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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44편1~26절
제목 : 일어나 도우소서
전쟁에서 패한 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신뢰와 결심(1-8절)으로 시작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간절한 구원의 호소로 이어집니다.
1. 구원의 역사 회고(1~3절)
1) 우리가 우리 귀로 조상들의 행하신 일을 들었나이다(1절)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 조상들의 날 곧 옛날에 행하신 일을 그들이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
옛날에 행하신 일 - 이에 대한 히브리 원어는 '파알 파알타 비메이헴'으로 직역하면 '그들의 날들에 당신이 행하셨던 그 일'입니다.
여기서 '그 일'에 해당하는 원어는 '파알'인데 이 말은 강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한편 이와 동일한 용어가 합 1:5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 용어는 애굽으로부터의 구원, 광야 여정의 인도 그리고 가나안 정착 이라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를 모두 묶어 나타내는 집합 명사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일러 주매 우리가 우리 귀로 들었나이다 - 여호와의 놀라운 구원 사역을 자손 대대로 전승(傳承)하는 일은 이스라엘의 부모들에게 맡겨졌던 중대한 의무였음을 간접적으로 엿보게 하는 구절입니다(출 10:2 ; 12:26 ; 13:8, 14 ; 신 6:20 ; 삿 6:13).
2) 주께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박게 하셨습니다(2절)
“[2] 주께서 주의 손으로 뭇 백성을 내쫓으시고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박게 하시며 주께서 다른 민족들은 고달프게 하시고 우리 조상들은 번성하게 하셨나이다 ”
우리 조상들을 이 땅에 뿌리박게 하시며 - 물론 이 표현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 원주민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백성을 정착하게 하셨던 사실을 가리킵니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어느 한 지역을 정하시고 그곳에 정착하게 하시되 영원히 정착하게 하심을 가리킬 때 쓰이는 표현입니다(Barens).
한편, 포도나무를 심고 자라게 하는 모습으로 부터 그 이미지를 따온 이 표현은 출 15:17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그 이후 삼하 7:10 ; 시 80:8 렘 24:6 ; 32:41 ; 암 9:15등에서도 나타납니다.
한편, 본절에서 '쫓으시고'와 '심으시고'는 시 분위기상 좋은 대조를 이루면서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냅니다.
3) 땅을 얻은 것은 오직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입니다(3절)
“[3] 그들이 자기 칼로 땅을 얻어 차지함이 아니요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오직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과 주의 얼굴의 빛으로 하셨으니 주께서 그들을 기뻐하신 까닭이니이다”
그들의 팔이 그들을 구원함도 아니라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 자신의 팔이 그들에게 승리를 주지 않았다'입니다.
그런데 시편 전체적으로 볼 때 여기의 '승리'(야솨)는 대체적으로 '구원', '도움'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33:17).
이 단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소테리아'인데 벧전 1:5의 경우를 보아도 이 어를 '구원' 혹은 '승리'로 번역하는 일은 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야곱에게 구원'을 '야곱에게 승리'로 번역하는 일은 무리가 없는 듯합니다(53:6).
주의 오른손과 주의 팔 - 은 능력, 힘을
얼굴의 빛 - 은 하나님의 자비의 현시(顯示)를 각각 상징합니다.
2. 구원 확신과 찬양(4~8절)
1) 최고 권력자인 왕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허히 낮추어 말합니다(4절)
“[4]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야곱에게 구원을 베푸소서 ”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왕이시니 - 직역하면 '당신은 그분,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문맥을 중시하여 본 호칭을 가리키는 의미를 정리하면 '당신은 열조의 때에 간섭하셨던 그 하나님과 동일한 왕, 동일한 하나님으로 당신의 백성의 통치자인.
그리고 나의 왕이신 바로 그분'입니다.
특히 여기 '왕'이란 호칭을 저자가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저자의 강한 염원을 반영합니다.
한편, 이 표현은 특히 '즉위시'로 불리우는 시편들에게서 자주 볼 수 있는 것 이기도합니다(24: 7 ; 68:24 ; 93:1).
구원을 베푸소서 -(차웨 예슈오트). 문자적인 뜻은 '구원을 명령하소서'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왕적 권위를 인정하는 이 소원적 표현 속에는 땅 위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므로 이제 하나님이 한마디 명령만 내리면 저자 자신이 구원받는 일은 문제도 아니라는 기대가 담겨져 있습니다(Barnes).
2) 우리 대적을 누르고 주의 이름으로 짓 밟으라합니다(5절)
“[5] 우리가 주를 의지하여 우리 대적을 누르고 우리를 치러 일어나는 자를 주의 이름으로 밟으리이다 ”
대적을 누르고 -'누르고'(차레이누)의 문자적인 뜻은 '우리가 들이받다'입니다.
이것은 뿔을 가진 동물이 그 상대를 들어 받는 모습에서 따온 표현법으로 구약 여러 곳에서 그 예들을 찾을 수 있겠으나 특별히 신33:17을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한편, 우가릿 사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은유가 등장하는데 바알과 모트 붙이라는 이방신들이 들소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들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 '이름'은 '하나님 자신'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습니다(20:1).
유사 용례를 삼상 17:45 ; 대하 14:11 등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Anderson).
따라서 본 구절은 '당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당신께서 우리의 도움자가 되심니이다'로 풀어 볼 수 있겠습니다.
밟으리이다 - 원어는 '카페이누'로서 복적으로 밟는 동작을 의미하는 제1부정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용어는 들소와 같은 거친 짐승이 그 희생물을 계속적으로 밟아대는 모습을 강조하는 용어입니다.
한편, 여기서는 밟히는 희생물의 철저한 멸망을 읽을 수 있습니다(7:5 ; 18:40 ; 12 ; 사 10:6 ; 단 7:23).
3) 내 활과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 할 것입니다(6절)
“[6]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
활 - 은 당시에 일반적으로 소금물에 담근 목재나 뿔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의 활은 소위 청동 활을 가리키는데 청동 활은 시적인 분위기에 적합한 표현입니다(18:34 :40 ; 욥 40:12 ; 사 10:6 ; 단 7:23).
활의 경우 일반적으로 군주 시대에 사용되었고 활과 칼은 성경에서 일반적인 무기류로 간주되고 있습니다(창 48:22).
칼 - 은 가장 보편적인 이스라엘의 무기였는데 히브리 세계에서 이 용어는 일종의 전쟁의 상징으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렘 14:15 ; 겔 7:15 ; 33:6).
칼은 대체적으로 청동이나 쇠로 만들었는데 크기나 모양은 다양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이스라엘 형 칼은 아마도 짧고 양면에 날이 섰었던 것 같습니다(Anderson).
본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군대의 승리는 일상적으로 쓰였던 이와 같은 무기들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쟁취하게 될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20:7 ;33:16 ; 60:11).
4) 주께서 우리를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를 수치 당하게 하셨습니다(7절)
“[7]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 여기 원어의 시제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저자는 선조들의 위험한 시대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들을 구원하신 과거의 사건을 드러내어, 동일한 민족으로서 유사한 역경을 겪고 있는 자신들에게도 동일한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원해 달라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합니다(8절)
“[8] 우리가 종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셀라)”
하나님을 자랑하였나이다. - 즉 우리가 찬양한 것은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유일무이한 찬양의 대상이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에게 있어서 과거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 역사의 경험은 그가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했던 근거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 말하자면 하나님 그분께 감사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예배 공동체는 믿음과 소망뿐 아니라 과거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한 감사를 통하여 자신과 하나님과의 연관성을 나타내어야 합니다(34:1).
3. 결백의 확신(9~22절)
1) 백성의 탄식(9~14절)
(1)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함께 나아가지 않으신다고 호소합니다(9절)
“[9] 그러나 이제는 주께서 우리를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그러나-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아프로서 아주 상반된 내용이 전개될 것을 암시하는 접속사입니다.
1-4절까지는 든든한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은 승리의 과거를 묘사한 반면 본절부터 4절까지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사라진 비극적 현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버려 욕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 - 원어상으로 볼 때 '버려'는 이미 완성된 동작을 의미하는 과거형으로 되어 있는 반면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완성된 동작의 결과를 의미하는 현재 혹은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기 때문에 그들 군대와 함께 나아가지 않고 그냥 계시거나 나아가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소리를 발하셨기 때문에(과거 동작) 땅이 녹게
되었다(결과)'라는 표현과 유사합니다(46:6).
그리고 '나아가지 아니하시나이다'는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군대의 지휘관이 되셨던 것처럼(삿 4:14 ; 삼하 5:24), 또한 사막에서 많은 이스라엘 무리를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고백입니다.
본절은 거의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60:10과 유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편 자체도 많은 점에 있어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Pero-wen).
(2) 적들에게 쫓기고 빼앗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10절)
“[10] 주께서 우리를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우리를 미워하는 자가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
대적들에게서 돌아서게 하시니. - 승리를 주는 대신 대적에게 패배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탈취하였나이다 - 이 표현은 대적이 자신들의 의지대로 마음껏 이스라엘 성 안에있는 모든 것을 탈취하고 그들의 본토로 옮겨갔던 것을 가리킵니다.
구체적으로 느부갓네살은 유다가 멸망한 때(B.D. 568년) 예루살렘에 침입하여 성전의 기명을 비롯한 유다의 주요한 물품들을 탈취해서 그의 본국으로 가져갔었습니다(대하 36:7).
(3) 주께서 여러민족 중에 우리를 흩어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11절)
“[11] 주께서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
우리를 잡아먹힐 양처럼 그들에게 넘겨 주시고. - 직역하면 '당신은 우리를 식사를 위한 양처럼 만드셨다'입니다.
양이 식사용이 된다는 것은 양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여기서는 죽음에 직면한 포로 시대의 이스라엘의 운명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러 민족 중에 우리를 흩으셨나이다 -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바벨론 포로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봅니다(J. A. Alexander, A. A. Anderson).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본절과 다음절을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 시대 때 안디오커스 에피파네스가 애굽으로부터 폭풍처럼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와 삼일 동안사만 명의 유대인들을 살륙하고, 포로로 잡은 유대인 중 많은 수를 노예로 팔아넘겼던 사건에 대한 언급으로 보기도 합니다(De Wette).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적으로는 전자의 견해를 지지하지만 그 어느 시대의 그 어느 사건이었든 간에 여기서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방의 손에 잠시 넘기기로 작심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이 열방 중에 피난민, 포로 혹은 도망병의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왕하24:14 ;렘29:1 ; 암1:6-9).
(4)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셨으나 이익을 얻지 못했습니다(12절)
“[12] 주께서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
주의 백성을 헐값으로 파심이여 - 이것은 구약에서 자주 사용되는 화법 중의 하나로(신32:30 ; 2:14 ; 3:8 ; 4:2, 9 ; 10:7 삼상 12:9) 대적들의 노예가 되어 그 소유물까지도 그들의 수중에 들어가 버린 하나님의 백성들의 운명을 묘사하는 표현입니다.
그러한 비극적 결과의 이유는 대체적으로 그 백성들의 불순종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을 판 값으로 이익을 얻지 못하셨나이다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은 그들의 값으로 증가 되지 않았다'입니다.
따라서 개역 성경을 비롯한 많은 역본들이 첨가하고 있는 '이익' 혹은 '부'(영역본의 대부분) 등은 원문적이라 할 수 없으나 문맥을 볼 때 저자가 이 용어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Barnes).
그러므로 직역적 의미는 그 백성을 대적의 손에 맡기셔서 하나님이 얻은 소득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 동사 '얻다'(증가하다)는 '혼'으로 잠 22:16과 전2:9에서와 동일하게 사역(使役) 절대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편, 본 구절은 하나님에 대해 거의 반박하는 듯한 불평조의 문장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통치자는 자신의 부를 늘리기 위하여 백성을 가축처럼 팔아버릴 수 있어도 하나님은 그와 같은 상술로 부자가 되시려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시편 저자가 재앙의 원인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는 듯한 이 표현 속에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즉, 자신들을 그토록 두들겨 패고 상처를 주고 갈라 놓았었던 바로 그 손길로부터 치유를 추구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종 시편 저자의 확신을 읽어내야만 합니다(Calvin).
(5)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십니다(13절)
“[13]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이웃에게 욕을 당하게 하시니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조소하고 조롱하나이다 ”
그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 (리스비보테이누). 문자적인 뜻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들'입니다(79:4).
이들은 블레셋, 에돔, 모압, 암몬과 같이 지형적으로 이스라엘의 주변에 위치하였을 뿐 아니라 대항하여 승리를 거두었을 때 이스라엘을 조롱하였던 이스라엘의 철천지 원수들입니다.
후기 선지자들 중에는 이스라엘의 이 원수들이 승리를 거두고 비웃는 사실에 대해 하나님께 불평하곤 하였습니다(Perowne).
뿐만 아니라 선지자들은 이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구원받는 것도 싫어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에 열거한 열방의 이름들 중에는 생략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의 원수의 도성인 니느웨로 가서 그곳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하도록 명령 받았던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싫어서 명령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간 바 있습니다(욘 1, 4장).
(6) 뭇 백성 주에 이야기 거리가 되게 하셨습니다(14절)
“[14] 주께서 우리를 뭇 백성 중에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며 민족 중에서 머리 흔듦을 당하게 하셨나이다 ”
이야기거리가 되게 하시며 -'이야기거리'는 '마솰'로 비유' 혹은 '유사한 말', '격언', '금언' 특히 '풍자적이고 조소적인 노래'등을 뜻합니다.
결국 이 표현은 대적들이 이스라엘의 멸망, 그에 따른 디아스포라(diaspora)등을 보고 조롱하며 불렀던 것을 가리키는 표현임이 확실합니다(민 21:27 ; 신 28:37).
한편 대적들이 불렀던 노래 가사 내용은 이스라엘이 신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 재앙, 심판, 불행, 실패의 표본이 되었다는 것 등이었을 것입니다(Barnes).
머리 흔듦 - 웃음, 조롱거리를 묘사하는 문자적 표현입니다.
이것은 비난, 조롱의 모습으로서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기법입니다(22:7 ; 64:8 ; 109:25 ; 렘 18:16 ; 애 2:15).
2) 왕의 수치를 선포(15~16절)
(1) 능욕과 수치가 얼굴을 덮었습니다(15절)
“[15]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나의 능욕이 종일 내 앞에 있으며 - 직역하면 '하루 내내 나의 앞에 혼돈이 있다'입니다.
여기 혼돈이라는 것은 전쟁으로 말미암은 가시적인 참화의 현장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즉, 이곳저곳에 즐비한 시신들, 파괴되고 불타버린 건물들, 그리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 통곡소리들과 같은 것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그 어느 곳도 참화를 겪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어느 곳으로 시선을 돌려도 비참의 현장을 피할 수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그러한 참화의 현장을 '나의 것'이라고 표현하여, 전쟁으로 말미암은 민족적 재앙을 자신의 재앙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께 슬픔의 마음을 표하고 있습니다(Barnes).
이는 저자가 단순히 개인적인 자신의 고통 때문에 호소하며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영광을 위해 슬퍼하는 진정한 신앙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느 1:4 ; 단 10:2,3).
수치가 내 얼굴을 덮었으니 - 것이다(보쉐트 파나이 키사트니). 이를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거나 '나의 얼굴의 수치가 나를 덮으니'로 번역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좀 더 분명하게 본 표현의 강조점을 드러내고 있는 70인역과 대다수의 역본들을 중시할 때, 후자의 번역을 취함이 바람직합니다.
(2) 왕은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에 더더욱 스치스럽습니다(16절)
“[16] 나를 비방하고 욕하는 소리 때문이요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때문이니이다 ”
비방하고 욕하는- '가프다'로 '말로 난도질하다','헐뜯다','불경스런 말을 하다'인데 뒤에 언급된 '소리'까지 붙으면 좀 더 분명히 '비꼬는 말, 비난, 조롱하는 말' 을 뜻합니다.
이 용어는 인간과 하나님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전자의 경우 이것은 비난, 조롱을 뜻하고 후자의 경우 신성 모독을 뜻합니다.
본문에서는 그 비난의 대상이 백성들뿐 아니라 하나님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와 후자를 포함하는 양쪽에다 사실을 고려할 때 전자와 후자를 포함하는 양쪽에다 적용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동사로 사용되고 있는 각각의 예는 자신이 하나님을 신성모독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었던 앗수르 왕 산헤립에게 적용하고있는 왕하 19:22 ; 사 37:23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원수와 나의 복수자 - 신 32:35에 의하면 복수와 보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절에서 그러한 기능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붙여주셨던 대적들에 의해 찬탈되어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3) 백성의 결백 선언(17~22절)
(1) 백성의 결백 선언이 살짝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당하다(17절)
“[17]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임하였으나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
우리가 주를 잊지 아니하며 - 아마도 과거와 현재에 적용되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온갖 불행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께 충성했다는 뜻입니다(119:16).
주의 언약을 어기지 아니하였나이다. 여호와께서 선조들에게 주셨었고 그들이 그 선조들에게서 전수받았던 명령들에 대해 불신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언약이 명시하고 있는 의무 조항들을 무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55:20).
이것은 단지, 언약의 원리들로부터의 보편적인 이탈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일 뿐입니다.
즉, 이것은 전국가에 임했던 끔찍하고 독특한 불행 및 재앙이라는 실존적 상황과 민족적 슬픔, 혹은 국가적 종교 상황의 원인이 될 만큼 언약을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 표현입니다.
(2) 백성들의 마음과 걸음은 하나님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18절)
“[18]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우리 걸음도 주의 길을 떠나지 아니하였으나 ”
우리의 마음은 위축되지 아니하고 - 문자적인 뜻은 '우리의 마음은 돌이키지 않고'입니다.
즉 자신들은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는 하나님을 배교하지 않았다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일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당시 전 국가적인 경향이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만 앞서 언급된 범 국가적인 재난의 원인이 될 만큼 그러한 악이 일반적 이고 지배적인 경향이지는 않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국민 개중에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부류들도 있었으나 그러나 그러한 경향이 지배적인 경향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Barnes).
(3) 백성들은 주께서 우리를 사망의 길로 몰아넣으셨다고 항변합니다(19절)
“[19] 주께서 우리를 승냥이의 처소에 밀어 넣으시고 우리를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
우리를 시랑의 처소에서 심히 상해하시고(디키타누빔콤 타님). 직역하면 '당신이 시랑(혹은 용)의 처소에서 우리를 밟으셨다'입니다.
앞절과 연결시켜서 해석해 보면 자신들의 마음은 하나님께 등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들은 무자비하게 짓밟힐 만큼 그에 해당하는 배교나 불충성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본 표현의 강조점입니다.
여기에서 승냥으로 번역된 '타님'은 '커다란 물고기', '바다 괴물', '뱀', '용',
'악어', 혹은 '(여우와 이리의 중간형인) 재칼' 등을 의미합니다(사 13:22).
그러나 이 '타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동물이냐를 결정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동물들의 서식지로 볼 만큼의 황량하고 폐허가 된 장소, 즉 당시의 국가적인 상황에 초점이 모아져야 합니다.
이유인즉 '재칼(혹은 용)의 처소'라는 표현은 폐허, 황량함을 암시하는 구약의 일상적 표현이기 때문입니다(사 34:13 ; 35:7 ; 렘 9:11 ; 10:22 ; 49:33 ; 51:37).
사망의 그늘로 덮으셨나이다 . - 여기 '사망의 그늘'은 '찰마웨트'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거나 '진한 어두움'으로 의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후자가 바람직한 번역으로 보이는데 그 까닭은 히브리어에서 '사망의 그늘'과 같은 복합 명사성은 거의 사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Anderson).
이제 진한 어두움으로 덮는다는 것은 큰 어두움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나타내나 것인데 이러한 표현은 고통과 절망을 나타내는 비유법의 일종입니다(107:10, 14).
따라서 이와 같은 시련의 경험을 하고 있는 자는 '돌아오지 못할 땅'(욥 10:21)에 가까이 있거나 이미 죽음의 권세 안에 들어가 있는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의 '깊은 어둠이 덮었다'는 표현을 통해서 당시 저자는 거의 삶을 포기할 정도의 엄청난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4)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비밀을 아십니다(20~21절)
“[20]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우리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21]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무릇 주는 마음의 비밀을 아시나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렸거나 - 하반절에 암시되어 있는 바대로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배의 핵심을 이루는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63:4 ; 79:6 ; 창 4:26).
손을 이방 신에게 향하여 폈더면 - 예배자가 그 손을 신을 향하여(88:9 ; 141:2 ; 143:6 ; 출 9:29, 33 ; 스 9:5 ; 사 1:15), 성전을 향하여(28:2 ; 왕상 8:38), 혹은 하늘을 향하여(왕상 8:22) 펴는 일은 기도 행위로 잘 알려진 자세입니다.
이제 저자는 자신들이 이방신에게 예배하거나 기도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알아내지 아니하셨으리이까. - 직역하면 '하나님께서 이것을 찾아내지 않았겠습니까?'입니다.
하나님의 전지(全知)성을 향한 엄숙한 이 호소는 국가적 순결에 대한 각자의 정직한 확신을 보여줍니다.
현편, 멸망적 재앙을 받을 정도로 국가가 비교적 죄의 성향을 띄고 있지는 않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저자로서는 재앙의 원인을 또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했습니다.
(5) 우리가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되었다고 탄식합니다(22절)
“[22]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종일 - (콜 하욤). 문자적인 뜻은 '모든 하루(날)'입니다.
이것은 재앙이 한 번의 강타 형식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되어 왔으며 아직도 끝나지 않고 지금도 눈으로 목격하고 있음을 뜻합니다(Anderson).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 본 구절은 하나님의 교회가 항상 박해받는 교회였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는 롬 8:36에서 바울에 의해 인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의 어조(語調)와 사도 바울의 어조는 명백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전자는 핍박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유 없이 하나님의 징계의 손이 그의 백성들 위에 임하고 있습니다
고 믿었던 반면 후자는 그 박해를 기뻐할 뿐 아니라 또한 감격스럽게 외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4. 주의 구원을 소망(23~26절)
1) 주무시지 마시고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23절)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이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자의 이러한 표현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비활동적인 듯한 하나님의 모습을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78:65).
즉 이는 수수께끼와 같은 위기 속에서 외치는 당황에 찬 저자의 절규일 것입니다.
2)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셨나이까 질문합니다(24절)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압제를 잊으시나이까 ”
얼굴을 가리시고 - 문자적인 뜻은'얼굴을 숨기다'입니다.
성경의 표현 가운데서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대체적으로 그 상대를 무시 한다거나(13:1 ; 22:24 ; 88:14), 불쾌함을 표시한다거나(사 54:8), 징벌을 내리는 것(신 31:17, 18:32:20 ; 욥 13:24 ; 사 57:17)을 뜻합니다.
그러나 20, 21절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을 무시했다거나 그분을 불쾌하게 만들 어떤 일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편 기자는 당혹감 속에서 이 같은 심정을 토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3) 이는 생명이 전토 속에 파묻히고 몸은 땅에 붙어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25절)
“[25] 우리 영혼은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진토 속에 파묻히고 우리 몸은 땅에 붙었나이다. - 본절을 현재 국가적 시련과 연관시켜 해석해야 함이 분명한데 세부적인 의미는 명백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자가 하나님에 대한 깊은 겸손의 태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흙먼지가 많은 땅바닥에 엎드렸던 사실(신 9:18 ; 대하 20:18) 과 큰 슬픔을 당하였을 때 먼지와 재를 무릅쓰고 땅위에 주저앉던 당시의 관습을 고려할 때(119:25) 본 구절이 묘사하는 바는 처절한 재앙을 당하여 큰 슬픔 가운데 겸손히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시편 기자의 태도인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이 의식적인 자세를 금식일의 전형적인 기도 자세와 연결시키는 것은 약간의 무리가 있는 듯합니다(수 7:6 ; 사 47:1 ; 렘 6:26 ; 14:2).
4) 주의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소서(26절)
“[26] 일어나 우리를 도우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소서 - 원어를 직역하면 '당신의 인자하심 위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드러내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뜻입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인 인자하심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신성의 현시(顯示)는 인간뿐 아니라 우주의 안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또한 이것은 죄인인 우리가 그분 앞에 나아가 호소하고 소망을 아뢸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Barnes).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3절 선택하신 백성을 돌보십니다.
애굽의 노예로, 제국을 유지하는 소모품처럼 살던 민족을 잊지 않으시고 그들을 구출하셔서 약속하신 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애굽 군대를 물리치고, 가나안 민족과 싸워 이긴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신 결과입니다.
이처럼 모든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기뻐하시기를, 우리를 향하신 그의 얼굴빛이 온화하시기를 기도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4-8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위해 싸워주시고, 구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철저히 패배했지만, 주님이 이스라엘을 생각하시고 이스라엘을 위해 그의 손을 펼치시면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능력과 힘을 의지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승리를 주신다면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겠다고 다짐합니다.
계획한 일이 어긋나고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나는 어디서 원인을 찾고 어떻게 헤쳐나갑니까?
하나님을 원인과 해결의 중심에 두고 있습니까?
9-22절 시인은 이스라엘이 패전한 이유가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지 않으셨기 때문이라 호소합니다.
시인은 언약을 어기지 않았고, 주의 길에서 벗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고난이 오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왜 패전했는지 알지만 왜 패하게 하셨는지 알 수 없어서, 그는 하나님을 붙들고 따집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을 만난 욥의 심정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무고하게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의 마음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필 내게 이런 고난이 오는지, 왜 나만 이런 실패를 거듭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지만, 분명한 것은 이 또한 주님의 손을 벗어난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상황이 절박할수록 절박한 기도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23-26절 시인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깨어 일어나 구원하시라고 부르짖습니다.
자녀의 고통에 귀를 막지 마시고, 구원을 바라는 그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마시라고 소리칩니다.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신뢰(1-8절)의 터 위에서, 시인은 원초적인 기도를 맘껏 토해냅니다.
나의 정제되지 않는 마음의 소리도, 주님은 넉넉히 들어주실 것입니다.
[기도]
공동체-실패에도 절망하지 않고, 고난이 깊을수록 더 간절히 주님을 붙들게 하소서.
열방-중부 유럽에서는 극심한 가뭄피해가 7배 증가하여, 생태계와 인간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중부유럽 지역의 가뭄이 속히 해결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