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에의 추억(방문)
1. 서론
69년 7월부터 4여년의 울릉에서의 연단은 육지에서의 제2의 사회생활에 활력소가
되었고 울릉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은 늘 간직한 것 같다. 친한 공직자와 울릉주민의
육지에서의 개업이나 자녀 결혼식 등 연락이 오면 찿아서 정을 나누곤 했다.
그리고 15여 년의 신일대학교직중 기독 서클을 지도하면서 여름방학이면 84년부터
10여 년간 한해는 <울릉도>, 한해는 <홍도, 소록도, 여수애향원> 등으로 현장교육과
훈련을 다녀온 게 많은 추억거리와 보람으로 남는 것 같다.
2. 첫 번째 방문(1978년, 달성군청 재임, 영남대 대학원 재학 중)
1978년 여름방학 때 휴가를 얻어 그리운 울릉을 찾았다. 주사곡 주 서방님이 아들의
손을 잡고 부두에 마중 나오셔서 반갑게 환영해주셨다. 대학친구 두 명과 함께 하였는데
옛날의 인정 많던 고배끼 우 봉화씨 내외와 언덕에 세워져있는 추억의 주택건축물
앞에서 기념촬영하며 향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선물로 받기도 했다. 아직 아는 분들이
많아서 인심 좋은 울릉이라서 갖고 간 쌀을 그대로 남겼다.
3. 두 번째 방문(1984년. 신일전문대학 전임강사)
1984년 여름방학인 8월 첫 주 기독서클 지도교수로서 첫 울릉도 수련회를 기획하고
광고하여 40여명의 학생들(교수3명 포함)이 5개 팀으로 구성하여 4박5일간
울릉도를 일주하였다. 봉래폭포 앞 이 관산님 어른 댁에서 감자떡으로. 오징어회로
별미를 맛보며, 성인봉정복, 나리분지 투막 집 기념촬영, 추산수력발전소, 서달령 탐방
그리고 오종원 부군수님께서 태하동에서 도동까지 군청배를 내주시어서 감사했다.
다녀온 후 울릉군청 관광과에 나리동 투막집 재건을 건의했더니 계획이 되어있다면서
감사하다는 답신이었다. 동행한 두 교수가 울릉도에서 가는 곳 마다 친한 사람이 많아서
국회의원 나와도 되겠다고 농담도한 기억이 된다.
4. 세 번째 방문(1986년. 장로회 신학대학원재학생 인솔)
신일대학에서 전임교수로 있으면서 교목실의 실무를 거의 전담했다. 영남대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후 2년간 휴직을 하고 서울 광나루의 장신신대원에서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신대원
2학년과 3학년을 다녔다(1학년은 학교 몰래 다님).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신학대학원에 울릉여행을 광고하여 10여명의 신청에 의거 울릉을
다녀왔다. 당시에 울릉제일교회(이재명 담임목사님이 영남신학대학 동기임)에서 숙식하며
곡물가게하시는 장로님의 곡물 등 후원과 교회직원 김 정곤씨(현재 경주 강동 중앙교회
담임목사)의 헌신적인 안내로 죽도 등의 관광 등 보람된 여행이었다(이 여행이 계기가되어
신대원3학년 졸업반 졸업위원장을 맡아서 제주도 졸업여행을 직영으로 130여명이 멋있고
보람있게 행사할 수 있었다).
5. 네 번째 방문(1986년. 신일전문대학 기독써컬 인도)
휴직 후 신대원 재학중이였지만 기독써컬 지도와 신 진수 이사장님의 배려로
수업이 없는 월요일은 주, 야간에 풀 수업을 할 수 있었다.
84년에 이어 5명의 교수를 포함한 60여명의 재학생들이 8월 첫 주 4박5일간을 울릉을
찾게 되였다. 철판으로 제작한 <울릉도 안내판>을 만들어 성인봉입구에 세우고 7여 개조로
편성해서 성인봉 나리분지와 도일주중에 쓰레기수거 등 자연보호를......서달령에서는
2개조로 나누어 교회에서 1일 어린이 여름성경학교개최와 한 팀은 산정상의 약소목장
봉사활동으로...친한 손씨 댁에서 오징어 회 등 푸짐한 조식을 대접하기도...태하고개를
넘어 남양으로....마지막 날 울릉초교에서 1박을 하는데 박 경동 부군수님과 이 상태
내무과장님이 음료수 몇 박스를 싸서 방문하셨다.
마침 간호과 3학년졸업반의 예수님 잘 믿는 예쁘장한 황모양이 졸업 후에 울릉에
간호사로 봉사하고 싶다고 하여 부군수님께 건의 드렸더니 흔쾌이 받아드리셨다
(이 숙현 당시 울릉 군수님으로부터 별첨과 같은 감사패를 받았는데 글귀가 너무 좋아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6. 다섯 번째 방문(1988년. 신일전문대학 기독써컬 인도)
신대원을 졸업하고 복직하여 기획과장을 거쳐 경영학과장으로의 보직을 수행하며
임박한 박사학위 논문 준비로 거의 학교연구실에서 식사를 해결하며 논문을 준비하고
있었기에 행사가 힘들었으나 여름방학 8월 첫 주에 4박5일간 교수 3명과 40여명의
학생들을 인도하여 울릉을 찾았다. 아내와 어린남매도 동행하고 장애인인 봉산교회 당시
처녀전도사님도 같이 동행하였다.
역시, 성인봉-나리분지-평리동-서달령에서 1일 어린이 여름성경학교와 봉사-태하제를
넘어서 남양에서 1박, 당시에 태풍피해로 많은 피해를 본 현장을 본 것으로 기억된다.
7. 여섯 번재 방문(1990년. 신일전문대학 기독써컬 인도)
육신적으로 가장 힘들었던 울릉의 여행이었다. 그동안 82년에 입학한 영남대 박사과정의
학위논문준비로 근 3여년을 연구실에서 칩거하며 논문작성 및 9차례이상의 논문심사(심사위원
5명의 교수님 중 현 서울대학교 총장이신 성낙인 당시 영남대학 법대교수님도 포함됨) 등의
어려운 연단을 거쳐서 겨우 8월25일에 박사학위 취득식을 앞두게 되었고 3차례의 목사고시를
거쳐서 10일 후인 9월6일에 경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게 되어 있었으니 몸은 많이
쇠약해져 있었다.
그러나 2년마다, 사명감으로 대학의 기독서컬 중심으로 울릉을 인도하였기에, 8월 첫 주
4박5일간을 학생들을 인솔하여 울릉을 다녀왔다. 힘들었던 여행이라 기억이 거의 없다.
간호과 황모제자가 휼륭한 군청 모범직원과 결혼하여 어린아이를 업고 부두에 마중 나온
기억, 그리고 서달령의 봉사. 이 상태님께서 울릉약소불고기로 대접해주시던 기억.......
8. 일곱 번째 방문(1992년. 신일전문대학생 인솔)
학생들과는 마지막 울릉방문인 것으로 기억된다. 가장 적은 20여명의 기독서클 재학생들을
인솔했다. 역시 옛날처럼 큰 짐을 지고 앞장서서 학생들을 인도할 수 없는, 이제는 뒤에서
따라가야 하는 나약함이 있었다. 서달 교회에서 설교한 것으로 기억되고, 마침 태풍이라
배가 운행되지 않아서 울릉초교에서 숙식하며 9박10일을 보냈는데 울릉군청에서 최 인영
사회과장의 배려로 읍사무소에서 쌀을 제공하여 별 어려움 없이 잘 지낼 수 가있었다.
9. 여덜 번째 방문(2002년. 낙원교회 담임목사)
1998초 고향 경주에서 200 여 평의 전원주택을 구입하여 4여 년 간 무리하게 공사하며
육적으로 애쓰다가 강한 연단 중에 강한 영적세계를 체험하게 되었고 목사로서의 영적인
삶을 위해 15년의 대학교수직 사표를 던지고(아내는 남매도 어린데 교수사표 낼려고 한다고
힘센 처남 처조카 등 5명을 동원하여 대학이있는 대구 수성구내 신경정신과에 강제입원조치
하여 한달간 정신병동 입원환자의 체험도 가졌다.) 경주의 집을 정리하고 대구로 와서 영적훈련
으로 교회개척준비한 후 1999 11월에 대구 수성구 범어동 상가 2층에 60여평에 낙원교회를
개척.....2000. 1월 3일부터 40일금식기도.....등으로 목회에 전념,
그러나 개척교회의 보람도 있었지만, 어려움과 연단을 겪으면서 2002년 10월 홀로 울릉을
찾아 걸어서 일주를 하게 되었다.정든 울릉은 힘과 위로를 줄 것 같았다.
내수전에서 죽암으로 가는 길에 그 옛날 울릉군청 산림계 봉직 시에 출장 중 걸었던 언덕길에
앉아 마른 오징어로 요기를 하면서 이렇게 보살펴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흐르는
눈물을.......태하교회에서 잠을..........
10. 아홉 번째 방문(2003. 울릉 동광교회 초대)
2003년인가? 여름에 울릉 동광교회 조 석종 담임목사님으로 부터 초빙 연락이 왔다.
수년전 대학에 있을 때 영남신학대학에서 <목회와 생활법률>을 보람 있게 수업 한바
있는데, 유일하게 개척 교회한다고 매달 후원금을 보내시고 또 후원하는 어려운 교회들
목사부부를 초청하여 고생함에 위로의 접대를 하겠다는 것이다. 돕지는 못할망정
도움 받는 처지가 부끄러워서 사양했다가 담당권사님의 권유와 아내의 허락으로
입도 하게 되어 너무나 풍성한 대접을 받게 되어 그 감사를 늦게나마 울릉문학회에
기고하였다.
9. 열 번째 방문(2013년. 오산 영적 훈련 중)
2013년 2월경 오랜만에 대구 박 언휘 의학박사와 반갑게 통화 후에 <울릉문학회>를
알게 되었고 틈틈이 19세의 어린나이의 공직생활의 4년3개월의 울릉도 산림공무원으로
잊을 수 없는 지난날을 틈틈이 소박한 글로 올리게 되었고, 2013년 8월 근 10 여년 만에
그리운 울릉을 홀로 찾았다. 3박4일간의 일정을 보람있게 보냈고 울릉문학회에 <“그리운
울릉을 다녀오다”>와 <“존경하는 울릉군수님께 올리는 청원서”> 두편을 사진과 함께
진솔하게 올렸다. 우 봉화씨 등 정든 모습도 보이지 않았고, 사모되시는 노인은 반가워서
붙들고 우셨다.
보고 싶은 산천을 우선하여 일주하였고, 다음엔 지인들을 찾아서 옛정을 나누는 여행을
희망하고 있다.
10. 결론
“울릉에의 추억”을 (입도), (만남), (영전), (방문), 4편으로 정리하여 봤습니다.
성경에 모세가 80세에 민족을 애급의 억압에서 구출하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훈련하시듯 저도 19세의 어린 첫 사회생활을 4여년간 울릉에서
갖은 꿈과 낭만, 그리고 방황과 회개와 연단을 통하여 인생의 참의미와 빛된 하나님의 세계와
어두운 사탄의 세계를 알고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느냐?" 는 진리의 세계를 알기에,
이제 남은 삶이라도 가야할 방향과 삶의 원리를 알고, 하루하루를 열심히 보람 있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의 삶, 그리고 빛된 주님의 자녀로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하게 살려고 하는 원동력은 그 기반이 울릉에서의 연단과 훈련이었슴을 자신 있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늘 임마누엘 하셔서 선한 길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
드리고요, 울릉의 산천과 지인들과 울릉을 아름답게 지키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 드립니다.
(울릉에의 추억을 정리하면서 관련해서 너무나 신세지고 피해 끼치고 잊을 수 없는 모습들이
많습니다. 은혜에 보답도 못한 체.........대학생들을 인도하여 울릉을 찿을 때마다 전화
드리면 학교 등 좋은 장소에 무료숙소를 마련해주시던 김 영두 울릉군 교육청 前학무과장님께도
감사드립니다(경주계림고교 교장선생님으로 게실 때 찿아 뵈었으나 오히려 반기시며 오찬을
대접해주셨다)---<이 글을 끝맺으면서 꾸준하게 인연을 나뉘고온 이 상태님(前울릉군 내무과장, 경북도의원
역임)과 반가운 통화로 정담을 나뉘었다>.
(1986년은 가장 기억에 남는 보람된 울릉의 방문이었으며, 이숙현 울릉군수님으로 받은
감사패의 글이 너무 좋아서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감 사 패
신일전문대학
교수 석 홍
"태고의 신비가 드리워진
성인봉 기슭에
동해의 아침을 맞이하는 섬
순박한 인심
갈매기의꿈
바다의 교향시가 피어나는 섬
여기에 못다한 꿈이 아쉬워
고향가꾸는 정성으로
또다시 애정을 솟아주신
귀하의 큰뜻에 감사드립니다.
1986. 8. 7.
울 릉 군 수 이 숙 현
<감사패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