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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동영상) 1970년대초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를 결심한다. 첫번째 목표는 대형 조선소건설, 조선산업 육성에 강력한 의지를 가졌던 박 대통령은 여러 기업에 의사를 타진합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곳이 없었다. 당시 영세한 조선소들은 만년 적자에 시달렸고 조선업은 이윤을 장담할 수 없는 장사였다.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대형 조선은 기업의 명운을 거는 도박, 하지만 정주영은 조선업 진출을 결심한다. 대통령 박정희의 의지와 기업인 정주영의 모험정신, 훗날 세계 조선산업을 뒤흔든 무모한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최원정/KBS 아나운서: 사백 세번째 역사저널 그날입니다.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잘 살아보세 네번 째 시간인데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권유와 정주영 회장의 결단으로 대한민국 조선산업이 이렇게 시작이 됩니다.
이시원/배우: 대한민국의 造船하면 진짜 두말하면 입 아프죠. 저는 세계 수주 1위 가장 많이 들었던 게 조선업이었던 것 같애요.
허준/방송인: 양궁에서 1위 우와~ 응원하기도 하고 티브이 1위 하면 야~ 우리 티브이가 전 세계 1위야 이런 때가 있었는데 조선 1위하면 배를 딱히 타본 적이 없어요.
김동환/삼프로TV대표: 조선하면 사실 그게 우리 삶과 동떨어져 보이잖아요. 우리가 생필품으로 쓴 일은 없으니까. 예를 들면 유람선 같은 건 탈 일은 있을 지언정 정말 컨테이너선 이라든지, 유조선 이라든지, 요즘 잘 나가는 LNG선, 이런 걸 탈 일은 우리 인구의 99.99%는 없는듯~ 하물며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 가본 일은 많이 없는데 한번 가보세요. 저는 몇 번 가봤는데~
최원정: 저도 가봤어요
김동환: 어떠셨어요?
최원정: 저는 뉴스에서 보면 크다 그러는데 실제로 가서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규모, 거인국에 와 있는 것 같애요.
김동환: 압도 당하는 느낌 그 정도로 큰데 조선산업이라는 게 자동차를 만들어서 실어 나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니까 유조선 없으면 겨울을 어떻게 나요.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잖아요. 우리나라에서 들고 나는 화물의 운송은 거의 99. 몇 %는 배에 의존합니다. 그래서 조선산업은 우리가 이런 경제 규모와 삶을 영위하는 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최원정: 무역선이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루 하루 살아갈 수 없는 것인데~
최태성/한국사 강사: 쉽게 얘기하면 배 안 오면 자동차 운전을 못하는
이시원: 그러니까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역활을 하는 산업이 조선업이잖아요.
박태균/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그렇죠, 조선이 중요한 게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조선공사 라는 걸 1950년 1월에 만듭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배를 만들고 해군을 건설하는 데 대해서 굉장히 관심이 많았던 사람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미국이 한국에 대해서 공군하고 해군 만드는 것에 대해서 지원을 안해 줬습니다. 왜냐면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그러니까 혹시 배나 비행기 있으면 가지고 올라가는 것 아냐 그래 가지고 주로 했던 게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에서 활약했던 퇴역한 배들을 사가지고 오는 노력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한조선공사를 만드는데 이걸 만들고 6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생해요.
허준: 제가 지금 열 받는 게 배 주고 비행기 주면 북으로 올라갈까봐 안 줬는데 근데 먼저 북에서 내려왔잖아요. 줬으면 그걸 우리가 잘 사용할 수 있었는데~
박태균: 1970년대 오기 전까지는 우리 造船은 완전히 죽어있었어요.
최원정: 그랬던 우리나라가 지금 세계 조선소 빅3가 다 우리나라에 있고 수주액 60% 수준의 나라잖아요.
최태성: 저는 이 내용을 보면서 조선후기의 박지원 박제가 실학자들있잖아요. 그들의 소망이 뭐냐면 조선이 제발 선박을 활용하는 게 꿈이었는데 (북학의 박제가-백대의 수레가 싣는 중량이 하나의 배를 당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천 리 길도 수로로 만 리를 가는 배를 따를 수 없다), 그분들의 꿈이 드디어 지금 이루어진 것을 보면 너무 자랑스러워요.
최원정: 처음 보니까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산업을 하라고 강력하게 권고를 하는데 기업들은 다들 약간 빼고 있는 상황이었잖아요. 이게 될까 싶어서 이게 뭔가 안 되는 산업이라는 인식이 있었나보죠?
허준: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웠잖아요. 자동차 돈이 될 것 같으니까, 각하, 자동차 산업 도와 주십시오. 강력하게 요청했잖아요. 이런 산업을 하기 위해서는 제철소가 필요하다. 임자가 맡아서 해! 명령을 해버리고~ 근데 이건 조선이라는 게 돈도 안 되고 국가 사업으로도 진행이 안 되니까 기업들이 돈이 되겠나~ 조선은 단순히 철판 부치는 게 아니잖아요. 엔진부터 시작해서 모든 핵심 기술들이 이 안에 다 들어가야 되는 건데~
최태성: 누가 사 줘야지!
최원정: 이건 내수가 아니고 수출을 해야 되는데
김동환: 조선은 사실 대표적인 수주산업이거든요. 물량을 수주하면 공사에 들어가서 납기를 맞추어서 납품을 하면 매출이 나오는 거거든요. 근데 수주와 납품까지 적어도 2~3년이 걸립니다. 그 정도로 큰 산업인데 조선하면 굉장히 노동집약적인 산업으로 인식을 많이 해요. 실지로 그런 면도 있고 그런데 핵심기술! 설계라든지 엔진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매우 고부가 가치고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이거든요. 이런 데에 대한 기술자들이 전무한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당시 환경에서 현대가 조선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정부의 고위 관료중의 한 사람이 현대가 조선업에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고 불을 부쳐서 하늘로 올라가겠다 라고 얘기 할 정도였다구요.
이시원: 한 마디로 절대 안 된다.
김동환: 대통령이 아무리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제가 말씀드린 건 사업의 영역이거든요. 배를 사줄 사람이 있어야지 이거는 철강이라든지 고속도로 놓는 거 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라고 했던 게 당시 환경이었어요.
박태균: 사실은 박정희 대통령은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배를 만들고 싶었어요. 1962년에 대한조선공사법이라는 것을 통과시킵니다. 대한조선공사를 공기업으로 해가지고 여기서 우리가 선박을 만들겠다. 그러면서 일본에 222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합니다. 이거를 공기업으로 하다 보니까 두 가지 난관에 부닥치게 되었어요. 하나는 정부 내의 다양한 부처들이 차관 들어오는 걸 정부가 보증을 서야 돼 말아야 돼 하면서 시간이 3~4년이 흘러가 버린 거에요.
최태성: 그림이 보입니다. 책임지기 싫으니까
박태균: 거기다가 차관은 일본이 주지만 기술도 같이 주어야 되는데 일본 쪽에서 기술은 별로 주고 싶지 않았죠. 그러다 보니까 68년까지 가버린 거예요. 근데 68년부터 부실 기업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청와대에다 부실기업정리 부서를 설치했거든요. 조사를 하다 보니까 대한조선공사가 대표적인 부실기업인 거예요. 그렇게 하다 보니까 정부에서는 깨달은 게 있어요. 이런 조선사업을 공기업으로 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 그러면 민간기업들이 주도를 하면서 정부가 어떤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가야 되겠구나 하는 게 정부 쪽에서 스스로 깨닫기 시작한 게 70년 전후 시기예요.
최태성: 정주영 회장도 이걸 처음 봤을 때 이게 말이 안 되는 거에요. 조선업에 들어가는 것은 명운을 거는 도박이다 어렵다 라고 스스로도 판단했던 거예요. 근데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따로 불러가지고 강하게 얘기를 하니까 정주영씨가 그런 얘기를 했더라구요. 하도 눈빛이 무서우니까 그럼 제가 한 번 해볼까요 라고 얘기 했다는 일화가 있어요.
허준: 조선업이라고 말씀 하셨잖아요. 그리고 수주에 2~3년이 걸린다고 말씀하셨잖아요. 돈을 잔뜩 투입했는데 배가 제대로 안 나와 안 팔려 그러면 현대 망하는 거잖아요.
김동환: 그러기도 하거니와 정주영 회장 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가들은 사업을 강제로 안 합니다. 어느 정도의 사업에 대한 가능성을 보지 않으면 어떤 사업가가 정부가 시킨다고 도산 위기의 길로 가겠어요. 그런데 최고 권력자와의 면담에서는 항상 죽겠습니다. 이만큼 도와 주셔야 됩니다.
최원정: 김 대표님, 말씀에 웃겼던 게 왜 매번 이렇게 큰 사업을 할 때마다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 그렇게 초치는 사람이 꼭 한 명씩 있나요?
이시원: 근데 이건 만들어낸 스토리 같애요. 그 만큼 모두 날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해냈다.
최원정: 신화창조의 이미지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
박태균: 조선 사업이라는 게 그냥 신화창조를 넘어서는 뭔가 있는 것 같애요. 이게 노동 집약적이면서 기술 집약적이고 자본 집약적인 사업이기 때문에 정주영 회장이 당시에 미국의 카이저 라는 회사를 벤치 마킹했다는 거예요. 이 회사가 처음에 건설업 하다가 나중에 조선업으로 가서 굉장히 성공했다는 거예요.
이시원: 현대는 건설로 고속도로로를 닦고 이랬잖아요.
박태균: 또 하나는 정부에서도 뒷받침을 하고
김동환: 그렇게 정부가 강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는데 고위 관료가 장을 지진다? 이건 너무 좋은 조건이죠. 장을 지진다는데
최태성: 포니 때도 내 손에 장을 지진다고 했었는데 나중에 머쓱 해졌잖아요.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는 육상에서 뚝딱 뚝딱 건설을 워낙 잘 했으니까 배 만드는 것도 하면 되겠구나. 자신감이 있었을 것 같애요. 그리고 국가에서도 지원하겠다고 하니까 이 기회에 내가 한 번 도약 해보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겠네요.
박태균: 플러스 저는 생각의 전환이 있었던 것 같애요. 60년대 까지 조선은 수입대체였는데 70년년부터는 수출로 가는 겁니다. 우리가 만든 배를 그냥 수출한다.
최태성: 발상의 전환
박태균: 왜냐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경제성장을 했냐고 할 때 수입 대체산업에서 수출 주도형이라고 얘기 하잖아요. 아주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산업입니다.
김동환: 한 마디로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이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수출이 필수다 라는 인식이 있었고 그리고 거기에 가장 필요한 게 조선업이다. 그래서 남들이 다 안된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보자. 저는 왜 현대 그룹이었을까 현대 그룹의 모태는 현대건설입니다. 조선을 영어로 하면 shipbuilding이에요. 배를 짓는다고 표현하죠. 건물을 짓는다. 빌딩한다. Build up 한다. 그런데 사실 조선소에 가보면 건축적인 요소가 매우 많이 들어가 있어요. 건축기반의 사업가가 하기에 매우 적합한 사업이다.
허준: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가 어떻게든 해군력도 키우고 공군력도 키워야 된다는 생각을 했잖아요. 그런데 못 키웠잖아요. 그거와 마찬가지로 지금 박정희 대통령도 야~ 이거 우리 배 만드는 기술 없으면 안 된다. 우리 해군도 우리 힘으로 키워야 한다. 이런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최원정: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이라는 게 북한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월성을 갖기 위해서 노력했다 라는 면도 있네요.
박태균: 있죠, 허준씨가 지금 굉장히 중요한 면을 지적을 해준 게 1970년을 전후한 시기가 남북간에 NLL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시기예요. 한국전쟁 때 유엔군이 재해권까지 완전히 장악을 했었어요. 그래서 북한 앞 바다에 있는 섬들까지도 유엔군이 다 장악을 한 그런 상태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해 5도를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가 있었거든요. 북한이 60년대를 지나면서부터 해군을 복원하기 시작하니까 우리도 해군의 복원 필요성이 생긴 거구. 거기다가 우리 해군력이 자꾸 떨어지니까 60년대에 남한 해양 경비정들이 북한에 의해서 격침 당하는 경우도 있었구 나포되는 경우도 있었어요.
TV 방송: (동영상), 1967.1.19. 우리 어선단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적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의 포격을 받아 애통하게도 해군 당포함이 침몰되고 말았습니다. (전사 39명),
최원정: 조선업은 운명처럼 우리가 꼭 해야만 했던 산업이었네요.
최태성: 국방력 차원에서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포항제철이 1970년대 초에 시작해서 73년도에 쇳물이 처음 나온단 말예요. 그러면 쇳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철강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잖아요. 철강을 어딘가는 써야될 것 아녜요.
최원정: 그걸 우리가 쓰겠다.
최태성: 딱 맞는 비즈니스가 바로 조선산업인 것이죠. 원래는 조선소 설치를 어디다 할려고 했느냐 하면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에다 할려고 했거든요. 딱 맞아떨어지니까 그런데 현대가 사업자로 선정이 되면서 포항에서 울산으로 옮겨진 거죠. 굉장히 퍼즐이 맞죠.
허준: 모든 게 잘 맞는 게 순서적으로도 맞고 현실적으로도 맞잖아요. 바닷가에 NLL 부근이 뭐냐면 서해 쪽으로는 꽃게가 이거 NLL 못 지키면 대한민국에서는 간장게장은 언감생신입니다. 동쪽으로는 대게, 오징어, 명태, 대구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 만큼 수산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정말 많지 않데요.
이시원: 먹을 복은 많아요.
최원정: 허준씨가 제철 수산물에 대해서 진심이거든요.
허준: 알배기 봄 쭈꾸미 강추입니다.
이시원: 이게 산업지도도 바뀌고 우리 식탁에 먹거리 지도도 바뀌고 그럴 수 있었던 순간이네요.
김동환: 조선업을 경제적인 환경도 보셔야 되는데 사실 박정희 대통령이 수출입국, 수출전략 드라이브를 걸 잖아요. 품목을 보니까 모피인데 쥥크(쥐모피), 거기다가 가발, 옷, 신발 이게 진짜 많이 만들어야 되거든요. 100만불 팔래도 언제 그걸 100억불하겠어요. 그러니까 야~ 그거 좀 큰 덩어리 없냐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애요. 그런데 배는 기본적으로 어마어마 하게 비싼 거죠. 수주만 하면 한 방에 수출실적이 쭉 쭉 올라가니까 실제로 2005년부터 2008년 사이에 우리나라 조선업이 엄청 발전하거든요. 그런데 그때 우리 금융시장에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겼어요. 환율! 계속 달러가 들어오니까 원화 강세가 생겨가지고 그 정도로 외환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산업으로서 박정희 대통령이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최태성: 그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수출 100억불은 거의 국가의 운명을 건 사업이었잖아요.
이시원: 박정희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렇게 티끌 모아 봤자 태산이 되겠어? 큰 돌덩이 하나 가지고 와 봐! 돌덩이의 규모가 어느 정도 였어요?
김동환: 계산을 한 번 해볼 게요. 1974년도에 포니 5대를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을 하거든요.
허준: 5대도 수출해요?
김동환: 에콰도르로 수출을 하는데
이시원: 운송료도 안 나올 것 같은데?
김동환: 이게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인데 포니 국내 출고가가 그때 227만원 이었다고, 지금은 자동차를 수십만대씩 수출하니까 굉장히 큰 돈이 되지만 그때는 그런 상상을 하기에는 힘들었을 거란 말이죠. 당시에 우리나라 수출 총액이 11억 7300만 달러 였을 때 정부가 추산컨대 조선소가 완공돼서 연간 어느 정도 수출을 할 수 있냐 계산을 해봤다는 거죠. 2억 5000만 달러~총 수출액이 12억이 안 되는데 조선소 하나에서 연간 2억 5천만 달러면 그런 생각을 했겠죠. 조선소 2개 있으면??
허준: 수출 총액의 40%야
김동환: 그 정도로 큰 산업이라는 거죠.
TV방송: (동영상), 1976년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은 올해 수출은 목표액을 넘어서 80억 달러를 달성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내년에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라고 당부했습니다. 현대 조선은 선박수출 실적 3억 6천만 달러를 달성해서 3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습니다.
허준: 이 당시에 김칫국은 엄청 팔렸겠어요. 만들지도 않았는데 20억 수출얘기하고 야~ 이제 꿀꺽 꿀꺽 들이켜
최원정: 아직 조선소는 짓지도 않았는데 기대를 크게 한 것 같애요. 조선 산업은 국가적으로 경제, 국가 안보차원에서 꼭 진출해야 되는 산업이었고 또 대통령의 권유 하에 정주영 회장이 모험심을 가지고 시작을 했습니다. 근데 시작부터 잘 되지는 않았겠죠.
김동환: 조선소를 짓기 위해서 당시에 약 6300만 달러가 필요했는데 이중에 현대가 4300만 달러를 담당해야, 당시에 환율로 약 208억원의 외자를 충당했어요. 지금 208억원은 웬만한 부자들도 갖고 있는~ 4300만 달러가 어느 정도 큰 돈이냐 하면은요, 1971년 까지 국가 경제개발 예산의 15%에 해당돼요. 어마어마한 돈을 써야 되는 거예요.
박태균: 그러니까 72년에 산업합리화 자금이 나갑니다. 이 산업합리화 자금이 나갈 때에 거기에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조선산업 육성을 위해 나가는 자금부분이 있어요.
김동환: 당시에도 정부의 조선소 건설 자본 비율이 14% 정도 되었다고 그래요. 그러면 현대가 얼마를 책임져야 되느냐 86%륽 책임져야 해요.
허준: 아직 멀었는데~
김동환: 멀었는데, 어쨌든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큰 후광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정주영 회장의 계산은 이거 안 망한다. 정부가 있는 한 이건 안 망한다. 왜냐면 독점이잖아요. 그런 계산법도 했으리라고 봅니다.
최태성: 그런데 만만치 않아요., 왜냐면 현대가 담당해야 될 자금이 있잖아요. 이걸 빌리기 위해서 현대 정주영 회장이 직접 해외로 나가요. 그때 가져갔던 게 뭔지 아세요? 사업 계획서 한 장 그리고 조선소가 들어설 미포만 허허벌판 백사장 사진 한 장 이걸 들고 돈 빌리려 가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돈 빌리려 온 사람을 어떻게 할 거예요?
허준: 안 만나 줄 거예요.
최원정: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던 시절인데
이시원: 너무 허황된 거 아닌가요? 요즘 집 살 때 돈을 빌릴 때도 직업, 자산상황 등 꼼꼼히 체크하는데~ 종이 한 장 기술도 없고 그런 사람한테 어떻게 돈을 빌려줍니까?
최태성: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되잖아요. 정주영 회장도 속이 바짝 바짝 타는 거예요. 맨 처음에는 미국하고 일본을 통해서 돈을 빌려 볼까 했는데 모두 거절을 당해요. 그래 가지고 소문 끝에 영국의 선박 컨설팅 회사가 있는 데 거기에 롱바텀 회장이 있거든요. 그 회장을 만나러 가요. 이 사람을 설득을 해 가지고 은행 차관을 빌릴 수 있는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 사업계획서와 백사장 사진 한 장을 들고 가서 써 달라고 한 거에요.
故정주영 회장/1986년: (동영상), 땅도 안 사놓고 현재 우리 미포 백사장 사진만 들고 다니면서 “돈을 꿔주면 여기다 조선소를 짓겠다” 하면서 돈을 빌리려 다닌 겁니다.
최태성: 롱바텀 회장이 어떻게 나오겠어요?
이시원: 안 사요 안사! 가세요, 가세요
최원정: 잡상인 금지!
최태성: 이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지는 데 정주영 회장이 이걸 하나 꺼내 듭니다. 자~ 이걸 하나씩 받으세요 (한국돈 500원 지폐)
이시원: 이거 진짜 주는 거예요?
최태성: 500원 지폐를 꺼내 듭니다. 요 뒤를 보시면 뭐가 있느냐면 거북선이 있어요. 이걸 롱바텀 회장에게 딱 보여 주면서 봐라 해양 대국 영국이 300년 전에 배를 만들었지만 우린 이미 1500년 대에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다. 비록 지금은 산업화가 조금 늦었지만 우리의 잠재적 역량은 정말 뛰어나다. 한 번 믿어줘 봐라. 그때 롱바텀 회장이 어떻게 했겠어요?
이시원: 원더풀! 멋지다 정주영!
허준: 정말이에요? 아니 그건 말이 안돼, 이거 봤다구 추천서를 써준다는 게 저는 말이 안 된다고 봅니다.
박태균: 약간 보이스 피싱 같다~
허준: 여기서 우리가 추측은 하나 할 수 있습니다. 영국이 해양대국으로서 굉장히 자부심이 강해요. 굉장히 강한데~ 영국의 해군사관학교에서도 교육을 하는 정말 최고의 영웅이 누구죠? 넬슨(1758~1805) 제독~이 넬슨 제독과 동급으로 취급하는 전 세계 유일한 제독이 한 사람있습니다.
이시원: 이순신 장군!
허준: 롱바텀 회장이 혹시 만약에 해군사관학교 쪽이나 넬슨에 대한 미음이 남다른 사람이라면 이게 진짜 이순신의 나라였어?
박태균: 일본 해군에서도 사실은 이순신 제독은 거의 신적인 존재입니다.
허준: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전이 이순신 장군 해전이라고 전 세계 해군 역사에 수록~ (Japan and Korea)
김동환: 이걸 보여주고 얼마큼 설득을 했는지는 사실 미스터리죠. 근데 이게 한국은행권 이거든요. 아무리 한국이 영국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아도 이게 화폐란 말이에요. 화폐에다 딱 배가 그려져 있는 거는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대부분 인물이 그려져 있고 꽃이 그려져 있고 그러지 배 그것도 거북선이 그려져 있는 거예요. 해양국가 영국에서는 해군에 대한 엄청난 리스펙트가 있어요 (영국 유학파),
최원정: 정주영 회장의 기지도 대단하지만 그걸 듣고 이해해준 롱바텀 회장도 정말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 조선사업은 500원이 이룬 기적이네요. 이 일화에서 시작된 것이었군요.
박태균: 그래서 롱바텀 회장을 만난 다음에 영국 버클레이 은행(Barclays Bank PLC)에 추천서도 써주고 다 되었는데 문제가 뭐냐면 또 하나가 영국에 수출신용보증국(ECGD-수출을 지원하는 영국정부 기구) 이라고 하는 관청이 있는데 여기를 통과하기가 쉬운 게 아니에요.
최태성: 돈을 빌려 주는 데 한 두 푼이 아닌데~
박태균: 그렇죠, 마지막에 관청에서 한 얘기가 이 배를 만들면 살 사람이 있어?
최태성: 그렇지,
박태균: 이걸 물어 보는 겁니다. 살 사람이 있어야 돈이 들어올 거 아녜요.
이시원: (영국 수출신용 보증국 조건) 배를 살 사람을 먼저 찾아라.
박태균: 살 사람 데리고 와, 그럼 내가 돈 꿔줄게 이렇게 되어 버리는 거죠.
이시원: 미션 임파셔블 같지 않나요? 조선소도 없어 조선 기술도 없어 그런데 배를 살 사람을 찾아야 된다니~ 너무 불가능할 것 같아요.
박태균: 그때 생각한 게 스코틀란드에 있는 스코트리스코 라고 하는 선박회사가 있는데 거기에 가서 26만 톤 급의 배도면을 빌려와요.
허준: 도면을 빌려요?
최원정: 도면을 빌려줘요?
박태균: 저도 어떻게 빌려 왔는지 모르겠어요. 과정은 보이스피싱을 했던지 어떻게 했던지 빌려와 가지고 이제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 라는 사람을 만나요. 내가 이 배를 지금 만든다. 여기에 플러스 싸게 해 드릴게~
이시원: 근데 리바노스 사장님은 뭘 믿고 그래 내가 살게 이러신 거예요?
박태균: 어쨌든 16% 싸게 해 준다니까
이시원: 싸니까
허준: 티브이 사러갔는데 16% 할인한다고 적혀 있어 집에 가서 티브이 틀었는데 안 나오면 어떡해?
김동환: 원금을 돌려준다!? 물건 줬어요. 인도했는데 배도 마음에 안 들고 애초에 약속했던 퀄리티가 아니다. 갖고 오라구 (배에 문제가 있을 경우 원금을 돌려준다는 계약조항),
최원정: 배가 얼마짜리인데 원금을 돌려줘요?
이시원: 그야말로 엄청난 파격조건이네요.
故정주영 회장/1986년: (동영상), 지금 생각해도 한심한 얘기죠. 우리가 조선소가 있어서 배를 팔겠다는 얘기가 아니고 조선소 지을 백사장 사진 들고 가서 “당신이 배를 사주면…” 이게 얘기가 가관이죠. “배를 사겠다는 증명서를 가지고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차관을 얻고” “기계를 사들여 조선소를 짓고 당신의 배를 만들어 줄 테니 사라” 이런 얘기죠. 근데 우리보다 더 엉터리 같은 사람이 걸려들었어요. 그래서 26만톤 급 짜리 유조선 두 척을 약 7000만 달러에 계약을 해서 그때 우리 돈 현금으로 계약금을 13억을 받아서 외환은행에 송금을 했죠. 계약서를 영국 정부에 들이대니 영국 정부는 꼼짝 못하고 차관을 승인했죠.
김동환: 사업의 초반에는 뭔가 매출을 만들고 매출 자체가 트렉 레코드(Treck record-기업의 사업실적이나 경력) 잖아요. 그게 있어야만 다른 데 수주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때 당시 정주영 회장의 수주 조건은 모든 위험을 현대가 감수하는 그리고 16% 싸게 해주고 마음에 안 들면 원금도 돌려주겠다.
최태성: 이건 모 아니면 도네요.
김동환: (선주에게는 리스크가 없는 계약) 만약 이것만 지켜진다면 안 해야 될 이유가 없죠.
이시원: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던 거네요.
김동환: 회사에서 야유회를 갔는데 사회를 누굴 맡길까? 아~ 허준? 일단 써봐, 조건이 뭐야. 행사 망치면 원금보장
허준: 16% 외에 원금보장
김동환: 행사는 3개월 뒤에 있어요. 허준은 다른 업체에 가서 나 땄대니깐요. 그 사이에 수주는 계속 할 수 있다. 3개월 후에 행사 망하면 돈을 돌려준다.
최원정: 대기업 행사를 하니까
김동환: (첫 계약을 통해 수주를 계속 할 수 있는 셈) 이 경우도 현대 입장에서는 지금 수주를 안하면 어차피 처음 실적이 없으니까 다른 데는 영업이 전혀 안돼요. 그런데 리바노스 선박 왕 한테 규모있는 배를 수주를 받았어. 그러면 그것을 계속 복사해서 (Ctrl C+Ctrl V) 계속 영업을 다닐 수가 있는 거죠.
최원정: 이 조선업도 그런 거네요. 누가 어떻게 시작하느냐에 따라서 내 사업의 클래스가 달라지는 거에요. 이왕이면 선박 왕이랑 한번 네고를 해서 정말 우리 거하게 시작해 보자.
TV 뉴스: (동영상), 1972년 3월 23일, 현대 울산조선소가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됐습니다. 이 조선소는 정부의 중공업 육성계획에 따라 세워지게 됐는데 오는 1973년 7월, 50만톤 규모의 시설능력을 갖추고 완공될 예정입니다. 이 조선소가 완공되면 국내 조선시설 능력을 지난 해 18만 톤보다 여섯 갑절이나 넘는 110만 톤으로 늘어납니다.
최원정: 허허벌판이다 진짜 허허벌판이다.
박태균: 이걸 보면서 내가 깜짝 놀란 게 뭐냐면 지금 조선소를 74년 6월까지 50만 톤의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소를 준공해야 돼요. 그런데 선박 왕한테 계약한 26만 톤 유조선 두 척을 인도하는 게 1974년 7월 이에요.
이시원: 조선소도 없는 데 지금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김동환: 6월 달까지 조선소를 만들면서 7월 달까지 배를 납품해야 돼요.
이시원: 말도 안 되는 계획
최원정: 6월이 잘못 적혀 있는 게 아녜요?
박태균: 맞아요, 조선소를 만들면서 배까지 동시에 만드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거죠. 빨리 빨리가 또 한 번 나오는 거죠.
최태성: 그래서 정주영 회장이 급한 거에요. 모든 역량을 이쪽에 쏟아 부으라고 해요. 현대 시멘트에서 속성 시멘트를 대량으로 만들어 가지고 이 조선소에다 쏟아 붓습니다.
이시원: 아니 근데 이게 가능한 건가요? 26만 톤 급이면 어마어마할 건데 그 전에 2만 톤, 3만 톤도 제대로 만들어보지 않았는데
허준: 이번에 얘기할 게 없는 게 낚시를 가잖아요. 제일 큰 배가 18인승에서 21인승 배가 제일 큰 배예요. 이게 5톤, 6톤 돼요.
최태성: 26만 톤 크기가 제대로 감이 안 온다.
이시원: 거기 다가 규모만 문제가 아니예요. 시간이 없잖아요.
박태균: 그렇죠,
이시원: 이거 마치 학생한테 야~ 너 시험 한 번 봐 본 일 없지. 3개월 후에 (400점 만점) 수능 한 350점 받아와~ 이런 거란 비슷한 거죠.
박태균: 그 정도는 괜찮은데~ 학교 지으면서 교실 지붕도 없어 학생 들어와 그렇게 해 가지고 2년 있다가 대학 진학시켜! 그런 거나 똑 같은 거 아녜요?
최원정: 내가 느끼기에는 그것보다 더 불가능한 얘기 같애요. 아무리 우리가 철갑선을 만들어 봤지만 이게 가능할까요? 과연 26만 톤 배는 어느 정도 규모일지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할까요?
이민영 선생님~
---------------이민영/거제 장평중학교 교사: 26만 톤 급 선박, 킬로그램으로 따지면 2억6천만 kg 선박이 어느 정도 사이즈인지 숫자가 너무 커서 감이 잘 안 오시죠? 제가 造船의 도시 거제에서 왔기 때문에 크고 작은 배들을 많이 봤거든요. 현대에서 최초로 건조한 배의 이름은 애틀랜틱 배런 호인데요. 배런의 길이가 345미터 그리고 폭이 52미터 높이가 27미터 인데요. 배런 호에서 한쪽 끝에서 반대 쪽 끝에 있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의 크기가 조그마한 좁쌀보다도 더 작게 보일 정도로 굉장히 큰 배입니다.
허준: 그게 보이면 눈이 좋은 거예요. 345미터면 안 보여요.
이민영: 다른 예를 하나 들어 볼게요. (그림 등장), 이것은 한강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유람선을 그림으로 표시한 건데요. 이 배가 적재 중량이 200톤~400톤 정도가 됩니다. 평균을 내서 300톤 이라고 한다면 애틀랜틱 배로 비교한다면 무려 887배가 적재중량과 맞먹는 사이즈 라는 걸 알 수 있죠.
이시원: 한강 유람선도 꽤 크잖아요. 근데 저것의 887배~
최태성: 엄청나긴 하네~
이민영: 아직도 대한민국의 초고층 빌딩하면 그 대명사로 63빌딩이잖아요. 이 63 빌딩의 높이가 대략적으로 250 미터가 넘어요. 그러면 앤틀랜틱 배런 배와 비교하면 63빌딩의 1.5배가 됩니다.
허준: 앤틀랜틱 배를 63빌딩 옆에 세우면 63빌딩 보다 높다는 거예요?
최태성: 그러니까 거의 100층 높이라는 얘기네요.
이민영: 맞습니다. 배가 큰 만큼 당연히 갑판도 굉장히 크겠죠. 만약에 앤틀랜틱 배런 호의 갑판위에서 축구를 하게 되면 아마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힘들겁니다. 왜냐하면 이 갑판의 넓이만 해도 무려 축구장의 3배가 됩니다.
최태성: 어마 어마 하네.
최원정: 3 경기를 한꺼번에 치를 수 있네요. 미니 월드컵도 가능하겠어요.
이민영: 우리가 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형 승용차의 무게가 한 1.5톤 정도 됩니다. 그런데 승용차의 무게와 애틀랜틱 배런 호의 적재 중량을 비교해 보면 그 속에 173,333대가 들어갈 정도로 굉장히 큰 사이즈죠.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환 배에는 몇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도 궁금하겠죠. 74년도 당시 이 배가 건조될 당시에 홍보영상을 보면 그때 당시 서울시 전체 인구수가 500만 명이었는데 서울시 사람이 이 배에 다 들어갈 정도 사이즈였습니다.
최태성: 노아의 방주네
허준: (성경에) 옛날 사람들 뻥이 심하시네~모든 동물을 한 쌍씩 배에? 가능하네! 63빌딩이 서 있는데 63빌딩의 1.5배가 옆으로 쓸어진다고 생각했을 때 이게 어떻게 물에 뜬다고?
최태성: 진짜 그러네
이시원: 이게 물에 떠 있는 게 진짜 신기해요.
허준: 63 빌딩 창문을 테이프로 다 틀어막으면 떠요?
이민영: 그 비밀은 바로 浮力 때문입니다, 부력~ 부력이라는 힘 때문인데 지구가 물체를 잡아 당기는 힘=중력이라고 하는데 근데 물은 지구와 반대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해요. 그 밀어내는 힘을 보고 우리는 浮力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부력을 크게 해주는 게 배를 띄우는 핵심이겠죠. 간단한 실험을 하나 해 보겠습니다. (검은 천으로 씌운 교탁등장) 여기 보시면 마술 같이 거창하게 뭔가가 준비되어 있죠.
최태성: 지금 마술하는 거예요?
이민영: 간단한 실험입니다. 여기에 가벼운 물체가 있고 여기에는 무거운 물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물체를 이게 수조거든요. 두 물체를 수조 안에다 넣을 거예요.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둘 중에서 어떤 게 가라앉을 까요?
최태성: 선생님, 그거 너무 하다, 당연히 답이 무거운 거죠.
이민영: 그렇죠, 무거운 게 가라 앉을 것 같죠. 그런지 제가 한 번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박태균: 에이~ 우리가 문과 라고 너무 무시하시는 것 같애요.
최원정: 유치원생도 알만한 건데
이민영: 자, 이걸 치우고 (카버를 걷어냄) 여기 보시면 이건 쇠구슬인데요. 제가 이 쇠구슬 질량을 한 번 재어 보겠습니다. 254g 정도 나옵니다. 그리고 이건 냄비인데요. 커다란 냄비 이걸 질량을 한 번 재어 봤더니 이건 609g입니다. 냄비가 두 배가 넘죠. 각각을 물에 넣어 보겠습니다. 쇠구슬은 바로 가라 앉았다. 그런데 이 무거운 냄비는 넣었더니 둥둥 뜹니다.
최원정: 우리 설거지 할 때 보면 알잖아요. 둥둥 뜨잖아요.
이시원: 바로 浮力 때문이랍니다.
이민영: 그래서 뜨고 가라앉는 것을 결정짓는 건 무게가 아닙니다. 밀도에 따라서 뜨고 가라앉는 게 결정이 되는 거예요. 밀도(물질의 단위 부피당 질량)란 어떤 개념인가면 물체의 질량이 얼마나 집중되어 있다가 얼마나 똘똘 뭉쳐 있는가 이게 밀도 이거든요. 밀도가 물보다 작으면 뜨게 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를 만들 때 목적은 딱 하나예요. 물보다 밀도가 작은 배를 만들어라! 밀도를 낮춰라 요게 이제 목표입니다. 밀도=질량/부피
이시원: 밀도는 같은 부피라도 부피가 클수록 밀도가 낮다!
이민영: 그러니까 배를 만들 때 그냥 널쩍 널쩍하게~ 내부의 공간도 슝 슝 뚫어가지고 물보다 밀도가 작은 배가 완성이 되면은 이건 배의 무게가 26만 톤이 아니라 10억 톤, 100억 톤이어도 물에 무조건 뜬다는 거죠.
이시원: 근데 선생님, 만들 때는 육지에서 만들잖아요. 그러면 이걸 옮겨야 될텐데 그게 굉장히 어렵지 않을까요?
이민영: 그래서 거대한 배는 도크 건조방식을 이용합니다. 지금 여기 보시면 이게 도크입니다 (Dock-거대한 홈을 만든 후 선박을 건조하고 물을 넣어 배를 띄울 수 있도록 만든 시설),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바다 근처에 있는 육지를 파요. 육지를 파서 구덩이를 만듭니다. 그 속에서 배를 건조를 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나서 배가 완성이 되면 여기에 수문이 있거든요. 수문을 열면 물이 쏴 들어오면서 배가 뜨니까 유유히 나가면 됩니다.
이시원: 그런데 선생님, 차를 바다에 넣으면 풍덩 빠지잖아요. 근데 어차피 그 배가 떴다고 해도 차를 넣으면 같이 가라앉지 않을까요?
이민영: 아닙니다, 이 부력이 배에 싣게 되면은 그 정도로 버틸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부력은 형성을 하거든요. 제가 이걸 한 번 넣어서 확인을 해 볼게요. 가라앉나? 안 가라앉나? 자동차라고 생각을 하고 윙~ 이렇게 냄비 안에 들어가게 되면~ (냄비가 가라앉는다),
일동: 폭소!
이민영: 민망 (빅 웃음만 남긴 실험), 민망~
제작진: 냄비는 배가 아닙니다. 배는 평형수가 무게 중심을 잡아 줍니다.
제작진 일동: (이민영에게) 지켜드리지 못해 미안합니다.
최원정: 정말 큰 배를 만들어서 띄운다는 게 어마 어마한 우여곡절을 겪게 되네요.
최태성: 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최원정: (최태성에게) 너무 감동하시는 것 같애요.
최태성: 배가 뜨는 걸 저런 식으로 알려주니까 완전히 이해가 돼요.
이시원: 저 배 만드는 기술, 조선소 만드는 기술, 도크 만드는 기술자는 있나요?
박태균: 배를 만들기 시작하니까 이것 잘못 만들면 가라 앉아버려요. 70년대 보면 기억 나실지 모르겠지만 기능올림픽이라는 게 있었어요.
--------------TV뉴스: (동영상), 1977년 제23회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우리나라 대표 선수단이 김포공항에 도착, 개선했습니다. 이들 선수단은 네델란드에서 열린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첫 종합 1위를 차지하고 기능 한국을 세계에 떨쳤습니다.
박태균: 기술 집약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다 보니까 이제는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과정들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당시 현대가 기능 인력훈련소라는 것을 지어서 기술자를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허준: 같이 2년전에 출발하는 거잖아요. 기술자 배 만드는 공장, 공장을 채우는 건조재료, 준공 모두 2년전에 출발, 이게 가능해요?
최태성: 너무 무모하지 않아요? 어느 날 정주영 회장하고 기술자 직원들 하고 같이 일본 조선소를 견학을 간 거예요. 둘러 보면서 사진도 찍고 도움될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러 간 거예요. 그런데 일본 쪽에서 사진 한 장 못 찍게 했대요. 정주영 회장이 굉장히 안타까웠던 것이죠. 그냥 눈으로만 보고 왔으니까 여기서 反轉! 같이 갔던 직원이 견학 후 도크를 스케치해 버린 거예요.
이시원: 혹시 몰래 카메라를 숨겨 가지고
최태성: 그 당시 그게 어디 있어요.
최원정: 현장에서 스케치한 게 아니라 숙소로 돌아와서 숙소에서 스케치를 머리 속에 그려 가지고 와서
최태성: 이 직원이 대단한 게 걸음거리로 몇 보 가면 뭐~ 몇 보 가면 뭐~ 이.걸 머리 속으로 집어 넣고 도크 규모를 생각해 가지고 스케치를 해버린 거예요. 놀랍지 않나요?
허준: 한국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태성: 스케치한 걸 정주영 회장에게 보이니까 야~ 이건 걸어 다니는 컴퓨터다! 이렇게 하면서 정말 흐뭇해했대요.
이시원: 솔직히 지금은 산업 스파이다 뭐다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사명감을 갖고 어떻게든 배우겠다는 분들이 많았던 것 같애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그런 분들 때문에 이런 속담이 있나 봐요. 서당 개도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허준: 안 돼 안 돼 지금 2년 남았어. 3년 안 돼,
박태균: 실제 2년 이란 시간 밖에 없으니까 시멘트를 부어서 굳으면 배 건조 시작하고 다른 쪽 시멘트 굳으면 배 건조 시작하구, 이런 작업들이 진행이 되는 거예요.
최태성: 도크와 함께
최원정: 쪽대본으로 드라마 찍듯이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는 거에요.
최태성: 그랬네
최원정: 그 당시 울산 조선소 노동자의 하루 일과표를 저희가 준비해 봤거든요. 6:00-11:30=작업, 11:30-12:30=점심식사, 12:30-17:30=작업, 17:30-18:30=저녁식사, 18:30-22:00=작업, 22:00-익일 06:00=취침, 식사하는 시간 외에는 다 작업 또 작업~ 너무 단순하니까 마음이 아프다. 휴식시간도 중간에 없어요.
이시원: 이걸 거의 매일 매일 했던 거잖아요.
최원정: 정주영 회장이 평상시 한 말 중에 유명한 게 잠 다 자고 어떻게 선진국을 따라 잡느냐고 맨날 그랬다는데 저는 그 얘기가 처음엔 멋있게 들렸거든요. 그런데 개개인의 삶이라 지금 생각해 보니까 마음 아프네요.
최태성: 노동자들이 안전화 끈을 풀 시간이 없었네요. 왜냐면 밤에 늦게 퇴근 하잖아요. 퇴근하고 그냥 너무 피곤하니까 쓸어져 자는 거야. 월평균 500~600시간을 일했대요.
허준: 지금은 근로시간이 주당 52시간 이잖아요. 이게 달로 치면 208시간 정도예요.
이시원: 두 세 배를
허준: 세 배를 한 거예요. 세 배, 3교대를 혼자 한 거예요?
최태성: 그렇죠,
김동환: 작업시간도 시간이지만 저게 이제 실내 작업이잖아요. 여름 같은 경우는 이게 철입니다. 철~, 얼마나 가열이 되겠습니까.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작업하는 겁니다. 1970년대 초까지만 세계 조선산업 1위가 일본이었습니다. 당시에 일본의 조선업 근로자에 대비했을 때 우리 근로자들이 받았던 거는 20~30% 수준의 임금인데 그나마도 다른 산업에 비해서는 좀 더 많이 받았대요. 그래서 사실은 초기에 우리나라의 조선산업은 정말 조선소에서 일했던 그분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결과물입니다.
최원정: 게다가 선박수주단가가 16% 낮았다고 그러잖아요. 그래서 이익을 만들려면 공기단축해야 되고 그러니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있었겠어요.
박태균: 1973년 기사를 보니까 1834건의 산재가 있었구요. 34명이 사망을 했다는 기록이 있구요. 1974~1975년 사이에 산업재해가 4000건이 발생을 합니다.
최원정: 조선업 세계 1등을 위해서는 이런 노동자들의 희생이 어찌보면 당연한 거라 감수해야 된다고 오랜 기간 동안 세뇌를 받아왔던 것 같애요.
허준: 우리나라가 빠르고 강하게 변신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을 수 있다 그거는 인정합니다. 근데 그것의 영광을 누가 받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미국은 지금도 군인들을 보면 존경을 하고 국가에 대한 희생에 감사드립니다.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이 명예를 그들은 아무도 누리지 못한 거예요.
최태성: 맞아요, 얼마 전에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생존을 건 투쟁을 제가 밨거든요. 그분들이 주장하는 건 뭐냐면 임금인상, 노조인정 이거 였거든요.
김동환: 그래서 하청업자들이 받는 돈이 계속해서 순차적으로 줄어들거든요. 그러면 경쟁력은 약화되고 근로자들의 노동력이라는 측면에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측면도 있으나 한국 조선사의 원천 기술력은 계속해서 일본과 중국을 앞서 나가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 줘야 될 것입니다.
최원정: 아무튼 정주영 회장의 결단, 대통령의 권위를 얘기했지만 분명한 것은 수많은 산업 일꾼들의 희생,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1974년 6월, 울산의 현대 조선소와 26만 톤 초대형 유조선이 드디어 탄생을 합니다.
---------------TV뉴스: (동영상), 현대그룹은 1974년 6월에 박 대통령 각하와 영부인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조선소 준공식을 가졌습니다. 1973년 3월에 선박 건조에 착수한 현대 조선소는 1년 3개월 만인 1974년 6월 28일, 박정희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역사적인 제1, 2호선의 명명식을 가졌습니다. 이날 대통령 각하 영부인이신 육영수 여사께서는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기념하는 뜻에서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초대형선인 26만 톤 애틀랜틱 배런호를 손수 명명해 주셨습니다. (탄생-애틀랜틱 배런호),
최원정: 웅장 하네요.
최태성: 1974년 6월 28일, 당시 조선소 준공식하고 배 명명식이 같이 진행이 되었대요. 대한 뉴스에도 나왔는데 사실 대한 뉴스는 몇 초 컷으로 치고 넘어가거든요. 근데 이 조선소 준공식하고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 장면은 TV에서 전국으로 생중계 되었습니다. 이만큼 국가적인 사업이었던 거죠.
이시원: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엄청나게 빨리 만들었잖아요. 과연, 이 배가 잘 뜰 수 있을까? 사람들이 조마 조마 했을 것 같애요.
최태성: 프로펠러는 돌지, 앞으로 나갈 지,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근데 딱! 출발하고 뜨니까 그때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기뻐서 그 선박을 수주했던 라바노스 선주는 이 배는 정말 내가 지금까지 본 배중 가장 잘 만들어진 배다. 극찬을 하면서 정말 와~ 드라마 완성~
최원정: 겨우 만들어진 배가 아니라 완성도가 있었던 배네요.
이시원: 리바노스 선박 왕이 인정한 배네요.
최태성: 우리 조선업의 정말 획기적인 장면이었죠.
박태균: 박정희 대통령이 굉장히 좋아하는 용어들이 몇 개 있는데요. 그 중의 하나가 立國이에요. 나라를 세운다. 그래서 여기서 조선입국 이라고 하는 휘호를 썼다는 거예요. 1967년에 처음 나온 얘기가 輸出立國이 나옵니다. 수출로써 나라를 세운다. 1974년 이때는 이제 造船立國 그걸 새겨서 울산 조선소에 휘호가 남아 있습니다.
김동환: 대통령이지만 사실 거의 왕 같은 대통령이잖아요. 그래서 立國 이라는 말을 썼을 거예요. 본인이 주체가 돼서 세운 나라 라는 뜻인데 입국 이란 말을 거의 안 썼습니다. 報國 이라고 썼지요. 삼성의 이병철 회장 事業報國, 또 박태준 회장은 製鐵報國, 立國과 報國은 다른 것이거든요. 근데 애틀랜틱 배런호가 물에 뜬 날, 이 날을 깃점으로 수주대박이 터집니다. 1972년 3월에 조선소를 만들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초대형 유조선을 무려 10척을 수주합니다.
박태균: 애틀랜틱 배런호가 물에 뜬 날, 이 날이 사실은 한국 조선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조선의 역사가 바뀝니다.
최태성: 진짜, 그러네,
박태균: 한국이 세계 조선에서 10년 만에 1위가 될지 누가 알았겠어요. 드디어 우리가 우리 손으로 배를 만들고 해운사 만들고 하면서 세계를 가슴 펴고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열게 된 게 바로 이 때였습니다.
김동환: 울산에 가시면 호텔이 있잖아요. 호텔에 묵을 때 통상 뷰, 그러니까 풍경을 어느 쪽에 원합니까? 그러면 태화강 뷰 해안 뷰 이러는 데 공장 뷰가 있어요. 공장이 쫙 있는 데 어마 어마 하게 멋 있어요. 거기서 뭔가 웅장한 기운이 느껴져요. 실제로 울산의 가장 좋은 호텔에 가면 가장 좋은 뷰가 공장 뷰예요 (꿀팁),
최원정: 하여튼 조선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시원: 진짜 우리나라 산업의 역사를 보면 미션 임파셔블 영화 한 편 보는 것 같애요. 근데 그 와중에 Impossible is nothing (불가능은 없다) 을 만들었던 인물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었던 수 많은 노동자들을 같이 조명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허준: 저는 다른 방향으로 시야를 돌리고 싶습니다. 입국시대에 아버님들 우리 삼촌들께서 이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저희 70년대 생을 전후해서 굉장히 힘든 가정이 많이들 탄생했습니다. 왜냐? 아버지 이거 안 돼요,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 우리 때는 말야 이렇게 6년 동안 만들고 다 됐어 왜 안 된다고 그래 정말 너무 힘들었던 거든요. 아버지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최원정: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잘 살아보세 지난 시간엔 제철소를 다루었고 이번 주엔 조선소를 다루었습니다. 오늘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403회 공영방송 50주년 기획-잘 살아보세 ④ 박정희 특명, 대형조선소를 건설하라 에서 정리).
요약
① 1970년대초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화를 결심한다. 첫번째 목표는 대형 조선소건설, 조선산업 육성에 강력한 의지를 가졌던 박 대통령은 여러 기업에 의사를 타진했다. 그러나 선뜻 나서는 곳이 없었다. 당시 영세한 조선소들은 만년 적자에 시달렸고 조선업은 이윤을 장담할 수 없는 장사였다. 자본도 없고 기술도 없는 대한민국에서 대형 조선은 기업의 명운을 거는 도박, 하지만 정주영은 조선업 진출을 결심한다. 대통령 박정희의 의지와 기업인 정주영의 모험정신, 훗날 세계 조선산업을 뒤흔든 무모한 도전이 시작되었다. 대한민국의 造船하면 두 말하면 입 아프다. 세계 수주 1위 가장 많이 들었다. 그런데 조선 1위하면 국민 대부분은 배를 타본 적이 없다. 예를 들면 유람선은 탈 일은 있을 지언정 정말 컨테이너선이나 유조선이나 요즘 잘 나가는 LNG선은 우리 인구의 99.99%는 타본 일이 없는 듯하다. 하물며 배를 만드는 조선소에 가본 일은 거의 없다. 그런데 실제로 조선소에 가서 보면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거대 규모라고 한다. 압도 당하는 느낌 그 정도로 크다. 조선산업이라는 게 자동차를 만들어서 실어 나르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기름 한 방울도 안 나는 나라니까 유조선 없으면 겨울을 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삼면이 바다다. 우리나라에서 들고 나는 화물의 운송은 거의 99. 몇 %는 배에 의존한다. 그래서 조선산업은 우리의 경제 규모와 삶을 영위하는 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무역선이 왔다 갔다 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루 하루 살아갈 수 없다. 쉽게 얘기하면 배 안 오면 자동차 운전을 못한다.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는 산업이 조선업이다.
② 1950년 1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조선공사를 만든다. 이 대통령은 배를 만들고 해군을 건설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왜냐 하면 미국이 한국 공군과 해군 창군에 지원을 안해 줬다. 이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주장하니까 혹시 배나 비행기가 있으면 북진할지 몰라서 그래서 주로 했던 게 2차 세계 대전 때 미국에서 활약했다 퇴역한 배들을 사가지고 왔고 다른 한편으로 대한조선공사를 만들었는데 6개월 만에 한국전쟁이 발생했다. 1970년대 오기 전까지 우리 造船은 완전히 죽어있었다. 그랬던 대한민국이 지금 세계 조선소 빅3가 다 우리나라에 있고 수주액 60% 수준의 나라다. 일찌기 조선후기의 박지원 박제가 실학자들의 소망은 조선이 제발 선박을 활용하는 게 꿈이었다. 북학의 박제가는 백대의 수레가 싣는 중량이 하나의 배를 당하지 못하고, 육지에서 천 리 길도 수로로 만 리를 가는 배를 따를 수 없다, 그들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졌다. 처음에 박정희 대통령은 조선산업을 하라고 강력하게 권고를 하는데 기업들은 다들 약간 빼고 있었다. 이게 안 되는 산업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런 산업을 하기 위해서는 제철소가 필요하다. 조선은 단순히 철판 부치는 게 아니다. 엔진부터 시작해서 모든 핵심 기술이 다 들어가야 된다. 그리고 이건 내수가 아니고 수출을 해야 된다. 조선은 대표적인 수주산업이다. 물량을 수주하면 공사에 들어가서 납기를 맞추어서 납품을 하면 매출이 나오는 거다. 근데 수주와 납품까지 적어도 2~3년이 걸린다. 조선하면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인식을 한다. 그런 면도 있고 그런데 핵심기술! 설계, 엔진, 이런 것들은 매우 고부가 가치고 기술력이 필요하다. 이런 데에 대한 기술자들이 전무한 상태였다. 그래서 당시 환경에서 현대가 조선업을 하겠다고 했을 때 정부의 고위 관료 중의 한 사람이 현대가 조선업에 성공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고, 한 마디로 절대 안 된다. 대통령이 아무리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건 사업의 영역이다. 배를 사줄 사람이 있어야 하고 철강이나 고속도로 놓는 거 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③ 박정희 대통령은 5.16군사정변 직후부터 배를 만들고 싶었다. 1962년에 대한조선공사법를 통과시킨다. 대한조선공사를 공기업으로 해서 우리가 선박을 만들겠다. 그러면서 일본에 222만 달러의 차관을 요청한다. 이걸 공기업으로 하다 보니까 두 가지 난관에 부닥쳤다. 하나는 정부 내의 다양한 부처들이 차관 들어오는 걸 정부가 보증을 서야 돼 말아야 돼 하면서 시간이 3~4년이 흘러가 버렸다. 거기다가 일본이 차관과 기술도 같이 주어야 되는데 기술은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까 68년까지 흘러가버렸다. 근데 68년부터 부실 기업이 나타나기 시작해서 조사를 해 보니까 대한조선공사가 대표적인 부실기업이었다. 정부가 깨달은 게 있었다. 조선사업을 공기업으로 했다가는 큰 일 나겠다. 그러면 민간기업들이 주도를 하면서 정부가 어떤 혜택을 주는 방식으로 가야 되겠다. 정부 쪽에서 깨닫기 시작한 게 70년 전후였다. 정주영 회장이 이걸 처음 봤을 때 말이 안 되는 거였다. 조선업에 들어가는 것은 회사명운을 거는 도박이었다. 근데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따로 불러가지고 강하게 얘기를 하니까 정주영씨가 대통령의 눈빛이 무서워서 그럼 제가 한 번 해볼까요 라는 일화가 있다.
④ 조선업은 수주에 2~3년이 걸린다. 돈을 투입했는데 배가 제대로 안 나와 안 팔려 그러면 현대는 망한다. 그러기도 하거니와 정주영 회장 뿐만 아니라 모든 사업가들은 사업을 강제로 안 한다. 어느 정도의 사업에 대한 가능성이 없는데 정부가 시킨다고 도산 위기의 길로 가지는 않는다. 조선 사업은 신화창조를 넘어서는 뭔가 있다. 이게 노동 집약적이고 기술 집약적이고 자본 집약적인 사업이다. 정주영 회장은 당시에 미국의 카이저 라는 회사를 벤치 마킹했다 이 회사가 처음에 건설업 하다가 나중에 조선업으로 성공했다. 현대는 건설로 고속도로로를 닦았다. 또 하나는 정부에서도 뒷받침을 하였다. 정주영 회장 입장에서는 육상에서 뚝딱 뚝딱 건설을 워낙 잘 했으니까 배 만드는 것도 하면 되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국가에서도 지원하겠다고 하니까 이 기회에 내가 한 번 도약 해보자.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생각의 전환이다. 조선은 60년대 까지는 수입대체였는데 70년년부터는 수출로 간다. 우리가 만든 배를 그냥 수출한다. 발상의 전환이다. 왜냐면 대한민국이 어떻게 경제성장을 했냐고 할 때 수입 대체산업에서 수출 주도형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산업이다. 한 마디로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우리나라가 이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수출이 필수다. 거기에 필요한 게 조선업이다. 그래서 남들이 다 안된다고 해도 어떻게든 해보자.
⑤ 조선소에 가보면 건축적인 요소가 많이 있다. 건축기반의 사업가가 하기에 매우 적합한 사업이다.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가 어떻게든 해군력도 키우고 공군력도 키워야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못 키웠다. 그거와 마찬가지로 지금 박정희 대통령도 우리 배 만드는 기술 없으면 안 된다. 우리 해군도 우리 힘으로 키워야 한다. 우리나라 중화학 공업이라는 게 북한과의 군비경쟁에서 우월성을 갖기 위해서다. 1970년을 전후한 시기에 남북간에 NLL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한다. 한국전쟁 때 유엔군은 재해권까지 완전히 장악을 했었다. 그래서 북한 앞 바다에 있는 섬들까지도 유엔군이 다 장악을 한 상태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서해 5도를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가 있었다. 북한이 60년대를 지나면서부터 해군을 복원하기 시작하니까 우리도 해군의 복원 필요성이 생겼다. 거기다가 60년대에 남한 해양 경비정들이 북한에 의해서 격침 당하는 경우도 있었고 나포되는 경우도 있었다. 1967.1.19. 우리 어선단을 보호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적과의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의 포격을 받아 애통하게도 해군 당포함이 침몰되고 말았다(전사 39명),
⑥ 조선업은 운명처럼 우리가 꼭 해야만 했던 산업이었다. 국방력 차원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포항제철이 1970년대 초에 시작해서 73년도에 쇳물이 처음 나온다. 쇳물이 나오기 시작하면 철강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철강을 어딘가는 써야 된다. 그걸 우리가 쓰겠다. 딱 맞는 비즈니스다. 원래는 조선소 설치를 포항제철이 있는 포항에다 할려고 했는데 현대가 사업자로 선정이 되면서 울산으로 옮겨졌다. 모든 게 순서적으로도 맞고 현실적으로도 맞았다. 조선업을 경제적인 환경도 보아야 되는데 박 대통령이 수출입국, 수출전략 드라이브를 걸었다. 품목이 모피인데 쥥크(쥐모피), 거기다가 가발, 옷, 신발 이걸 많이 만들어야 된다. 100만불 팔래도 언제 그걸 100억불하겠어 그거 좀 큰 덩어리 없나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배는 기본적으로 어마어마 하게 비싸다. 수주만 하면 한 방에 수출실적이 쭉 쭉 올라간다. 실제로 2005년부터 2008년 사이에 우리나라 조선업이 엄청 발전하였다. 그때 우리 금융시장에 또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환율! 계속 달러가 들어오니까 원화 강세가 생겼다. 박 대통령은 외환을 끌어들이는 중요한 산업으로 조선업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⑦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수출 100억불은 국가사업이었다. 박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렇게 티끌 모아 봤자 태산이 되겠어? 큰 돌덩이 하나 가지고 와 봐! 1974년도에 포니 5대를 에콰도르에 처음 수출을 하였다. 이게 당시 아파트 한 채 값인데 포니 국내 출고가가 그때 227만원 이었다, 지금은 자동차를 수십만대씩 수출하니까 큰 돈이 되지만 그때는 그런 상상을 하기에는 힘들었다. 당시에 우리나라 수출 총액이 11억 7300만 달러였을 때 정부가 추산컨대 조선소가 완공돼서 연간 어느 정도 수출을 할 수 있냐 계산을 해봤다. 2억 5000만 달러~총 수출액이 12억이 안 되는데 조선소 하나에서 연간 2억 5천만 달러가 들어온다. 조선소 2개 있으면 수출 총액의 40%다. 그 정도로 큰 산업이다. 1976년 수출의 날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은 올해 수출은 목표액을 넘어서 80억 달러를 달성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내년에는 100억 달러 수출을 달성하라고 당부했다. 현대 조선은 선박수출 실적 3억 6천만 달러를 달성해서 3억불 수출의 탑을 받았다. 조선 산업은 국가적으로 경제, 안보차원에서 꼭 진출해야 되는 산업이었고 또 대통령의 권유 하에 정주영 회장이 모험심을 가지고 시작을 했다. 근데 시작부터 잘 되지는 않았다.
⑧ 조선소를 짓기 위해서 당시에 약 6300만 달러가 필요했는데 이중에 현대가 4300만 달러를 담당해야, 당시 환율로 약 208억원의 외자를 충당했다. 지금 208억원은 웬만한 부자들도 갖고 있는돈, 4300만 달러가 어느 정도 큰 돈이냐 하면은 1971년 까지 국가 경제개발 예산의 15%에 해당돼고 어마어마한 돈을 써야 되는 거다. 그러니까 72년에 산업합리화 자금이 나간다. 이 산업합리화 자금이 나갈 때에 거기에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가 조선산업 육성을 위해 나가는 자금이다. 당시에도 정부의 조선소 건설 자본 비율이 14% 정도 되었다. 그러면 현대가 얼마를 책임져야 되느냐 86%륽 책임져야 된다. 어쨌든 박 대통령이라는 큰 후광이 있었다. 정주영 회장의 계산은 이거 안 망한다. 정부가 있는 한 안 망한다. 독점이다. 그런 계산법도 했으리라.
⑨ 현대가 담당해야 될 자금은 4300만 이걸 빌리기 위해서 현대 정주영 회장이 직접 해외로 나간다. 그때 가져갔던 게 사업 계획서와 조선소가 들어설 미포 백사장 사진이다.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모르던 시절이다. 상식적으로는 말이 안 된다. 정주영 회장도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간다. 맨 처음에는 미국하고 일본에서 돈을 빌려 볼까 했는데 모두 거절 당했다. 수소문 끝에 영국의 선박 컨설팅 회사 롱바텀 회장을 만나러 갔다. 이 사람을 설득해서 영국 은행의 차관을 빌릴 수 있는 추천서를 받기 위해서다. 정주영 회장이 한국돈 500원 지폐를 꺼내 들었다. 거북선을 롱바텀 회장에게 보여 주면서 해양 대국 영국이 300년 전에 배를 만들었지만 우린 이미 1500년 대에 철갑선을 만든 민족이다. 비록 지금은 산업화가 조금 늦었지만 우리의 잠재적 역량은 정말 뛰어나다. 한 번 믿어 봐라. 여기서 우리가 추측을 할 수 있다. 영국이 해양대국으로서 굉장히 자부심이 강하다. 영국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하는 데 넬슨(1758~1805) 제독과 이순신 장군을 동급으로 취급한다. 롱바텀 회장이 혹시 해군사관학교 쪽이나 넬슨에 대한 미음이 남다른 사람이라면 이게 진짜 이순신의 나라였어? 일본 해군에서도 이순신 제독은 신적인 존재다.
⑩ 전 세계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해전이 이순신 장군 해전이라고 전 세계 해군 역사에 수록되어 있다 (Japan and Korea), 거북선을 보여주고 얼마큼 설득을 했는지는 미스터리다. 근데 이게 한국은행권이다. 아무리 한국이 영국보다 경제적 수준이 낮아도 이건 화폐다. 화폐에 배가 그려져 있는 거는 드문 일이다. 대부분 인물이나 꽃이 그려져 있지 배 그것도 거북선이 그려져 있다. 해양국가 영국에서는 해군에 대한 리스펙트가 있다고 한다. 정주영 회장의 기지도 대단하지만 그걸 듣고 이해해준 롱바텀 회장도 정말 대단하다. 그래서 우리 조선사업은 500원 지폐가 이룬 기적이다. 롱바텀 회장이 영국 버클레이 은행(Barclays Bank PLC)에 추천서도 써주고 다 되었는데 문제가 또 하나 있다. 영국에 수출신용보증국(ECGD-수출을 지원하는 영국정부 기구) 이라고 하는 관청이 있는데 여기를 통과하기가 쉬운 게 아니다. 마지막 영국 관청에서 조건은 배를 살 사람을 데리고 오란다. 조선소도 없어 조선 기술도 없어 그런데 배를 살 사람을 찾아야 된다. 그때 생각한 게 스코틀란드에 있는 스코트리스코 선박회사에 가서 26만 톤 급의 배도면을 빌려온다. 어떻게 빌려 왔는지 과정은 모른다. 빌려와 가지고 그리스의 선박왕 리바노스를 만난다. 내가 이 배를 지금 만든다. 여기에 플러스 16% 싸게 해 준다. 배를 인도했는데 배도 마음에 안 들고 애초에 약속했던 퀄리티가 아니다. 원금을 돌려준다. 배에 문제가 있을 경우 원금을 돌려준다는 계약조항, 그야말로 파격조건이다.
⑪ 배를 사겠다는 증명서를 가지고 영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서 차관을 얻고, 기계를 사들여 조선소를 짓고 당신의 배를 만들어 줄 테니 사라. 이런 얘기다. 근데 우리보다 더 엉터리 같은 사람이 걸려들었다. 리바노스 선주다. 그래서 26만톤 급 짜리 유조선 두 척을 약 7000만 달러에 계약을 해서 그때 우리 돈으로 계약금 13억을 받아서 외환은행에 송금했다. 계약서를 영국 정부에 들이대니 영국 정부는 꼼짝 못하고 차관을 승인했다. 사업의 초반에는 매출을 만들고 매출 자체가 트렉 레코드(Treck record-기업의 사업실적이나 경력)다. 그게 있어야만 다른 데 수주가 가능하다고 생각을 하니까 이때 정주영 회장의 수주 조건은 모든 위험을 현대가 감수하고 16% 싸게 해주고 마음에 안 들면 원금도 돌려주겠다. 선주에게는 리스크가 없는 계약이다. 이것만 지켜진다면 계약을 안 해야 될 이유가 없었다. 정주영 회장은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을 내걸었다. 첫 계약을 통해 수주를 계속 할 수 있었다. 현대 입장에서는 지금 수주를 안하면 어차피 처음 실적이 없으니까 다른 데는 영업이 전혀 안된다. 그런데 리바노스 선박 왕 한테서 규모있는 배를 수주를 받았다. 그것을 계속 복사해서 영업을 다닐 수가 있었다.
⑫ 1972년 3월 23일, 현대 울산조선소가 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됐다. 이 조선소는 정부의 중공업 육성계획에 따라 세워지게 됐는데 오는 1973년 7월, 50만톤 규모의 시설능력을 갖추고 완공될 예정이다. 이 조선소가 완공되면 국내 조선시설 능력을 지난 해 18만 톤보다 여섯 갑절이나 넘는 110만 톤으로 늘어난다. 우리가 깜짝 놀란 게 지금 조선소를 74년 6월까지 50만 톤의 배를 만들 수 있는 조선소를 준공해야 된다. 그런데 74년 7월 계약한 26만 톤 유조선 두 척을 인도해야 된다. 아슬 아슬하다. 조선소도 없는 데 지금 조선소와 유조선을 동시에 만들어야 되고 6월 달까지 조선소를 만들면서 7월 달까지 배를 납품해야 된다. 정주영 회장은 급했다. 그래서 모든 역량을 현대 시멘트에서 속성 시멘트를 대량으로 만들어서 조선소에다 쏟아 붓는다. 26만 톤 급이면 어마어마한데 현대는 그 전에 2만 톤, 3만 톤도 제대로 만들어보지 않았다. 26만 톤 크기가 제대로 감이 안 온다. 거기다가 규모만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없다. 이건 마치 학교 지으면서 교실 지붕도 없어 학생 들어오게 해 가지고 2년 있다가 대학 진학시켜! 그런 거나 똑 같은 거다. 아무리 우리가 철갑선을 만들어 봤지만 26만 톤 배다.
⑬ 26만 톤 급 선박, 킬로그램으로 따지면 2억6천만 kg 선박 사이즈, 현대에서 최초로 건조한 배의 이름은 애틀랜틱 배런호, 길이가 345미터, 폭이 52미터, 높이가 27미터 배런호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에 있는 사람을 본다면 그 사람의 크기가 조그마한 좁쌀보다도 더 작게 보일 정도다. 한강에서 유람선의 적재 중량이 200톤~400톤 정도, 평균 300톤 이라고 한다면 애틀랜틱 배로 비교한다면 무려 887배가 적재중량 사이즈다. 대한민국의 초고층 빌딩하면 63빌딩이다. 이 63 빌딩의 높이가 대략적으로 250 미터가 넘는다. 앤틀랜틱 배런 배와 비교하면 63빌딩의 1.5배가 된다. 거의 100층 높이다. 앤틀랜틱 배런호의 갑판위에서 축구를 하게 되면 체력으로는 힘들다. 이 갑판의 넓이만 해도 무려 축구장의 3배가 된다. 흔히 볼 수 있는 중형 승용차의 무게가 한 1.5톤 정도다. 승용차의 무게와 애틀랜틱 배런호의 적재 중량을 비교해 보면 그 속에 173,333대가 들어갈 정도다. 마지막으로 거대환 배에는 몇 명의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이것도 74년도 당시 이 배가 건조될 당시에 홍보영상을 보면 그때 당시 서울시 전체 인구수가 500만 명이었는데 서울시 사람이 이 배에 다 들어갈 사이즈였다. 이게 물에 떠 있는 게 진짜 신기하다.
⑭ 그 비밀은 바로 浮力 때문이다, 지구가 물체를 잡아 당기는 힘=중력이라고 하는데 근데 물은 지구와 반대로 밀어내는 힘=부력이 작용한다. 그 밀어내는 힘을 보고 우리는 浮力이라고 한다. 부력을 크게 해주는 게 배를 띄우는 핵심이다. 간단한 실험을 하나 해 보겠다. 여기에 가벼운 물체와 무거운 물체가 있다. 이 두 물체를 수조에 넣는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 둘 중에서 어떤 게 가라앉을 까요? 답은 당연히 무거운 거다. 쇠구슬 질량을 한 번 재어 보면 254g 정도다. 이건 냄비다. 커다란 냄비 질량은 609g이다. 냄비가 두 배 무겁다. 각각을 물에 넣어 보았다. 쇠구슬은 바로 가라 앉았다. 무거운 냄비는 둥둥 뜬다. 바로 浮力 때문이다. 뜨고 가라앉는 것을 결정짓는 건 무게가 아니다. 밀도에 따라서 뜨고 가라앉는 게 결정된다. 밀도란 물질의 단위 부피당 질량이다. 어떤 개념인가면 물체의 질량이 얼마나 집중되어 있다가 얼마나 똘똘 뭉쳐 있는가 이게 밀도다. 밀도가 물보다 작으면 뜨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가 배를 만들 때 목적은 딱 하나다. 물보다 밀도가 작은 배를 만들어라! 밀도를 낮춰라 요게 목표다. 밀도=질량/부피, 밀도는 같은 부피라도 부피가 클수록 밀도가 낮다! 그러니까 배를 만들 때 그냥 널쩍 널쩍하게~ 내부의 공간도 슝 슝 뚫어가지고 물보다 밀도가 작은 배가 완성이 되면 이건 배의 무게가 26만 톤이 아니라 10억 톤, 100억 톤이어도 물에 무조건 뜬다.
⑮ 배를 만들 때는 육지에서 만든다. 거대한 배는 도크 건조방식을 이용한다. 도크(Dock)는 거대한 홈을 만든 후 선박을 건조하고 물을 넣어 배를 띄울 수 있도록 만든 시설, 바다 근처에 있는 육지를 파서 구덩이를 만든다. 그 속에서 배를 건조를 시키는 거다. 배가 완성되면 여기에 수문이 있다. 수문을 열면 물이 쏴 들어오면서 배가 뜨니까 유유히 나가면 된다. 배는 평형수가 무게 중심을 잡아 준다. 큰 배를 만들어서 띄운다는 데 어마 어마한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배를 잘못 만들면 가라 앉아버린다. 1977년 제23회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종합우승을 차지한 우리나라 대표 선수단이 김포공항에 도착, 개선했다. 이들 선수단은 네델란드에서 열린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첫 종합 1위를 차지하고 기능 한국을 세계에 떨쳤다. 기술 집약적인 노동력이 필요하다 보니까 이제는 기술자들을 양성하는 과정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당시 현대가 기능 인력훈련소라는 것을 지어서 기술자를 양성하기 시작하였다. 같이 2년전에 출발하는 거다. 기술자, 배 만드는 공장, 공장을 채우는 건조재료, 준공 모두 2년전에 출발이다.
ⓐ 어느 날 정주영 회장은 기술자 직원들 하고 같이 일본 조선소를 견학을 갔다. 둘러 보면서 사진도 찍고 도움될 수 있는 자료들을 수집하러 간 거였다. 그런데 일본 쪽에서 사진 한 장 못 찍게 했다. 정주영 회장은 굉장히 안타까웠다. 그냥 눈으로만 보고 왔으니까 여기서 反轉! 같이 갔던 직원이 견학 후 도크를 스케치했다. 현장에서 스케치한 게 아니라 숙소로 돌아와서 머리 속에 그려 가지고 와서 숙소에서 스케치를 하였다. 이 직원이 대단한 게 걸음거리로 몇 보 가면 뭐~ 몇 보 가면 뭐~ 이걸 머리 속으로 집어 넣고 도크 규모를 생각해 가지고 스케치를 해버린 거였다. 솔직히 지금은 산업 스파이다 뭐다 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사명감을 갖고 어떻게든 배우겠다는 분들이 많았다. 실제 2년 이란 시간 밖에 없으니까 시멘트를 부어서 굳으면 배 건조 시작하고 다른 쪽 시멘트 굳으면 배 건조 시작하고, 이런 작업들이 진행이 되었다. 그 당시 울산 조선소 노동자의 하루 일과표를 봤다. 6:00-11:30=작업, 11:30-12:30=점심식사, 12:30-17:30=작업, 17:30-18:30=저녁식사, 18:30-22:00=작업, 22:00-06:00=취침, 식사하는 시간 외에는 다 작업 또 작업~ 휴식시간도 중간에 없었다. 정주영 회장이 평상시 한 말 중에 유명한 게 잠 다 자고 어떻게 선진국을 따라 잡느냐. 맨날 그랬다는데 그 얘기가 처음엔 멋있게 들렸다. 그런데 개개인의 삶이라 지금 생각해 보니까 마음 아프다. 노동자들이 안전화 끈을 풀 시간이 없었다. 왜냐면 밤에 늦게 퇴근한다. 퇴근하고 그냥 너무 피곤하니까 쓰러져 잔다. 월평균 500~600시간을 일했다. 지금은 근로시간이 주당 52시간 인데 이걸 달로 치면 208시간 정도다. 혼자 세 배, 3교대를 하였다. 작업시간도 시간이지만 실내 작업이라 여름 같은 경우는 얼마나 무더웠겠나.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작업하는 거다.
ⓑ 1970년대 초까지 세계 조선산업 1위가 일본이었다. 당시에 일본의 조선업 근로자에 대비했을 때 우리 근로자들이 받았던 임금은 20~30% 수준, 그나마도 다른 산업에 비해서는 좀 더 많이 받았다. 사실은 초기에 우리나라의 조선산업은 정말 조선소에서 일했던 그분들의 피와 땀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게다가 선박수주 단가가 16% 낮았다. 이익을 만들려면 공기단축해야 되고 그러니 근로환경을 개선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법이 있었겠나. 1973년 기사에 1834건의 산재가 있었고 34명이 사망했다. 1974~1975년 사이에 산업재해가 4000건이 발생했다. 조선업 세계 1등을 위해서는 이런 노동자들의 희생이 당연한 거라 감수해야 된다고 오랜 기간 동안 세뇌를 받아왔던 것 같다. 우리나라가 빠르고 강하게 변신하기 위해서는 희생이 있을 수 있다. 근데 그것의 영광을 누가 받았느냐가 중요하다. 미국은 지금도 군인들을 보면 존경을 하고 국가에 대한 희생에 감사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했다는 것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되겠다. 얼마 전에도 조선소 하청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에 생존을 건 투쟁을 했다. 그분들이 주장하는 건 임금인상, 노조인정이다. 하청업자들이 받는 돈이 계속해서 순차적으로 줄어들고 있다. 그러면 경쟁력은 약화되고 근로자들의 노동력이라는 측면에서 점점 더 힘들어지는 측면도 있으나 한국 조선사의 원천 기술력은 계속해서 일본과 중국을 앞서 나가는 노력도 함께 하고 있다는 것도 인정해 줘야 된다. 아무튼 정주영 회장의 결단, 대통령의 권위는 분명한 것이다. 수많은 산업 일꾼들의 희생, 노력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렇게 해서 1974년 6월, 울산의 현대 조선소와 26만 톤 초대형 유조선이 드디어 탄생한다.
ⓒ 현대그룹은 1974년 6월, 박 대통령 각하와 영부인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조선소 준공식을 가졌다. 1973년 3월에 선박 건조에 착수한 현대 조선소는 1년 3개월 만인 1974년 6월 28일, 박 대통령 각하께서 참석하신 가운데 역사적인 제1, 2호선의 명명식을 가졌다. 이날 대통령 각하 영부인이신 육영수 여사께서는 우리나라 조선공업의 획기적인 발전을 기념하는 뜻에서 우리 기술로 만들어진 초대형선인 26만 톤 애틀랜틱 배런호를 손수 명명해 주셨다. 탄생-애틀랜틱 배런호, 1974년 6월 28일, 당시 조선소 준공식하고 배 명명식이 같이 진행이 되었다. 이 조선소 준공식과 애틀랜틱 배런호 명명식 장면은 TV에서 전국으로 생중계 되었다. 이만큼 국가적인 사업이었다. 기술도 없는 상태에서 엄청나게 빨리 만들었다. 과연, 이 배가 잘 뜰 수 있을까? 사람들이 조마 조마 했을 것 같다. 프로펠러는 돌지, 앞으로 나갈 지, 한번도 해본 경험이 없으니까 근데 딱! 출발하고 뜨니까 그때 모든 사람들이 정말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기뻐했다. 그 선박을 수주했던 리바노스 선주는 이 배는 정말 내가 지금까지 본 배중 가장 잘 만들어진 배다 극찬을 하였다. 리바노스 선박 왕이 인정한 배다. 우리 조선업의 획기적인 장면이었다.
ⓓ 박 대통령이 좋아하는 용어들이 몇 개 있다. 그 중의 하나가 立國이다. 나라를 세운다. 그래서 1974년 여기 울산 조선소에 造船立國 이라는 휘호를 썼다. 1967년에 처음 나온 얘기가 輸出立國이다. 수출로써 나라를 세운다. 대통령이지만 사실 거의 왕 같은 대통령이었다. 그래서 立國 이라는 말을 썼을 거다. 본인이 주체가 돼서 세운 나라 라는 뜻인데 입국 이란 말을 안 썼을 때. 報國 이라고 썼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 事業報國, 박태준 회장은 製鐵報國, 立國과 報國은 다른 것이다. 근데 애틀랜틱 배런호가 물에 뜬 날, 이 날을 깃점으로 수주대박이 터졌다. 1972년 3월에 조선소를 만들기 시작한 지 4년 만에 초대형 유조선을 무려 10척을 수주한다. 애틀랜틱 배런호가 물에 뜬 날, 이 날이 사실은 한국 조선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다. 한국이 세계 조선에서 10년 만에 1위가 될지 누가 알았겠나. 드디어 우리가 우리 손으로 배와 해운사를 만들고 하면서 세계를 가슴 펴고 돌아다닐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열게 된 게 바로 이 때였다.
ⓔ 울산에 가면 호텔에 묵을 때 통상 뷰, 그러니까 풍경을 어느 쪽에 원하는 지 묻는다. 그러면 태화강 뷰 해안 뷰 이러는 데 공장 뷰가 있다. 공장이 쫙 있는 데 어마 어마 하게 멋 있다. 거기서 뭔가 웅장한 기운을 느낀다고 한다. 실제로 울산의 가장 좋은 호텔에 가면 가장 좋은 뷰가 공장 뷰란다(꿀팁), 하여튼 조선업의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 엿보았다. 우리나라 산업의 역사는 미션 임파셔블 영화다. 그 와중에 불가능은 없다를 만들었던 인물, 그리고 그 안에 숨겨져 있었던 수 많은 노동자를 생각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