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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러 떠내려 가지 않도록… 押し流されないように。( 2025년 2월 9일 주일예배)
본문 히브리서 2:1~4
히 2:1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바를 더욱 굳게 간직하여,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습니다. 2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효력을 내어, 모든 범행과 불순종하는 행위가 공정한 갚음을 받았거든, 3 하물며 우리가 이렇게도 귀중한 구원을 소홀히 하고서야, 어떻게 그 갚음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 구원은 주님께서 처음에 말씀하신 것이요,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확증하여 준 것입니다. 4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표징과 기이한 일과 여러 가지 기적을 보이시고, 또 자기의 뜻을 따라, 성령의 선물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그들과 함께 증언하여 주셨습니다.
1. だから、わたしたちは聞いたことにいっそう注意を払わねばなりません。そうでないと、押し流されてしまいます。2. もし、天使たちを通して語られた言葉が効力を発し、すべての違犯や不従順が当然な罰を受けたとするならば、3. ましてわたしたちは、これほど大きな救いに対してむとんちゃくでいて、どうして罰を逃れることができましょう。この救いは、主が最初に語られ、それを聞いた人々によってわたしたちに確かなものとして示され、4. 更に神もまた、しるし、不思議な業、さまざまな奇跡、聖霊の賜物を御心に従って分け与えて、証ししておられます。
지난 주일에는 천사들의 역할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듣고 배웠습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해 순종하는 성도들을 돕는 역할이 천사들의 존재가치입니다. 그러므로 세속의 삶에서 천사들처럼 여겨지던 대단한 존재들을 숭배하고 의지했던 무지몽매와 오해의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복음을 믿고 거듭나서… 『거룩한 삶』을 소명으로 삼아, 하루에 하루만큼 주어지는 사명의 일상을 삽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돕기 위해 바람처럼 불꽃처럼 쓰시며 보내시는 천사들의 도움을 풍성히 누리며 기쁨과 즐거움으로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앞서 말한 천사들이 왕이요, 주인으로 섬기는 예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령하셔서, 우리에게 밝히 나타내시고 들려주신 구원의 복음에 자신을 붙들어 맬 것을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간단히 말해 이 땅의 모든 혼란과 무질서, 그리고 사악함과 온갖 나쁜 일들에 휘말리거나,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전도자들로부터 들은 바, 복음을 붙들어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이 한 마디가 오늘 전할 메시지의 결론이며, 핵심입니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붙들어야 하고, 붙들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 새번역에는 2장 1절 후반부를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이 없어야 마땅하겠다”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요. 개역성경은 이 구절을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원어의 직역에 더 가까운 번역은 개역성경의 표현입니다. 헬라어 『파라르레오』는 흘러서 지나가다, 씻겨 없어지다… 등의 뜻인데요. 성경에서 이 곳에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새번역 성경이 기록할 때, 잘못된 길로 빠져드는 일… 이라고 의역하여 번역한 것은 우리의 소명과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요.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는 유일한 소명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세속적인 국가인 이집트에서 구원하시고, 제사의 율법을 가르쳐 주시며 명령하신 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레 11:45)
여러분, 꼭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남들보다 좀 더 나은 살림살이를 갖추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잘난 사람으로 인정받기 위해, 아니면 좀 더 재미있고 즐거운 놀이를 위해서 사는 것도 아니지요. 그렇다고 매일 도전해 오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존재로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의 사랑으로 태어났고, 그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 소명 가운데 각자의 사명으로 나타나는 삶과 일상이 있는 것입니다. 그 일상에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의 소유도 필요하고, 존엄성도 필요하고, 인간관계도 필요하고,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도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맡기시는 것입니다. 소명을 이루기 위해 각자에게 각자의 사명이 있는 것이지요.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딤후 2:20)
사람 사이에 서로 비교하는 눈으로 보면 금 그릇이 은 그릇보다 더 귀해 보입니다. 그 재료(재능과 실력)로 평가받는 것이지요. 그래서 어떤 삶은 귀하게 쓰임 받는 것처럼, 어떤 그릇은 천하게 쓰임 받는 것처럼… 평가가 되기도 하는데요. 하지만,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금이냐, 은이냐를 기준으로 사용하지 않으시고, 그릇이 깨끗한 지의 여부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딤후 2:21)
그러므로 자신의 가치를 돈이나, 혹은 영향력, 인기, 재능, 실력 등으로 헤아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말 거룩한 자의 삶을 소명으로 가졌는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종종 저에게 문자로 뭔가 메시지가 도착했다고 연락을 하실 때가 있습니다. 엇그제도 무슨 사이트가 통합이 되면서 몇 만 원짜리 소액결제를 사용할 수 있다는 문자를 받으셨다면서 연락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검색으로 알아보니 그와 같은 수법으로 휴대폰 해킹을 하는 앱이 설치되고, 그 휴대폰이 사기꾼의 도구가 되는 사건들이 있다고 합니다. 보이스피싱이나, 혹은 문자로 오는 각종 피싱 사기가 횡행하고 있는데요.
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온갖 속임과 부정과 부조리한 일들에 연루되어 어려움을 겪는 사례들을 들어보면 일상생활의 작은 유익이나 이익을 남기기 위한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하는 경우들도 많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땅에서의 생존만을 위해 살 때 우리는 사기와 속임의 덫에 매우 가까워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은 자신의 마음 문 앞에 도사리는 범죄의 유혹을 경계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7)
그러나 가인은 이런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고, 결국 들판에서 자기 동생인 아벨을 돌로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단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지키고 싶던 자존심이 상처를 받은 순간에 자신의 거룩함을 지키기 못했기에 살인까지 저지르고 말았던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소명을 갖고 사는지를 분명히 붙들어야 할 것입니다.
2절에 보시면 “천사들을 통해 하신 말씀”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는 율법과 거룩함을 위한 가르침을 뜻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불순종과 온갖 범죄를 경계하는 가르침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어떤 종교적인 실력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자기 수련과 수행을 위한 도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요.
복음을 믿는다는 것의 기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거룩한 존재로 회복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뭔가를 더 많이 해야 하고, 혹은 한 것을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주님을 알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완성하셨습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롬 8:3-4)
로마서의 이 말씀은 정말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기억하고 잊지 말아야 할 구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복음의 값어치를 아주 뚜렷하고 또렷하게 고백하는 구절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율법이나 교리, 혹은 기독교라는 종교적인 지식이 능수능란한 사람이 되는 것이 삶의 목표와 소명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종종 사람들이 오해하고, 우리도 왜곡하듯이 거룩하다는 것과 성령에 충만하다는 것이 전혀 세속적인 것과 동떨어진 말과 행동을 습득해야 하는 것(현실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과 구원은 나의 태도나 행동으로 인해 그 어떤 더러움의 영향도 받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우리가 죄인인 상태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믿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말씀의 가르침에 순종하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이고요. 이런 삶의 태도와 자세가 우리의 유일한 소명임을 인정하고, 매일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지요. 더 많은 노력으로 구원을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완성하신 구원에 거룩한 삶으로 응답하기 위한 열심인 것이지요.
3절이 고백하듯이 우리가 그 구원을 소홀히 하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서 완벽하게 해결하신 죄의 문제와 영생의 약속을 붙들 수 없다는 뜻인거죠. 바꿔 이야기하면 구원을 소홀히 하면 영생의 견고한 안전벨트가 느슨해 지고, 결국 이 땅에서의 온갖 사기와 속임과 유혹이 일으키는 사고에서 생명을 보전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는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구원과 영생의 약속인 복음을 듣고, 거룩한 삶이라는 소명에 자신을 붙들어 매는 것이 심판을 피하는 유일한 길이거니와 동시에 이 땅에서의 안전하고 평안한 삶을 사는 기본적인 삶의 자세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단지 예수님께 열심히 기도하고 바라고 구하는 것을 성취하는 것으로만 이해하고 단정해 놓으면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더라도 참된 평안과 든든함을 체감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아니 거의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에게 기도의 응답이 무의미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과 이적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4절에 하나님께서 표징과 기이한 일들과 기적을 보여주신다고 하지요. 더불어 성령의 선물을 나눠주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성령의 선물이란 성령님 그 자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들의 이유를 복음을 들은 이들에게 그 복음을 더욱 견고하게 간직하도록 하기 위한 수단으로 허락하시는 것이지요. 1절에 더욱 굳게 간직하다고 할 때의 헬라어 표현은 『프로세코』라는 단어를 사용하는데요. 이는 ‘마음에 두다’, ‘관심을 가지다’는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서는 ‘주목하다’, ‘열중하다’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이 단어의 용법을 종합하여 이 구절을 이해하자면, 누군가로부터 들은 복음을 마음의 중심에 견고하게 깊이 기둥으로 박아두고, 그 복음의 기둥에 자신의 가치관, 세계관, 생각, 감정, 이성 등등 모든 내면세계의 것들을 매어 둔다는 뜻으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저는 이 구절을 우리가 각자 자기의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박아 세워 두고… 그 십자가에 나의 말과 행동과 소유와 명예와 존재감과 즐거움을 붙들어 매어 두자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복음에 자신을 붙들어 매어 두면 이 세상의 그 어떤 유혹과 속임과 범죄와 두려움과 걱정과 고난과 괴로움의 풍랑이 넘쳐나도 결코 휩쓸려 떠내려가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믿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홍수를 만납니다. 자기만의 광야를 걷게 되지요.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을 고해라고 정의합니다. 고통스러운 바다라는 것인데요. 어떤 나그네가 광야를 걷다가 갑자기 화난 코끼리가 쫓아와 정신없이 도망칩니다. 그러다가 한 우물을 발견하고 두레박에 연결된 줄을 타고 그 안으로 숨었습니다. 쫓아오는 화난 코끼리를 피해서 안도하고 있던 나그네는 곧 그 우물이 죽음의 우물인 것을 발견하지요. 벽에는 온갖 독충들이 우글거리고, 우물 바닦에는 거대한 독사가 그 나그네를 삼키려고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손에 힘은 빠져가는데 더욱 최악인 것을 그가 의지하는 동앗줄을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가면서 갉아먹고 있습니다. 밖에은 아직 코끼리가 우물 주의를 배회하고 있고, 우물 안은 죽음의 그림자가 너무도 확실합니다. 절망과 좌절의 그 때 우물을 덮고 있는 지붕의 처마에 달려 있는 꿀벌집에서 꿀 한 방울이 떨어져 그의 입술에 닿았습니다. 그 순간 그는 다른 모든 악조건들을 잊고 벌집에서 떨어지는 꿀 한 방울을 애타게 기다리며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이 나그네의 모습이 곧 우리의 인생이라고 설명하는데요.
과연, 생존만을 위해서 애쓰고 몸부림치는 인생이라면 그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존만을 위해 애쓰고 수고하는 쳇바퀴에서 벗어나게 해 주셨다는 복음을 믿는 자유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땅에 생존과 생활을 위해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이들을 초청하고 부르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시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고 복음을 믿는 자가 되어 이제는 생명을 지키며 사는 인생의 축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멍에를 함께 매자고 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 11:29)
예수님의 멍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거룩한 소명으로 사는 유일한 에너지원입니다. 삶은 진즉에 부조리하고 부족하며 불의로 오염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는 직접 그 책임에서 면제되었습니다. 그래서 당당히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마 16:24-25)
정말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싶으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따라 주님의 멍에를 함께 매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의 온갖 문제가 더 이상 문제 되지 않는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경험하게 됩니다. 성령의 능력과 성령의 선물과 성령의 열매를 실감나게 경험하게 되지요.
우리의 진정한 가치와 존엄성은 세속적인 판단기준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세속적인 시각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지속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문제보다 더 크게 일하시며 든든하게 역사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우리를 눈동자처럼 지키고 계시기 때문이지요.
저와 여러분은 우물 속에 빠져 멸망한 운명을 잊기 위해 꿀만 떨어지기를 갈망하는 허망하고 가련한 나그네의 삶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에 안전하게 붙들려 천사의 도움으로 영생의 하늘을 힘차게 날고 있는 참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이미 된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약속의 주인공으로 매일 하루에 하루만큼의 축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은 우리의 노력이나 실력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완성하신 약속이며,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복음을 고백하는 그 음성을 듣고 기억함으로 나를 견고하게 붙들고 계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입니다. 세상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혹은 보다 윤택한 생활을 즐기기 위하여 각자의 인생을 허비하던 삶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이렇게 회개하면 거듭납니다. 거듭나면 영생하는 생명으로 거룩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함으로써 거룩한 삶을 소명으로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축복과 능력과 기적을 끝없이 채우시는 것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풍성함의 주인공으로 일상을 생명력 넘치게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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