씀’에서 경건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말’로 전환된다(18-21절). 그리고 언어생활에서 이어지는 실천의 삶(‘도를 들음에 끝나지 않고 행하는 삶’), 특히 봉사의 삶(‘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삶’)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삶(‘세상과 짝하지 않는 삶’)은 야고보가 강조하는 ‘참된 경건’의 골격이 된다. 1. 신자의 언어생활(19-21절) 우리가 앞으로 보는 대로 신자의 언어생활(‘혀의 통제’)은 온전한 사람, 성숙한 사람, 경건한 사람의 척도가 된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2). 언어생활 특히 말의 윤리에 대한 문제는 야고보서의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이다. 이 문제는 현재의 단락에서만 언급된 것이 아니라, 2장(예배상황: 차별과 위선)에서도 그리고 3장(지도자의 언행)과 4-5장(공동체 내에서의 비방과 원망)에서도 이 주제는 반복되고 확장되고 있다. 야고보서의 108구절 중 54개의 명령문으로 제시된 중에 23개(직접) 혹은 29개(간접포함)가 언어 윤리와 관련된 것들이다(Baker 1995:6). 특히 흩어진 나그네(이민자)로서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며 사는 사람들에게 ‘언어생활’은 경건의 누수현상, 도덕적 해이의 수로(水路)와 같다. 여기서부터 구멍이 나기 시작하면 전인격적인 파멸로 나아간다. 신자의 언어생활은 세 가지 형태의 의사소통(듣기, 말하기, 그리고 성내기)을 통해 인격과 경건을 유지한다. 언어생활은 인내와 절제와 온유와 함께 악과 하나님의 의와 관련되어 있다. 1) 듣기와 말하기와 성냄(19-20절) - 듣기 : 속히 하고 - 말하기: 더디 하고 => 사려 깊은 언어생활은 경건의 척도 => 하나님의 의(義)를 이룸 - 성내기: 더디 하라 듣기의 중요성과 함께 과묵함(침묵)과 간결한 언변은 고대세계에서 지혜자의 모습으로 여겨졌다. 구약의 지혜서(잠언과 전도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물론 지나치게 과묵하고 간결한 언어와 지나치게 말이 많은 언어사이에 중용이 강조되었다. 달리 말하면 무조건 ‘침묵의 말’(혀)이 아니라 ‘절제된 말’(혀)을 말한다. 여기 ‘급한 혀’와 ‘많은 말’은 겸손(온유)과 인내의 부족을 들어내는 것으로 성내기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조급한 말, 자제하지 못하는 말, 그리고 수다스러운 말은 하나님의 의(義)를 이루지 못한다. 19절의 의사소통의 세 방편들(듣기, 말하기 그리고 성내기)은 이어지는 구절들에 다시 반복하여 나타난다. 분노의 문제는 하나님의 의와 관련하여 언급되고(20-21절) 듣기의 문제는 행함과 연관되고(22-25절), 그리고 말하기는 경건과 절제의 문제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다(26절). 특히 언어생활의 세 요소 중에 세 번째 항목인 성내기는 앞의 두 요소들의 결과로 여겨진다. 결국 언급된 의사소통의 세 요소들은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듣기를 속히 하는 일이 말하기를 더디 하게 하며 말하기를 더디 하는 일이 성내기를 더디 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야고보서의 강조는 중간의 두 번 째 항목인 ‘말하기’에 있다. 이 세 요소들을 우리의 삶에 비추어 묵상해 보라. 우리는 얼마나 듣지 않고 말할 때가 많은가? 듣지 않고 성을 낼 때가 많은가? 듣기는 경건한 언어생활의 시발점이다. 듣기는 구원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롬10:17) 우리의 일상의 윤리적 삶과 영적 성숙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통제된 말은 듣기에 의존하고 분노의 자제 또한 듣기에 의존한다. 이 듣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듣기가 우선한다. 경건한 언어생활은 말하기보다는 듣기(하나님 말씀이든 사람의 말이든)에 비중을 두라는 것이 지혜자의 교훈이기도 하다. 그리고 분노는 말로서 표출한다. 우리가 알다시피 화냄(성내기)의 표출은 대체적으로 언어로 나타난다: “따따따...”. 우리 가운데 ‘말하는 법’(how to speak)을 이미 다 배웠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우리는 아직도 ‘말하기’(speaking) 즉 ‘의사소통’(communication)에 자유롭지 못하다. 가까운 사이에 있는 사람들간(부부간이나 부모와 자녀간)의 싸움의 시발점은 주로 언어의 폭력(함부로/가볍게)에서 온다. ‘급한 혀’와 ‘많은 말’로 인한 화냄은 자신과 상대방에게 모두 해(害)를 끼친다. 특히 비방은 ‘말하는 사람’(speaker)과 ‘듣는 사람’(listener)과 ‘언급된 사람’(mentioned person) 모두에게 해를 끼친다. 말로서 ‘급히 성냄’(더러움과 악함의 발설)은 자신에게는 질병이 되고, 상대방에게는 상처가 되고, 하나님께는 욕됨이 된다. 정말 여러분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다”는 말을 삶의 현장에서 실감하는가? 특히 억압받는 상황 가운데 사는 사람일 수록 주로 언어를 통해서 폭력(복수)을 휘두른다: 시장바닥과 건달들. 지혜자의 교훈(잠언과 전도서)은 우리의 언어생활에 큰 통찰을 준다(잠 10:8, 14, 19, 31; 11:12-13, 18; 13:3; 14:3; 15:1-2; 17:27-28; 18:4, 6-7; 21:23; 29:11, 20; 전 5:1-2, 6; 6:11; 10:14; cf. 시 39:1; 141:3; etc). 지혜가 필요하다(1:5; 3:17). “급한 마음으로 노를 발하지 말라 노는 우매자의 품에 머무름이니라”(전 7:9)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잠 13:3)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온량한 혀는 곧 생명 나무라도 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4)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잠 17:27-28)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잠 18:4) “네가 언어에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바랄 것이 있느니라”(잠 29:20) 급한 말과 성냄, 그리고 온유함이 이 곳에서 대귀적 병행이 되며 ‘하나님의 의’(義)와 ‘구원’(救援), 마음에 심기운 ‘도’(道)가 이 단락의 메시지의 무게를 전달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언어생활의 윤리는 21절에서 마음속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일로 유지되어진다. 즉, 언사(言事)에 의한 도덕적인 불결과 악은 마음에 심겨진 하나님의 말씀을 삶(행위)에서 온전히/적절히 받아드림으로써 제약을 받는다. 어떻게 우리 마음 속에 생긴 더럽고 악한 생각들과 그 표현들을 절제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들음이 없이는? 다시 한 번 21절을 읽어 보라. 2. ‘들음이 없는 행함’[교만]과 ‘행함이 없는 들음’[위선](22-25절) <경구>: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A.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B.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B'.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A'.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참됨 들음’이 행함을 결정한다. 그러나 이 ‘들음’은 새 생명이 시작된 곳에서 진행되며(21절) 이것은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잊지 않고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즉 들음을 통해서 심겨진 ‘하나님의 도’(말씀)가 행함(행위)으로 표현되고 자라가야 한다: 번역(translation)과 성육화(incarnation). 들음에 대한 히브리적 개념은 순종과 행함을 포함한다. 즉, 히브리적 사고에서 듣고 행함은 결코 분리된 개념이 아니다. - 들음 - 듣고 잊어버림 - 듣고 기억함 - 듣고 기억하고 실행함 여러분은 어떤 부류(단계)에 속하는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변화와 개혁(고침)이 없는 사람(cf. 히 4:12; 딤전 3:16-17)은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다. 3. ‘참된 경건’(26-27절) 참된 ‘경건’(piety: 기독교의 ethos)이란 단순히 외관상의 종교의식(cultic)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윤리적 결과를 창출하는 것을 의미한다(cf. 호 6:6; 미 6:8; 사 1:10-11; 렘 7:21-28). 이것은 ‘자신’(절제와 통제)과 ‘이웃’(자비와 사랑)과 ‘세상’(순결)에 대해 바른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본문에 따르면 ‘헛되지 않는 경건’(worthless religion) 혹은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pure & undefiled religion)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 자신: 혀를 통제하는 삶(사려 깊은 언어생활) => 3장과 4:11-12 - 이웃: 사랑과 자비의 돌봄(고아와 과부를 돌아봄) => 2:1-26과 5:1-6 - 세상: 세속에 물들지 않음(사치와 방탕과 음란을 피함) => 4장 무엇보다도 종교적인 삶과 통제된 언어는 무관한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말(혀)은 그 사람의 마음과 경건(종교)을 표현한다. 특별히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일은 가장 필요에 처한 사람을 돌보는 일로서 구약과 신약 윤리의 중심에 서 있다(신 10:18-19; 14:29; 16:11, 14; 24:17-22; 사 1:17; 렘 5:28; 겔 22:7; 슥 7:10; 행 6:1-6; 딤전 5:3-16).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않은 삶은 세상 밖으로 나간 삶이 아니라 세상에 있으면서도 세속에 물들지 않고 도리어 세상을 변혁시키는 삶을 말한다. 제 3 과: 참된 신앙과 외관/차별주의(약 2:1-13)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2:1-13)" 1 장에서 야고보 감독은 참된 ‘경건’(piety)에 대한 서론적인 진술을 한 후에 이제 경건에 대한 주제들(언어생활[혀]; 돌봄의 생활[물질]; 거룩한 삶[세상])을 2-5장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2장에서 그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faith)과 ‘외모/차별주의’(favoritism)를 공동체의 상황가운데서 다룬(2:1-13) 이후에 연이어 참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여야 함을 구체적인 여러 예들을 통해 설파하고 있다(2:14-26). 여러 가지 시련(특히 정치-경제적인 시련)가운데 처한 공동체가 사회적 안전을 위해 외모주의 혹은 차별주의에 빠지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동은 참 신앙 혹은 경건(영성)과 상치되는 죄악된 행동이다. l. 결론적 요약(1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2. 공동체 내의 차별주의의 예화(2-4절) 3. 구약의 선례에 기초한 논쟁(5-13절): 이웃사랑과 긍휼 1. 참된 믿음은 사람을 외모로 취급하지 않는다(1절) 야고보 감독은 1절에서 결론적 요약(“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을 먼저 제시한 후에 그에 대한 공동체 내의 가상적 예증(2-4절)과 함께 그것을 설명하고 논증하여 ‘이웃 사랑’의 율법(레 19:18)을 지킬 것을 설파한다. 특히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외모주의 혹 차별주의(favoritism)는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상호 모순되는 사상과 행동임을 천명하고 있다. 어떻게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이와 같은 차별의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신다(레 19:15; 신 10:17; 삼상 16:7; 욥 34:19; 마 22:16; 롬 2:11; 갈 2:6; 엡 6:9; 골 3:25; 벧 1:17). 예수님 역시도 그의 공생애 동안 사람들을 외모로 취하시지 않으셨다(막 12:14; 눅 20:2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나사렛 예수를 영광의 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거나 그로 인해 차별을 할 수 있나? 이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전적으로 위배되는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저자는 이러한 사실을 예화를 통해 제시하고 있다. 2. 가상적 예화(2-4절) 이 예화는 예배의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거나 아니면 법정재판의 상황(Ward 1969:87-97)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2절). 왜냐하면 여기 언급된 회당(synagogue)은 예배의 모임과 법적 모임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이 예화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외모주의 혹은 차별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예화에서 저자는 두 사람의 차별을 의상(계층)에 의해 구별하고 있다. 2-3절이 조건문이고 4절이 귀결문이다. 1). 두 종류의 방문자들(계층의 사람들) -----------> 가상적 교인들 혹은 방문자들 -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 -> 좋은 자리 의상에 의해 묘사된 사람(‘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은 사회적인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귀족/부호/권력가)으로서 그 당시에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자유를 줄 수 있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사람들에 해당한다. 이러한 모습은 자신의 부(富)를 나타내는 로마문화의 표식이기도 하다. 그 당시 로마에서는 특별한 날들을 위해 가락지들을 빌려주는 상점까지 있었던 것을 볼 때 어느 정도 그 모습을 감안할 수 있다. 물론 유대적 관습도 가능하다. -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들 -> 서있게 하거나 발등상 아래(바닥)에 앉게 함 언급된 이 사람은 거지나 천한 신분의 사람으로 보인다. 그래서 이들에 대해서는 차별적/모멸적 대우를 하고 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행동을 취할 수 있는가? 그런데 마 25:35-36에서 주님은 이와 같은 사람들의 모습으로 오신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마태복음의 이 구절들은 테레사 수녀가 즐겨 인용하는 말씀이다. 4절에서 저자는 2-3절의 공동체 내의 이러한 행동은 엄연한 차별이고 악한 생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위의 가상적 상황은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모습을 잘 지적해 주고 있다. 특별히 교회는 특정 계층에 대한 편애나 외관주의에 빠져서는 안 된다. 물론 이 말씀은 부자를 멸시하고 가난한 자를 선호하라는 교훈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는 지위(position)와 부(wealth)에 따라서 어느 정도 계층들이 그 안에 형성된다. 그러나 기독교적인 신앙이란 이 모든 계층의 현존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명령 표준에 따라 사람을 공평히 대해야 한다(신 16:19; 요 7:24). 그러므로 여기서의 강조는 계층(class) 자체에 대한 비판이라기보다는 외관주의(favoritism)에 대한 비판이다(cf. 마 26:11; 막 14:7). 우리는 자주 차이(distinction)와 차별(discrimination)을 구분할 줄 모르며 또한 다름(difference)과 틀림(wrongness)을 구별할 줄 모른다. 평등(equality)을 획일 혹은 동일(sameness)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다. 인간의 본성(죄성)은 언제나 외관주의 혹은 차별주의로 흐른다. 흔히 자신에 대해서는 평등(equality)을 주장하다가도, 남에게 대해서는 편애(favoritism)로 나아가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사실 교회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이지 구별된 계층을 가진 사회적 집단이 아니다. 돈과 학벌과 지연, 그리고 권력에 대한 교회의 애착과 편중은 복음의 참 모습을 가리는 행위다. 3. 외관주의/차별주의의 불합리성과 부도덕성(5-13절) 외모주의 혹은 차별주의(favoritism)는 기독교의 신앙 혹은 경건(영성)과 정면 대치되는 행위이다. 이런 까닭에 야고보 감독은 반복된 수사적 질문으로 몰아치고 있다(5-7절). 이러한 차별적 행동은 일반적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되는 행동(5-7절)이며 또한 성경적으로 생각해 봐도 더 그러하다(8-12절). 특히 5-7절은 가난한 자들을 이같이 차별(멸시)하는 행동은 가난한 자들을 택하신 하나님 편에 있기보다는 교회를 핍박하는 부자 편에 있는 행동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행동과 이들의 행동이 상호 반대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신앙과 대치되고 율법과도 대치된다. 1) 하나님의 구원(택하심)을 생각하라(5절. cf. 고전 1:26-31; 고후 8:9) 야고보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 사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의 대부분은 부자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름 받은 주님의 제자들도 그들의 신분이 사회적으로 출중한 사람들이 아니다. 이점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다. 2) 악한 사회적 상황과 경험들이 그것을 입증한다(6-7절)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압제자이고 법정고소자들이며 예수의 이름(“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한 자들로 언급하고 있다(6-7절). 어떻게 이런 자들을 편애할 수 있는가? 외모주의 혹은 차별주의 모습이 오늘의 사회의 현실이고 어쩌면 신앙 없는 세속화된 교회의 현실인지도 모른다(cf. 고전 6:1-6). 그런데 오늘 교회가 이러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3) ‘최고의 법’인 이웃사랑의 법(레 19:18)을 어기는 행위이다(8-13절) 특히 약 2:8-9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행위는 단순히 자신의 취향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범법행위임을 지적하고 있다(8-9절). 특히 최고의 법인 ‘이웃 사랑’의 계명을 어긴 죄이다. 결코 부수적인 죄나 부차적인 죄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이러한 외모주의 혹은 차별주의의 행동은 살인(폭력)이나 간음(음행)과 다를 바가 없는 범법행위이다(10-13절). 그리고 사랑하기에 실패한 자, 즉 자비를 베푸는데 실패한 자는 자신도 자비 없는 심판가운데 처할 수밖에 없음을 명심하여야 한다(13절; cf. 마 25:31-46). 이처럼 야고보 감독은 외관주의가 믿음을 벗어난 얼마나 잘못된 행동(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범법의 행동)인가를 신랄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자인 우리는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할까? 과연 우리의 믿음과 경건과 영성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이점에 있어 인종차별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해야 되지 않을까? 남아공의 인종차별이 성만찬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참 아이러니컬한 이야기이다. 결과적으로 외관주의나 차별주의는 참된 경건(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믿음을 부인하는 행동이다. 우리가 외모로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본다면 예수는 저주의 십자가를 지고 가장 비참하고 가난하게 처형되신 분(행악자로 취급)이시다. 사 53장을 보라. 그런데 바로 그 분이 우리의 영광의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보시지 않으신다. 긍휼의 사랑이 하나님이 보이신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종말에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찾으신다(cf. 마 5:7). 제 4 과: 행함이 있는 믿음(약 2:14-26)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 서신을 통해서 야고보 감독이 강조하고 있는 기독교(h` qrhskei,a)란 ‘산 실제적 기독교’를 말한다(약 1:26-27). 이미 1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란 하나님의 말씀을 단지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듣고 행하는 자임을 강조하였다(1:22). 그렇다면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참된 믿음’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믿음의 문제는 단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인가? 기독교에 있어 믿음은 꼭 있어야 할 심장(心腸)이고, 행위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맹장(盲腸)인가? 믿음과 행위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서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헛된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이 단락을 통해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어떠해야 하는 지)를 믿음의 행위(행함과 함께 한 믿음)를 통해 제시한다. 2:14(믿음의 유용성[usefulness]의 문제) 2:15-17(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의 예) 2:18-20(행함이 없는 [헛된] 믿음의 예) 2:21-26(행함으로 시작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된 믿음: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 1. ‘참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faith)은 기독교(개신교) 교리의 중심된 개념이다. 개신교의 교리와 삶의 기본적인 뼈대는 바로 이 ‘믿음’(faith)이란 단어에 있다. 히브리서(11:6)에서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합 2:4; 롬 1:17; 히 10:38; 갈 3:11)는 주장(이신칭의[以信稱義])은 개신교의 뿌리이고 근간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참 믿음’이란 무엇인가? 14절에서 야고보는 참된 믿음의 문제(행함과 분리된 믿음)를 수사적 질문을 통해 제기하고 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말]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즉 입술의 고백(‘믿음이 있노라’ 하고)은 있지만 행위(삶)가 없는 신앙이라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그 고백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 야고보는 행위가 수반되지 아니하고 단지 지적(知的)인 것에만 그친 믿음이라면 헛것(20절), 즉 죽은 것(17, 26절)이라고 설파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입술의 고백만 있고 행위가 없는 신앙은 구원이 보장될 수 없는 죽은 신앙이라고 말한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과 요한, 바울에게도 나타나는 모습이다: 산상보훈, 요한복음, 바울서신. 2.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함이 있는 믿음(14-26절) 여기서 우리는 야고보가 믿음과 행함을 결코 분리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기를 ‘믿음만으로’ 즉, ‘오직 믿음’(sola fide)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전적으로 행함을 배제하는 것처럼 여기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임을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야고보가 구원은 믿음 + 행함(인간의 공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바울의 ‘오직 믿음’이란 논의는 이방인에 대한 복음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면 여기 야고보가 다루는 문제는 실천(행동/행위)을 수반한 믿음의 문제를 다룬 것이다(논의가 다르다). 야고보는 믿음이란 것 자체가 행함을 수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야고보는 15-26절에서 4 가지 예들을 통해 적절하게 제시하고 있다. 즉 앞의 두 가지 예들은 참 신앙이 아닌 모습 즉 ‘행함이 없는 믿음'의 모습을 소개한 것이라면 뒤의 두 가지 예들은 참 신앙의 모습 즉 ‘행함이 있는 믿음’을 소개하고 있다. <참 신앙이 아닌 모습> 1)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나 자매에 대한 태도(15-17절) 2) 믿고 떠는 귀신들(18-20절) <참 신앙의 모습> 3) 이삭을 드린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의 믿음(21-24절) 4) 사자를 접대한 기생 라합의 믿음(25-26절) 1) 첫 번째 예화(15-17절) - 가장 가까이 대할 수 있는 상황 크리스천은 단순히 말(축복선언) 이상의 행동을 해야 한다. 자기 주변에, 공동체 내에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가 있는데도 그들의 삶(생존)의 필요를 채워주지 아니하고 단순히 말(축복)만 하는 행위(16절)는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물론 말(축복 선언):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자체는 매우 아름답지만 그 말의 내용대로 행동을 수반하지 아니한다면 그것은 헛된 말, 헛된 축복, 헛된 경건, 헛된 믿음이라는 것이다. 유익이 없다(useless). 육체에 필요한 것들을 줌(돌봄)이 없이 어떻게 그들이 평안히 갈 수 있으며 따뜻할 수 있으며 배부를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정말 헛된, 의미 없는 말(축복)이 아닐 수 없다. 2) 두 번째 예화(18-20절): 믿고 떠는 귀신 복음의 순종이 없는 지적인 신앙은 죽은 정통 신앙이다. 행동이 없는 신앙(믿음)을 어떻게 가질 수 있나? 이점을 그는 구약을 통해서 잘 제시하고 있다. 특히 신 6:4-5을 통해서 이점을 잘 입증한다. 모든 바리새파 유대인은 매일 두 번씩 신 6:4, 5(쉐마[Shama]의 첫 부분)을 암송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4-5은 고백과 사랑이 동시에 포함된 내용이다. 만약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라는 고백은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 삶(행동)이 없다면 그것은 사탄적 행동일 수 있다고 논박한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참된 앎은 관계성과 함께 행위성을 가지고 있다. 알고 두려워 떪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 하나님을 사랑(순종) 유대교와 기독교의 기본적 신앙고백 그러나 고백한 자는 주를 사랑 참 신자들 사랑, 하나님과 평화 여기서 야고보의 강조는 믿음은 행함으로 입증된다는 점이다(18절). 단지 지적(知的)인 앎의 믿음은 귀신도 가지고 있다. 3) 세 번째 예화(21-24절): 하나님의 벗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이 행함으로 입증되었다는 것을 창 22:1-18의 기사(독자 이삭을 제단 위에 바침)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다. 특히 창 22:12의 선언은 이점을 잘 입증하고 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義)로 여기시고” 여기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순종은 믿음의 행동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예증을 통하여 야고보는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고 말한다. 여기서 믿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주어(주체)로 등장할 뿐만 아니라 행위와 함께 함을 본다. 행위가 믿음을 대신(대체)하지 않고 믿음을 완성한다. 즉 이삭을 제단에 바침(순종)이 그의 믿음을 확증(입증)하는 것이 되었다. 4). 네 번째 예화(25-26절): 라합의 행함(접대) 믿음이 동기가 된 행동(수 2:8-11), 특히 수 2:12, 13(cf. 히 11:31)의 라합의 믿음(“믿음으로 라합은”)은 야고보에 의하면 행동이 수반된 신앙임을 강조한다. 라합에게서 보여진 참 신앙은 위험에 처한 사람을 희생적으로 돌봄을 수반한다. 이것이 라함의 믿음이었다. 비록 여기서 저자는 히 11:31처럼 라합의 믿음을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라합은 하나님을 믿었고(수 2:11), 그녀의 이 행동은 바로 믿음의 표현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신앙과 행위는 동전의 양면과 같이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면서 이것은 서로 함께 일하면서 서로를 온전케 한다고 주장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을 성경에서 요구하거나 주장하고 있는가? 결코 아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26절)라고 선언한다. <믿음의 행위 문제> 지금까지 이 단락은 해석역사에 가장 주의를 받아온 단락이다. 이 단락은 바울 사상과 비교할 목적으로 문맥을 떠나서 가장 왜곡되게 해석되어온 본문 중에 하나이다. 물론 이 본문이 롬 4장과 갈 3장의 바울 서신과 유사한 어휘들(믿음; 구원; 행위; 의)이나 예증(아브라함)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와 관련되어 논의되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과 바울 서신과의 차이를 긴장을 지닌 보충적 관계로 이해하여 조화롭게 이해하고자 하지 않고 하나의 모순과 대립으로 이해하였다는 점이다(Luther). 루터는 바울을 참된 사도로 보고 야고보를 평가절하 함으로써 신약 연구에 적잖은 영향력을 미쳐왔다. 그는 야고보서가 우리를 율법으로 돌아가게 한다고 공격하였다. 단지 이 본문이 이신칭의의 교리를 무력화시키는 듯한 모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가 이 이 부분(더 나아가 서신 전체)에 대해 가지는 적대감을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야고보서의 논의를 오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고보서의 논의와 로마서와 같은 바울 서신과의 논의는 그 논쟁점이 다르다. 몇 가지로 요약하면, 1) 바울의 논의는 ‘이방인에 대한 복음의 문제’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면 야고보의 논의는 ‘신앙의 실천적 면’을 다룬다. 2) 바울의 행위에 대한 논의는 ‘율법의 행위’를 다룬 것이라고 한다면 야고보의 논의는 ‘믿음의 행위’를 다루고 있다. 3) 믿음과 행위는 결코 분리(양분)할 수 없는 사항이다. 믿음은 행위를 수반하고 행위를 통하여 완성(입증)된다. 참 믿음은 언제나(처음부터 끝까지) 행위를 수반한다. 행위가 없는, 행위와 관계가 없는 믿음이란 헛된 믿음이고 죽은 믿음이다(죽은 씨와 산 씨의 비교). 제 5 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약 3:1-1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 감독은 언행의 성숙(成熟)이 참된 경건의 표이며, 참 신앙의 모습임을 이미 서신에서 언급하였다(1:26-27). 2장에서 야고보 감독은 교회내의 외모주의 혹은 차별주의가 단순히 개인적 성향에 따른 행동이 아니라 살인과 간음에 맞먹는 범죄행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부인하는 행위임을 지적하였다(2:1-13). 그리고 이어서 2:14-26에서는 신행(信行)의 일치(一致) 특히 자비의 행동을 경건의 척도로 보았다. 이제 야고보는 3 장에서 다시 한번 언어생활 - 특별히 혀의 통제 - 의 중요성에 대한 교훈으로 넘어가고 있다(1:19-21, 26). 이 언어생활은 특별히 교회의 기둥이 되는 선생들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임을 시사하며 시작한다. 1. ‘가르치는 자’에 대한 경고(1절)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언어생활에 대한 교훈을 특별히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교사들에 대한 경고로 시작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하면 지도자들(특별히 교사들)의 언어사용과 그 영향력은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목사들 특히 대형교회의 목사들을 ‘종교권력가’라고 지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형교회의 목사가 하는 말은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들 목사들은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며 또한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영향을 가지는 지를 잘 이해하여야 한다. 교회에서 교사의 직분 또한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롬 12:7; 고전 12:28; 엡 4:11-13; cf. 마 23:8). 그러므로 교사들(지도자)에게 있어 언어의 오용(誤用)과 남용(濫用)은 매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교회의 감독인 야고보는 먼저 교회내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자들인 교사들의 언어생활을 경고한다(cf. 마 12:34-37; 23장). 신문지상에 <말, 말, 말> 코너를 보면서 사람의 말, 특별히 지도자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배운다. 그의 화법(speech)은 그의 인간 됨을 잘 보여준다. 2. 말(speech)의 중요성(2-5a절)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언어생활의 온전함은 인격의 온전함이며, 성숙의 표시이며, 경건의 척도이다. 그리고 영적 성숙으로 나아가는 수단이다. 왜냐하면 말(speech)이란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약 1:26; 마 12:34; 막 7:16, 20-23; 잠 23:7) 우리의 온 몸도 굴레씌운다(2절). “언어는 정신의 호흡이다”(피타고라스). 특별히 이와 같은 말(speech)의 중요성을 야고보는 탁월한 2 가지 은유들을 통해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1) 말(horse)의 입의 재갈(bit) -> 말(horse)의 온 몸을 어거(통제) 2) 배(ship)의 키(rudder) -> 광풍에 밀려가는 큰배를 운전(통제) 3) 작은 지체로서의 혀 -> 큰 것을 자랑 말(馬)의 재갈과 배(船)의 키에서 보는 것처럼 이것들은 지극히 작은 것들이지만 매우 큰 영향력(온 몸; 큰 배)을 미친다. 혀도 이와 마찬가지다(5절). 자랑의 예가 이에 속한다. 특히 교회에서 (교사들의) 말(speech)의 영향력이란 지대하다. 최근 ‘언어는 힘이다’(language is power)라는 말은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말의 중요성은 그것의 파괴적 영향력을 통해 더욱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잠 18:21). 3. 악의 본질과 혀(tongue)의 파괴적 능력/결과(5b-6절) 야고보 감독은 말(speech)의 중요성을 말한 후 뒤이어 그것의 파괴적 결과를 또 다른 은유로 제시하고 있다. 성경에서 보는 대로 인간의 근본적 타락상은 혀에서, 언어생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창 3장의 유혹의 시작도 언어를 통해 나타났다(뱀도 말을 한다는 자체가 흥미로운 영상). 인간의 죄악상에 대한 바울의 묘사 중에 가장 첫 번 째는 언어생활에 대한 문제이다(롬 3:13-14; cf. 시 5:9; 10:7; 140:2-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 3:13-14). 한 마디로 인간의 본성(죄성)과 혀는 밀접하게 관련된다(8절 참조). 과연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로서 온몸(전인격)을 더럽히고 생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6절). 잘 나가든 인생이 혀(한 마디의 [통제되지 않은] 말)로 인해 파멸을 경험할 때가 있다. 사소한 일들이 혀를 통해서 생각지도 못하는 파멸들(부부싸움; 교통사고; 이웃분쟁 등등의 언쟁으로 인한 자폭과 자멸행위들)을 우리는 신문지상을 통해 자주 본다. 누가 과연 이 혀를 통제할 수 있는가?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미련한 자의 입은 그의 멸망이 되고 그 입술은 그의 영혼의 그물이 되느니라”(잠 18:6-7). 4. 자신의 힘으로는 통제 불가능한 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3:8)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만물(모든 생물들)을 다스릴/길들일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을 가졌지만(창 1:26-28; 9:2) 자신의 조그만 한 지체인 혀를 통제할/길들일 수 없는 모순을 가진 존재다(7-8절). ‘우리는 다 말(speech)에 실수가 많은 사람들’로서 말하기에 부자유스런 존재들이다(2절).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지음 받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이렇게 혀를 통해 쉬지 않는 악을 내 뿜고, 죽이는 독을 가진 악한 존재(8절; 롬 3:13-14)라는 것은 얼마나 모순적인가? 이러한 이중성을 가진 존재가 인간이다(9-10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를 함. 특히 저자는 수사적 질문을 통해 이점을 더욱 강조한다. 이러한 이중성은 다른 피조물에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샘과 나무들의 예 (11-12절). 그런데 이러한 이중성이 선생들에게 더 많은 것이 비극이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이 ‘혀’를 길들이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 도움이 필요하다. ‘외부적 도움자’가 필요하다. 그 분은 곧 예수 그리스도시다. 예수님은 그 입에 궤사(詭詐)가 없는 분(벧전 2:22)으로서 우리를 위하여 비방거리가 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이 없이는 이 죄악에서 어떻게 심판을 면하고 구원을 받을 수 있나? 롬 3:19-24를 보라. 모든 인생은 혀의 의인이 없고 입술이 부정한 존재들이다(사 6:5). 오직 위로부터의 신령한 지혜가 필요하고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약 3:17-18; 갈 5:22-23). 그렇지 않으면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활동하여 시기와 이기심(다툼, 경쟁심)이 우리 자신과 공동체를 지배하여 무질서(요란)와 악(惡)을 산출하여 분열과 멸망만 초래한다. 뿐만 아니라 사탄은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우리의 혀를 사용한다. 가정, 사회, 교회에서 사탄은 이 혀(말)를 통해 구원사역을 교묘하게 방해한다. 그러나 이 혀도 구원사역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고 사람을 세우는 일에 사용한다면 매우 유익한 것이 또한 혀이기도 하다. <결론> 말하기(speech)는 우리가 아는 확실한 단어들을 사용하는 능력 이상을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반영이며 인격의 자화상이며 성숙과 경건의 척도이다. “사람은 누구나 그가 하는 말에 의해서 그 자신을 비판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 한 마디가 남 앞에 자기의 초상을 그려 놓는 셈이다”(R. W. 에머슨). 과연 이 땅에 ‘말하기’에 자유로운 사람, ‘말하기’를 다 배운 사람이 있는가? 아무도 말(하기)에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 마치 죄에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말에 통제력을 가진 자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2절). ‘말하기’에는 합리적 지식과 다른 사람을 경청하고 이해하는 능력이 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옛 말에도 “말하기는 어떤 기술보다도 어렵다”고 하였다. 지혜로운 자(잠 17:27)는 말을 아끼는 자이지만 사악한 자(시 50:19; 59:7; 50:21)는 고삐 풀린 말처럼 악을 토한다. 이점에 있어 잠 13:3의 말씀은 의미심장하다: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 자제가 없는 사람은 그의 생애에 악의 영향력에 대하여 무방비적이라고 지혜자는 말한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 같으니라”(잠 25:28). 이 가운데 혀의 절제(통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이런 까닭에 의로운 사람은 자신의 혀를 제어해 달라는 기도를 하나님께 매일 드린다(시 141:3; 39:1). 우리의 영성에 언어생활은 우리로 하여금 매우 중요한 경건 훈련을 요구한다(묵상과 기도).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숫군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시 141:3). “내가 말하기를 나의 행위를 조심하여 내 혀로 범죄치 아니하리니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 내가 내 입에 자갈을 먹이리라 하였도다”(시 39:1). 지난 번 강의에도 언급한 것처럼 경건한 언어생활에 대한 성경(지혜서) 읽기와 기도에 대한 영적 훈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특히 한국사람은 언어생활에 대한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 적절한 스피치(말하기) 훈련이 필요하다. 자제(自制)에 대한 부분에 있어 구약, 특히 지혜서는 기질, 말많음, 단순함, 침묵, 그리고 은혜로운 말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 특별히 분노의 순간에 자신의 말을 자제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경우에 구약은 한결같이 자제를 촉구하고 있다(잠 29:11). 분노로 인해 토해진 말은 죄(罪)라는 것이 구약의 사상의 근간이다. 그것은 언쟁(言爭)을 야기하고 다음 단계의 싸움으로 이끈다. 특히 공동체 내의 화평과 조화/연합을 유지하는 일에 말하기는 대단히 중요하다(잠 17:1). 이런 까닭에 인내심을 가진 자제된 사람(혀)에 대한 칭찬이 구약에 나타난다(잠 15:1). 물론 혀의 긍정적 면도 많이 있다. 제 6 과: 지혜의 온유함 안에서의 행함(약 3:13-18)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선생된 자들이 가져야 할 두 번째의 모습은 단순히 언어적 지혜와 총명이 아니고 선행으로 나타난 지혜라고 말한다. 야고보에 따르면 이 선행은 지혜의 온유함 가운데에서 나타난 행동을 의미한다. 통상적으로 가르치는 자가 갖는 잘못된 행동은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으로 나타나는 자랑이다. 마음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기적 야심)에서 나오는 자랑은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동체로 하여금 선행과 화평과 결속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분쟁과 분리를 일으킨다. 이러한 모습은 참된 지혜를 가지고 있지 않고 세상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를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참된 지혜, 위로부터 나온 지혜는 이러한 행동과는 다르다. 그것은 성숙한 행동을 동반한다. 결론적으로 야고보가 말하는 두 종류의 지혜는 우리의 삶에서 깊이 상고해 볼 가치가 있다. 우리의 믿음이 행함을 통해서 입증되는 것처럼, 우리의 지혜도 행동(삶)을 통해서 그 진위(眞僞)가 입증된다고 할 수 있다. 선한 삶으로 입증된 지혜 그것이 참 지혜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지혜는 ‘위로부터의 지혜’로 이것은 ‘영적 지혜, 하나님으로부터의 지혜’를 말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경건은 영성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본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찌니라”(약 3:13). 1. 두 종류의 지혜(3:14-17) 특히 오늘날의 교육이 산업화되고 물질화 되고 사유화된 이런 시점에서 우리의 교육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과연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이런 물음들에 대해 이 단락에서 제안하는 두 종류의 지혜는 우리에게 훌륭한 지침이 된다. 1) 세상적 지혜(14-15절)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자랑과 요란(무질서)하고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하고 악을 일삼는 지혜란 위로부터 내려온 지혜가 아니고 세상적이며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지혜다. 성경에 말하는 우리의 원수가 바로 세상과 정욕과 마귀인데(요일 2:15-17), 야고보는 지금 이것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이러한 행동을 취한다면 그것은 참다운 지혜자(선생)의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히 13:7). 윤리적 삶이 따르지 않는 지혜는 액면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위로부터 난 지혜,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 영적 지혜는 이러한 모습과는 다르다. 2) 위로부터 난 지혜(16-17절) - 성결(pure): 온전하고 깨끗함(cf. 잠 21:8; 15:26) - 화평(ready for peace): 거만과 야심과 분리와 파당을 경계 - 관용(gentle): 윗자리에서 지배적이고 조작하는 인간들을 고려하는 사람 - 양순(compliant): 밑의 자리에서 합리적이며 양보적이고 순종적인 모습 - 긍휼과 선한 열매가 풍성(full of mercy & good fruit): 참된 경건이고 참된 신앙 - 편벽(impartial)과 거짓/위선(hypocrisy)이 없음: 이중플레이를 하지 않는 액면가의 사람 위로부터 난 지혜의 모습(cf. 잠언 8 장)은 갈 5:22-23의 성령의 열매나 고전 13장의 사랑의 모습과 유사하다. 성경에서 강조하는 지혜는 바로 이러한 지혜로 곧 위로부터 난 지혜,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이다(약 1:17). 이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으로부터 나온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 그리고 이것은 성령을 쫓아 사는 사람의 삶의 모습(갈 5:20ff)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이다(약 1:5, 17). 내 자녀들을 향한/위한 기도 제목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오 하나님! 나의 자녀들이 세상에서 살 때 자기를 자랑하고 교만하며 거짓을 말하고 악을 행하는 그러한 세상의 지혜(智慧)가 아니라 양순과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긍휼과 선한 열매를 맺고 진리를 사랑하는 그러한 지혜 곧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를 갖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 언급된 여러 행동들을 통하여 이 사람의 지혜가 어떤 지혜인지 그리고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즉 그가 ‘육에 속한 사람’인지 ‘영에 속한 사람’인지를 구별(고전 2:14; 15:46)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야고보 감독은 18절에서 이 단락의 논의를 종결하고 있다. ‘참된 지혜’의 표지(mark)는 화평과 의(義)를 산출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cf. 마 5:9). 2. 참된 지혜는 화평으로 나아가는 것(18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이 본문의 직역은 “그것의 열매가 의(義)인 씨는 화평케 하는 자들에 의해서 화평 가운데 심겨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화평(和平)과 의(義)는 결코 상호 이율배반적이지 않다. 오히려 서로 상호 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의(義)가 뿌려져 화평(和平) 가운데 거둔다. 화평케 하는 일과 시기는 서로 상반되는 행동이다. 전자는 연합을 창출한다면 후자는 분리와 분쟁을 창출한다. 이 말씀은 특히 한국교회에 필요한 말씀이 아닐까? ‘위로부터 난 지혜’가 정말 필요하다. 제 7 과: 세상과 짝한 신자들(약 4:1-10)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 디아스포라의 흩어진 신자들에게 직면한 어려운 문제는 외부적인 시련들 즉, 핍박과 물질적 유혹(약 1 장)과 함께 공동체 내의 다툼과 분쟁의 문제였다. 이러한 외부적이고 내부적인 시험들 가운데 처한 신자들을 향하여 야고보 감독은 4 장에서 필요한 진단과 처방을 내리고 있다. 이미 선생들(지도자들)의 언어생활과 세상적 지혜와 가치로 인한 시기와 다툼의 문제(약 3 장)를 다룬 후 이제 야고보 감독은 공동체 내에서 신자들간의 다툼과 분쟁의 문제로 접근한다. 이 단락에서 저자는 공동체 내에 일어나는 싸움과 다툼은 세속에 물들은 정욕에 의하여 발생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미 앞에서 저자는 참된 경건이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1:27). 1. 공동체 내의 다툼과 분쟁(1-3절): 영적 전투가운데 있는 신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1-3절) 위로부터 난 지혜(신적 지혜, 영적 지혜)가 선행과 화평을 좋아하고 실천하는 사람들 가운데 발견되어진다면(3:13, 17, 18) 공동체 내의 싸움과 다툼은 분명히 이러한 지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의 근원은 인간의 죄악된 내면에 있다. 이것을 야고보는 정욕(passion)이라고 하였다. 싸움과 다툼은 신자들간의 나쁜 관계를 언급한 것이라면 이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근원은 훨씬 내면적인 문제임을 야고보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죄성(욕망, 이기심, 옛 사람)을 올바로 인식하여 회개하기까지 교회 내의 화평에 대한 소망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정욕이 신자의 마음을 지배하는 한 신앙공동체 내에서도 싸움(적대감이 계속되는 상황)과 다툼(적대감이 밖으로 표출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신앙공동체라고 해서 화평(和平)과 연합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공동체) 내에서나 가정에서나 싸움과 다툼의 근원을 살펴보면 내면 속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죄악된 자기 중심적인 욕망(야고보는 이것을 ‘정욕’으로 봄)이 항상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어 야고보는 이 정욕을 하나님과의 교통과 축복을 막는 근원으로 규정하였다. 결국 정욕은 성도들간에(공동체 내에) 화평을 방해하는 요인 즉, 싸움과 다툼을 일으키는 요인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통과 그 축복을 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결국 야고보가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이러한 분쟁과 다툼은 이 세상(this world: 세속적 가치와 표준들)에 의하여 부채질되고 활성화됨을 본다. 이 세상(의 풍습과 가치)이 인간의 이기심을 조장한다. 시대정신이 동료, 동역자, 성도간에 치졸한 경쟁심, 더 나아가 싸움과 다툼을 조장한다. 오늘날의 시대정신(時代精神)이 우리의 욕망과 죄성(sinful nature)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치졸하고 유치한 욕망가운데 행동하도록 하며 이러한 행동이 공동체 내에서는 싸움과 다툼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공동체 내에서의 싸움과 다툼의 근원은 우리의 죄성(정욕)으로서 이것은 시대정신에 크게 좌우된다. 결국 우리는 ‘우리 시대’가 지닌 세속적 시대정신이 무엇인지를 바로 깨달아 때론 시대(時代)와의 불화(不和)를 각오하여야 한다. 이점은 우리의 영성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침을 알아야 한다. 소유를 존재이유나 존재가치로 여기는 시대에는 더 많이 가지는 것이 더 나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내가 더 많이 가지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다른 사람이 더 많이 가지면 그것은 나에게 위협이 되기 때문에 결국 싸움과 다툼이 일어나며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한다. 결국 다른 사람을 제거해야만 내가 더 많이 가질 수 있고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까지도 자신의 축복의 후견인(도구)으로 여겨 오직 더 많이 얻어서 그것을 정욕으로 쓰려고 한다. 비뚤어진 영성이며 황폐한 영성이다(3절). 2. 세상과 짝한 교회의 모습(4, 5절) -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마치 저자는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들(이스라엘)의 신실하지 못한 모습을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호세아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신부(사 54:4-8; 렘 3:6-10; 겔 16:38; 호 3:1; 9:1)로 제시된 것 같이,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新婦)이다(엡 5:22-24; 계 19:21). 하나님과 우상을 겸하여 섬긴 배교의 이스라엘처럼 신약의 교회도 세상과 짝하며 살기 쉽다. 그러므로 신자 개인이든지, 교회는 이러한 위험에 늘 직면하고 있음을 인식해야한다. 여기 ‘간음’이란 문자적 의미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나 그 욕망의 성취자로 생각하는 일종의 우상숭배(하나님을 사유화하는 일)에 대한 책망으로 여겨진다. 여기에 대해 야고보 감독은 단호한 선언을 한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약 4:4). 야고보가 말하는 ‘세상과 벗된 것’이란 생각에서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주장과 반대되는 의미와 가치의 체계를 의미하는 세상과 더불어 사는 사람을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벗’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고 행동하는 것(믿음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시대의 유행에 대하여 거리를 두는 일이며 더 나아가 시대와의 불화를 갖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적 삶을 청산하라. 두 길 보기를 중단하라. 세상과 벗된 삶을 저자는 ‘간음하는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종말에 처한 교회의 모습이기도 하다(계시록을 보라). 또 다른 가치와 또 다른 지혜를 따라 사는 신자(교회)의 모습.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5절; 출 20:5; 34:14; 신 4:24).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가 된다면.... 우상 숭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의 세상에 벗된 모습을 보고 있다면 어떤 행동을 취하시겠느냐?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 야고보는 결국 그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즉, 우리의 경건은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성의 문제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6절. cf. 잠 3:34) 3. 그러므로 하나님께 순복하며 회개하라(7-10절): 그러면 회복과 소망(욥 5:11) 이미 앞에서 본 대로 크리스천의 삶은 언행일치와 신행일치의 삶이지만 이것은 영적 변혁 없이는 곤란하다. 우리의 싸움은 단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이 세상 공중 권세 잡은 자와 그가 지배하는 세상(가치) 그리고 내 속에 숨어 있는 정욕과의 싸움이다. 사회적 무질서와 폭력과 전쟁과 살인은 단순히 구조적 악의 결과만이 아니다. 내면적인 문제이고 영적인 문제이다. 여기서 야고보의 요구는 단순한 기도가 아니라 급진적 행동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시 24:3-4). 여기서 우리는 왜 ‘의인 야고보’(James the just)가 ‘낙타무릎을 가진 사람’인 줄을 이해하게 된다. - 하나님께 순복하라 - 마귀를 대적하라 ->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말 3:7; 슥 1:3) =>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출 30:19-21) -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제 8 과: 비방과 자랑을 버려라(약 4:11-17)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이미 공동체의 지도자와 나머지 신자들의 이기심과 교만으로 인한 다툼과 분쟁의 문제를 다루면서 하나님께 겸손히 순복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한 야고보 감독은 다시 한 번 사랑 어린 권면으로 나아간다: “형제들아”. 그리고 실제적 삶에서 - 대인관계, 일상생활(생업과 미래), 부(富) - 하나님과의 겸손한 동행을 하는데 빠지기 쉬운 위험들을 다시 한 번 경고하며 자신의 자신됨과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올바로 인정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형제에 대한 비방과 판단(정죄), 그리고 자랑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두 가지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연합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소로서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이다. 1. 형제 비방(판단)과 자랑의 문제 비방이란 남을 나쁘게 말함, 즉 상대방을 욕하고 헐뜯는 일을 말한다. 악한 의도로 상대방을 비하 혹은 과소 평가, 왜곡, 거짓으로 하는 발언을 비방이라고 한다면 자랑은 자신을 과대 포장(뻥튀기)하는 행위를 말한다. 비방의 전 형태 혹은 비방과 유사한 형태를 우리는 소위 가십(gossip)이라고 부르는데 가십은 불평하거나 악한 의도로 반복하여 남의 잘못(약점)만 드러내거나 또는 뒤에서 유포하거나 물고늘어지는 언어적 행위를 말한다(잠 11:13; 20;19): 한담, 험담, 뒷공론을 의미함. 비방은 별식과 같아서 빠르게 유포된다(잠 18:8; 26:22). 비방의 의도와 목적은 상대방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은밀하게 유포하여 그 사람을 중상모략 하거나 명예훼손을 통해 상처를 입히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를 성경은 폭력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그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잠 25:18). 성경은 비방에 대해 엄히 경고한다(잠 19:5, 9; 24:28-29; 30:10). 성경은 비방을 ‘경멸스러운 악’으로 규정한다(출 23:1; 레 19:16):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하나님이 받으시는 사람은 비방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시 15:3). 악을 행하는 자와 거짓말을 하는 자의 특징은 모두 다 비방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잠 17:4; 시 73:9; 마 15:19; 막 7:22). 랍비들은 비방을 우상숭배와 간음과 살인보다도 더 악한 죄로 여겼다: “그의 이웃을 비방하는 자나 그 비방을 받아들이는 자는 개에게 던져짐이 마땅하다”(Pes. 118a). 랍비문헌에서 비방은 하나님의 영광이 지상에서 떠난 이유이며 재앙과 문둥병과 기근의 원인으로 간주한다. 특히 창 3장의 원죄의 시발이 뱀의 비방으로 되었다고 본다. 비방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으며(민 12:8-10; 잠 6:12-15; 19:5, 9; 21:28; 시 57:4; 101:5), 이스라엘의 멸망과 포로생활의 한 원인은 비방의 죄로 인한 것이었다(렘 6:28; 9:4; 겔 22:9). 종말에 처한 사람들의 특징은 남을 비방하는 일이다(딤후 3:3). 비방(후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다(고전 6:10). 비방의 대상에서 면제된 사람은 없다. 다윗(시 31:13; 35:15-16; 41:5-7)과 예레미아(렘 18:18)와 모세(민 12:1; 14:35)도 비방의 대상이었고 바울과 예수님 역시도 비방의 대상이었다(눅 2;34). 물론 우리가 잘못된 비방거리가 되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해야겠지만 복음을 위해 의롭게 사는 자는 이 세상으로부터의 비방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흔히 교회에서 비방의 문제를 다루면서 아예 성도가 가지는 건전한 비평적 기능까지도 말살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잘못된 극단이다. 비방에 대한 경고는 필요하겠지만 이것을 빌미로 건전한 비평까지 말살해서는 안 된다. 지도자의 권위와 교회정책에 대한 남용과 오용에 대해서는 자성과 함께 열린 비평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 때의 비평은 비평을 위한 비평이 아니라 사랑가운데서 보다 나은 공동체의 개혁과 성숙을 위한 비평이어야 한다. 최근 정치권의 저질비방시비나 인터넷 상에서 저질 비방이 만연하고 있는데 이러한 잘못된 말세적 징조가 교회(교단) 내에 파급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는 조심하여야 한다. 이러한 모습은 지도자나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취할 행동이 아니다. 2.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자는 하나님(4:11-12): “너는 누구관대” 공동체 내의 다툼과 분쟁의 문제를 다루는 중에 야고보는 이 단락에서 형제(성도) 간의 상호 비방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앞에서 이미 강조한 ‘율법을 실행하는 믿음’(1:22-25), 곧 ‘이웃 사랑을 실행하는 믿음’(2:8ff)과 ‘형제 비방’은 결코 공존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하는 자는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cf. 레 19:18)고 말씀하는데 어떻게 율법의 준행자인 우리가 형제를 비방할 수가 있단 말인가(cf. 레 19:16)? 형제비방은 곧 하나님의 율법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방을 버리고 이러한 이웃(형제) 사랑의 율법의 요구를 겸손히 순종(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 율법의 역할과 기능 율법은 형제를 판단하는 잣대(수단)로 사용되어야 할 도구가 아니라 도리어 우리가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해서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누구인가’에 대한 인식이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2) 자신과 상대방을 바로 인식: “너는 누구관대” 우리가 형제를 비방하면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이 입법자며 재판자로서의 모습을 취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율법의 준행자이지 입법자(lawgiver)와 재판자(judge)가 아니다. 결국 비방의 문제는 우리 자신과 상대방에 대한 바른 인식을 요구한다. 서로 서로를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서로 형제요(11절에 3번이나 이 단어가 반복됨; cf. 롬 14:15. ‘믿음이 연약한 자’=‘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 이웃이다(12절). 그러므로 형제와 이웃은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하는’(히 10:25) 존재들이지 ‘서로 판단(정죄)하거나 그 앞에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을 두어야 할’(롬 14:13) 대상들이 아니다. 성경에서 특히 비방(비판)과 멸시의 문제는 항상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망각함에 있음을 본다: “너는 누구관대”(cf. 롬 14:4). 비방과 자랑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철저한 자기성찰로부터 나온다: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12절);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14절).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이웃보다도 우월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되며 또한 인생의 자충한 존재로 여겨서도 안 된다. 비방과 자랑의 행동은 모두 교만으로부터 나온다. - 우리 모두는 율법아래 있는 율법의 준행자이다: 법 아래 평등한 존재. - 무지한 존재(“내일 일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도다”) - 유한한 존재(“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의존적 존재(“주의 뜻이면…”) 우리는 결코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자충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인간성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인간의 죄악(불행)의 출발은 바로 이러한 인식을 버리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나왔다. 오직 하나님만이 스스로 계신 분(“I am what I am"), 지존자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구원자이시다. 역사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시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식의 결핍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결핍에서 나온다. 율법의 입법자와 재판자는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다. 구원하시기도 하고 멸하시기도 하신 하나님이 율법의 입법자이시고 심판자이시다. 3) 하나님의 주되심(Lordship)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인식(올바른 대신관)이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인식인 올바른 대인관을 갖게 한다. 정말 지혜자의 말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며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잠 1:7; 9:10; 15:33)이다. 올바른 대인관과 삶의 지혜는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경외하는데서 나온다. 특히 미래에 대한 태도 역시도 이러한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3. 인생의 전문가이신 하나님(4:13-17) 원래 인간은 하나님처럼 “스스로 계신 자”(I am what I am: 출 3:14)가 아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을 의존해야 하는 존재들이다. 특히 이점은 미래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명백하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상인은 마치 자기가 생명(미래)의 주인인양 행동하고 있다(반복된 미래시제의 사용):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利)를 보리라”(13절).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도 바로 이에 속한다. 이러한 자랑은 야고보에 따르면 허탄한 자랑이며 악(惡)이다(16절; cf. 요일 2;16). 왜냐하면 인생이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와 같은 유한(有限)하고 무지(無智)하고 의존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자신의 생명(生命)과 미래(未來), 그리고 선택(選擇)과 능력(能力)이 무한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내일의 내용과 내일의 현존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인간이 아닌가?. - 생명(life)과 미래: ‘오늘’, ‘내일’, ‘일년’ - 선택: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유하며 - 능력: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그러나 성경(14-15절)은 인생이란 - 무지(無智)한 존재: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 도다” - 유한(有限)한 존재: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 의존적(依存的)인 존재: “주(主)의 뜻이면…” 물론 이 말씀은 우리가 미래에 대해 계획을 세우지 말라고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미래에 대한 계획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생의 설계(계획)는 하나님과 함께 계획해야 하고 각 계획들은 하나님의 표준과 목적에 따라 바르게 설립되고 수행되어야 한다(cf. 잠 16:3, 9):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잠 16:3)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미래에 대한 지침> 하나님의 뜻을 들으려 하는 태도로 적절한 시간 동안 기도하며 준비하여 실행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 안전과 소망 가운데 살게된다. 어리석은 부자를 보라(눅 12:13-21): 재물과 영혼문제를 동일시하였다. 사악한 비방과 헛된 자랑은 우리의 영성을 파괴하는 악(惡)이며 독(毒)이다. 이러한 태도와 행동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한 자기성찰의 결여로부터 나온다. 자만과 오만과 교만으로부터 나온 뒤틀린 인간성의 결과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황폐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황폐하게 만든다. 오늘 한국사회와 교회는 바로 이와 같은 모습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지나친 비평일까? 과연 우리의 경건과 영성의 현주소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인간의 인간 됨에 대한 성찰을 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제 9 과: 들으라 부한 자들이여(약 5:1-6)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 제 5 장에서 야고보 감독은 심판의 확실성과 기도의 능력을 교훈 함으로써 서신을 마치려고 한다. 이미 부(富)와 자비(慈悲)에 대한 교훈들(1:9-11, 27; 2:1-13, 15-16)을 서신서 여러 곳에서 언급하였던 야고보는 가난한 자들(고아와 과부)에 대한 관심과 돌봄을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 ‘이웃 사랑의 율법의 실행’과 ‘행함의 믿음’으로 제시하였다. 이제 야고보는 부자의 탐욕스러운 행동에 대한 심판을 언급함으로써 부(富)에 대한 우리의 애정과 집착에 큰 획을 긋고 있다. 야고보서의 교훈은 상인(商人)으로부터 지주(地主)로 넘어가도 있다. 본문의 야고보의 태도는 부자나 권력자에게 편애하는 오늘의 종교지도자(목회자)와는 대조적이다. 1. 만물(부)의 주인되신 하나님: “만군의 주”(4절) 여기서 야고보 감독은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부(富)가 어떻게 사용되어져야 함을 교훈하고 있다. 특히 잘못 사용된 부(富) 즉, 부(富)의 남용과 착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을 본문은 먼저 시사함으로써 새로운 단락을 시작한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5:1). 애통에 대한 권면(경고)은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기뻐하라는 서신의 서두에서의 권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크리스천은 재물 혹은 부(富)의 청지기이다. 주신 재물 혹은 부(富)에 대한 관리자로서 성실한 삶이 요구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린다. 특별히 잘못 사용되거나 축적된 부(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 성경에서는 잘못된 부의 축적이나 사용 그리고 부에 대한 잘못된 애정과 신뢰를 강하게 비판한다(암 5:11[부당한 축적]; 잠 11:28[부에 대한 의지]; 사 5:8[부동산 투기]; 딤전 6:9-10[부 하려는 욕구의 결과와 돈을 사랑함의 악]; 말세의 징조[딤후 3;2]; 돈을 사랑치 말라[히 13:5]). 이처럼 부(富)의 불용(축적)과 오용과 남용(사치와 방탕)과 불의한 취득(착취)은 모두 우리의 헛된 경건(영성)을 보여주는 표와 같다. 결론적으로 재물의 취득과 사용은 우리의 경건(영성)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1) 사용되지 않고 축적된 부(2-3절. cf 눅 12:16-18):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어 불같이 너희 살[육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썩은 재물, 좀먹은 옷, 녹슨 금과 은의 표현은 사용되지 않고 축적된 부(富)를 가리킨다. 특별히 말세 즉 주의 재림이 가까워진 때에 우리는 우리의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여야 하는가를 유의해야 한다. 쌓아 둔 재물은 우리가 믿음을 어디에 두었는지를 보여주는 측량계와 같다. 재물에 대한 욕심과 축적은 곧 이 세상이 전부라고 여기는 삶의 결과이다. 결국 주의 재림 때 남겨진 부(富)는 우리가 어떻게 청지기 노릇을 잘 하였는지를 입증해 준다. 주의 재림 때에 우리와 함께 부(富)가 들림을 받는다든가 또는 우리가 죽을 때에 부(富)를 짊어지고 간다는 말을 성경에서 본 적이 없다. 오히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감을 주지해야 한다. 이 땅에서 축적한 부(富)에 대한 경고는 산상수훈에서도 잘 나타난다(마 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銅綠)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축적된 부(富)에 대한 전형적인 책망은 어리석은 부자의 경우(눅12;15-21)에 잘 나타난다. 물질이 전부인 사람. 내세와 하나님이 없고 이 세상과 재물만이 전부라고 여기고 재물이 자신의 미래(여러 해)와 영혼까지 보장할 줄로 착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한 마디로 성경은 이 사람을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21절)로서 평가하고 있다. 이 사람은 찰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에 나오는 욕심쟁이 구두쇠 영감 스크루지에 해당되는 사람이다. 우리는 스크루지 영감의 별명(‘에벤에셀’)을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소비지상주의 가운데 살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들이다. 후기-현대주의(post-modernism)의 특징중 하나를 초-소비주의(ultra-consumerism)라고 부른다. 최근 전우익 선생의 “요즘 사람들이 죽어라 돈 벌어서..죽어라 사고..죽어라 버린다”는 말은 초-소비주의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경종이다. 우리의 옷장을 한 번 열어 보라. 우리의 신발장을 한 번 열어 보라. 그리고 우리 자녀들의 필통을 한 번 살펴 보라. 그리고 장난감 통을 한 번 살펴 보라. 남자들은 넥타이 넣어 둔 장(통)을 한 번 열어 보라. 그리고 여자들은 냉장고의 냉동실을 한 번 살펴 보라. 위의 성경구절(2-3절)에 비추어 보면서 우린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재물의 축적은 그것의 적절한 사용(눅 12:33)과 하나님께 대한 참된 소망(딤전 6:17)과 경건한 기대(딤전 6:18-19)를 전적으로 부인하는 행동이다. 2) 부당하게 모아진 부(4절): 임금착취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품군의 삯을 주지 아니하는 일은 유대문헌에서도 대단히 비판적이다. 왜냐하면 품꾼의 삯이란 그의 가족의 일용할 양식을 살 수 있는 최저치의 생활비로 이것은 생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착취하는 사람은 ‘피의 사람’으로 살해자와 다를 바가 없다(Sirach 34:21-22). 특별히 구약에서 말 3:5, 레 19:13, 그리고 신 24:14-15과 렘 22:13은 이러한 임금 착취자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과 화(禍)가 있음을 신랄하게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압제받는 가난한 자에게는 ‘만군의 주’이신 하나님께서 그들 편이 되고 있음을 말한다(이점에 대해서는 말라기와 이사야 5 장과 눅 16:19-31[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을 보라). 3) 사치와 방탕한 부(5절):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할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이러한 사람은 도살할 날을 기다리는 살찐 짐승(돼지)과 같은 운명이다(5절). 이렇게 착취를 통해서 땅에서 사치와 연락을 일삼는 사람들은 그들을 대항하지 아니한 옳은 자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6절)을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음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하겠다. 음행(淫行)과 사치(奢侈)와 치부(致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계 18 장을 자세히 읽어 보라.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옷)들을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사용해야 함을 주지해야 한다. 만약에 우리의 삶이 재물을 통해서 하나님(예수님)을 섬기며 살았다면? 그 날에 인자가 왔을 때 하나님 보좌 앞에서 복 받는 의인의 모습은 주님을 공궤한 자들이다. 여기에 대해서 마 25:31-46을 읽어 보라.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저희도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치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4.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림(6절)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우리는 여기서 억울하게 압제 당하는 가난한 자와 압제하는 부자 사이의 대조를 본다. 과연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과 오늘 우리의 관심 사이의 차이를 우리는 잘 판별하고 있는가? 앞의 상인들처럼 오직 이익과 번영만 추구하는, 세속적 축복만 추구하는 이기적인 경건과 영성을 가진 자들이 우리가 아닌가?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하며 아니 오히려 그들의 고통을 과중시키는 사람은 아닌지? 제 10 과: 그러므로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약 5:7-12)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인간이란 모두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시험을 만나면 본성과 연약함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 시험을 만나면 인내심(참음)이 바닥이 나게 되어 원망이 생기고 기회주의자가 되어 진실치 못한 사람이 되기가 십상이다(거짓/헛된 맹세). 여기에 야고보는 시험을 만난 구약의 두 인물들을 중심으로 인내와 기도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 본문에 언급된 욥과 엘리야는 인내와 기도로 시련을 극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을 소유한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역사의 결말을 알기 때문에 인내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기도한다. 특히 ‘주의 강림’(7-8절과 9절)은 이 단락에서 여러 번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위의 두 주제들은 이미 약 1 장(특히 2-4절)에서 나타난 바 있다: 시련 -> 인내와 기도 -> 축복/결말/완성. 1. 그러므로 형제들아 길이 참으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8) 특히 야고보는 ‘길이 참음’(makroqume,w)에 대해 교훈하면서 “하늘을 보며 사는”(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며 사는) 농부들이 하나님의 법칙에 순종하며 추수 때까지 결실을 바라며 사는 것처럼 우리도 시련가운데서 주님의 강림(결과)을 바라며 하나님의 법도(뜻)를 따라 인내하며 살 것을 권면한다. 여기 추수 때까지 기다리는 농부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끌기에 충분한 영상이다. 이들은 추수(‘땅의 결실’)를 위해 이른 비(씨뿌리기 전의 가을)와 늦은 비(씨뿌린 후의 봄)를 기다린다.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은택을 바라며 어려운 때에 하늘을 바라며 살도록 촉구한다(cf. 1:17). 그러나 현실은 도리어 길이 참음과 인내에 비해 원망과 헛된 맹세로 나아갈 때가 많다. 길이 참음과 인내의 누수현상은 원망과 헛된 맹세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마음을 굳게 함으로 되어진다(8절). 그러므로 길이 참음과 인내는 참된 소망 즉, 주의 강림을 믿고 바라기 때문에 가능하다: 소망의 인내가 바로 그것이다. 1) 서로 원망하지 말라(9절) 압력 하에 있을 때 인간은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에 대해 불평하고 원망하기를 잘한다. 마치 열을 받을 대 시끄러운 소리로 끓는 냄비처럼 요란한 우리(원망하는 우리)가 아닌지 생각해 보라. 2) 헛된 맹세를 버리고 신실한 사람이 되라(12절)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인간은 압력(시련과 고난)을 받을 때 그 인격이 시험을 받는다. 즉 성숙이 측정된다. 그 중에 특히 그 마음이 시험을 받는다. 그 중에 가장 비근한 예는 원망하는 마음, 신실치 못한 마음이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표현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오합지졸과 같은 신앙인지 아니면 베테랑과 같은 신앙인지가 드러난다. 고난을 통한 인내의 학교에서 수업 받지 못한 크리스천이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은 미숙한 신앙이다. 성급함, 원망, 불평, 헛된 맹세, 거짓, 그리고 신실치 못함. 등. 여기에 특별히 마음을 ‘굳게 함’(sthri,zw)이 요구된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cf. 신 4:9). 마음의 심지를 굳게 함(초점화)과 마음의 허리를 동이는 것(cf. 벧전 3:14)이 요구된다. 2. 선지자들(특히 욥)의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本):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야고보는 고난과 오래참음의 본(本)으로 선지자들의 삶을 제시한다(10절; cf. 마 5:12; 눅 6:23; 11:49-51). 그리고 덧붙여 인내하는 자가 복되다고 선언한다(cf. 약 1:12). 선지자들의 인내는 환난을 참는 긴 고난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특별히 이 경우에 욥의 인내는 가장 탁월한 모범이 된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to. te,loj kuri,ou)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11절). 여기서 주께서 주신 결말이란 ‘주의 목적’으로 번역될 수 있으며 예수의 생애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수난의 결과인 주의 결말(죽음과 부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리고 욥의 생애에 있어서 결말이란 욥 42:12의 말씀을 들 수 있다: “여호와께서 욥의 모년(暮年)에 복을 주사 처음 복보다 더하게 하시니”. 특별히 욥은 시련 중에도 입술(혀)로 범죄(불평과 원망)치 않았다: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1:20-22);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욥 2:10). 이러한 욥의 모습은 우리에게 정말 귀감이 된다. 결론적으로 야고보는 ‘하나님은 가장 자비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분’(11절)이라고 소개한다. 여기 가장 자비롭다는 단어(polusplagcvoj)는 poluj와 splagcnon의 합성어로 ‘full of compassion’을 의미한다. 즉, 고통 가운데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기는/민망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또한 사랑하는 자녀들을 대하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시련 중에 있는 우리를 대하는 하나님의 모습은 환난 중에 두 마음을 품고 있는 우리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제 11 과: 모든 상황에서 기도하라(약 5:13-20)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찌니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 야고보 감독은 이제 기도에 관한 교훈으로 서신을 끝마치고 있다. 특히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여러 가지 시험들을 만나고 있는 신자들에게 길이 참을 것을 권면한 야고보 감독은 이 모든 것들이 기도가운데 진행되어야 함을 권면한다. 흔히 야고보서를 행위에 관한 서신으로 이야기한다. 물론 야고보서는 신앙이 있노라 하면서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권면의 서신이다. 그러나 야고보서가 결코 신앙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다. 서신의 전후에서 그는 기도를 언급함으로써 그가 강조하는 신앙의 행동인 경건은 곧 기도를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낙타무릎’이라는 별명을 가진 기도의 사람, 야고보의 기도의 권면은 우리의 주의를 끌기에 충분하다. 사실 신앙의 행동은 기도로부터 나온다. 기도가 없는 경건이란 자기 자랑, 자기 확신, 자기 성공, 자기 공적일 수가 있다. 기도는 신앙적 삶의 알파(Α)요 오메가(Ω)다. 이것이 야고보가 서신의 서두(1:5이하)와 말미(5:13-18)에서 기도를 언급하는 이유다. 1. 모든 상황에 기도하라(5:13-18)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상황(고난; 행복, 그리고 병중)에 절대적으로 충족하신 분이시다. 이미 앞서 묘사한 것처럼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 내려온다”(1:17). 고난의 상황이나 즐거움의 상황 그리고 병중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야고보의 권면처럼 기도하기를 주저해서는 안 된다. 정통 이슬람 신자는 하루에 5번 씩 기도한다고 한다: 아침, 정오 늦은 오후, 그리고 일출과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고 그들의 성지(聖地)인 메카를 향하여 기도한다. 그러나 신자는 어떤 곳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고 그 분께 기도한다. 신자의 신자됨의 모습 중에 하나가 기도하는 삶이다.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pray in the spirit on all occasions]”(엡 6:18),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 “기도에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골 4:2),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 4:6)는 서신 말미에서의 바울의 권면은 오늘 본문에 가장 적합한 말씀인지 모른다. 참된 종교란 인생의 모든 국면과 삶의 정황을 다 다루어야 한다. 1) 고난의 상황(13a절) 여기에 표현된 ‘고난받다’(kakopa,qew)라는 단어는 문제와 불행과 환난으로 인해 고통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러한 고난은 걱정이나 재난, 그리고 비통들을 야기시키는 개인적인 상황들이나 육체적 환경들을 포함한다. 어느 인생도 고난이 전혀 없는 인생은 없다. 고난은 삶의 한 부분이다. 앞 구절과 연관시켜 이해하자면 부자들의 손에서부터 압제와 고통이나 그와 유사한 비통한 상황들(여러 가지 외부적 시련)을 당할 때에 사람들은 대부분 불평, 원망, 거짓 맹세와 거짓말로 반응한다. 그러나 경건한 신자는 시편의 말씀처럼 “환난의 날에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는다”(시 50:15; 86:7; 120:1; 59:16; 91:15; 138:7). 하나님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신뢰할 수 있는 우리의 등불이시다. 우리의 심령에 이 불이 꺼지면, 불평, 원망, 격노, 감정대립으로 치달아 육체의 것을 심고 거둔다(갈 5:16ff).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밖은 캄캄해도 내 심령에는 불이 꺼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라고 외친다. 정말 주님은 어두움가운데 등불이며 폭풍과 풍랑 속의 등대이며 혼란과 요동 속에 평안이다. 내 인생이 엎질러진 물처럼 되어도, 내 삶이 홀랑 뒤집혀 져도 우리에겐 기도의 기회만은 남아있다. 찬송가 342장은 이 교훈에 적절한 찬양이다. 주님 역시도 2) 즐거워하는/행복한 상황(13b절) 고난의 상황과 반대로 행복한 상황, 즐거운 상황에서 신자의 반응은 하나님께 찬양하는 일이다. 어려울 때에 기도와 행복할 때의 찬양은 신자의 삶의 주된 모습이기도 하다. 감사와 찬양의 삶이 없는 신자는 진정한 신자가 아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안심이 되는 상황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잊기 쉽다. 각양 좋은 은사와 선물이 다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는 줄을 알고 그 분께 감사하고 그 분을 찬양하라. 3) 병든 상황(14-16절) 고난과 행복의 상황이 아닌 질고(병)의 상황을 저자는 언급하고 있다. 신약에서 이 단어는 어떤 형대로 서든지 육체적 연약함을 가리킨다. 아마도 본문의 정황에서는 많이 아픈 경우를 가리킨다. 그렇기 때문에 장로들을 청하여 “그(녀)를 위하여” 기도한다. 초대 교회의 장로들의 역할 중 하나는 병자를 심방하고 기도하는 일이었다. 지금도 이 전통은 교회에 계속된다. 여기서 강조는 기도에 있다. 우리는 여기서 병든 상황에서 기도할 때에 따라야 할 절차를 언급하고 있는 점은 흥미롭다. 치유는 단지 의사와 약만의 영역(일반은총)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치유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한 기름은 그라코-로망 사회에서 의약적 목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병자에 대한 기름 바름과 기도의 모습은 치유에 대한 균형 잡힌 태도를 잘 제시한다. 이것은 치유에 대한 우리 시대의 잘못된 견해(양극단의 견해)를 교정시켜 준다. 즉 치유란 오직 의사와 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견해와 함께 치유란 약을 써서는 안되며 오직 기도로 고침 받아야 한다는 견해를 교정해 준다. “하나님은 치료 우리는 봉사”라는 구호는 의미 있는 표현이다(15절). 병자를 위한 기도가운데 내적 치유(죄 고백과 용서)는 참 중요하다. 이 치유는 동동체적 의미를 지닌다. 1) 교회의 장로들을 초청 -> 장로들의 역할(심방) 2) 기름(주의 이름으로 바르고) + 기도 = 하나님의 일반 은총 + 특별은총 모두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진행된다. 또 다른 해석으로서는 기름 바름은 기도의 내적인 능력에 대한 외부적 표시로 곧 기도행위의 한 부분으로 이해 될 수 있다. 중세에 와서는 병자성사 혹은 종유성사로 시행되었다. 3) 중보 기도가 요구: “위하여 기도” 4) “주의 이름으로 기도”: 초대교회의 치유와 축귀의 관계 결과적으로 약 5:13-16은 우리가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기도해야 함을 교훈한다: 간구, 찬양, 도고(중보), 죄 고백. 이것이 낙타무릎을 가진 사람 야고보의 권면이다. 2. 그러면 어떤 기도가 효과적인, 응답 받는 기도일까요? => 기도의 능력 1) 믿음의 기도: 기도의 분량, 빈도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신뢰의 기도 물론 긴 기도가 필요하고 자주 계속된 기도가 요구되지만, 응답받는 기도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뢰(믿음)의 기도여야 한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 예수님 병든 자를 고치신 후에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히 11:6). 2) 죄의 고백 고난은 주님/복음/의(義) 때문에 발생하지만 때론 고난은 자신의 잘못(죄)으로 인해 찾아오는 경우가 있다. 교회 안의 문제나 개인의 문제가 공동체의 죄나 개인의 죄로 인해 찾아온다. 이런 경우에는 죄 고백이 필요하다. 모든 병이 다 죄의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한 훈련(성화)용 도구인 질병을 주신다. 그럴 때는 죄 고백이 필요하다. 스스로 깨닫지 못할 때는 중보 기도가 필요하다(14-15절). 그러므로 죄 고백이 없이는 능력 있는 기도, 응답 받는 기도란 있을 수 없다. 죄 고백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깝게 하며 친밀하게 한다. 공동체 내에서도 죄 고백이 없이는 진정한 부흥은 없다. 회칠한 성장, 외관상 성장일 뿐이다. 3) 집중적 기도 16절의 의인의 간구라 할 때 그 간구의 의미는 헬라어로 보통 ‘기도’와 달리 ‘간구’로 표현됐다. 즉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 있는 특별한 기도를 의미한다. 커다란 필요 가운데서 매달리는 기도를 의미한다. 심령을 쏟는 기도 즉 한나의 기도와 같은 모습을 말한다. 4) 의인의 기도: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완전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사는 사람을 말한다. 이럴 때에 기도는 강력하고 기도의 응답도 효과적이다. 내적 힘을 가진 기도, 심령을 움직이는 기도, 응답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마음을 끄는 기도이다. 하나님은 정직한 자의 기도(잠 15:8), 의인의 기도(잠 15:29)를 잘 들으신다. 바로 이러한 기도의 예가 엘리야의 기도다(17-18절; cf. 왕상 17:1-18:45). 여기 소개된 엘리야는 야고보서에서 네 번째로 소개된 인물이다: 아브라함; 라합; 욥; 엘리야.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엘리야는 믿음의 기도, 진지한 기도, 필사의 기도를 드린 기도의 모범으로 소개되고 있다. 3. 형제를 돌보는 삶을 살아라(19, 20절) - “너희 중에” -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을 돌보면서 - 미혹되어 진리를 떠난 사람을 돌보면서(환난과 핍박과 유혹으로) 압력과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의 주의를 돌아보면 우리가 해야할 일들(봉사들)은 많다. 5:7-20에 나오는 이 세 가지 행동: 인내, 기도(믿음), 돌봄은 우리 주님이 교회를 향해 찾으시는 삶의 모습이다(계 2:2). 곧 소망의 인내와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가 종말에 처한 우리들이 온전함(성숙함)을 향해 열매 맺어야 할 크리스천의 삶의 특질들이다. 참된 경건, 성숙을 향한 몸부림을 쳐야하는 오늘 우리들이 안팎의 유혹과 시험 앞에서 앞서 간 신앙의 선진들의 본과 특별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승리하신 그 모습을 기억하며 말씀과 기도로 성령 안에서 거룩하여져 가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야고보서를 통해서 참된 경건과 영성이 무엇인지를 보았다. 그것은 우리의 삶의 모습 속에서 우러나오는 경건을 의미한다. 언어생활(언행일치의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자비를 실천하는 삶, 곧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이웃 사랑의 실천적 삶으로서 믿음과 행위가 일치하는 삶을 말한다. 이 신행일치의 삶은 외모주의와 차별주의를 탈피하는 삶을 포함한다. 그리고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말한다. 이 모든 것은 영적 삶에 뿌리를 둔 것으로서 기도하는 삶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서신을 통하여 자주 언급한 것처럼 ‘낙타무릎의 야고보’가 ‘의인 야고보’인 사실은 그의 서신의 깊이를 더 해 주는 모범이기도 하다.
- 비교적 젊은 개혁주의자들의 아지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