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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주먹으로 성공한 대박기업 대박가게
허중희 지음
황금물고기 / 2005년 8월 / 221쪽 / 9,800원
㈜남진농기 유남진 사장 - 획기적인 농업 신기술 개발로 다시 일어서다
생활의 불편함과 호기심이 발명으로 이어져
유남진 사장은 생활 속에서 불편한 점을 발견하면 좀더 편리하게 개선시키고자 노력을 기울이는 세심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그런 그가 발명에 처음 눈을 뜨게 된 것은 군대 통신병과에 배치되면서부터다. 군 복무 기간 동안 통신과 전기 기술을 배우면서 전화기와 라디오 등 당시 낙후되었던 전기 기술 가운데 개선할 점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제대 후 그는 전업사를 세우고 증폭 전화기를 발명하였다. 하지만 결국 그의 전화기는 우리나라 전기통신법상 인가를 받지 못해 상용화되지 못했다. 그 후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대규모 조개 양식장을 운영한다. 9만 평 규모의 양식장에서 키운 조개를 100% 수출하면서 한때 많은 돈을 벌기도 했다. 하지만 양식장이 바다 한 가운데 있다 보니 도적이 끊이지 않았는데, 충남 당진에서는 대낮에 배 20여 척에 나눠 탄 100여명의 도적들을 상대해 싸우다가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 후 사고의 후유증을 겪은 그는 수산업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된다.
코알라 인형 만들어 호주에 수출 시작, 최초로 ‘집게 인형’ 발명
사고의 후유증으로 쉬고 있던 어느 날, 그에게 고교 후배가 “인형을 한번 만들어 보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우연히 호주의 마스코트 코알라를 보게 된 유 사장은, 딸이 입던 잠바 속 원단이 동물의 털 색상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뜯어다가 코알라 인형 샘플 하나를 만들어 호주로 보냈다. 얼마 후, 호주에서 반응이 왔고 코알라 인형 3천 달러 어치와 강아지 인형 3천 달러 어치를 주문 받게 된다. 유남진 사장은 종업원 7명을 모집해 서울 화양동에 30평 짜리 지하실에서 인형을 만들기 시작한다. 설립 2개월 후, 그는 코알라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 착안해 팔과 다리에 집게를 넣어 나무에 매달리게 하는 ‘집게 인형’을 발명한다.
집게 인형이 나오자마자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히트 친 남진산업의 집게 인형은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 특허를 받지 못했다. 다른 인형 회사 대표 두 명이 특허 담당자에게 특허를 주지 말도록 로비를 벌였고, 당시 여우 목도리에 있는 집게와 비슷하다는 억지를 내세워 특허를 내주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수십 개 완구회사가 이 집게 인형을 모방하면서 엄청난 양의 집게 인형이 완구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유 사장은 당시 법원에 이의 제기로 상고했고, 무려 10년이 걸린 끝에 특허가 나왔다. 하지만 10년이나 지나 뒤늦게 받은 특허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와이에 갔다가 ‘허리 돌아가는 훌라 인형’에 아이디어 착안
1973년, 지하실에서 직원 7명으로 시작한 남진산업은 집게 인형의 대히트로 주문이 계속 들어오면서 불과 1년 만에 160평 규모로 공장을 확장한다. 호주를 비롯해 미국, 일본 등지에서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들었고, 설립 8년 후인 1981년에는 무려 1,130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전국에 5개의 공장을 가진 탄탄한 중소기업으로 발전했다. 또한 1,000만 불의 수출 공로를 세우며 국내 최대의 완구인형 회사로 거듭났다. 그렇게 탄탄한 성공 대로를 달리던 1980년대 초, 그는 하와이에 갔다가 관광객들이 이곳에 오면 꼭 훌라 인형을 하나씩 사가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리고 곧바로 하와이 민속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훌라 인형 개발에 착수한다. 허리를 돌리면서 깜찍하게 작동하는 훌라 인형은 하와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이듬해에 120만 달러의 수출 계약을 하게 된다. 그의 앞날은 그야말로 핑크빛 세상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사악한 인간의 사기 행위로 몰락의 길 걸어
국가에 많은 공로도 세우고 성공한 사업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그에게 어느 날 더글러스 킴이라는 재미교포가 찾아온다. 자신에게 15만 불 어치의 외상을 주면, 하와이은행에서 120만 불의 신용장(L/C)을 열어 주겠다고 제안한다. 유 사장은 은행 지점장이 책임지고 신용장(L/C)을 열어 주겠다고 하자 의심하지 않고 15만 불 어치의 물건을 주게 된다. 그런데 더글러스 킴은 물건을 가져간 뒤 잠적해 버렸다. 당시 국내에는 훌라 인형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전자부품 칩이 없어서 거액의 비용을 들여 홍콩과 일본에서 칩을 수입하던 형편이었는데, 많은 돈을 투자해 만든 훌라 인형을 사기꾼에게 몽땅 떼인 것이다. 게다가 더글러스 킴은 자기 이름으로 미국에서 특허를 받아 오히려 유 사장을 사기꾼으로 몰아 소송을 걸기까지 했다. 한 사악한 인간의 술수에 넘어가 한 순간에 10억 이상의 금전적 손실을 본 유 사장은 정신적으로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공장 2개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정리했다. 그런데 이즈음 마이클 박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변호사를 선임하여 더글라스 킴 문제를 해결해 줄 테니 자기에게 미국 판매권을 달라는 제안을 했다. 유 사장은 또 다시 그와 계약을 하고 재판을 진행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4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이클 박은 그동안 자기가 지불한 변호사 비용이 10만 불인데 50만 불의 신용장을 열어 줄 테니, 1년 동안 12회로 나누어 갚아 달라고 요구한다. 유 사장은 그 동안 애써 준 그를 철석같이 믿고 10만 불에 대한 지불증을 써 주게 된다. 하지만 마이클 박은 신용장은 열지 않고 거꾸로 법원에 청구 소송을 하여 유 사장의 부동산 3건을 압류했다. 두 사람이 쳐놓은 사기 올가미에 어이없이 걸려들면서, 1984년부터 1992년 사이에 남진산업은 전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다. 결국 유 사장은 당시 시가로 300억 원 상당의 재산을 모두 자진 매각하여 부채를 청산한 후 월세 방을 전전하는 신세가 된다. 두 번의 사기와 계략에 휘말려 분신과도 같은 회사를 어처구니없이 날린 유남진 사장. 몇몇 인간의 사악한 욕망으로 공들여 키운 회사가 어이없이 쓰러지는 좌절을 맛봐야 했던 그는,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1990년 그는 사기꾼 2명을 찾아내 자신 앞에 무릎을 꿇어 잘못을 빌게 한 후, 총으로 쏴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무작정 하와이로 떠난다. 그 뒤 하와이에서 7일 동안 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헤매던 그는 문득 정신을 차린다. ‘내가 왜 쓰레기 같은 인간들 때문에 죽어야 하느냐? 나는 사업에 실패한 것이 아니고 사기에 의해서 사업이 망한 것이므로 내 자신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일어설 수 있다.’ 정신을 차린 그는 서울로 돌아왔다.
농업 분야의 신기술 벤처기업 ‘남진농기’로 재기
정신을 추스르고 재기를 다짐하던 그는 농업 분야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의 농업 기술은 매우 낙후되어 있었다. 그는 농업 분야의 낙후한 기술을 개선할 아이템을 선정하고, 이 새로운 사업을 위해 1992년 남진농기를 설립한다. 유 사장은 평소 선진국을 다니면서 눈여겨보았던 농업 기술 분야의 4개 상품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 어느 한 가지만 성공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전국의 수많은 농촌 지역을 다니면서 잠자는 시간도 아끼기 위해 야간열차에서 잠을 자고 곧바로 아침에 일을 시작하는 생활을 이어 갔다. 이렇게 13년 동안 농업 기술을 연구한 끝에 개량형 논물꼬, 종이육모상자, 앞마당 육모기, 논뚝보강덮개, 흙톨볍씨 등을 개발했다. 이것은 기존의 낙후된 방식을 혁신적으로 개선한, 획기적인 발명 제품으로 현재 국내 시, 군청에 납품하고 있으며 미국, 일본 등 농업 선진국에도 활발히 수출하고 있다.
현재 남진농기는 광주와 김천에 공장을 건립하고 있다. 앞으로는 전국 각지에 신기술 제품을 빠르게 보급하기 위해 호남권, 경남권, 충남권, 경기 강원 지역에 각각 공장을 설립할 예정이다. 한 공장에 들어가는 투자액만 50억 원에 달해, 국가 보조금과 회사의 자금 투자로 충당하면서 차근히 진행하고 있다. 이 사업은 앞으로 10년을 내다보고 추진하는 사업이므로 무궁한 발전과 희망을 기대하고 있다.
13년 만에 이뤄 낸 결실, 남진농기를 국민 기업으로
유남진 사장은 앞으로 남진농기를 국민 기업으로 키우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즉, 국민 기업이 되어 농민들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골고루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제 좌우명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사회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입니다. 평범하지만 이 말 속에서 굳은 의지와 살아가는 힘을 얻고 있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뜻하지 않은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 있다. 여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결국 실패로 끝나는 사람도 있을 테고, 환난을 꿋꿋이 이겨내고 새롭게 도약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결국 인생의 쓰디쓴 고난을 얼마나 잘 이겨내고 지혜롭게 극복하느냐는 각자의 몫일 것이다.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 이제 밝은 햇살 속에서 기지개를 활짝 펴고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는 유남진 사장. 과거의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그의 현재는 더욱 가치 있고 소중하다. 이제 그는 희망의 축포를 쏘아 올렸고, 앞으로는 그에 값하는 무한한 성취감과 기쁨을 누릴 것이다.
수원 호텔 캐슬 이은종 사장 - “최고가 아니면 시작도 안 한다!” 맨 주먹의 호텔리어
다리 장애는 더 강한 의지와 독립심 키워
친척 잔칫집에 갔던 어머니가 방에 눕혀 놓은 갓난 아기.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 그때부터 아기는 사흘을 쉬지 않고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한다. 집에서는 사흘 밤낮으로 굿판을 벌였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그리고 아기는 자라면서 보통 아이들처럼 똑바로 걷지 못했다. 그는 학창 시절에 전교 3등을 할 정도로 명석하고 공부를 잘 했지만 다리를 절뚝거린다는 이유로 중학교에 불합격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나중에 결국 합격 처리가 되어 중학교에 진학했지만 처음으로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서러움을 느꼈다. 25세까지 학업을 마치고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그 사람의 능력보다는 외형을 먼저 따지는 사회적인 풍토 때문에 그는 취업을 할 수가 없었다. “나중에 큰 병원에서 다시 정밀 조사를 받고 수술을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지 않았어요. 남들이 보기에는 안 좋아 보이겠지만 다리 때문에 할 일을 못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왔기 때문에 크게 안타까워하지 않아요.” 세상에는 사지 멀쩡해도 자기 구실을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중요한 것은 멀쩡한 육신이 아니라 건전하고 건강한 정신과 가치관이라는 사실이다.
장애로 취업이 안 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장사 선택
마침 유통업 쪽에서 일하던 친구의 권유로 수원에 와서 슈퍼마켓을 열게 된다. 서울보다 땅값이 저렴해서 아예 땅을 구입해 그곳에 건물을 짓고 오토바이를 타고 직접 배달까지 다니며 150여 평 규모의 대형 슈퍼마켓을 알뜰히 운영해 나갔다. 수원에 온 것은, 경기도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친구를 주말이면 만나러 오다 이 지역의 발전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수원은 예로부터 갈비가 유명한 지역이다. 이 사장은 종종 거래처 사람들에게 갈비를 접대하곤 했는데 하나같이 갈비집들이 차를 타고 찾아가기도 힘들 정도로 교통이 불편하다고 느낀 그는 문득 ‘주차하기 편하고 대로변에 갈비집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올 텐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마침 슈퍼마켓을 운영하면서 건너편 가게에서 동물 사료를 팔던 이웃이 있었는데, 자주 접하다 보니 형님과 아우 사이로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자본을 대줄 테니 사업 한번 크게 해 보라고 부추겼다. 이 사장은 그 동안 번 돈과 그 사람에게 사채 2억 원을 얻어 사업을 확장한다. 1983년, 그는 객실 30여 개가 달린 5층 짜리 건물을 지었다. 위치가 수원의 동쪽에 있다고 해서 ‘동수원 모텔(이은종 사장이 처음으로 이름 붙인 '동수원’이라는 말은 어느새 수원에서 하나의 지명이 되어 버렸다. 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모텔’이라는 이름을 쓴 장본인이기도 하다)'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건물 1층에는 대형 갈비집을, 2층은 커피숍으로 만들어 숙박업과 같이 운영했다. 갈비집 앞에 넓은 마당은 잔디 정원으로 꾸며 날씨 좋을 때는 야외 정원에서도 갈비를 먹을 수 있게 했다. 또 당시 음식점 입구 문은 자동문으로 해 놓았는데, 손님들이 무척 신기해하였다. 내부 인테리어도 대형화․고급화시켰고 일류 주방장을 고용해 갈비 맛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잘 나가던 관광호텔, 넉 달만에 부도내고 도망자로 전락
누구나 찾기 쉬운 편리한 교통과 지리적 이점 덕에 날이 갈수록 손님들이 몰려들었다. 집 한 채 없던 자리에,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한적했던 곳에 갈비집을 열어 번성하게 되었고 이후 근처에는 우후죽순으로 갈비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돈을 긁어모을 정도로 갈비집은 장사가 잘 되었다. 그렇게 번 돈으로 2년 후에는 건물을 더 증축하고 관광호텔을 지었다. 그야말로 승승장구 모든 것이 잘 풀려 나갔다. 하지만 사채로 끌어 쓴 돈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초기 투자비용이 얼마나 드는지 생각지 못했던 이 사장은 결국 사채를 쓰게 되었고,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형님’이라 불렀던 사람에게 농락을 당하게 된다. 갈비집은 날로 번성하고 돈을 떼로 벌어 들었지만 그 돈은 고스란히 사채업자의 손으로 들어갔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다. 혹독히 당하고 나서 나중에야 그가 직업적으로 사채놀이를 하던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결국 장사가 잘 되는 관광호텔을 차지하려는 사채업자의 농간에 이리 저리 끌려 다니다가 부도를 내게 된다. 채권자들이 몰려오고 그에게는 지명수배가 내려졌다. 친구가 잠시 피해 있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여 급하게 짐만 싸서 무작정 떠났고, 1년 8개월 동안을 그는 그렇게 떠돌이 도망자 신세로 지내게 된다. 사업이 잘 되면서도 부도를 낼 수밖에 없어 수배자 신세가 되다니, 이은종 사장은 자살 충동을 느꼈고 소주 먹고 죽을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죽고 싶어도 분통이 나서 죽을 수가 없었다. 또 자신의 죽음으로 남은 자식들에게 피해를 줄 수도 없었다. 이 시기만 무사히 넘기기를 바랄 뿐이었다. 난생 처음 노숙도 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침 부동산 경기가 불황이라 지어서 안 팔린 아파트에 보증금 200만원에 월 7만원을 주고 들어갔다. 만약 아무 때라도 아파트가 팔리면 나가고, 또 세입자가 나간다고 하면 보증금을 바로 받기로 하는 조건이었다. 하루는 대중탕에 갔는데 일회용 면도기를 살 돈마저 없었다. 마침 다른 사람이 쓰다 버린 것 같은 일회용 면도기를 주워 쓰고 있는데, 갑자기 주인이 나타나더니 ‘왜 남의 면도기를 쓰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래서 ‘버린 것인 줄 알고 썼다고, 죄송하다’고 했더니,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면도기 하나 가지고 그렇게 무안을 주느냐’며 ‘이거 쓰라’고 이 사장에게 주는 것이었다. 이때의 일은 당시엔 비참한 기분이었지만 지금 이 사장에게는 쓰지만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파산자에서 다시 복권자로, 기업 소생시킨 의지의 기업인
그렇게 1년 8개월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1988년, 다시 호텔로 돌아온다. 그 동안 악덕 사채업자는 호텔을 삼키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호텔 자산은 200억이 넘는데 부도 액수는 15억이었다. 채권자들이 협의해서 ‘호텔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돈을 벌어서 갚으라’고 했다. 부도가 나면 블랙리스트에 올라 은행에서는 대출이 안 되었다. 당시 신용금고에서 15억을 대출 받아 채권자들에게 모두 나눠주었다. 채권자들은 주로 호텔과 관련된 협력업체로 건축 자재, 타일, 카펫, 식당의 야채, 계란, 콩나물 납품업체까지 그야말로 자잘한 곳까지 다 포함되었다. 주인 없는 호텔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는 호텔을 다시 정상화시키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 복병이 숨어 있었다. 호텔과는 전혀 관계없는 불량배들이 이미 나이트클럽을 점거해 영업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법적으로 관제인을 두고 한 달에 300만원씩 세만 내고 억대의 영업 수입을 거저먹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이은종 사장에게는 깡패고 뭐고 눈앞에 무서울 게 없었다. 악덕 사채업자에 당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조직 폭력배와 싸워야 한다는 현실이 기가 막혔다. 결국 3년 간의 지루한 싸움 끝에 폭력배들을 호텔에서 완전히 쫓아냈다.
새로 내부 수리를 하고 영업을 정상화시켜 나갔다. 은행의 부채도 다 갚고 채권자들에게 다시 신뢰를 얻기 시작했고 악덕 사채업자의 손아귀에서도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제가 대한민국 파산 7호예요. 그리고 파산되었다가 복권된 것은 국내 최초입니다. 88년도에 복권자가 되었고 2000년도까지도 복권 사례가 없을 정도로 한번 파산되면 복권되기가 힘들었어요. 부도난 기업을 재생시킨 것도 유일하고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파산되고, 다시 복권되면서 기업을 소생시킨 사람. 이은종 사장에게 지금의 성공은 그래서 더욱 값진 결실이다.
마음 고생이 있었기에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내 사업을 키웠다
수원시 팔달구에 위치한 현재의 호텔은 1996년도에 증축하여 이름도 ‘호텔 캐슬’로 바꾸고 현재까지 오고 있다. ‘규모는 작아도 실속 있는 호텔’. 호텔 캐슬은 그런 곳이다. 특히 한식, 일식, 중식 등 식음료 업장이 많이 있다 보니 요리사, 웨이터 등 직원들이 많이 일하고 있는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일자리 창출과 그 가족들 모두에게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장은 “그동안 마음고생도 많이 하고 인생의 나락까지 떨어져 보았지만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장사가 잘되었고, 무엇보다 신용이 회복되어서 더없이 기쁘다.”고 말한다. 현재 직영점을 포함해 호텔 캐슬에서 일하는 직원들만 400여 명이다. 또 백 여 군데의 협력업체까지 합치면 ‘호텔 캐슬’로 인해 일을 하고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이 수 천 명에 이른다. 이 사장은 "이들에게 고용 창출의 기회와 함께 서로가 더불어 사는 데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는 그 동안 알게 모르게 봉사의 삶도 이어오고 있다. 이미 20여 년 전부터 고향인 평택 모교에 장학금을 전달해 왔다. 그 동안 ‘은종장학회’라는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에서 장학생만 300여명이 나왔다. 또 현재 경기도 사격연맹 회장을 10년째 맡는 등 지역 봉사에도 적극적이다. 특히 사격연맹 회장으로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에는 강초현 선수를 출전시켜 은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인생을 정리하고 싶은 마무리 단계에 자신이 살아온 기록을 담은 자서전을 쓰고 싶다.’는 이은종 사장. 평탄한 길을 걷다가 어느 순간 인생의 나락에 빠져본 그에게, 그러한 경험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더욱 의미 있는 인생을 가져다주었다. 또 그것은 진정으로 ‘최고’가 되기 위한 하나의 발판이 되었고, 그 발판을 딛고 그는 지금 더 큰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모정식품㈜ 대표 이충섭 사장 - ‘묵’이 구해준 인생, ‘묵’의 제왕이 되기까지
아버지에게 배운 ‘신용’을 평생의 사업 밑천으로
유복한 집안에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충섭 사장은 남부럽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국내에서 가장 큰 볼트 공장을 운영한 덕분이다. 1960년대 우리나라에 불어닥친 전후 복구 사업과 경제개발 붐을 타고 건설 현장이면 꼭 필요한 볼트 부품은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수요가 좋았다. 당시 을지로에는 볼트를 공급하는 영업 대리점이 많았는데 얼마나 돈을 많이 벌어 들였던지 당시 대리점을 했던 사람이 지금 제주도에 호텔도 가지고 있고, 그 자손들은 지금도 가게를 물려받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이 사장에게 “네가 앞으로 살아가면서 갖춰야 할 것은 신용”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된 이 말은, 이 사장이 어려운 시절을 지내 오면서 사람들에게 신용을 쌓고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공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저희 첫째 형님은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잘해서 사업보다는 학문에 관심이 많았어요. 제가 초등학생 때 무슨 연유인지 몰라도 아버지께서 겨우 20살 밖에 안 된 둘째 형님에게 회사를 일찍 물려주었어요. 그리고 아버지는 사업에서 손을 떼고 시골로 내려가 목장 일을 하셨어요.” 아버지의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을까?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승승장구 잘 나가던 볼트 공장은 둘째 아들이 많으면서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재산이 많으니 여기저기 친구들과 사람들이 붙었고 사람들의 말에 넘어가 호기 부리듯 여기저기 투자해 재산만 날리고 술과 여자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점점 재산을 탕진하면서 아버지가 탄탄하게 일궈 놓은 회사는 5년 만에 빚만 남긴 채 망하게 된다.
재래시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묵’과의 만남
이 사장은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던 큰 형 덕분에 그도 책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왕성한 시기, 책 속의 세상이 궁금해서 학교가 끝나면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친척형이 하는 하청업체에서 7개월 동안 직장 생활을 하게 되지만 쳇바퀴 돌 듯 똑같은 조직생활이 싫어 곧 그만두고 말았다. ‘책에서 본 세상과 직접 경험한 세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밑바닥 인생을, 그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술집 웨이터, 막노동, 구두닦이, 때밀이 등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하면서 세상의 온갖 삶을 몸소 경험하게 된다. 그렇게 4년 동안 숙식을 해결하며 여러 직업을 전전한 끝에 어느 만우절날, 이 생활을 끝내기로 결심한다. 그는 그 동안 책에서 보고 느낀 것과 현실에서 직접 겪은 것에 괴리감을 느꼈고 가치관의 혼란도 겪었다.
서른 살의 그는 어떤 뚜렷한 목표와 희망도 없이 그저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성산 시장을 지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50대 부부가 용달차에서 묵을 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과 막막함은 그를 그 자리에 멈추게 했다. 다가가서 그 부부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묵 한판을 팔면 만원이 남는 장사였다. 더구나 당시 묵 장수들은 도매상에서 하루치 물건을 받아다 팔고 물건값은 나중에 지불하는 후불제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밑천이 없는 그로서는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장사 경험도 없는 데다 종전의 묵 장수들과 같은 방식으로 하면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깔끔한 이미지와 청결, 시식 코너 운영으로 대박 터트려
먼저 청결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필요했다. 더구나 먹는 음식이기에 재래시장 특유의 불결한 이미지를 청산해야 했다. 그는 먼저 손톱을 짧게 깎고 면도를 한 다음 머리에는 무스를 발라 뒤로 넘기고 말쑥한 양복 차림으로 장사를 하면서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또한 그는 묵에 함유된 도토리 중 80%가 ‘재롱이 도토리’라는 사실을 알고 여기에 착안해 제품명을 ‘재롱이 묵’으로 정했다. 같은 도토리묵이라도 재미난 이름을 앞에 붙여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마지막으로 손님들이 마음껏 묵을 시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당시에 묵을 가장 많이 팔았던 사람의 기록이 하루 27판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불과 일주일만에 이 사장이 50판을 팔면서 순식간에 기록을 갈아치웠다. 시장 통에서는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반경 100미터까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듣고서 찾아오기도 했다. 이 사장은 “그때 만해도 가짜 묵이 많아 시중에 20%만이 진짜 묵이었는데, 그 와중에 진짜 묵을 만드는 사람을 만난 것은 천운이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2년 동안 종일 서서 장사하며 과로한 탓에 디스크가 찾아왔다. 장사를 쉴 수 없어 하루에 진통제를 12알까지 먹었다. 나중엔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병원에 갔더니 디스크 판정을 받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일에 바로 수술을 했다. 수술 후 허리에 복대를 대고 보름 동안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지내야 했다.
디스크 발병, 묵공장의 횡포 등 어려운 고비마다 구해준 ‘신뢰’
“디스크 수술 후 움직이지 못했던 기간이 제가 유일하게 쉬었던 시간이에요. 허리 때문에 더 이상 노점에서 장사를 할 수가 없어 저처럼 노점 장사를 할 사람들을 모집해서 교육하는 묵 유통업 사무실을 내었어요. 모집 광고를 보고 하나 둘 사람들이 찾아왔는데 일어나지도 못하고 허리에 복대를 하고 누워서 설명하는 사람을 누가 선뜻 믿겠어요? 그런데 지금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하는 것은 찾아 온 20명 중에 6명이 이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 사장은 작게나마 6명으로 출발해 묵 판매 대리점을 열고 묵 유통업을 시작했다. 나중에는 직원이 12명으로 늘어났다. 그런데 이 사장의 대리점에서 매일 판매 기록을 갈아치우자 묵을 대주던 공장 사장이 시기를 한 나머지 이제부터는 월급제로 하자는 둥, 전분이 없어서 더 이상 물건을 대주지 못하겠다는 둥의 이상한 조건을 내세웠다. 결국 묵을 제공받지 못하자 사무실 직원들은 하는 일 없이 놀아야 했다. “거의 45일 동안 일이 없어 놀 수밖에 없었어요. 직원들이 다른 데로 갈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저에게 바둑판과 장기판 하나를 사 달라고 하더라고요.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건 한 명의 직원도 동요 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무실 밖에 나와서 저도 모르게 울었어요. 그 동안 내가 신뢰를 잃지 않고 살아왔구나, 가슴이 뭉클했어요. 그 신뢰가 있었기에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다양한 묵 제품 시식으로 마트에서도 묵 돌풍 일으켜
품질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아는 그는 결국 자본금 6천만 원을 투자해 강원도 화천에 직접 묵 공장을 세웠다. “한 12년 간 묵을 하다 보니 묵 만드는 것도 밥 짓는 것과 똑같은 원리더라고요. 좋은 원료와 깨끗한 물, 불 조절만 잘하면 잘 된 묵을 얻을 수 있는 거죠. 초보 주부가 밥을 할 때 설익을 때 있고, 푹 일을 때 있고 실수를 하잖아요. 저희 묵도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최상의 묵을 만들어냈지요.” 당시 재미있던 일은 잘못 만들어진 묵을 공장 주변 농가에 소먹이로 주었다. 그런데 하루는 소 주인이 화난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묵을 먹인 후로 통통했던 소가 살이 빠졌다는 것이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은 묵이 바로 최적의 다이어트 식품이라는 것이다. 그는 다이어트 효능 쪽으로 사업 방향을 정하고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다 또 생각한 것이, ‘왜 묵은 재래 시장에만 있고 백화점이나 마트 매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것일까?’하는 것이었다.
그는 무작정 묵을 들고 큰 규모의 슈퍼부터 백화점까지 유통업계의 식품 매입부 담당자를 찾아갔다. “딱 3일만 매장에 놓게만 해 달라”며 6개월 동안 끈질기게 찾아가서 허락이 떨어졌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났다. 그가 내놓은 묵은 하루만에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당시 제일 장사가 안 된, 모 백화점 한 지점에서 첫날만 60만원 어치의 묵이 팔린 것이다. 점점 매출이 늘더니 보름 후에는 15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백화점 측에서는 놀랄 수밖에 없었고, 결국 모정식품의 묵을 전 지점에 들여놓게 되었다. 이후 다른 유명 백화점과 슈퍼, 할인마트에서도 납품 문의가 쇄도하기에 이르렀다.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 감동을 이끌어 낸 것’이 성공 비결
이충섭 사장은 유명 대기업 회사 제품이 점유하는 식품업계에 ‘묵’이라는 한가지 아이템에만 열성적으로 파고들었던 게 성공의 한 이유라고 말한다. 그리고 묵 장사를 하면서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개발한 것이 주효했다고 한다. 그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지금도 끊임없이 묵에 대해 연구하고 다양한 제품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묵은 사양 산업이 아니에요. 경쟁력을 확보할 만한 아이디어만 있다면 사양 산업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느 분야든지 고객의 입장에서 고객 감동을 이끌어 낸다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묵’이라는 한 가지 아이템에 쏟은 열정과 신념, 그리고 정직하게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현재의 성공을 일궈낸 이충섭 사장. 그가 무일푼으로 시작해 억대 부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려운 고비가 와도 변하지 않는 열정과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서울 삼각지 원대구탕 김명희 씨 - 추억의 매운탕 맛, 서민의 입맛 사로잡은 대구탕
남편의 사업 실패로 봉천동 골목에서 음식 장사 시작
김명희 씨의 첫 음식 장사는 30여 년 전, 남편의 거듭된 사업 실패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되자 아이들이라도 굶기지 않기 위해 골목길에 세를 내어 작은 식당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동네 작은 골목 어귀에서 해장국, 돼지갈비, 삼겹살 등 이것저것 되는 대로 메뉴를 바꿔 가면서 장사했지만 영 신통치가 않았다. 동네 골목길이다 보니 항상 지나다니는 사람들만 다니고 메뉴도 흔한 것이라 눈길을 끌지 못했다. 결국 4년 동안 봉천동에서 이것저것 메뉴만 바꾸고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했던 메뉴가 보신탕이었는데 당시에 보신탕 붐을 타고 그나마 장사가 제법 돼서 어느 정도 자금을 마련하게 되었다.
시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대구탕’ 한 가지 메뉴로 특화
자금이 모이자 이제는 동네가 아닌 시내 쪽으로 가서 좀더 특화된 메뉴로 장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금의 삼각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삼각지에 가게를 마련한 후 생각한 메뉴가 ‘대구탕’이었다. 시집와서 시어머니가 끓여 주던 대구탕. 그 독특한 맛을 잊지 못했던 그는 서울에서도 이 대구탕 맛을 선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전골냄비에 즉석에서 끓여내는 대구탕을 개발, 한국인의 입맛에 맞는 독특한 맛을 선보였다. “처음부터 가게가 잘 되었던 것은 아니에요. 당시에는 대구탕이 일식집에서나 파는 메뉴로 인식돼 있었고, 식당 위치도 후미진 곳에 있어서 그야말로 파리만 날렸죠. 왜 첫 손님이 중요하다고 하잖아요? 저는 지금도 저희 집에 온 첫 손님들을 잊지 못해요.”
대구탕집을 찾아온 첫 손님은 군복 입은 군인 3명이었다. 당시 삼각지 부근에는 육군본부가 있어서 군인들이 많았는데, 어느 날 이 골목을 지나가던 군인 3명이 우연히 이 집에 들른 것이다. 군인 셋이 둘러앉아 대구탕을 먹으면서 ‘예전에 못 먹어 봤던 맛이다. 독특하고 맛있다’며 칭찬을 하고 돌아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 군인들이 다른 동료 군인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군인들 사이에 ‘독특한 대구탕 맛과 인심이 후한 식당’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건장한 군인은 대개 대식가들이 많아서 공기밥 추가가 많았는데 이 집에서는 처음부터 밥 가격을 탕 가격에 포함해서 밥을 추가해도 따로 밥값을 받지 않았다. 밥을 큰솥에 담아 놓고 더 먹고 싶은 사람은 주걱으로 얼마든지 퍼 가도록 했다. 얼큰하고 맛있는 대구탕과 무제한으로 밥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인심이 후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점차 단골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후 대구탕집은 군인들로 시작해 소문이 꼬리를 이어가면서 손님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가게 안에 있는 테이블 8개로는 부족해서 식당 앞 길가에 평상까지 펴놓고 장사를 해야 할 정도로 성황이었다.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한 주인의 횡포로 세든 가게에서 쫓겨나기도
이때 첫 시련이 닥쳤다. 남이 잘 되는 걸 못 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어느 정도 가게가 자리를 잡을 무렵, 세를 준 집주인의 횡포로 가게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당시 중국집을 운영하던 가게 주인이 잘 되는 이 식당을 시기해서 당장 가게를 비우라고 엄포를 놓았던 것이다. 당장 가게를 비우지 않는다고 덩치 큰 남자들까지 고용하여 영업 중인 가게 안에 막무가내로 들어와 모래를 퍼부었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당할 수밖에 없었다. “가진 거라고는 이 식당 하나뿐인데 당장 나가라면 어디로 가야 할지 집 없는 설움을 톡톡히 느꼈습니다.”
음식을 매개로 따뜻한 정을 나누는 사람들
가게에서 쫓겨난 김명희 씨는 마침 비어 있던 옆자리의 50년 된 낡은 건물, 바로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가게 자리는 바뀌었어도 그동안 주인아주머니의 후한 인심과 얼큰한 대구탕 맛을 잊지 않고 찾아오는 단골손님과 소문을 듣고 온 손님들로 가게는 여전히 번성했다. 또한 대구탕 맛이 얼큰하고 독특하다는 소문이 나면서 지방에서도 손님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이 집에서는 생선 재료의 신선도를 위해 아침 일찍 당일에 물건을 구입해서 그 날 소비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손님들에게 최상의 재료로 만든 음식을 제공하고 있다. 자리가 없어 줄을 선 손님은 혼자 와서 먹어도 친절하게 1인분의 대구탕을 내온다. 당시 근처에서 구둣방을 했던 한 아저씨는 “음식을 먹고 나가는 손님들이 오히려 주인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식당은 아마 이 집밖에 없을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손님들을 잘 만나서 잘 될 수 있었다.”고 손님들에게 공을 돌리는 김명희 씨는 “가게의 수익은 모두 손님들 덕분이므로 음식 재료도 제일 좋은 것으로 쓰고, 밥이나 반찬은 무제한으로 제공하는 등 최상의 음식과 서비스로 손님들에게 다시 투자한다”고 말한다. “지금이 있기까지 저희 집을 군인들이 살려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당시 젊은 장교였던 분이 지금은 대장이 되어 온 가족과 함께 찾아와요. 그런 분들을 보면서 저희 집에 오신 분들을 단순히 손님과 주인관계가 아니라 음식 하나로 맺어진 인간적인 관계,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끈끈한 정을 느낍니다.”
“돈 벌었다고 편히 살려고 하지 마라! 항상 몸을 놀려라!”
20여 년 동안 대구탕 하나를 팔아 번 돈으로 8년 전에는 근처에 작은 건물도 마련했다. 그리고 현재는 주변 사람들의 요청으로 프랜차이즈(대구탕 분점)를 준비하고 있다. 그 동안 돈도 많이 벌었고 부동산도 소유했고 이제 편히 살만한데도 가족들은 아직도 식당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새벽부터 생선과 야채 재료를 직접 골라서 사고, 서빙도 하고 손님들을 직접 맞는다. 지금도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가게는 성황이다. 프랜차이즈를 시작하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대구탕 맛을 알리고 음식 하나로 작은 기쁨을 주기 위해서다.
삼각지에 대구탕 집을 연 후, 800원으로 시작한 대구탕 가격은 현재 6,000원이 되었다. 이 6,000원은 6년 동안 올리지 않고 고수하고 있는 가격이다. 그 동안 최상급 생선 재료와 야채 등 원가가 올랐지만 음식 가격은 쉽게 올리지 않고 있다. 박리다매로 얻은 이익을 손님들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는 셈이다. ‘오늘 내오는 대구탕은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은지, 맛은 달라지지 않았는지’ 항상 점검해 본다. 수십 년 동안 매일 한결같이 내온 대구탕이지만 지금도 재료를 계량하고 꼼꼼히 맛을 비교한다. 식당이 잘 된다고 자만하지 않고 처음 시작했을 때의 마음가짐을 잊지 않는 것이다. “힘 안들이고 번 돈은 금세 힘 안들이고 나간다.”고 말하는 김명희 씨. “좀 살만해졌다고 편히 살려고 하지 마라! 항상 몸을 놀려라! 안 쓰면 병드는 게 몸이다. 또 당장 눈앞의 이익을 따지지 말고 손님들의 이익을 위해 일해라!”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온 가족이 힘을 합쳐 땀과 눈물로 일궈낸 삼각지 원대구탕. 이 집을 보면서 ‘인내는 쓰지만, 그 열매는 달다’라는 말이 보다 절실히 와 닿았다.
오징어 불고기 전문점 ‘오첨지’ 안성의, 신금순 부부
- 정이 오가는 시끌벅적한 식당에서 먹는 ‘불타는 오징어’ 맛!
친정 도움 안 받고 보따리 행상으로 생계 꾸려
장남에게 시집와서 서울 봉천동 8평 짜리 셋집에서 시어머니, 시동생들과 함께 살아야 했던 신금순 씨. 남편의 봉급만으로는 가족이 생활하기가 빠듯해 일찌감치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어머니는 시집보냈으니까 형편이 어려워도 너희들이 알아서 살라고 하면서 일절 도움을 주지 않았어요. 굶든 말든 너희들 능력대로 살라고 하는데 정말 몇 년만에 친정에 가도 십 원 한푼 얻지 못했어요. 오기가 생기니까 이를 악물고 더 열심히 살게 되더라고요.” 당시엔 어머니가 야속하고 서운한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것은 살아가는 데 약이 되었고 이제는 어머니를 이해한다고 한다. 신 씨는 물건을 받아 보따리 행상을 시작했다. 당시에 피아노, 냉장고, 식탁 등을 덮는 천 커버가 인기였는데, 그것을 받아다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팔고 영등포 시장 앞에서는 좌판을 깔고 팔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다.”고 말하는 신금순 씨. 그 동안 커버 장사, 옷 장사 등 동네마다 다니면서 보따리 행상으로 고생하다가 드디어 시집 온지 3년 만에 봉천동 달동네에서 신림동의 번듯한 기와집으로 분가할 수 있었다. 고생 끝에 모은 돈과 주변에서 융통해서 처음 마련한 내 집. 너무 기쁘고 설레서 한동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음식에 ‘음’자도 모르고 시작한 한식당
옷 행상을 하면서 이곳 저곳을 방문하다 알게 된 음식점이 있었다. 서울 염창동의 제법 넓은 한식집이었는데 정작 주인 여자는 장사에는 별 관심이 없고 사치와 멋 부리는 데만 신경을 썼다. 주인 여자한테 옷을 팔러 식당에 가보면 식사시간인데도 넓은 홀 안에 고작 한두 테이블에만 사람이 앉아 있었다. 결국 파리만 날리고 문을 닫으려는 참에 주인 여자가 갚아야 할 외상값도 있고 해서 싼값에 그 식당을 인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인수한 식당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앞이 캄캄했다. 육개장, 돌솥밥, 해물탕 등 10가지가 넘는 다양한 한식 메뉴를 내놓고 싼 가격으로 새롭게 문을 열자 주변에 있는 공장, 업소로부터 배달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운이 따랐는지 처음 시작한 식당임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성황을 이루었다. 하루하루 손님들이 몰려오니까 ‘이게 장사인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낮으로 손님들 받고, 배달 나가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 없이 일했다. 장사는 그렇게 잘 되었지만 갈수록 몸과 마음은 지쳐 갔다. 더욱 견디기 힘든 건 바쁜 와중에도 눈에 밟히는 갓난 아들이었다. 딸만 내리 셋을 낳고서야 막내아들을 얻었는데, 그 젖먹이 아기를 떼어놓고 하루 종일 떨어져 장사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신림동에 매콤한 오징어 불고기 떴다!’ 손님들 몰려와
‘돈도 벌고 자식도 키울 수 있는 장사를 하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작한 지 1년 만에 시누이에게 가게를 넘기고 집 근처인 신림동에 가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1년 남짓 한식집을 운영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었다. 12가지 한식 메뉴를 하다 보니 다른 음식점들과 크게 차별되는 것도 없었고, 더 큰 문제는 안 팔리는 메뉴의 재료가 나중엔 썩어서 버리게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장사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뭔가 색다른 한 가지, 전문적인 메뉴를 찾아야 했다. 시어머니가 평소 오징어와 낙지 등 매콤한 음식을 잘 했는데 이것을 전문 요리로 만들어 식당을 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징어, 낙지 이 두 종류만 해보자! 이걸로 죽으면 죽고 살면 살자!” 신금순 씨는 전국 곳곳에 맛있다는 음식점을 모두 다녀 보고, 먹어 본 음식에 대해 평가하고 기록하면서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또 매일 집에서는 시어머니와 함께 오징어, 낚지 요리를 이리저리 만들어 보고 실험하기를 반복했다. 수 차례의 시행착오 끝에 드디어 16가지의 양념이 들어간 오징어 불고기의 맛을 내는 양념장을 개발했다.
마침내 1987년 신림동 골목에 ‘오첨지’라는 오징어 불고기 전문점을 냈다. 당시엔 이곳이 외진 곳에 자리해 있었고 순대타운도 형성되기 전이라 사람들의 발길이 뜸해서 한동안 고전했다. 그러다가 한두 명씩 사람들이 오고, ‘오징어 불고기가 독특하고 맛있다’는 입소문이 이어지면서 손님들이 꾸준히 몰려왔다. 지금은 줄을 서서 20~30분 기다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저녁 시간에는 사람들이 몰려와 식당 안은 그야말로 도떼기시장처럼 시끌벅적하다. “우리집은 시끌시끌하니 완전 시골 장터 같아요. 먹고 나가는 사람들, 기다리다 들어오는 손님들로 늘 북적거리죠. 그야말로 서울 사람이 시골 장터 같은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곳이죠. 막상 이 분위기에 적응하다가 보면 삭막함이 사라지고 정말 사람 사는 기분을 느낄 수 있어요.” “우리집의 불타는 오징어가 맛있어서 음식 맛 못지 않게 우리집을 찾은 손님들이 ‘오첨지에 갔더니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하고 엄마 같고 푸근해서 또 오고 싶더라’라는 말을 듣게 해야죠.” 이 집의 대박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석쇠 판에 지글지글 끓는 오징어 불고기는 평소 맛보기 힘든 이 집만의 단일 메뉴로 이미 그 맛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주인 부부의 격의 없는 편안함과 친근감이다.
용산 영양족발 허명욱, 양정남 부부 - 12평 가게에서 족발 하나로 이뤄 낸 성공
첫 상경 후, 친척집 단칸방에 6식구가 얹혀 살아
허명욱 사장은 고향인 순창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시골에서도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일을 많이 했다. 18살 때 한 동네 소꿉 친구였던 양정남 씨와 결혼했는데 넉넉지 못한 살림에 형편은 더욱 어려웠다. 시골에서 부부가 밤낮으로 일에 매달렸지만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만 만족해야 했다. 그러다가 양정남 씨 동생이 서울 서부이촌동으로 이사해서 살았는데, 동생에게 부근에 있는 식당에 취직자리를 부탁하게 되었다. 서울의 한식집에 취업이 되자 양정남 씨는 혼자 올라와 식당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했다. 가족과 떨어져 아내가 먼저 서울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무렵, 큰아들이 서울의 한양대학교 공대에 합격했다. 겸사겸사해서 시골집을 정리하고 나머지 가족들이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 마침 당숙모가 용산 원효로 쪽에 살았는데 그 집에 방 하나를 빌려서 여섯 가족이 살게 되었다. 그야말로 무일푼으로 서울 친척집에 얹혀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4개월을 당숙모네 단칸방에서 살다가 좀더 넓은 지하방을 구해 이사했다. “당장은 대학생이 된 큰아들과 고등학생 등 아이들 학비를 대줘야 했기에 제대로 된 집을 마련할 형편이 안 되었어요. 집이 깊은 지하라서 여름에 장마가 오면 지하로 들어오는 물을 퍼내기 바빴고, 습기와 곰팡이 냄새로 안에서 생활하기가 힘들었어요. 또 겨울엔 난방도 제대로 안 돼 무척 추웠고 잠자리도 불편해 아이들도 고생 많이 했지요.”
일했던 족발집에서 신뢰 얻고 가게 인수
양정남 씨는 처음에 한식집 한 곳에서 일하다가 욕심이 생겨 한 군데 더 일할 식당을 알아보았다. 마침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한 족발집에 들어가 “일 좀 할 수 있냐”고 물었고 “전화번호 하나 적어 놓고 가라”고 해서 연락처를 남기고 나왔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족발집에서 연락이 와서 이제 두 군데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성실하고 야무지게 일을 하니 점차 사장에게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 사이 나머지 가족들이 서울에 올라왔고 허명욱 사장은 서울에서 막노동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 때 족발집 사장이 중국에서 사업을 한다고 이들에게 가게를 맡아서 하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이때부터 부부가 남의 식당에서 일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생각에 가게를 맡아 운영했다. 서울 온 지 2년도 안 돼 89년에 가게를 맡게 되었고, 4년을 그렇게 장사한 후 자금이 모아지자 93년에 권리금 2800만 원을 주고 가게를 인수했다. 나중에 이전의 족발집 사장은 “장사가 잘 되는 족발집을 동생도 있고, 친척도 많은데 왜 남한테 넘겨줬냐?”는 핀잔을 들었다고 한다. 또 허 사장 자신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시기 아닌 시기성의 그런 말을 많이 들었다. 비록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이지만 오랜 기간 함께 하면서 그만큼 인간적인 정과 신뢰를 쌓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연히 방문한 신문기자에 의해 매스컴에 처음 소개
지난 97년, 근처에 있는 피부과 원장에게 한 후배가 찾아왔는데 “이 근처에 맛있는 집 있냐?”고 해서 피부과 원장이 “규모는 작아도 맛있는 족발집이 있다. 온 김에 한번 먹어 보고 가라.”고 해서 이 집을 찾았다. 그런데 이 사람이 족발을 먹어 보더니 “족발에 뭐를 넣어서 삶느냐?”는 등 족발에 대해 꼬치꼬치 물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와서 사진을 찍어 갔다. 그러더니 3일 후에 조선일보에 맛있는 집으로 소개가 된 것이다. “매스컴의 위력이 굉장히 크더라고요. 신문에 나간 후 손님들이 더 많이 찾아왔고, 그 후 다른 신문과 방송에도 나가자 정말 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어요.” “2002년 월드컵 때는 낮이고 밤이고 주문이 끊임없었고, 하루 분량의 족발이 금방 동이 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어요. 요즘도 지방에서 우체국 택배로 족발을 보내 달라는 전화가 오고, 또 찾아오는 길을 물어보는 전화도 많이 오고 있어요.” 지난해에도 방송이 한번 나갔고, 밤 10시면 벌서 그 날 만든 족발이 다 팔려서 나중에 오는 주문은 받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초심과 한결같은 정성으로 불황에도 끄떡없어
“요즘 음식점도 많이 문을 닫고 실업자도 많잖아요. 저희 집에 상추를 대주는 거래처 사람이 얘기하는데, 한 갈비집에 예전엔 하루 열 박스씩 상추가 들어갔는데 요즘엔 하루에 한두 박스만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그 정도로 장사가 안 되고 불황이라는 이야기죠.” 허 사장은 “장사가 안 된다고 불황 탓으로만 돌리지 말고, 분명 장사가 안 되는 이유가 있으니 그 원인을 찾아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늦게나마 고생한 아내에 대해 따뜻한 배려를 하고 있는 허 사장은 또한 자식들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도 열심히 공부하고 부모 말 한번 거역한 적 없는 착한 아이들이 있었기에 마음은 누구보다 든든했어요. 그래서 힘든 줄 모르고 열심히 일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 소망이 있다면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손자 손녀들이 아무 사고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력이 다 할 때까지 일 하다가, 나중에 아들에게 가게를 물려줄 생각이에요.”그는 그런 후엔 아내와 함께 산에도 다니고, 여행도 다니면서 그 동안 못다한 여가를 즐길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