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훈장 / 최미숙
며칠 전 내린 가을비로 기온이 뚝 떨어졌다. 가을에 내리는 비는 유난히 사람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11월 중순쯤이면 온산이 단풍으로 물들어 화려한 나들이가 한창일 때인데 올해는 나뭇잎이 물도 들기 전에 말라 떨어지고 색깔 또한 곱지 않다. 가을 풍경 감상할 틈도 없이 그동안 활짝 열어젖혔던 문이라는 문은 다 닫고 따뜻한 곳을 찾는 시기가 돼버렸다. 옷장 문을 열어 미처 걸치지 못한 가을옷을 몇 번이나 만지작거리다 한쪽으로 밀쳤다. 겨울이 손에 잡힌다.
24년 1월 5일까지 한 달 반만 근무하면 42년 일했던 직장을 떠난다. 멀기만 한 일이라 여겼는데 세월은 한 치 오차도 없이 부지런히 달려 마지막 지점에 데려다 놓았다. 요즘은 하루에도 몇 번씩 ‘벌써’와 ‘어느새’ ‘빨리’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오랫동안 일했던 곳에서 벗어나게 되면 아쉬울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한시라도 빨리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다. 학교에 오면 어느 누구도 내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이제는 홀가분해지고 싶다. 그 오랜 시간도 용케 견뎠으면서 역설적이게 얼마 남지 않은 기간을 참지 못하고 조급해한다.
쉰다섯이 넘으니 학교에 내 또래 교사가 별로 남지 않았다. 다들 명예퇴직하고 구성원 대부분이 젊은 친구들 뿐이었다. 옮기는 곳마다 마음을 나눌 동료가 없어 혼자 외로웠다. 수업 시간 애들과 말한 것이 전부인 날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점점 혼자 있는 게 익숙해졌다. 지금 있는 학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이 내 아들딸 나이인 30 초반부터 40대로 세대 차가 많이 난다. 교장인 친구가 없었으면 마지막 근무지에서도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같이 이야기 나눌 친구가 없어 학교를 그만둔다더니 괜한 말이 아니었다. 후배들도 다들 깍듯이 잘하지만 세대 간 거리를 좁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내 성격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이제는 그런 사사로운 것에서도 자유롭고 싶다.
10월 말, 24년 2월 퇴직 교원 재직 기간을 산정해 보내라는 공문이 왔다. 훈장 때문인 모양이다. 후배 교감 선생님이 40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는 황조근정훈장을 준다며 명예로운 일이라고 했다. 지금껏 한 번도 그런 것을 생각해 본 적도 없고, 그동안은 그냥 구리로 만든 메달 하나 준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이 퇴직하면서 받은 것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나처럼 40년 넘게 근무한 사람이 많지 않다며 다른 어떤 것보다 값진 훈장이니 소중히 간직하라고 해 웃고 말았다.
듣고 보니 궁금했다. 교실로 돌아와 자료를 검색했더니 의외로 훈장 종류가 많았다. 그중 공무원에게 주는 근정훈장은 재직 연수를 기준으로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뉘었다. 특히 교육공무원은 계급을 정하지 않고 근속 연수에 따라 2~5등급으로 훈격을 결정해 청조(교육공무원은 해당 없음), 황조(40년 이상 근무), 홍조(39~38년), 녹조(37~36년), 옥조(35~33년) 순으로 정해져 있었다. 긴 세월을 버티지 못하고 도중에 나가든지(명예퇴직), 아니면 사건에 휘말려 받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눈을 감고 지나온 시간을 돌아봤다. 힘들었던 일들이 먼저 스친다. 아기 맡길 곳이 없어 절망스러웠고, 열이 펄펄 끓는 애를 두고 눈물 흘리며 출근했던 일(예전에는 조퇴나 연가를 쓸 생각도 못함), 통근 버스 놓치지 않으려고 아침마다 20분 거리를 죽어라 뛰던 일, 밤새 아이 돌보느라 잠이 부족해 학교에 가기만 하면 졸던 일 등 그저 동동거리며 살았던, 말로 다 할 수 없는 아픈 세월이 떠올라 코끝이 찡하더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어서 빨리 시간이 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는데 웃으며 과거를 돌아보는 때가 오긴 한다. 어쨌든 42년 세월에 내 억척스러운 땀방울과 우리 세 아이의 갈증, 외로움이 배어 있다 생각하니 아랫배 깊은 곳에서부터 묵직한 것이 울컥하고 올라온다. 가벼운 메달이 아니라 젊은 날 고독이 덕지덕지 붙은 영광의 훈장이다. 그래도 가족이나 주변 사람 도움이 없었으면 이런 일이 가당키나 했겠는가?
이제 서서히 얼마 남지 않은 정년을 준비하려 한다. 그래도 아직은 수업도 남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 글쓰기 동아리 아이들 문집과 1학년 여학생 한글 지도도 마무리해야 한다. 원고는 다 받았으니 교정해서 출판사에 넘기면 되고, 1학년 친구도 이제 받침을 배우고 있으니 겨울방학 들어가기 전까지 웬만한 글자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내 할 일은 모두 끝난다. 24년 2월 고독한 훈장 받을 일만 남았다. 그날을 기대한다.
첫댓글 우와!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우와. 그동안의 선생님의 노고가 그림처럼 그려집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그리고 존경스럽습니다.
아울러 건강한 퇴직을 축하드립니다.
그 동안 수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축하드립니다.
남모르게 흘린 눈물로 많겠지만 그래서 더 값진 훈장입니다.
영광스런 정년퇴직을 축하합니다. 그동안 수고 많았습니다.
정년을 앞두면 시원섭섭할 것 같아요. 그간 고생 많으셨는데, 1년쯤은 하고 싶은 것만 하시면서 푹 쉬셨으면 좋겠네요.
선생님. 글이 너무 좋아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눈물 나요.
42년 동안 늘 열심히 하셨을 것 같은 선생님 존경합니다. 정년까지 건강하고 무사히 마무리하시는 선생님 축하드립니다.
'세 아이의 갈증과 외로움' 제 일인 듯싶어 눈물 찔끔 납니다.
이제 저도 4년 남았네요.
선배님처럼 영예롭게 퇴직할 수 있을까 의문이 갑니다.
오랫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제 2의 인생도 부지런한 선배님 성정이면 멋지게 가꿔 나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응원합니다!!!!
정말정말 존경합니다. 저는 30년도 안 됐는데, 올해 들어 자꾸만 답답해지네요. 서로 다른 생각들과 개인주의적 풍토에 지치는 것 같아요.
오늘 '다물고, 격려하고, 감사하며 나아가라'라는 설교말씀을 듣고 반성해 봅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새로운 인생을 행복하게 시작하시길 바랍니다.
선생님, 존경합니다. 그리고 축하합니다.
별 탈없이 42년을 보내신 것은 큰 축복입니다. 축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