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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기 두려운 말씀(제자들끼리의 논쟁)
9,30-37: 그들이 그곳을 떠나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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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분은 당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왜?
이 대목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 두 번째로 예고하신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예고를 하시면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마르 9,30) 왜 누구에게도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을까? 당신의 복음이 온 세상에 선포되기를 원하지 않으셨는가?(마르 16,15)
당신의 온 몸으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지 않으셨는가? 그렇다면 “자, 보아라, 이 몸을, 복음의 몸을!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시면서 더욱 더 당신을 세상에 보여주셔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당신이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가?
그분은 곧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막상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서 죽게 될 일이 두려워서였을까? 그런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이어지는 말씀으로 보아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면 왜? 당신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시는가?
복음사가는 그 이유를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당신께서 십자가에 넘겨지고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리라는 것을 그들에게 ‘특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당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이를 제자들에게 집중적으로 가르치는데 온 힘을 쏟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이 어째서 복음인지 제자들이 먼저 깨닫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은, 죽음과 부활은, 인간의 언어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직 그들의 언어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논쟁이 이를 증명한다.) 그들은 복음을 깨달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3년이나 당신을 따라다니는 제자들도 깨닫지 못하였다면 다른 사람이야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여전히 남을 위해 죽는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잡혀 죽게 되리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주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방금 하신 그 말씀 철회하십시오.” 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열쇠는 여기에 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그들을 데리고 다니며 가르치는 것은 어쩌면 바리사이와 논쟁하는 것보다 더 힘드셨을 지도 모른다. 그분은 끊임없이 호소하신다. “나는 사람들의 손에 잡혀죽을 것이다. 나는 남을 살리기 위하여 이제 내 온 몸을 희생으로 내 놓는다.
너희도 나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너희가 나를 따라야 할 이유다. 부자가 되고, 권세와 인기와 일신의 영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 희생하고 죽기 위해서 너희는 나를 따라야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엉뚱하게도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 따위로 논쟁을 벌이고 있다.(34절) 누가 더 부자 되느냐,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느냐, 이런 문제만이 그들의 관심사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은 높은 자리를 위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눈도장을 찍기 위해 대통령이 다니는 교회를 기웃거리고, 대통령은 또 그런 자를 선호하여 선택한다. 국민과 나라를 위하여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고 하면서도 속내는 딴 곳에 있다.
어떻게 하면 더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대통령의 마음에 드는 기도를 바칠 수 있을까, 어느 교회에 가면 그런 기도가 통하게 될까. 예수님을 따른다 하면서 예수님과는 반대의 길을 걷는 무리들, 예수님 이름을 팔아 높은 자리를 사고파는 자들. 예수님 마음은 착잡하다. 언제 이들은 당신의 죽음을 깨달을 수 있을까.
언제 이들은 남(나라, 백성)을 위하여 자신을 내놓는 삶을 살 수 있을까. 그런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으니 슬프기만 하다. 가까운 제자들부터 깨우쳐 그들을 복음의 삶으로, 십자가의 삶으로 이끄는데 성공해야 한다. 예수님의 단호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제자들을 따로 가르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슬픈 의지를 보면서 제자들을 깨우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긴 가르침이 있은 후 그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게 될 것이다.(마르 16,20)
1.2. 그분의 제자들은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왜?
1. 깨닫지 못한 마음이 두려움으로 표현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느낀다. 복음을 깨닫지 못한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하느님 나라를 느끼게 해주셨다. 십자가에 대해 이야기하시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셨다.
“사람의 아들은 이제 잡혀 사람들의 손에 넘어 가 그들에게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이 곧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이다. 이 말씀보다 예수님을 더 잘 느끼게 하는 말씀이 또 있을까?
하지만 제자들에게 십자가는 무서운 형틀일 뿐이다. 당신이 십자가의 죽임을 당한다는 말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는 말씀이다. 이 말씀에 대한 제자들(우리들)의 반응에 대해서 마르코는 이렇게 쓴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32절) 제자들이 묻지 못한 까닭은 단순한 두려움을 넘어 주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한 때문이다.
알아듣지 못한 까닭은 그들의 관심사가 예수님의 관심사와는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그분은 곧 붙잡힐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붙잡히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고, 그런 뒤에야 다시 살아나실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시하시는 당신의 미래는 제자들의 기대와는 너무나 달랐다.
그들의 머리에는 누가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이냐 하는 생각으로 온통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구세주는 아무런 고통 없이 안락하고 높은 자리를 보장해 주는 분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반대를 이야기하신다. 예수님의 마음과는 정반대인 마음으로는 그분의 삶을 깨달을 수 없고 그분을 느낄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제자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두려움에 쌓인다. 예수님께서 첫 번째에 이어 두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을 때도(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세 번이나 이 말을 들었다.) 제자들은 말씀의 핵심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길에서 제자들끼리 논쟁한 것은 그들이 알아듣지 못했음과 무관하지 않다.
그들은 오히려 이 예고와는 정반대 주제로 논쟁하고 있었다. 그들이 예수님의 예고를 깨달았다면, 그들이 지금 그분과 함께 어디로 가고 있는 지를 깨달았다면, 그런 주제로 논쟁을 한다는 것 자체를 부끄럽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였다.
묻기조차 두려워한 것은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이 그들에게는 무시무시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첫 번째 예고 때 베드로는 이 무시무시한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했다가 혼이 난 경험이 있다. 깨닫지 못한 마음은 두렵기 마련이다. 무지의 어둠 속을 헤맬 때 두렵기 마련이다.
2. 두려워하는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그분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종이 되어야 당신의 삶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이어 어린이 하나를 껴안으시며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주제로 내세우신 것은 어린아이의 순수한 경지에 들어서야만 당신의 복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종이 되고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 종이 되지 않고 어린아이가 되지 않고서는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면에서 그리스도교는 지독한 종교다. 그리스도교는 십자가가 구원에 방해된다고 보지 않을 뿐더러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자들은(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를 껴안지 않고도 사랑하는 방법은 없을까, 고통을 외면하고도 하느님께 나의 사랑을 증명해 보일 수는 없을까, 하고 잔머리를 굴린다. 복음은 머리로 깨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는 머리로 짊어지는 것이 아니다. 부활은 머리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늘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고 고백을 한다. 그러나 그렇게 고백하면서 무슨 느낌을 받는가? 이런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느끼는가? 건성으로 고백하면서 믿는 시늉만 하는 것은 아닌가? 그분에게서 귀에 달콤한 말씀만을 듣기를 원하는 것은 아닌가?
1.3. 여러분은 길에서 무엇 때문에 수군거렸소?
이 단락에는 ‘길에서’라는 표현이 두 번 나온다. 그들은 지금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가는 중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신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으로 봐서 “제자들이 흥분한 상태에서 벌이던 논쟁의 내용을 들으셨던 것 같다.”(부어스 87)
예수님은 그들이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당신의 영으로 아셨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질문은 성경 여러 군데서 나온다. 마르코 2장 8절에서는 대놓고 질문하신다. “너희는 어찌하여 마음속으로 의아하게 생각하느냐?”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2,25) 라고 전한다.
제자들은 당황하여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마르코는 그들이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서술한다. 그들이 논쟁하기 바로 전에 스승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르 9,31-32) 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그들은 아직 그분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분의 수난의 길이 될 예루살렘을 향한 길에서 그들은 누가 제일 큰 사람인가를 두고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위 다툼, 서열에 대한 질문은 당시 유대교의 종교적인 사고 내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였다.”(부어스 88) 마르코는 그런 그들의 모습을 “(율법학자들은)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잔치 때에는 윗자리를 즐긴다.”(마르 12,39) 라고 꼬집는다. 제자들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서열을 생각하며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라고 청하기도 한다.
서열 논쟁을 하는 제자들을 보시는 예수님의 심정을 어떠하였을까?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논쟁하는 자리에서 즉시 말씀하시지 않고 집에 당도하여 그들을 불러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33절)고 물어보신 뒤 자리에 앉으신 다음 말씀하신다. 길을 가면서 하는 말과 자리에 앉아 하는 말에는 차이가 있다.
유럽에서 발전한 그리스도교와 동양에서 발전한 불교의 차이는 서양의 성직자는 대개 서서 설교하고 동양의 스님은 앉아서 설법하는 데서 볼 수 있다. 서서 설교하는 이에게는 자기의 주관을 군중에게 심으려는 의지가 나타나는데 반해 앉아서하는 가르치는 자에게서는 자기의 소리를 집어삼키고 내면의 소리를 들려주는 모습을 느끼게 된다.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특히 중요한 일을 가르칠 때는 앉는 자세를 취한다.
정좌하여 가르치는 스승에게 제자들은 스승의 비장한 결의를 느끼며 귀를 기울이게 된다. 제자들은 방금 전 길 위에서 선 상태에서 논쟁을 벌였다. 이제 예수님은 그들을 앉힌다. 그리고 당신도 자리를 잡고 앉으신 다음 제자들을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9,35) 예수님의 말씀은 보통 사람들이 지향하고 생각하는 바를 완전히 뒤집어놓는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앉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입에서 종과 꼴찌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종과 꼴찌에 대한 이야기는 앉아서 들어야 한다. 내면으로 집어삼킨 다음 내면으로부터 들어야한다.
우리는 인생길에서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사는가? 어떤 일로 걱정을 하는가? 현재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는 복음이라고 말한다.
정말 나에게 이 말씀이 복음으로, 기쁜 소식으로 다가오는가? 이 말씀이 정말 나를 기쁘게 하는가? 종이 되면, 꼴찌가 되면 기쁨을 발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한다. 종은 듣는 존재다. 주인 앞에서 자기의 주관을 주장해서는 안 된다. 그는 무조건 주인에게 복종하고 들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종이 되라고 요구하신다. 그리고 그 종의 모습은 바로 당시의 모습이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자신을 버리고 예수의 이 요청을 받아들인다면 예수의 이 ‘지나친’ 요구가 복음이라는 것,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사실을 경험할 수 있다. 소유가 마음의 더 큰 평화를 보장해 주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보다도 그리스도인은 우리 모두를 위해 자신을 내어준 분을 따름이라는 길을 성숙한 자세로 어느 정도 가고 났을 때 자기 자신과 깊이 하나됨 기운데서 스스로를 발견한다. 철저하게 이타적은 사랑의 행위를 하고 나면 - 이는 그분의 은혜를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한 바 - 마음은 평안을 찾는다. 자기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그런 이기적인 행위 이후에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겠는가?”(부어스, 92-93)
1.4. 어린이의 깨달음
“누가 가장 큰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9,36-37) 하고 말씀하신다. 어린이를 껴안은 그분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이 도달해야 할 원초적인 상태이다. 고관이나 부자, 소위 잘나고 출세한 사람들을 껴안으려고 하지 말고, 아무 힘도 없이 연약하고 순수한 어린이를 껴안는 존재가 되어라. 부와 권력과 명예를 포기할 때 가능할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 어린 아이들에게조차 부와 권력과 인기의 옷을 입히려고 한다. 어찌 진리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어린이만이 예수님의 품에 안길 수 있고 어린이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어린이의 순진한 모습은 바로 복음화 된 모습이다.
마태오는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바로 전에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18,3-4)라는 말을 첨가한다. 어린이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천국은 어린이만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린이를 깨달은 존재로 보시는 것이다. 그런데 어린이는 진리를 깨달을 능력도 없다. 그들이 진리를 고백한다면 깨달음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바를 입력-저장-출력의 도식에 의해 고백하는 정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어린이들이 모든 이에 앞서 하늘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니 우리들에게 아예 깨닫기를 포기하라는 말씀인가?
깨달음이 없는 믿음은 맹신이요 광신이다. 천국은 ‘묻지 마’ 식의 믿음으로 고백한다고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니며 깨달음을 요구한다. 그런데 어떻게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렇게 알아들을 수 있다. 어린이들이 먼저 천국에 이른다는 말은 깨달음은 머리가 아닌 온몸으로 이르는 경지임을 시사한다. 진리(복음)는 머리로 깨닫는 것이 아니다. 어른들은 깨달음에 이른다면서 이론적으로만 머리를 굴릴 수 있다.
반면 어린이에게는 ‘깨달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할 수 있지만 머리 굴림이 없어 그들 마음 안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순수하게 받아들인다. 언어로 고백할 때는 - 어른들이 말한 것을 외워서 반복하는 정도이기에 - 맹신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살 때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서 산다. 마태오 복음 25장 31절의 오른편에 모인 사람들의 믿음은 어린이와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만나는지도 모르고 하느님을 만났다. 또 신학을 모르는 내 어머니와 같은 믿음도 이런 믿음에 속한다.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서 부활의 삶이 있다고 고백하지만 - 이것은 교회가 가르쳐 준 것이다. - 그 마음 깊은 곳에는 이미 와 있는 천국에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 자신이 이를 모를 뿐이다.
깨달음이란 오염된 언어를 벗어버리는데서 시작한다. 오염된 언어로는 아무리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해도 그것은 결국 자기의 생각을 믿는다는 고백일 뿐이다. “믿는 대로 되리라.”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 하며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다 해도 깨달음이 없는 고백은 자기의 욕심을 채우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런 욕심을 제거해야 들어가는 나라다.
어린이는 어른의 언어를 모른다. 어린이가 되어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어린이는 이런 어른의 언어를, 얄팍한 머리 굴리는 지식을 모르기 때문이다. 설사 어른이 시키는 대로 맹목적으로 신앙을 고백한다 해도 그 마음 속 깊은 곳에는 아직 오염되지 않은 신앙의 느낌을 간직하고 있기에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느끼며 살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지금 그들의 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그들을 만나신다. 그 마음을 안아 주신다. 그리고 그들의 순수한 신앙의 느낌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는 것이다.
깨달음은 머리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믿는다. 나보다 신학이 약한 나의 어머니가, 내 보기에 하느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나의 어머니가 나보다 먼저 지금 하느님 나라에 들어 있다고. 당신은 지금 부활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만 내가 살지 못하는 부활의 삶을 어머니는 살고 있다고.
어버이날에 본당과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하였다. 인사말을 통해 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예를 들면서 백 이십칠 세(‘백 세 이십 세 칠 세’로도 번역할 수 있음)까지 사시라고 하였다. 백세는 오래오래 살라는 뜻이고, 이십 세는 이십대처럼 젊게 살라는 뜻이고, 칠 세는 일곱 살 난 어린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지니고 살라는 뜻이라고 풀이하였다.
아무리 오래 살아도 푸른 마음이 사라지면 산다고 할 수 없고 더군다나 순수한 마음이 사라지면 추하다. 동양에서 무조건 오래오래 살라는 인사와 비교가 된다. 나의 인사가 끝나자 지방 국회의원이 인사말을 하였다. “신부님께서 워낙 좋은 말씀을 다 하셔서 저는 이하 동문입니다. 거기에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어르신네들 백 이십팔 세까지 건강하게 사십시오.” 국회의원 다음으로 시의회 의원이 인사말을 했다. “백 이십구 세까지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
1.5. 원초적인 순수한 삶
마르 10,13-16: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이와 같이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코 그곳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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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이야기(마르 10,1-12)에 이어지는 어린이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 원초적인 순수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암시해 준다. 어른이 되면 판단도 성숙해진다고 하지만, 어른이 되면 자칫 어린이의 순수성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하느님 나라는 질문을 잘 던지는 어른이 아니라 원초적인 삶의 고향으로부터 질문하는 어린이와 같은 순수한 마음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순진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한다.” 어린이를 품에 안고 그 위에 손을 얹어 축복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모세의 법을 넘어 인간의 원초적인 삶의 고향에 이를 것이다.
세상에는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차원이 있다. 사랑은 언어의 논쟁을 벗어나는 신성한 영역이다. 그런데 인간의 언어로 사랑을 하다 보면 스스로 자기 언어에 갇히어 사랑은 하지 못하게 된다. 어머니의 사랑을 이론적으로 다 알고 나서 어머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어린이는 사랑을 주제로 논리적으로 표현하는 데는 미숙하지만 누구보다도 어머니의 사랑을 더 잘 느끼고 전달하며 또 남에게 사랑을 느끼게 한다
. 차츰 인간의 언어로 정의 내릴 줄 아는 어른이 되어가면서 사랑에 상처를 입기도 하고 오해를 하기도 받기도 한다. 성장하여 어른에 가까워질수록 어머니를 덜 사랑하는 예를 심심치 않게 만난다. 하느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언어로 하느님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광신자가 되기도 한다. 하느님을 이야기하지만 이야기의 중심에서 하느님은 배제되고,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믿음의 중심에 자신의 아집이 자리하게 된다.
인간의 언어만 남아 광기를 부추기는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의 언어로 다루는 가운데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에게서 멀어지기도 하고 그렇게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거부감을 주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 수 없다고 하신다면 이런 어른의 마음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올바른 믿음은 어린이의 느낌을 되찾는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언어를 흉내 낼 수 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시키며 어린이의 언어로 연기할 수도 있다. 속은 검은 어른이지만 어린이의 하얀 순수로 포장할 수도 있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표정을 지으며 “내가 어떻게 하느님의 일을 알겠느냐? 내가 어떻게 하느님의 신비를 다 깨달을 수 있겠느냐?” 하며 짐짓 경건하게 말하지만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사탕발림일 뿐 마음속에는 위선과 교만이 가득하다.
그들은 자기의 경건함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선하지 못하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이처럼 순수한 사람의 것이다. 어른처럼 선악을 따지고, 나에게 이리 하면 나도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나도 저렇게 할 것이다 하고 계산하는 마음으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
예수님 시대처럼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께 다가가는 어린이를 가로막으며 어린이를 하느님을 만나는데 방해물인 듯 대할 때가 많다. 때때로 아이들은 어른들이 하느님을 경배하는데 방해되는 요소로 취급되고, 어른들에게 걱정을 주고 근심을 주는 존재로 여겨진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기쁨이요, 어리석은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다.”(잠언 10,1 공동번역)
또 “아이는 매를 맞고 꾸지람을 들어야 지혜를 얻고 내버려두면 어미에게 욕을 돌린다.”(잠언 29,15 공동번역) “어린이들은 율법을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종교적인 면에서 아주 하찮은 지위를 차지할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런 어린이들을 제일 높은 자리에 앉혀주고, 곧바로 ...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해주는 것이다.”(뒤켄, 227)
어린아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사회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 소경, 절름발이, 중풍병자, 나병환자, 창녀 등에게로 확장된다. 사람들은 이들이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을 막았고 이들을 그들이 하느님께 나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로 여겼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다. 최후의 만찬을 끝내고 겟세마니 동산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감에 사로잡힌 밤에는 철부지 어린이처럼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셨다.(마르 14,36) 이는 자신을 하느님의 아기로 여겼음을 암시한다. 그분은 태어날 때만 아기이셨던 것이 아니라 다 큰 어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까지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아기였다.
그분은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어린이였다.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었기에 그분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하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아기만이 아버지와 하나 될 수 있다. 아기인 그분 안에 아버지와 아들이, 하느님과 인간이 하나였다. 이런 일치의 원초적인 체험에서 그분은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을 선포하실 수 있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늘과 땅, 이웃과 원수 등 이원분리를 모르고,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어린이만이 체험할 수 있는 경지이다. 어린이가 되지 않고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이다.
때문에 그분께서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당신께 데리고 오는 것을 막는 제자들을 언짢아하시며 말씀하신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어린이들을 끌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 축복해 주셨다.(마르 10,13-16)
우리가 아직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지 못한다면 어린이가 되지 못해서이다. 아직도 하느님을 실감나게 아빠라고 부르지 못해서이다.
1.6. 막지 마라
마르 9,38-41: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선생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는데 그는 우리와 함께 다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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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주는 기쁨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기쁨이 있다. 예수님은 기쁨(복음)을 얻기 위하여 종이 되고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제 인생을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을 제시하신다. 우리는 인생을 너무 감정에 치우쳐 살 때가 많다. 위정자들이 감정적으로 나라를 다스릴 때 온 백성이 고생을 한다.
아버지가 또는 어머니가 집안을 감정적으로 대할 때 자식들은 불안해진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였을 때, 일의 결과보다 누가 그 일을 하였는가만 보고 평가할 때가 많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한 일은 잘못되었어도 참아주는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한 일은 잘 한 일이라도 평가 절하하며 무시하려 드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성당에서 홀로 기도하면 그럴 듯하게 보이는데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기도하는 모습은 색안경을 끼고 안 좋게 바라본다.
예수님은 이런 인간의 마음을 꾸짖으신다.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 필자의 번역; 새 성경의 번역에서는 “저희를 따르는”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이 경우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문맥상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하고 아뢰었을 때 예수님은 막지 말고 그냥 놔두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사람이 마귀를 쫓아내었다는 사실은 보지 않고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흥분한다. 그가 마귀를 쫓아내었다는 것은 어쨌든 좋은 일이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가 한 좋은 일은 보지 않고, 그가 자기네 그룹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만 본다. “자기편도 아닌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일이 비록 좋은 일일지라도 눈엣가시로 보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눈을 가진 제자들을 나무라신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리가 있겠는가? 그가 한 일만 보아라.”(마르 9,39)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막다’(그리스어)라는 말은 앞 대목에서도 나왔다. 어린이를 막는 그들은 어른들도 막는다. 저 사람이 나를 지지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따지며 그를 내편에 세우기도 반대편에 세우기도 한다. 어느 교회, 어느 종교에 속하는지 따지기도 한다.
그런 마음으로는 교회에 속한다는 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교회도 하느님도 인간에게 소속시킨다. 예수님은 이런 눈을 가진 자를 나무라신다. 막지 마라. 네 눈부터 치유하라. 갈라놓는 네 사고부터 치유하라. 그가 한일을 보라.
이런 눈을 가진 자는 한 교회 안에서도 막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 내가 보기에 신자답지 못하다 해도 그를 막아서는 안 된다. 그도 자기 나름대로 자기 안에 계신 주님을 믿고 그분을 느끼려고 애를 쓸 것이다. 나처럼. “어떻게 저런 놈이!” 하고 욕해주고 싶은 저 못된 사람도 교회 안에서 나름대로 주님을 만나고 싶어 할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 자기의 행동이 그 정도밖에 되지 못함을 나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반성하곤 할 것이다.
남들도 나처럼 예수님을 믿고 나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받으려고 애를 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아무리 그의 신앙이 못마땅하고 내 눈에는 그가 그르게 보여도,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한, 그가 설사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를 욕한다 해도, 그는 예수님의 제자이다. 예수님을 욕되게 할 마음은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하는 자는 예수님을 지지하는 자이다.
저런 자가 예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들인가 하고 손가락질하기에 앞서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임을 자각한다면 예수님에 대한 서로의 믿음도 인정해주고 받아들여야 한다.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한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