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 ―홍성 지역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복신굴, 상여바위 전설을 중심으로―
최운식(한국교원대학교 교수)
Ⅰ. 머리말
충남 홍성군 장곡 지역에는 최치원의 아들과 딸이 성 쌓기 내기를 하여 쌓았다는 「석성산성(石城山城)과 학성산성(鶴城山城) 전설」과 「복신굴 전설」, 「상여바위 전설」 등이 전해 온다.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오누이 힘내기 전설」과 같은 계열인 홍성의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을 「복신굴 전설」, 「상여바위 전설」과 관련지어 보면, 7세기에 있었던 백제 부흥운동 실패의 슬픈 역사를 상기하게 한다. 전설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구성되기도 하고, 자신의 사실성과 진실성을 보강하기 위해 역사와 결합하기도 하기 때문에 역사와 관련이 깊다. 역사적 사실과 전설이 결합할 경우, 역사는 사실이 그대로 후대에 전승될 것을 생각하고 기술되기 때문에 수용자의 기대나 보상, 문학적 굴절이나 윤색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설은 사실이 전승 집단의 의식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에 수용자의 사상, 감정, 기대, 보상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홍성의 두 산성과 그 주변 지역의 전설을 살펴보면, 백제 부흥운동을 보는 민중들의 의식이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이와 관련된 연구는 없었다. 필자는 이 지역을 답사하면서 채록한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과 「복신굴 전설」 및 「상여바위 전설」의 내용과 증거물의 특성을 알아보고, 이 전설이 지역적 특성 및 역사적 사실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를 살핀 다음, 이와 관련지어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을 알아보려고 한다. Ⅱ. 증거물의 특성과 전설
이 지역에 전해 오는 각 전설 증거물의 소재지와 특성 및 전설의 내용을 필자가 답사하고 채록한 내용, 문헌의 기록을 통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에는 있는 석성산성은 백제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여양산성(驪陽山城)이라고도 한다. 홍성군 장곡면과 청양군 비봉면의 경계지에 위치한 장곡면 산성리의 양성중학교 뒤편으로 표고 약 240m에 달하는 산이 있는데, 여양산성은 이 산 정상 부의 두 봉우리를 포함하는 포곡식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의 둘레는 약 1,200m에 달하는 대규모의 석축(石築) 산성이다. 이 산성에 대하여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양산성(驪陽山城)은 석축(石築)이며, 주위는 6,047자이고,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폐해 버렸다.
여양폐현(驪陽廢縣)은 본읍 남쪽 37리 지점에 있다. 여(驪) 자는 여(黎)로도 쓴다. 본래 백제의 사시랑현(沙尸良縣)인데, 사라현(沙羅縣)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에 신량(新良)으로 고쳐 결성군(潔城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현종(顯宗) 9년에 본주(本州)로 붙였다.
위 기록을 보면, 지금의 홍성인 홍주목의 남쪽 37리 지점에 여양현이 있고, 그곳에 여양산성이 있다고 한다. 여양현은 백제 때는 사시량현, 신라 때는 신량으로 결성군의 속현이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여양산성의 축조 시기는 백제 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다. 석성산성에 관해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석성산성의 성벽은 표고 240m의 산 정상부분 남쪽과 북쪽의 높은 두 개의 봉우리를 감싸는 포곡식의 형태로, 대부분 석축으로 쌓았다. 성의 최고봉에 달하는 남쪽 봉우리에서 동쪽 벽과 북쪽의 높은 봉우리까지는 암벽과 가파른 자연 지세를 최대한 활용하였으며, 북쪽 벽과 서쪽 벽은 자연석의 석재를 막쌓기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석축의 대부분은 거의 붕괴되어 본래의 모습을 잃고 있는데, 서쪽과 북쪽의 일부분에는 1m 내외의 성벽이 남아 있기도 하다. 성 안에는 동쪽에 형성된 계곡 부분에 평탄지가 넓게 형성되어 있고, 현재에도 우물지가 1개소가 남아 있어 건물지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문지(門址)는 지형상 동쪽과 서쪽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성 안에 있는 건물 터에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발견되었다. 여기서 발견된 기와에 ‘사시랑(沙尸良)’, ‘사라범초(沙羅凡草)’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그 기와가 백제 말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음을 말해준다. 석성산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학성산성(鶴城山城)이 있는데, 이에 관해 간략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홍성군 장곡면 산성리의 양성중학교와 반계 초등학교의 사이로 서당골이 있는데, 학성산성은 표고 210m의 서당골 뒷산 정상 부에 성 둘레 약 1,000m로, 포곡식으로 축조되었다. 성벽은 표고 210m의 산 정상 부에서부터 북쪽을 향하여 꺾여 내려간 능선을 따라 축조되어서 큰 계곡을 감싸고 있다. 동쪽 벽과 남쪽 벽의 경우 잔존 상태가 양호한데, 자연할석을 면을 맞추어 쌓았으며, 높이는 약 3m 가량 되었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아랫단에서부터 약간씩 안으로 들여쌓아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안쪽은 잡석을 채워 넣었다. 남쪽 벽은 일부에서 협축의 흔적이 보였으며, 그 폭은 약 3~4m 가량 된다. 북쪽 벽은 산 아래의 평탄한 곳까지 쌓았는데, 대부분 붕괴되어 원형을 잃고 있다. 한편 성 안에는 계곡 부분에 평탄한 곳이 거의 보이지 않고, 단지 서남쪽 벽 부근에 조그만 평지가 있을 뿐이다. 유물은 수습하기가 어려웠는데, 서남 벽 부근에서 청자 조각을 수습하는 정도였다. 석성산과 학성산의 낮은 자락이 만나는 곳을 잘라 614번 도로를 내었는데, 이 도로 남쪽의 논 가운데에 가로 1.5m, 세로 2.5m, 높이 1m쯤 되는 돌이 있다. 이를 ‘한치마석(嫺致摩石)’이라고 한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및 한치마석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옛날 월계리 쌍계에서 최치원 선생이 살으셨다고 합니다. 그 당시에 최치원 선생의 부인이 나소조(羅小祖)인데, 남매를 두고 지냈다 합니다. 그런데 마침, 최치원 선생의 부인 나소조께서, 딸과 아들이 성 쌓기를 하고, 성을 늦게 쌓을 경우에는 생사여탈을 내기를 했답니다. 그래서 나소조의 아들은 석성산(石城山城)을 쌓고, 딸은 학성산성(鶴城山城)을 쌓게 됐는데, 현재도 보면은 석성산성이 한 800m가 되고, 학성산성은 좀 짧습니다. 그런데, 성을 쌓다 보니까, 딸이 성을 먼저 쌓는다는 얘기여. 그러면은 아들이 죽게 돼서, 어떻게든지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월계리 용못에서부텀 나소조, 어머니께서는 팥죽을 쒀 가지구 왔어요. 팥죽을 쒀 가지구 와서 딸 보구서 배가 고픈데 먹구서 하라는 거유. 그래서 마지막에 문초석(門礎石)을 놓을 자리에 놓을 돌을 치마에 담아 왔다는 얘기유. 가지구 가다가 팥죽을 먹고 설사하는 바람에 그걸 놓쳤어요. 그 바람에 아들이 성을 먼저 쌓아 가지고, 딸은 죽게 됐대유. 그래서 인저, 그 무덤이 어디냐? 광성리 참뱅이에 적석총(積石塚)이 있습니다. 그 적석총이 있는데, 그러구 보니까, 아무리 딸이 죽었어도 남매간에 근심이 돼 가지구 오래 살지는 못했다는 얘기유. 그래서 적석총이 세 개가 현존하구 있어요. 그런데 그 현존하는 장소는 오서산 내원사부터 용잿날로 한껏 내려오는, 용잿날의 중간 지점, 말하자면 남산재하고 용잿날하고 중간 지점에 적석총 3기가 있습니다. 그 적석총 3기는 하나는 나소조, 나소조의 아들, 나소조의 딸, 그렇게 됐지요. 여동생이 먼저 죽고, 오빠는 나중에 죽어서 묻히고, 제일 나중에, 남매가 그렇게 죽고 보니까, 일이 상당히 어렵게 됐을 거 아닙니까? 어머니도 죽어서 묻혔지요. 치마에 담아 가지고 가던 돌을 ‘한치마석(嫺致摩石)’이라고 하는데, 그 돌이 지금 석성산하고 학성산성의 중간 지점 논 가운데 있어요. 행정 구역은 장곡면 산성리지요. 학성산도 산성리이고, 석성산도 산성리인데, 그 중간에 있어요. 그 근처에 일명 ‘칼바위’라고 있어요. 학성산성의 동문 쪽, 그리고 석성산성의 북문하고 마주보는 그 사이에 한치마석이 있어요. 그러니깐 나조소의 딸이 마지막, 학성산의 남문지(南門址)의 문초석(門礎石)을 가지고 가다가 놓친 바위가 한치마석이예요.
2. 복신굴
홍성군 광천읍 소재지의 동남쪽에 있는 오서산의 북쪽 8부 능선 지점에 크고 웅장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는 높이가 사람 키의 50배쯤 된다 하여 ‘쉰 길 바위’라고 하는데, 그 밑에 장정 2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있다. 오서산 내원사에서 동북쪽으로 3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이 굴은 행정 구역 상 장곡면 광성리에 속하는데, 동북쪽으로 300m 지점에 우물도 있다. 굴의 입구는 높이는 213cm에 폭이 386cm이고, 굴 안은 길이 532cm에 폭이 386cm이다. 굴 안의 면적은 약 12평 정도 된다. 이 굴을 이 지역 사람들은 ‘복신굴’이라고 한다. 이 굴은 무속인들이 즐겨 찾으며 기도하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지금은 보령시 주포면에 사는 무속인 김월례씨가 주로 관리하고 있다. 이 굴과 관련된 이야기를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오서산의 팔부 능선쯤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쉰 질 바위’라고 해요. 그 이름이 왜 그런가 하고 조사해 봤더니, 쉰 질, 충청도 사투리로 쉰 발. 그래서 쉰 질 정도 된다는 과장된 얘기죠. 바위가 높고 크다는 그런 뜻으로 바위를 ‘쉰 질 바위‘라고, 이렇게 이름 지어서 전해 내려오는 것 같아요. 그리고 쉰 질 바위 밑에는 어른들이 열댓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커다란 석굴이 있는데, 지금은 그 석굴에서 무속인 들이 와서 기도를 하는 기도 터로 이용되고 있거든요. 이 석굴이, 어떻게 이 쉰 질 바위가 많이 부각이 됐느냐 하면, 이 주류성에서 백제 부흥 운동을 할 때, 그 부흥군의 지도자 중에 승려인 도침, 복신 장군, 풍왕, 이런 분들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 분들이 단결해서 부흥군의 위세가 상당했었고, 금방 백제를 되찾을 수 있는 정도까지 위세가 대단했는데, 차츰 지도자들이 분열되는 바람에, 백제 부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마지막에 나당 연합군에게 망했다는 그런 백제 부흥군의 역사가 있는데, 그 풍왕에 의해서 살해된 복신 장군이 그 석굴 속에서 살해됐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복신 장군이 칭병하고, 거기 석굴 속에 있는데, 그 때 풍왕이 문병한다고 와서 복신 장군을 살해했다는 얘기가 전해옵니다. 기록에도 있대요.
3. 상여바위
석성산의 능선에 상여(喪輿)를 연상하게 하는 큰 바위가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여바위’라고 한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상여바위는, 양성중학교 뒷산에 석성산에 있는데,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이 석성산성이 옛날 백제가 망하고 부흥운동을 할 때, 그 부흥운동의 본거지였던 주류성이라고 합니다. 그 정상 부근에 상여같이 생긴 바위가 하나 있는데, 상여바위라고 사람들이 그렇게 이름지어 부르고, 거기에 전해지는 얘기는 옛날 백제 부흥군과 관련된 얘기들입니다. 이 전설의 내용은 옛날 노인들이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날이 궂을 때는 이 산 정상 부근에서 사람들의 통곡 소리도 들려오고, 상여 지나가는 소리, 이런 소리가 들렸다고 그래요. 그리고 어떤 분들은 잠을 잘 때, 꿈속에서 옛날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창을 들고, 그 산이라든가 이런 곳에서 막 뛰어다니는, 전투하는 이런 모습의 꿈도 꾸고 했다는 그런 얘기가 있어요. 그런데 상여 소리라든가 사람들의 울부짖음 소리, 또 꿈에서 보는 이 옛날 군인들의 모습들이 왜 전설로 내려왔느냐 하는 이런 해석을 향토 사학자 분들이 말씀하시기를, 이 곳에 옛날에 백제가 망하고 부흥운동을 할 적에 지도부들의 분열로 인해서 실패로 끝났는데, 그 때 실패로 끝난 한이 석성산 정상에 있는 그 바위에, 그 바위라는 구체물을 통해서 전설로 굳어져 전해져 내려오는 게 아닌가, 이런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위에 적은 세 전설 중 (1)의 두 산성 전설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오뉘 힘내기 전설」과 대체로 비슷한데, 다음의 세 가지가 다르다. 첫째, 성 쌓기 내기를 하는 오누이와 어머니가 신라 말의 대 문장가 최치원의 아들과 딸 및 아내로 되어 있고, 세 사람의 무덤인 적석총(積石塚) 3기가 남아 있다. 둘째, 다른 「오누이 힘내기 전설」에서는 대개 오빠는 서울을 다녀오고 여동생은 성을 쌓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위 이야기에서는 오누이가 각각 성 쌓기 내기를 한다. 셋째, 누이동생은 어머니의 방해로 성의 문초석(門礎石)을 놓지 놓지 못하여 내기에 지고 말았다 하여 내기에 진 사연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였다. 전설 (2)와 (3)은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와 관련된 전설로, 이 지역에만 전해 오는 전설이다.
Ⅲ. 전설과 사실(史實)의 관계
위에 적은 세 전설 중 (1)의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은 내용 중에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된 부분이 없다. 그러나 (2)의 「복신굴」과 (3)의 「상여 바위」 전설은 백제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게 된 일과 그 결과에 대한 민중의 의식을 증거물과 관련지어 설명하고 있다. (2)와 (3)은 (1)을 백제 부흥운동 실패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해석하게 하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여기서는 이들 세 전설이 역사적 사실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비유적 성격이 짙은 전설 (1)을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 보려고 한다.
1. 최치원의 가족과 적석총(積石塚)
「성 쌓기 내기 전설」은 성 쌓기 내기를 하는 오누이와 어머니가 신라 말의 대 문장가 최치원의 아들과 딸 및 아내로 되어 있고, 그 무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알아보겠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최치원의 생애를 간단히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최치원은 신라 말의 대 학자요 문장가로, 자는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고, 시호는 문창후(文昌侯이다. 경주 사량부(沙梁部)에서 헌안왕 1년(서기 857년)에 태어났다. 12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18세에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다. 그는 24세에 황소(黃巢)의 난 토벌대장인 고병(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뽑혀 전장에 나가 황소를 치는 격문(檄文)을 썼는데, 그 격문은 문장이 매우 뛰어났다고 한다. 28세 때인 884년에 귀국하여 뜻을 펴려고 하였으나, 국내에는 그를 의심하고 꺼리는 사람이 많아 그 뜻이 용납되지 않았다. 그는 대산군(大山郡) 태수(太守)와 부성군(富城郡) 태수를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경치 좋은 곳을 찾아가 조용히 지내면서 글씨 쓰기와 사서 공부에 힘쓰는 한편, 풍월을 읊는 것으로 날을 보냈다. 그가 주로 거처한 곳은 경주의 남산, 영주의 빙산, 협천의 청량사, 지리산의 쌍계사, 마산의 별야 등이다. 그는 만년에 거처를 가야산 해인사로 옮기고, 숨어 지내다가 여생을 마쳤다. 그는 887년에 왕명으로 「진감선사대공탑비명(眞鑑禪師大空塔碑銘)을 지었는데, 하동 쌍계사에 있다. 국보 47호인 이 비명은 문장뿐만 아니라 글씨도 최치원이 직접 쓴 것으로, 최치원의 친필이 전해오는 유일한 비명으로 사료적 가치도 높다. 쌍계사 입구에는 두 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두 바위에는 글자의 세로 길이가 1m에 달하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왼편 바위에는 ‘쌍계(雙磎)’라 새겼고, 오른편 바위에는 ‘석문(石門)’이라 새겼는데, 이 글씨는 최치원이 887년에 쓴 것이라고 한다. 충남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에는 최치원이 썼다고 하는 금석문이 있는데, 그 내용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홍성군 장곡면의 최북단에 위치한 월계리의 용못 마을에는 최치원이 각서한 금석문으로 전해지는 여러 글귀들이 남아 있다. 확인되는 각서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단응정립여진관(端凝挺立如眞官) 진윤삭성여규찬(縝潤削成如珪璨)(엄숙하게 정립함이여, 빛나는 관작이 로다. 치귈한 깍음질이여, 영롱한 큰 홀이로다. : 글자의 크기는 7㎝). “용암(龍巖)(글자의 크기는 7㎝) 옥룡암(玉龍巖)(글자의 크기는 8㎝) 취석(翠石)…영롱(玲瓏)…(두 줄로 14자 이나 4자만 확인됨 : 글자의 크기는 6㎝) 쌍계(雙溪)(글자의 크기는 85㎝) 최고운서(崔孤雲書)(글자의 크기는 8㎝) 취병(翠屛)(글자의 크기는 9㎝) …청옥영(靑玉映) 비출량백(飛出兩白)…(글자의 크기는 6~7㎝) 금석(金石)(글자의 크기는 8~9㎝) 예교(禮敎)(초서체로 글자의 크기는 85㎝) 침수대(枕嗽臺)(반초서체로 글자의 크기는 약 10㎝) 용두(龍頭)(글자의 크기는 약 9㎝) 용은별서(龍隱別墅)(글자의 크기는 가로 23㎝, 세로 26㎝) 질응운채(質凝雲彩) 문절룡린(文折龍麟) 좌대명월(坐待明月) 취류가빈(醉留佳賓)(경관은 구름 무지개 되어 엉키고, 문필은 물결져 용비늘처럼 꺾이는데, 앉아서 밝은 달을 기다리는 밤, 취기는 정든 소매 잡는다. 글자의 크기는 7~8㎝)”
이곳에 있는 금석문이 최치원이 쓴 것인가에 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에 관심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이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특히 ‘쌍계(雙溪)’라고 쓴 것은 글씨의 크기나 필체가 쌍계사 입구의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한다. 최치원이 홍성군 장곡 지역에 금석문을 남긴 것은 그가 지금의 충남 서산인 부성군 태수를 할 적에 인접 지역인 이 곳에 자주 와서 둘러보고, 이 곳을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나중에 은거하면서 여생을 마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 금환 마을에는 예로부터 최치원의 묘라고 전해 오는 묘가 있다. 최치원은 노년에 이곳에 와서 은거하며 제자를 기르다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들이 제사를 지냈다. 그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의 후손들에 의해 매년 정월에 제사를 지냈다. 그들도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이 “우리 선조들이 최고운 선생의 제자 아닌 사람이 없으니, 마을의 대동제로 무고안택(無故安宅)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자.”는 합의로 몇 백년 제사를 지내왔다. 그 후 새마을 사업이 시작되고, 미신타파 운동이 벌어지던 백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이를 중단하였는데, 괴이하게도 마을에 불상사가 일어나 다시 지내기 시작하여 지금도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는 홍주향토문화연구회원들은 이 마을 사람들과 경주 최씨 대종회 회원들과 함께 이 묘에서 1년에 한 번씩 묘제(墓祭)를 지내고 있다. 최치원이 쓴 것이라고 하는 금석문과 최치원의 무덤이 이 지역에 전해 오는 것은 이 지역 사람들로 하여금 최치원이 이 지역에서 살다가 죽어 이 곳에 묻혔다는 것을 사실로 믿게 해 주었을 것이다.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증거물인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의 축조 시기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백제 시대로 추정한다면, 두 성은 적어도 백제가 멸망한 서기 660년 이전에 축조된 것이다. 최치원이 출생한 것은 서기 857년이므로, 두 성의 축조 시기와 전설의 내용은 약 200년의 시차가 있다. 그런데도 두 성을 최치원의 아들․딸, 아내와 관련지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에서 성 쌓기 내기를 하는 오누이를 최치원의 아들과 딸이라 하고, 딸의 승리를 방해하는 어머니를 최치원의 아내라고 한 것은 신라 말의 대 학자요 문장가인 최치원이 이 지역에 살았다고 믿고, 이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 지역 주민의 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아온 주민들은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는 「오누이 힘내기 전설」로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의 축조 사실을 설명하면서 등장인물을 이 지역에 살았다고 믿는 최치원의 아들과 딸, 아내로 하였던 것이다. 이 전설에서 최치원의 아들과 딸, 그리고 아내가 묻혔다는 적석총은 장곡면 광성리 오서산 기슭에 3기가 있는데, 약간 불룩 나온 곳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삼국 시대 이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적석총에 관하여는 연구가 진척되지 않아서인지 보존과 관리 상태가 좋지 않다.
2. 백제 부흥운동과 석성산성․학성산성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항복하자 당나라 장수 소정방은 백제의 의자왕과 왕자, 대신 및 장사 88명과 백성 12,807명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로 보냈다. 당나라는 백제의 옛 땅에 다섯 도독부(都督府)를 두고 이 지역을 통치하려 하였다. 이 때, 복신(福信)을 중심으로 한 백제의 유민들은 당나라의 통치에 반대하며 백제 부흥운동을 일으켰는데, 그 개략을 삼국사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왕의 종자(從子, 조카) 복신(福信)은 군사를 거느리고 중 도침(道琛)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을 근거로 군사를 일으키고,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맞아 왕으로 삼으니, 서북부의 여러 성이 모두 이에 호응하였다. 이에 힘을 얻은 복신은 군사를 이끌고 웅진 도독 유인원(劉仁願)이 있는 도성(都城, 부여 사비성)을 포위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 때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군사와 신라 군사가 유인원을 구하러 옴에 따라 복신은 도성의 포위를 풀고, 웅진강 가에 진을 쳤다가 대흥(大興)의 임존성(任存城)으로 물러났다. 그 후 도침과 복신은 스스로 영군장군(領軍將軍)․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 칭하고 많은 무리를 불러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얼마 후,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아울렀는데, 부여풍은 능히 이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그 후 복신이 권세를 휘둘렀으므로, 부여풍과는 시기하고 반목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라 칭하고 굴 속에 누워있으면서 부여풍이 위문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다. 부여풍은 이를 알고 먼저 친히 믿는 사람을 거느리고 굴로 가서 복신을 살해하였다. 부여풍은 고구려와 일본에 사신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육군과 수군을 이끌고 주류성을 공격하기 위해 오던 중 백강(白江)에서 부여풍을 돕기 위해 온 일본군을 물리치고, 주류성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부여풍은 어디로인지 사라졌고, 왕자 부여충승(夫餘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그 무리를 거느리고 왜군과 함께 항복하였다. 그 때 지수신(遲受信)은 홀로 항복하지 않고 임존성으로 가서 항거하다가 고구려로 몸을 피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복신과 도침, 부여풍을 중심으로 한 백제 부흥군은 주류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모아 처음에는 큰 세력을 형성하여 승리를 눈앞에 두는 듯하였다. 그러나 지도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 반목으로 인하여 비극적인 결말을 맞고 말았다. 백제 부흥군이 거점으로 삼았던 주류성이 지금의 어디인가에 관하여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는데,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금강 하류 지역으로 보는 견해 : 이병도는 충남 한산의 건지산성(乾芝山城), 일본인 津田左右吉은 한산 지방, 池內宏은 서천군 길산천 부근의 구릉이라 하였음. ②전북 지방으로 보는 견해 : 일본인 今西龍은 전북 부안의 금암산성(金巖山城)이라고 하였음. ③충남 연기군 전의 지역으로 보는 견해 : 김재붕은 연기군 전의의 두졸성(豆卒城)과 소류성(疎留城)이라고 하였음. ④충남 홍성으로 보는 견해 : 김정호와 박성흥은 충남 홍성 지역에 있는 성이라고 하였음.
①은 주류성을 한산의 건지산성으로 보는 이병도의 견해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최근 충청매장문화연구원(忠淸埋藏文化硏究院)의 건지산성 조사보고서에 의해 부정되었다. 이 보고서는 건지산성의 축조 방법, 발굴된 유물 등을 검토한 결과 이 산성은 “고려 시대에 축성되어 이어져 오다가 조선 시대에 폐성(廢城)된 것으로 믿어진다.”고 하여 건지산성이 주류성일 가능성을 부정하였다. 위의 여러 견해 중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④이다. 19세기 말의 지리학자 김정호(金正浩)는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 홍주목 조에서 “홍주목은 본래 백제 주류성인데, 당(唐)이 지심주(支潯州)라고 고쳤다.”고 하고, 공주목 조에서는 “왕(문무왕)이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들에게 함께 두릉윤성(豆陵尹城, 지금의 定山), 주류성(周留城, 지금의 洪州)을 공격하라고 명하였다.”고 하여 주류성은 지금의 홍성임을 밝혀 놓았다. 19세기 말에 김정호가 이런 견해를 발표하였는데도, 그 뒤에 ①, ②, ③의 견해가 나온 것은 이에 관해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때문이라 하겠다. 최근에 박성흥은 문헌 기록과 현지 답사 결과를 바탕으로 김정호의 기록이 옳음을 확인하고, 주류성은 대흥의 임존성과 가까이 있는 홍성의 석성산성이고, 주류성과 관련이 깊은 백강(白江)은 당진 해안이라고 하였다. 최근에 홍성 석성산성의 건물지 발굴조사를 한 상명대학교 박물관 조사팀 역시 주류성은 홍성의 석성산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에는 최치원이 썼다고 하는 금석문과 최치원의 묘가 전해 온다. 이 지역 주민들은 최치원이 부성 즉 지금의 서산 태수를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최치원이 이 지역에 살았다고 믿고 있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전설에 최치원의 아들과 딸,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은 최치원이 이 곳에 살았다고 믿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백제 시대에 쌓은 성인데,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이것은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전설 즉 「성 쌓기 내기 전설」을 백제 부흥운동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Ⅳ.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본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
힘이 센 오누이가 ‘누이동생은 성을 쌓고, 오라비는 서울에 갔다 오기’ 내기를 하였는데, 어머니가 아들 편을 들어 비극으로 끝맺는다는 내용의 「오누이 힘내기 전설」은 전국의 크고 작은 성과 관련되어 전해 온다. 필자가 조사한 곳만 하여도 충남 서산의 ‘홀어미성’, 충남 공주의 ‘홍길동 산성’, 충북 청원의 ‘구녀성’,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충북 진천의 ‘홀어미성‘ 등이 있다. 이 전설과 관련된 장소로 70여 곳이 알려져 있는데, 분포 지역이 백제 판도와 일치하므로 이 전설은 백제역사와 관련이 있는 듯하다. 홍성의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오빠가 서울에 갔다 오지 않고 다른 성을 쌓았다고 하는 점이 다른 지역의 「오누이 힘내기 전설」과 다르다. 그러나 힘이 센 오누이가 목숨을 걸고 내기를 하였고, 그 때 쌓은 성이 지금까지 전해 온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전설에서 어머니는 딸에게 팥죽을 쑤어 가지고 가서 먹으라고 한다. 어머니가 배고픈 딸에게 팥죽을 먹게 한 것은 성 쌓는 일을 지연시키기 위한 작전이지, 진정 딸을 위하는 마음에서 한 일이 아니다. 딸은 어머니가 시간을 끌어 자기로 하여금 내기에서 지도록 하려고 그런다는 것을 알면서 팥죽을 먹었을 수도 있고, 배고픈 김에 잠깐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서 받아먹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급히 먹은 팥죽 때문에 설사하는 바람에 성문 달을 자리에 놓을 문초석(門礎石)을 땅에 떨어뜨려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내기에서 진 그녀는 약속대로 자결하였다. 이 이야기에서 아들 편을 들어 아들이 이기도록 한 어머니의 행동은 우리 민족이 오래 전부터 지녀 온 중남사상(重男思想)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위 이야기에서 ‘장사인 오누이가 서로 다투지 않고 서로 협조하면서 살아갈 방도를 찾았더라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지도 않았을 것이고, 힘을 합하여 큰 일을 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 어머니가 어느 한 쪽 편을 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면서 아들과 딸 모두를 살릴 방도를 찾았더라면 엄청난 불행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전설은 가족간의 불화와 편애가 부른 비극이 엄청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 남아 있는 석성산성이나 학성산성은 잘 축조된 대규모의 성으로, 힘이 센 장사 한 두 사람이 며칠 사이에 쌓을 정도의 성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에 걸쳐 힘을 합하여 쌓은 성임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위 이야기는 두 성의 축조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어떤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이야기는 어떤 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망한 직후에 복신과 도침, 부여풍은 주류성을 근거지로 군사를 일으켜 큰 세력을 떨쳤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백제 부흥군의 주력 부대가 주둔하던 주류성이다. 이 두 성은 그 때 쌓은 것일 수도 있고, 그 전부터 있던 성을 이 때에 손질하였을 수도 있다. 위 이야기는 백제 부흥군의 대립과 갈등을 이 두 성을 쌓거나 손질한 것과 관련지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생각한다. 백제 부흥군은 복신(福信)이 이끄는 군부 세력과 도침(道琛)이 이끄는 불교 세력이 있었는데, 뒤에 왕자 부여풍이 이끄는 왕족 세력이 이에 가담하였다. 처음에는 복신의 군대가 공격을 맡고, 도침은 작전 계획과 정보와 군수를 담당하며, 왕자 풍은 양대 세력을 조정하면서 후에 자기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래서 백제 부흥운동은 성공할 조짐을 보였다. 그러나 뒤에 세 세력간에 반목과 불신이 생겨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부여풍은 복신을 죽이는 바람에 그 세력이 약화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위 이야기를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해석하면, 성 쌓기 내기를 한 오빠는 복신, 누이동생은 도침, 어머니는 왕자 부여풍에 대응된다. 오누이가 목숨을 걸고 성 쌓기 내기를 한 것은 복신과 도침이 반목하다가 싸운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에 대응되는 부여풍은 처음에는 두 세력을 조정하면서 화합을 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오빠에 해당하는 복신의 편을 들어 복신으로 하여금 도침을 제거하게 한다. 그러다가 부여풍은 복신을 의심하여 복신마저 제거하고, 혼자 세력을 잡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대항하여 싸우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전설에서 딸과 아들과 어머니가 차례로 죽은 것은 부흥군을 주도하던 도침과 복신・풍이 차례로 죽고, 3년여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이 막을 내린 것을 의미한다. 두 산성에서 멀지 않은 장곡면 광성리 오서산의 8부 능선 가까이에 내원사(內院寺)라는 절이 있다. 이 절은 백제 말에 지어진 절이라고 하는데, 백제 부흥운동을 하던 풍왕의 승전을 위해 기도를 한 곳이라고 한다. 내원사와 골짜기 하나를 사이에 두고 20분 정도 걸어서 갈 수 있는 정도의 거리에 ‘쉰 길 바위’가 우뚝 솟아 있다. 이 바위는 밑에서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이름처럼 쉰 길 정도 되어 보이는 높고 큰 바위이다. 이 바위 아래에는 20여 명이 들어앉을 정도의 석굴이 있는데, 이 바위의 아래 부분은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있어 잘 눈에 뜨이지 않는다. 앞에서 소개한 「복신굴 전설」에 따르면, 부여풍이 적군과 간신들의 말에 속아 부흥군의 용맹스런 장수 복신을 죽인 곳이 바로 이 석굴이라고 한다. 부여풍이 복신 장군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있을 때, 복신 장군은 몸이 불편하여 이 석굴에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 때 부여풍은 이 석굴로 문병한다고 찾아와서 복신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부분을 삼국사기에는 “복신이 칭병(稱病)하고 굴 속에 누워있으면서 부여풍이 위문하러 오면 죽이려 하였는데, 부여풍이 이를 알고 친히 믿는 사람을 거느리고 굴로 가서 복신을 살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로 보아 이 전설의 내용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 이 석굴은 지리적으로 주류성과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자주 찾아왔을 내원사와도 가까이 있어 전설이 사실일 가능성도 있다. 위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에 얽힌 「성 쌓기 내기 전설」은 두 성을 쌓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전설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을 지키려다가 실패한 사실을 성의 축조와 관련지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3기의 적석총(積石塚)은 성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백제 부흥군 장수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백제 부흥군의 성공을 빌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던 백제의 유민들은 지도층이 서로 시기하고 반목하다가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난 것을 무척 아쉬워하며 한스럽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상여바위 전설」에서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불거나, 날이 궂을 때는 이 산 정상 부근에서 사람들의 통곡 소리도 들려오고, 상여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든가, “꿈속에서 옛날 군인 복장을 한 사람들이 창을 들고, 전투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에 대한 백제 유민의 한이 상여바위라는 구체물에 투영된 것이라 하겠다. 최치원의 아들과 딸이 쌓은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이야기와 「복신굴 전설」, 「상여바위 전설」은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 전파․전승해 오면서 지도층의 불화로 실패한 백제 부흥운동의 뼈아픈 실패담을 반추(反芻)하고, 한(恨)을 삭히는 한편, 아들을 중히 여기고 편애하는 중남사상(重男思想)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가족간의 화목을 강조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전설을 전승시켜 온 우리 조상들은 흥미로운 이 이야기를 통해 깊은 의미와 교훈을 던져 주면서, 그 증거물로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한치마석, 복신굴을 제시하였다. 이 이야기는 한 가족이 화목하지 못하면 그 집안이 망하는 것처럼 권력을 쥔 세력들이 합심하지 못하고 반목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있다.
Ⅴ. 맺음말
충남 홍성군 장곡 지역에는 최치원의 아들과 딸이 성 쌓기 내기를 하여 쌓았다는 「석성산성(石城山城)과 학성산성(鶴城山城) 전설」과 「복신굴 전설」, 「상여바위 전설」 등이 전해 온다.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오누이 힘내기 전설」과 같은 계열인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은 「복신굴 전설」, 「상여바위 전설」과 함께 7세기에 있었던 백제 부흥 운동 실패의 슬픈 역사를 상기하게 한다. 홍성군 장곡면 월계리에는 최치원이 썼다고 하는 금석문과 최치원의 묘라고 전해 오는 무덤이 있다. 이 지역 주민들은 최치원이 홍성에서 가까운 부성(지금의 서산) 태수를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지어 최치원이 이 지역에 살았다고 믿고 있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전설에 최치원의 아들과 딸, 어머니가 등장하는 것은 최치원이 이 곳에 살았다고 믿는 이 지역 주민들의 의식을 바탕으로 꾸며진 것이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은 백제 시대에 쌓은 성인데,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던 주류성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것은 석성산성과 학성산성 전설 즉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을 백제 부흥운동 실패의 역사적 사실과 관련지어 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이 전설의 의미를 백제 부흥운동과 관련지어 해석해 보면, 성 쌓기 내기를 한 오빠는 복신, 누이동생은 도침, 어머니는 왕자 부여풍에 대응된다. 오누이가 목숨을 걸고 성 쌓기 내기를 한 것은 복신과 도침이 반목하다가 싸운 것을 의미한다. 어머니에 대응되는 부여풍은 처음에는 두 세력을 조정하면서 화합을 꾀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오빠에 해당하는 복신의 편을 들어 복신으로 하여금 도침을 제거하게 한다. 그러다가 부여풍은 복신을 의심하여 복신마저 제거하고, 혼자 세력을 잡고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게 대항하여 싸우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전설에서 딸과 아들과 어머니가 차례로 죽은 것은 부흥군을 주도하던 도침과 복신・부여풍이 차례로 죽고, 3년 여에 걸친 백제 부흥 운동이 막을 내린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두 산성에서 멀지 않은 장곡면 광성리 오서산 8부 능선에 ‘쉰 길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밑에 복신굴이 있다. 몸이 불편하여 이 굴에서 쉬고 있던 복신을 부여풍이 문병한다고 찾아와서 죽였다고 한다. 이 석굴은 지리적으로 주류성과 가까이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들이 자주 찾아왔을 내원사와도 가까이 있어 이 전설이 사실의 표현일 가능성도 있다. 석성산성과 학성산성에 얽힌 「성 쌓기 내기 전설」은 두 성을 쌓은 사실을 이야기하는 전설이라기보다는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성을 지키려다가 실패한 사실을 성의 축조와 관련지어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3기의 적석총(積石塚)은 성을 지키려다가 목숨을 잃은 백제 부흥군 장수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백제 부흥운동의 실패에 대한 백제 유민의 안타까움과 한은 「상여바위 전설」에 투영되어 있다.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과 「복신굴 전설」, 「상여바위 전설」은 이 지역 주민들 사이에 전파․전승해 오면서 지도층의 불화로 실패한 백제 부흥운동의 뼈아픈 실패담을 반추(反芻)하고, 한(恨)을 삭히는 한편, 아들을 중히 여기고 편애하는 중남사상(重男思想)의 폐해를 비판하면서 가족간의 화목을 강조하는 기능을 하였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글은 홍성 지역의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 해석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지명이나 역사적 사실의 고증, 다른 지역에 전해 오는 「오누이 힘내기 전설」과의 관계에는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였다. [출처] 「오누이 성 쌓기 내기 전설」의 의미와 기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