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세와 인연을 끊은 단속사지(斷俗寺址)는 지리산 자락 옥녀봉 아래에 위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운리 333번지 마을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옛 절터인 단속사터를 말한다.문화재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창건설화에 관한 첫 번째 창건설화는 경덕왕 22년(763년)에 현사(賢士) 신충(信忠)이 두 벗과 약속을 하고 벼슬을 버리고 남악(南岳)으로 들어가 왕이 두 번 불러도 나가지 않고 머리를 깍고 승려가 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 창건설화는 경덕왕 때 직장(直長) 이순(李純)이 일찍이 원을 세워 나이 오십이 되면 출가하여 절을 세우리라 다짐했다. 경덕왕 7년(748년)에 그의 나이 오십이 되자 조연소사(槽淵小寺)를 고쳐 큰 절을 만들고 단속사(斷俗寺)라 하였다.
과거 단속사 이전에 이미 자그마한 절이 있었으나, 그 후 중창하여 단속사로 이름을 바꾼듯 하다. 단속사는 처음에 절 이름이 금계사(錦溪寺)였다 한다.
금계사(錦溪寺)에서 단속사로 바뀌게 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의 단속사는 수백 칸이 넘는 대찰로 식객이 너무 많아 스님들이 수행하는데 지장이 많았다고 한다. 어떻게 하면 식객을 줄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 한 도인이 나타나 ‘속세와 인연을 끊는다(斷俗)는 뜻의 단속사로 고치도록 하여 절 이름을 바꾸게 되었는데, 절 이름을 바꾼 뒤로부터 사람의 발길이 서서히 끊어지더니, 마침내 절이 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과거 단속사는 수백 칸이 넘는 규모를 자랑하였다고 한다. 절을 찾는 신도들이 절의 입구에 해당하는 광제암문(廣薺嵒門)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바퀴 돌고 나오면 짚신이 다 닳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또한 아침 저녁으로 쌀을 씻은 쌀뜨물이 십리 밖 냇물에 까지 미쳤다고 전해지며, 한편으로는 절에서 먹을 곡식을 찧는 물레방아가 수십 개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현재 절터에는 당간지주와 3층석탑이 원위치에 있으며, 주변에는 금당지를 비롯하여 강당지 등의 초석이 그대로 남아 있어 신라시대의 가람배치를 짐작할 수 있다. 동·서 3층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석탑으로 비례미와 균형미가 잘 조화되어 안정감이 있고, 또한 치석의 수법이 정연하여 우아하다.
이밖에도 절터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와당을 비롯한 석물들이 출토되고 있으며, 주변 민가의 담장이나 집안에 많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단속사에는 신충이 그린 경덕왕 초상화와 솔거가 그린 유마상이 있었다고 전하나 지금은 없다.
조선 성종 때 김일손의『속두류록(續頭流錄』에 의하면 신충이 그린 경덕왕의 초상이 단속사에 있었다고 하며,『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솔거가 그린 유마상(維摩像)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김일손이 정여창과 함께 천왕봉을 등반하고 쓴『두류기행(頭流紀行』에 의하면 절은 조선초기까지 법등을 밝혀 오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왜적의 침략으로 완전히 불타고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단속사에는 두 개의 탑비가 있었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의 인물인 신행선사(神行禪師, 704~779)의 비와 고려시대 최고의 명필인 탄연(坦然, 1070~1159)의 비인데, 부서진 것을 수습하여 신행선사의 비편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대감국사(탄연)의 비편은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에서 각각 소장하고 있다.
옛날의 단속사는 수백 칸이 넘는 대찰로 절을 찾는 신도들이 절의 입구에 해당하는 이곳 광제암문(廣薺嵒門)에서 짚신을 갈아 신고 절을 한바퀴 돌고 나오면 짚신이 다 닳았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하는 사찰의 입구에 해당하는 곳이다. 실제로 이곳에서 금당이 있었던 단속사지 삼층석탑까지는 2Km이상 더 가야된다. 최치원이 썼다고 알려진 ‘광제암문(廣薺嵒門)’이라는 글씨는 단속사를 가기전 용두고개 왼쪽 개울가의 나지막한 절벽에 새겨져 있다. 그리고 嵒(암)은 바위 巖(암)의 약자이다.
단속사지 초입에 남명 선생 시비(詩碑)가 있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1572)은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고 한다. 그 남명 선생이 단속사에 머물 때, 단속사를 방문한 사명대사에게 지어준 시(詩)라고 한다.
단속사 옛터의 금당터 앞에는 동서로 두 탑이 서 있는데 그 중 동쪽(오른쪽)에 세워진 탑이 보물 제72호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山淸 斷俗寺址 東三層石塔)"이고, 서쪽(왼쪽)에 세워진 탑이 보물 제73호 "산청 단속사지 서삼층석탑(山淸 斷俗寺址 西三層石塔)"이다.
산청 단속사지 동삼층석탑 .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다. 기단의 아래층은 ‘ㄴ’자 모양의 돌을 이용해 바닥돌과 동시에 만들어졌다.
그 위로 기단을 한 층 더 올린 후 몸돌과 지붕돌을 교대로 쌓은 탑신을 올려놓았다. 꼭대기에는 네모난 받침돌 위로 머리장식의 일부가 남아있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비례가 알맞고 위로 오를수록 탑신의 크기가 알맞은 크기로 구성되어 있어 그 모습이 아름답게 보인다. 함께 세워져 있는 서탑과 비교할 때 그 규모와 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같은 시대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쌍탑의 배치와 더불어 주목되는 작품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조성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산청 단속사지 서삼층석탑. 2단의 기단(基壇)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모습이나, 동탑에 비하여 많이 부서지고 안에 봉안된 사리함이 도난당하는 등 많은 수난을 겪었다.
기단에는 각 면의 모서리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아랫단은 가운데에 2개씩을 두고 윗단은 1개씩 두었다. 탑신의 지붕돌은 처마를 직선으로 처리하였으며, 밋밋한 경사가 흐르는 윗면은 네 귀퉁이에서 하늘을 향해 살짝 들어 올렸다.
지붕돌을 경쾌하게 처리한 점이나, 탑의 윗부분으로 갈수록 크기가 알맞게 줄어드는 수법에서 통일신라 석탑의 전형을 계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기단의 너비가 넓어지고 4면에 새긴 가운데 기둥의 수가 아래기단은 2개, 윗기단은 1개로 줄어든 점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수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는 매화 10선이 선정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3그루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삼매(三梅)로 산청 삼매(山淸三梅)를 꼽는다. 오랜 역사를 지닌 산청 삼매는 세속을 등진 채 은둔생활을 했던 옛 선조가 뜰에 심어놓은 것이다. 산청군 시천면 사리 산천재 뜰에 남명 조식선생이 직접 심은 수령 450년 된 남명매가 있고, 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예담촌의 한 가정집에 670년 되 원정매가 있으며, 나머지 한 그루가 이곳 단속사지에 있는 수령 630년 된 정당매이다. 하지만 본래의 정당매(政堂梅)는 죽고 현재 있는 나무는 100년 전에 심은 것으로 경상남도 보호수 제260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당매(政堂梅) 옆에는 정당매각(政堂梅閣)이라고 하는 비각(碑閣) 정당매는 석탑을 지나 마을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이 매화나무는 고려 우왕 때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 1357~1402)과 강회중 형제가 단속사에서 공부할 때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한다. 강회백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 벼슬을 하게 되자, 벼슬의 명칭을 붙여 정당매(政堂梅)라고 부르게 되었다. 노후에 강회백은 단속사를 찾아 매화나무를 보고 시를 한 수 읊었다고 전해진다.정당매각(政堂梅閣) 안에 보존되어 있는 석비에는 "政堂文學通亭姜先生手植政堂梅碑(정당문학통정강선생수식정당매비)"라고 기록되어 있어 통정 강회백 선생이 직접 심었음을 알려 준다.
우연히 옛산을 돌아와 찾아보니
한 그루 매화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나무도 옛 주인을 능히 알아보고
은근히 눈 속에서 나를 향해 반기네.
석탑 아래쪽의 마을 담장을 끼고 돌아가면 소나무 숲 옆에 단속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우뚝 서 있다. 높이 356Cm, 직경 50Cm의 당간지주인데, 윗부분이 떨어져 나간채 방치되어 잇던 것을 1984년 5월에 복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