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봄이 오면 인연은 산에 피는 것을 찻아 가지만 철쭉을 따라 다닌지는 참으로
삼십년 만에 늘 갔던 초암산 주월산 호남정맥 꽃길을 다녀왔다.
나는 지구에서 어떤 존재 일까요? 부처도 인간이고 예수도 인간이고 공자님도 인긴이고 노자 나 좋아하는 장자도 인간이다. 지나가는 바람이나 피어나는 들꽃이나 오래된 노송도 지구에는 똑같은 존재 이다. 존재는 지구에서 어떻게 생기는 지는 아는 것은 모두 다 안다고 하지만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존재는 성립되는 것은 일단은 이루이지면 아는 것 같지만 이루이지기 전에는 존재의 자체는 아는 것도 나타나는 것도 모르고 살아간다. 존재는 일단 지구에서 우주에서 성립되고 나면 모든 인연과 연결되는 것이다. 연결은 자가가 이루어 놓지도 않아도 존재가 되면 가지는 것이 각자의 세계이다. 간단히 지구라는 곳에서 존재하면 각자의 세계는 만들지도 않아도 자라면서 가지고 이루는 세계는 각자의 것이다. 인간이나 만물이나 하늘이나 땅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유일하지 않은 존재는 없는 것이다. 지금도 최고로 높은 하느님 이라는 존재나 길거리에서 노숙자 생활을 하는 인간이나 날아다니는 나방이나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존재 이든지 지금은 존재하고 시기가 지나면 소멸하고 다시 존재하는 것이다. 이무리 예수고 부처고 지금은 사라진 공자이고 노자이고 칸트이고 히틀러 이고 처어칠 이고
지금 우리를 괴롭히는 지구상의 모든 독재자이든 성인 이든지 각자는 존재의 세계에서 각자의 세계에서 존재의 빛을 밝히지만 그것은 단지 자신이 내뿜는 조그만 빛일 뿐이다. 존재란항상 철학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하나의 사라지기 위한 준비 단계 일 뿐이다. 존재란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각자의 몸부림일 뿐이다. 단지 존재하기 위한 각자의 빛을 찻으려는 것일 뿐이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존재의 이유는 각자가 알지 못하면 필요는 없다.
존재란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것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말하지만 하이데거는 자신어 세계와 관계맺고 살아가는 현존재에 대한 분석으로 '존재와 시간' 을 시작했다.
인간은 애초에 세계속에 인간이고, 세계도 애초에 인간의 세계이다. 세게가 인간을 구성하고, 인간이 세계를 구성한다. 모든 개인은 독자적으로 자유롭게 판단했다 생각하지만 사실 그러한 판단도 자기가 속한 세계 의 역사,전통, 관습, 관게와 무관하지 않다. 세계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가 속한 세계도 이해할 수 없다. 현존재로서의 인간은 세게속에서 도구를 사용하고 (도구적세계), 타인과 관계하며( 인간의 세계 ) 살아간다.
첫째는 용도의 관점, 둘째는 인식의 관점이라 한다. 용도의 관점이란 세게를 실용적인 관점으로 만나는 것을 의미하고, 인식의 관점이란 세계를 이론적인 관점으로 만나는것을 의미한다. 용도의 관점이란 세계를 손안의 존재이고, 인식의 관점이란 눈앞의 존재라고 한다. 손에 익은 존재란 낯설게 관찰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무언가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한발 물러나서 관찰하는 것이다. 용도에 대한 관심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그러나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면서도 도구의 세계나 도구의 진리를 망각하고 살아간다.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사용하니 무지가 아니라 망각이다. 우리는 도구를 사용하는 궁국적인 목표는 행복이다. 그러나 도구의 세계와 진리는 항상 결핍되거나 부정될 때 나타난다는 것이다. 도구뿐 아니라 자연도 인간도 건강도 직업도 모든 존재는 결핍으로 나타나고 변하는 것이다.
세계ㅡ나ㅡ존재 로서의 현존재는 사물이나 도구뿐 아니라 타인과도 관계 맺고 살아간다. 현존재는 일상에서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진지한 관심과는 담을 쌓고 잡담 호기심 애매성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일상에서 우리는 자신의 고유한 삶에 대한 진지한 관심없이 타인들에 대한 자질구레한 소문이나 뒷담화른 즐기며 살아간다. 자신보다 타인에게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참견하면서 말이다. 부조리한 삶에서는 그러한 재밋거리가 가벼운 위로와 활력운 주기도 한다. 그 다음은 '호기심' 이란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낯설고 새로운 것을 좇으며 긴장과 흥분을 즐기는 태도를 말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삶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보려는 일탈의 자유이다. 여행이나 모험이라는 것도 역시 시장의 유혹에 매료된 수동적이고 강요된 욕망일 뿐이다. 그것은 대상에 대한 진지한 관심없어 그저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허세적 태도에 불과하다. 그러한 잡담과 호기심으로 뒤얽힌 일상에서 우리는 애매한
삶에 젖을 뿐이다. 그저 일상적인 가치들에 매료되어 타인들과 경쟁하며 살아가는 맹목적인 모방의 삶일 뿐이다. 그러한 일상적인 삶의 방식이 '타락' 이라 한다. 타인들과 동질적인 삶은" 나도 남들처럼 혹은 남들보다 잘살고 있다" 는 심리적 안정을 위장하고 살아간다. 이러한 가벼운 위로는 중독되고 진정한 자기를 상실하는 삶의 더 큰 불안을 떠아는 것이다.
죽음은 우리를 허무와 불안의 고통으로 내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한 불안을 용기있게 인수할때, 그것은 본래적인 삶을 위한 자유의 터전으로 전도 된다. 어려운 말로
유한성의 극단이 초월의 가능성으로 나타낸다. 이는 죽음의 불안을 견디지 못해 세계 ㅡ내ㅡ존재 공동존제 에 안주하려는 눈먼 태도는 자기상실과 부자유를 떠안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우리의 삶은고유하고 본래적인 의미는 누군가가 명령하거나( 본질) 신이 부여하는 것 (운명)이 아니다. 그것은 각자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양심의 부름'이다.
삶의 진리란 현존과 세계 의 관계 속에서 밝혀지는 철저히 개별적인 의미들이다.
문명의 세계는 우리에게 철저히 죽음을 망각하고 삶에만 집중하기를 가르친다. 죽은 자를 무덤에 감추듯이, 죽음의 가능성도 일상에서 몰아낸다. 죽음의 대면은 세속적인 가치들의 무의미와 허무함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맹목적인 출세의 욕구와 타인과의
비교에 빠져드는 공동존재의 삶이야 말로 문명세계의 이정표가 되어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의 의미와 자유를 망각하게 하는 일상의 장막, 저속한 문명이라 한다. 진정한 문명은 개인의 본래성과 공동체의 번영을 매개하는 역설의 길을 묻는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크게 후회하는 것은 살면서 한 일들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들이다." 영화 버킷리스트에 나오는 시한부 인생의 명대사이다. 존재란 자기를 아는 것이다.
인간의 가치를 나타낼수는 없다. 존재하는 순간 지구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받는 것은 다같이 귀하고 소중하지 않는 것은 없다. 철천지 원수의 상대방이나 음과 양처럼 상극인 것이나 하늘과 땅처럼 다르듯이 공존하는 것이나 서로를 도구처럼 이용하고 도움받지 않고 사는 이는 없다. 도독이 있어니 공권력인 잡는이들이 먹고산다는 것이다. 일전에, '일달러 강도'의 문제로 미국이 난리가 난적이 있다. 우리나라야 좁고 질서유지에 옛부터 지배층들이 공을 들인결과 의료보험 체계나 소외되는 사람들에게 복지를 신경쓰지만 미국이나 선진국은 의료보험 체계가 힘들어 개인들이 직접 의료보험에 들어 의료지원을 받는다.
극빈자들이나 하류층들은 건강보험에 적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병원에 갈수없는 극빈자 한사람이 은행에 가서 1달러를 요구하는 강도짓을 하고 경찰에 잡혀 ㅡ사실은 순순히 ㅡ 법원에서 10개월형을 받고 복역했다. 그런데, 교도소에 복역할려면 건강검진을 나라에서 하여 건강여부를 따져서 복역시킨다는 점이다. 목적은 건강검진이라는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나 사실은 우리나라도
먹고 살기위해 이따금 법을 어겨서 복역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살인범이나 흉악범도 나라에서 건강이나 편안한 생활을 할수있도록 하여준다는 것이다. 유럽 같은 나라는 죄를 어기고 복역하는 이들도 외출이나 휴가를 준다는 것이다. 인간의 복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평등하다는 것이다. 죄와 벌도 상대적이고 선과 악도 인간이 만든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존재도 진리가 마치 각인된 선지자들의 비문처럼 독재자같은 모습으로 지배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늘 변하고 존재도 변하는 것처럼 지구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서로의 우위하고 지배하는 쪽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하는 생각없는 짓인지 모른다.
" 의식이전에 의식 의 무가 존재할수 없을 것이다. 의식의 무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전에는 존재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의 의식이 있어야하고, 또 최초의 의식이 무를 재인의 종합으로 내세우는 증인으로 서의 의식이 있어야한다. 의식은 무에 앞서 있고, 또 존재로부터 자기를 끌어낸다." 사르트르의 '존재의 무' 에 나오는 내용인데, 난해하다. 무 無는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이다. 말 그대로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창출한 개념일 뿐이라는 불교의 논리대로 무도 유에서 나온 것인지, 유도 무에서 나온 것인지 모르지만 무도 하나의 유라는 것이다. 없다는 말 자체도 있어야하니 무도 유라는 것이다. 우주는 끝이 없다는 는데 그 끝은 도달하면 끝이 없는 지점의 다른 끝이 있어야한다 는 개념이다. 무는 시공마저 지워야 하는데, 인간은 상상 할수 없다는 칸트의 이론대로 불교에서 무는 유이고, 유는 무이다. 라는 논리도 말로 표현하는 한계이다. 인간의 사고는 말로 표현할 뿐이다. 말 의 표현 넘어 존재하는 세계를 경험하지도 못하고 말로서 표현할 수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내 세계의 한계는 내 언어의 한계이다 " 라는 비트게슈타인의 말대로 이다.
세계는 인간의 언어 너머를 넘어서 무한하다.
AI 라는 말자체가 싫다. 기계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계적인 것은 싫다.
AI는 존재론적으로 인간과 완전히 다른 영역의 구성체라는 점이 중요한 것이다. 그들을 창조한 신은 확실하다. 그러므로 AI는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고, 의심의 여지도 없이 생존하지만, 인간은 존재론적으로 완전한 불투명한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간과 AI는 다른 구성체이고, 물리적으로는 소통될수 있지만 내적 교감은 불가능하다.
유기체와 무기체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모든 건은 유기체의 산물이다 AI가 아무리 뛰어나도 인간이 알수없는 어떤 교감체라고 해도 그것은 저장된 데이트의 산물이지 내적으로 불안한 인간의 교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AI가 어무리 뛰어난 시를 쓰고 반ㆍ고호의 작품을 모방한 직품을 그린다 해도 그것은 하나의 저장된 데이트중에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다. 인간은 하나의 사과나무를 그려도 똑같은 그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AI는 똑같은 그림이나 시를 몇번이고 쓸수있다. 인공지능은 내적세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무한수라는 데이트만이 존재하고 수많은 작품을 변형하여 조합한 것일 뿐이다. 졸업논문이나 학위논문이나 인공지능을 빌리면 답은 비슷한 결론을 내리기에 교수들은 논문을 인공지능에 접속시키면 바로 데이트가 나타닌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고 한다. 인식 주체가 없는 예술은 허망하다. 그냥 목적없이 나타내는 예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인쇄물이 되는 것 뿐이다. 불완전하고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르기에 인간의 삶은 계속 유지되고 살아가고 있다.
인식이 곧 예술의 시작이고 서로 다른 것에 사랑을 느끼고 비판과 논쟁이 오고가는 것이 인생이다.
"ᆢᆢ우리들의 어린시절이 우리에게 상관없는 것이 되고, 소중한 보물이 아이들의 장난하는 손에서 미끄러져서 깊은 샘물 속으로 떨어지듯, 그것을 망각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생활이 불완전하고 빈곤하기 때문이다. 나는 소년시절 까지는 생활의 실마리를 더듬어 갈수 있지만, 그 이전일은 그 기억과 연결되는 며칠밖에는 안개와 박명 博明속에 쌓여 있을 뿐이다. 그런 날의 기억을 발판으로 하여 마치 탑에서 내려다보듯이 나의 어릴 적을 회상해 보지만 보이는 것은 오직 수수께끼와 태초의 굽이치는 바다뿐이다. 그것은 아무런 형
태도 갖고 있지 않지만 신성하고 아득한 안개와 기적과 귀한 것을 감싸고 있는 베일에 덮여 있는 것이 있다.ᆢ" 헤르만 헤세의 '인생론'에서 어린시절의 독백처럼 아름다운 글이다. 어린시절이 지나서 헤세의 글을 읽어면 눈물이 난다. 마치 어린아이의 마음을 표현하는 시인의 글은 읽고 있어면 나 자신의 마음을 대신 이야기 하는 대변인 같은 것이다. 누가 이리 어린시절이 아름다운 밤하늘 별처럼 소근소근 들려주는 이가 있을까?
" ᆢ나무는 성스러운 성자다. 나무와 말할수 있고 나무의 말을 들을수 있는 사람은 진리를 터득한다. 그것은 교리나 울법을 설교하지 않고, 개별적인 것은 고려하지 않은 채 삶의 기본 원칙을 설교한다. 한 나무는 말한다. 내안의 씨앗, 불꽂과 사상이 숨어있다. 나는 영원한 삶의 표본이다. 영원의 어머니는 딱 한번 의 시도로 나를 만들었다. 내 형체와 껍질의 수관들은 유일무이하다. 우듬지의 아주 작은 나못잎의 움직임과 내 껍질에 난 작은 흠집도 나만 갖고 있는 거다. 내 임무는
딱 하나 뿐인 그 모든 것을 영원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한나무는 말한다. 내 힘의 원천은 믿음이다. 나는 내 조상을 모르고, 내 몸에서 해마다 태어나는 수천의 자식들을 모른다. 나는 씨앗의 비밀을 끝까지 지키지 못할 것에 대한 걱정 뿐이다. 나는 신이 내안에 있다고 믿는다. 내가 하는 일이 성스러운 임무라는 것도 믿는다. 그런 믿음으로 나는 살고 있다. ᆢ" 헤세의 ' '나무' 라는 산문에 나오는 글이다. 숲은 진정한 사색의 소리를 들려주는 안식의 도피처이다.
숲이 없는 산은 삭막하게 울부짖는 벌거벗은 여인의 절규와 같다. 삭풍이 부는 날 겨울하늘을 향해 소리짓는 나무의 몸짓은 지난 여름 풍요한 노래소리를 갈구하는 모습은 성스러운 순교자 같다. 산야에서
산길을 가는 겨울길은 항상 성스러운 존재이다.
목력존자가 선정禪定을 딱는 도중에 잠에 빠져 들고 말았다. 붓다는 목련에게 이렇게 말했다. " 목련아, 만일 잠이 달아나지 않으면 이전에 들었던 법을 마음속으로 외워보아라. 그래도 잠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대가 이미 들었던 법을 외워보아라. 그래도 잠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냉수로 눈을 씻고 목욕하라. 그래도 잠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밖으로 나가 사방을 둘러보고 별을 우러러 보라." '중아함경' 에 나오는 붓다의 말씀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나 도를 딱는 사람이나 모든 일을 하는데 가장 큰 적은 잠이 문제이다. 스스로를 갈고 딱지 않는 사람은 잠든 사람과 같다. 깊은 꿈속에는 온갖 욕심과 애착의 마음이 가득하게 쌓이기 마련이다. 깨어있어라는 뜻이다. 깨어 있어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수행하라는 말이다. "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을 통솔할 줄 알아야 한다. 자기 한 몸을 통솔하지 못하고 어떻게 남을 통솔할 것인가? 노여움을 비롯하여 그 밖의 격렬하고 폭팔적인 감정따위는 모두 자기를 통솔하지 못한 증거이다. 사람은 남한테 저항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에게 저항해야 한다. 나 자신을 극복하는 것이 남에게 이기는 길이다." 카알 힐터는 스스로를 깨끗몸이라 생각하여, 절제하고 자신의 존재를 사악함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세상의 모든 사악한 것들은 인간의 존재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기를 늘 기다리는지 모른다. 삶을 배우기 위해서는 일생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삶의 존재를 시랑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루에 몇번의 가면을 벗고 쓰고 사는지 느껴볼수도 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수많은 과제를 위해 맡은바를 연기하여야 한다. 그 연기는 때로는 어설프기도 하고 어떤때는 주연급 연기를 능숙하게 할때도 있다. 가면을 벗는 순간은 진정한 지신의 모습으로 하루동안 맡은 바에 대한 결과로 우울하거나 환희에 젖은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지고 다시 쓰는 가면의 연기에 혼신의 힘을 쓸지 안쓸지는 자신도 모른다. 고프만의 이론에서 '진정성' 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나온다. 내가 하고 있는 말과 행동, 그리고 선택은 과연 내 내면의 의지여서 비롯된 것인가? 사회적 스크립트, 타인의 기대 혹은 내가 만든 이상적 자아상 에 따른 연기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수행하는 역활은 나를 억압하는 짓인가?
나는 가면을 벗은 진정한 자유로운 인간인가?
하는 문제에서 우리는 우울하고 허탈하고 외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진정성으로 키운 자식이나 정성으로 이룬 사회업적이나 성심성의껏 대하는 배우자나 한다고 하는척한 효도의 부모님 사별이나 하루에 몇번이고 갈망하는 자유나 모두가 번뇌가 되는 것은 벗지못한 가면의 휴유증일수도 있다.
존재란 인간은 똑같은 것은 절대로 없다. 각자가 하는 인생의 길은 자신의 길이다.
누가 맞고 틀린것은 없다. 타인이 보고 판단하는 것은 할수도 해서도 안된다. 단지 바라보는 관망의 방관자가 되어야한다.
삶이란 누구나 다 살고나면 우등생이다.
죽음이라는 상장을 받지 않는 존재는 없다.
가면을 벗고 자유를 얻는 것은 자신의 선물이다. 가면이 얼굴에서 굳어지면 벗을줄 모른다.
'我獨昏昏 아독혼혼 我獨悶悶 아독민민' 은 노자의 도덕경의 20장에서 나오는 말이다.
" 나만 홀로 바보구나, 나만 홀로 세상일에 어둡구나 " 라는 글이다. 노자는 배우는 일이 많을수록 근심이 많이지고 걱정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동양에서 윗사람에게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말에 차이가 있고, 대답도 문화에 따라 차이가 있다. 언어라는 것은 본성에서 나오는말과 인위적인 인식된 말에 차이가 있다. 이는 의식하지 않어면 ' 응' 이고, 상대방을 의식하면 '예 '이다. 안다고 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분별력이 있다고 지혜로운 것이 아니다. 잘짓는 개가 좋은 개인가, 말을 잘한다고 현명한 사람인가? 세상의 모든 것들 선과 악도 한 생각의 차이다.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도 생각의 차이 이다. 노자는 욕망을 일으켜 세상사람들은 즐거움으로 먹이를 삼지만, 항상 세상 속에 있으면서 세상을 벗어나 있어야한다 고 한다. 세상속에서 자신의 허물을 볼줄 알아야한다. " 세상 사람들 모두 넉넉한데, 나 홀로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어리석은 사람의 마음이구나, 아무런 분별없이 흐리멍텅하구나, 세상 사람들 모두가 총명한데 나만 홀로 바보구나. " 노자의 말씀이다. 자기 스스로 어리석고 바보인줄 아는 사람은 어리석지 않다. 자기가 가장 똑똑하고 현명하다 는 사람이 도리어 어리석은 사람이다. 사람들은 분별을 잘하는 이를 총명하다 고 한다. 그러나 분별할 것이 없는 없는 줄 아는 사람은 분별이 곧 분쟁의 원인인 줄 안다. 쓸모의 쓸모없음과 쓸모있음의 쓸모는 경제가 좋을수록 힘들고,
많이 배울수록 분노는 끝이없다. 장자나 노자나 바보임을 자처한다.
철학이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사유의 그늘에서 살아야하기에 늘 강한 상대를 이용한다. '존재' '있음'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갖고 계속 씨름중이다. 지금은 AI 시대가 다가오니 상대를 어떤 것으로 택하느냐는 벌써 철학은 시작되었다. 사실은 존재 라는 것은 언어나 글의 장난이 없어면 존재라는 개념도 없다. 철학사에서 변천의 역사가 있지만 그것은 이름의 장난인지 모른다. 인간이 지은 것들이 받은 이름이라는 받은 존재들은 그 이름의 존재조차 모르고 잘살아간다. 하늘이니 새들이니 봄이니 산이니 당신이니 하는 것들은 아무런 이름의 존재는 지금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존재의 개념에 밝은 데카르트조차 설명의 난세에 빠지고 말았다. 칸트조차 존재는 있음을 이성이나 지성, 사유나 생각으로 확인 하며 증명할 수 있는 차원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다시 존재의 불을 붙었지만 절박함은 아무런 개념도 이루지 못하고 지금은 AI 의 존재로 불을 붙인지 벌써 자리 집았다. 철학자나 이론의 선점을 잡으려는 자들은 흔히 말하는 전문가나 선도자가 되기를 바라는 짓을 즐기는 것 뿐이다. 자명한 개념은 믿어도 않된다. 사유도 개인적인 취향이다. 말놀이 법칙이나 이론의 정리도 각자의 개념의 일부이다. 세상은 정해진 것은 없기에 존재라는 것도 그시간이나 그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오늘의지금도 내일의 지금시간이 똑같을 수는 절대로 없다. 사실은 존재란 오늘의 것과 내일의 것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나는 지금 산에서 올라가야 하는 존재인가
내려가는 길을 찻아야 할시기인가?
모든 인연은 버리고 가야하지 않아도
어차피 버려야 하는 것 뿐인가?
세상에 모든 것은 나의 것은 아닌 것인데
나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질 뿐이다.
그냥 빈 것을 찻으러 다니는 길이네.
첫댓글 반푼수가 형님의 글에 경의를 표합니다.
장자와 노자의 바보가 아님이에도
반 푼수라 불러 주어서 고개 꾸벅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