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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카복음 21,12-19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ᆢ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12-13)
초세기 그리스도교와 초창기 한국교회는 피로 물든 역사를 지니고 있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증언은 없습니다.
오늘날 나의 신앙역시 이 목숨바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박해는, 강력한 반대는, 신앙을 흔드는 고난은 역설적으로 신앙의 기회라고 알게 됩니다.
죽이기까지 하겠지만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16-18)이란 이 모순을 우리는 신앙 안에서 알아 듣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요한 12,25 )이기 때문입니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16)
나의 신앙을 흔드는 이들은, 또 신앙의 죽음을 요구하는 이들은 원수가 아니라 가까이 있는 이들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박해시대를, 종교박해가 일어나는 나라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물질이 주는 달콤함이, 편리함이, 이기심이, 허영과 사치가 서서히 신앙을 잠식해 들어와 신앙의 목을 죕니다.
서서히 끓는 물에서 개구리는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1872년에 생리학자 하인츠만(Heinzmann)에 의해 행해진 이 실험에서 매우 천천히 온도가 올라가는 물에서는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이 실험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내 영혼은 어디쯤에 있는가?' 자문해 볼일입니다. 나도 모르게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ᆢ
현대 물질 만능시대에 신앙을 살기 위해서는 날마다 말씀에 마음과 정신을 온전히 쏟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천 사비나 수녀님)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루카 21,12-19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습니다 : 배교자의 비참함
서기 320년, 로마 제국의 리키니우스 황제 치하의 춥고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튀르키예의 세바스테(Sebaste)라는 곳에 주둔하던 로마의 최정예 부대, '제12군단' 병사들 중 마흔 명이 얼어붙은 호수 한가운데로 내몰렸습니다.
그들은 단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발가벗겨진 채 살을 에는 혹한 속에 서 있어야 했습니다.
호수의 얼음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살을 파고드는 추위는 뼈 속까지 사무쳤습니다.
그들의 입술은 파랗게 질려갔고, 몸은 제어할 수 없이 떨렸습니다.
그들은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희 마흔 명이 경기장에 들어왔으니, 마흔 명 모두가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해주소서."
그런데, 그들을 고문하던 총독 아그리콜라는 아주 잔인한 유혹을 준비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호수 바로 옆, 눈에 빤히 보이는 곳에 ‘뜨거운 물이 펄펄 끓는 목욕탕’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오직 그 목욕탕 문틈으로만 따뜻하고 붉은 불빛과 하얀 김이 새어
나왔습니다.
"누구든지 신앙을 버리겠다고 말만 하면, 지금 당장 저 따뜻한 물에 들어갈 수 있다!"
살을 찢는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였습니다.
결국 한 병사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동료들의 기도를 뒤로한 채, "나는 예수를 모른다!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며 호수를
뛰쳐나갔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그토록 원하던 따뜻한 목욕탕으로 뛰어들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 병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행복을 찾았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극한의 추위에 얼어있던 혈관이 급격한 온도 변화를 견디지 못하고 터져버려 심장마비가 온 것입니다.
그는 육체의 고통을 피하려다 육신의 생명도 잃었고, 잠시의 안락을 탐하다가 영원한 영혼의 생명마저 잃어버렸습니다.
그가 목욕탕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그를 기다린 건 따뜻한 위로가 아니라, 가장 비참하고 허무한 죽음이었습니다.
반면, 끝까지 호수에 남아 추위를 견딘 39명에게는 하늘에서 찬란한 빛과 함께 천사들이 내려와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배교자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던 경비병 하나가 그 광경에 감화되어, "나도 그리스도인이다!"라고 외치며 옷을 벗고 그 빈자리를 채우러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기어이 40명의 숫자를 채워 순교의 월계관을 완성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다가 배교하면 처음부터 안 믿던 이들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추운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곳에 있다가 뜨거운 물에 들어가면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레이엄 그린의 소설 『권력과 영광』에는 박해가 두려워 신앙을 타협한 '호세 신부'가 등장합니다.
그는 사제로서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멕시코 정부가 사제들을 처형하자, 신부는 살기 위해 정부가 시키는 대로 결혼을 하고 사제직을 버립니다.
그는 연금을 받으며 안전한 집에서 배불리 먹고
삽니다.
불신자의 눈에는 '운 좋은 생존자'입니다.
하지만 신앙을 알았던 그에게 그 삶은 지옥이었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그를 "호세 신부님!" 하고 부르며
조롱했고, 아내는 그를 경멸했습니다.
어느 날 밤, 숨어 지내던 동료 사제가 잡혀가며 고해성사를 청했을 때, 호세는 아내의 "가지 마요!"라는 호통에 겁을 먹고 나가지 못합니다.
그는 안전한 방구석에서 홀로 울며 기도합니다.
"하느님, 차라리 저를 죽여주시지 그러셨습니까."
하느님을 알고 난 뒤에 그분을 배신하고 사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입니다.
왜냐하면 그 전에 참된 행복과 자유를 누려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잃는 고통까지 겪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베드로의 둘째 서간에는 무서운 말씀이 있습니다.
"의로움의 길을 알고서도...등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길을 알지 못했던 편이 나았을 것입니다."(2베드 2,21).
아예 하느님을 몰랐다면 세상의 쾌락을 즐기며 잠시나마 행복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하늘의 맛'을 본 사람들입니다.
빛을 본 사람에게 어둠은 더 이상 안식처가 아니라 감옥입니다.
신앙인이 박해나 고통이 힘들다고 해서 세상으로 도망치면, 거기서 기다리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영혼의 질식'입니다.
가리옷 유다를 보십시오.
그는 스승이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가장 먼저 배에서 뛰어내려 '은돈 30냥'이라는 구명조끼를 챙겼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는 3년 동안의 허송세월을 보상받은 현명한 처세술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했던 유다는 그 돈을 쓸 수 없었습니다.
그의 양심은 불에 덴 듯 괴로웠고, 결국 그 돈을 성전에 내동댕이치고 목을 매어 죽었습니다.
신앙인이 뒤로 물러서면 갈 곳은 지옥뿐입니다. 되돌아갈 다리는 이미 끊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남은 길은 단 하나, '앞으로 나아가는 인내'뿐입니다.
고통과 박해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기적은 시작됩니다.
음악의 어머니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이야기를 아십니까?
그는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지만, 56세에 인생 최대의 시련을 맞았습니다.
오페라 사업은 파산했고, 빚쟁이들은 감옥에 넣겠다고 위협했으며,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까지 왔습니다.
그는 도망치거나 신을 저주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식음을 전폐하며 오직 성경 말씀과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고통을 음표 하나하나에 쏟아부었습니다.
24일 후, 그가 작곡을 마쳤을 때 하녀는 그가 눈물 범벅이 되어 소리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 앞에 하늘이 열리고 위대하신 하느님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바로 인류 역사상 최고의 찬양인 『메시아』 중 '할렐루야'입니다.
헨델이 파산과 질병이라는 박해를 피했다면, 그는 그저 빚쟁이에 쫓기는 노인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신앙으로 그 자리를 지켰기에(인내), 그는 천상의 문을 열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9)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손해를 보거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때 마귀는 속삭입니다.
"그만두면 편해져. 적당히 타협해. 저 따뜻한 목욕물(세상)로 돌아가."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신앙을 버리고 얻은 평화는 호세 신부의 비참함이요, 유다의 밧줄일 뿐입니다.
이미 빛을 본 여러분에게 세상은 더 이상 안식처가 될 수 없습니다.
뒤로 물러서면 죽습니다.
앞으로 나아가, 지금 겪는 이 시련을 뚫고 나가십시오.
헨델처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찬양하고, 스테파노처럼 박해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킬 때, 그곳은 우리를 죽이는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지성소가 될 것입니다.
인내하십시오.
그것만이 우리가 살길입니다. 아멘.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1월26일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21,12-19
종말과 관련된 호의적이고 낙관적인 예수님의 가르침!
겨울이 오기 전에 여기저기 낡고 노후된 곳을 찾아 열심히 손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식당 바닥이 너무 지저분해 페인트를 칠해야 하나, 어쩌나 하다가, 좋은 자재를 찾았습니다.
데코 타일이라고, 시공 방법이 너무 간단해 직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바닥을 깨끗이 청소한 후, 직사각형 모양의 데코 타일 뒷면의 종이를 벗겨내어, 차례대로 바닥 위에 덧붙여나가면 되니, 누구나 할 수 있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마흔평 정도 되니, 양이 만만치 않습니다.
쪼그리고 앉아 하나하나 붙여나가는데, 처음에는 재미있더니, 나중에는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고
결코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씩 일어나 허리를 펴고 전체를 보니...주문한 데코 타일이 점점 줄어들면서, 식당 바닥이 깔끔해져 갔습니다.
타일을 하나하나 붙이며, 우리의 삶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오늘 하루 보잘 것 없어 보이는 하루, 영양가 없어 보이는 하루라 할지라도, 지속적으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며, 하루 매순간을 충실히 살아갈 때, 그런 하루가 모이고 모여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생각.
결정적이고 궁극적 구원은 단칼에 이루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차곡차곡 쌓아나가는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생각.
이런저런 고통과 시련 속에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아가지만, 가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쳐들어 하늘도 바라보고, 내 인생도 한 걸음 크게 뒤로 물러나 큰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기 전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이 있으니, 고통과 시련, 박해와 투옥입니다.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시작될 새로운 세상의 재건을 위해서는 지상 장막이 허물어져야 합니다.
그때 새집을 짓기 위해서는 낡고 허황된 옛집, 교만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의 파괴는 필수적입니다.
다행인 것은 종말에 대한 예수님 가르침의 결론은 항상 우리에게 호의적이고 낙관적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 18-19)
오늘 첫 번째 독서 다니엘 예언서는 교만으로 가득한 안하무인 벨사차르 임금 케이스를 소개하며, 그처럼 주님의 진노 끝에 멸망하지 않기 위한 비결을 가르칩니다.
그것은 만군의 주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흙이요 먼지요 티끌인, 자신의 근본, 신원을 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 목숨은 주님 손에 달려있으니, 그분께 겸손되이 무릎꿇는 것, 그분을 충실히 섬기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34주간 수요일 강론>
(2025. 11. 26. 수)(루카 21,12-19)
<신앙생활은 결코 ‘헛고생’이 아닙니다.>
“이 모든 일에 앞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할 것이다.
너희를 회당과 감옥에 넘기고, 내 이름 때문에 너희를 임금들과 총독들 앞으로 끌고 갈 것이다. 이러한 일이 너희에게는 증언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친구들까지도 너희를 넘겨 더러는 죽이기까지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2-19).”
1) ‘박해’는 종말이 아닌데도 종말처럼 보이는 일들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일입니다.
또 종말과 재림이 하루라도 빨리 이루어지기를 갈망하게 만드는 일이기도 합니다(루카 17,22).
예수님께서는, 박해는 종말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할 기회’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받더라도 신앙을 증언하라고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신앙을 증언할 기회’ 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과
박해자들을 회개시킬 기회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것은,
아버지도 예수님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요한 16,3).
그러니 그들에게 아버지와 예수님을 제대로 알려 주면, 그들 중에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는 일입니다.>
“너희는 명심하여, 변론할 말을 미리부터 준비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세속적인 처세술로 박해에 대처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학문적인 논쟁이나 토론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삶으로’ 드러내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성숙한 이들 가운데에서는 우리도 지혜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 지혜는 이 세상의 것도 아니고 파멸하게 되어 있는 이 세상 우두머리들의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신비롭고 또 감추어져 있던 지혜를 말합니다.
그것은 세상이 시작되기 전,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미리 정하신 지혜입니다(1코린 2,4-7).”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진리를 증언하는 일은, ‘이 세상의 방식’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를 내가 너희에게 주겠다.” 라는 말씀은, ‘성령의 힘’으로 도와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2) 가족들을 포함해서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에게서 미움과 박해를 받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뜻으로는 ‘모든 사람’이 아니라, ‘많은 사람’입니다.
또 “반드시 미움을 받게 된다.”, 또는 “미움을 받아야 한다.”가 아니라, “미움을 받더라도 참고 견뎌라.”입니다.>
산상설교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라는 계명은,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받는 상황에도 적용됩니다.
신앙인을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이려고 하는 그 사람들도 ‘구원의 대상’이고, 복음 선포의 대상입니다.
3)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과 초대교회는 처음에는 ‘미움’이 아니라 ‘호감’을 얻었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한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이 집 저 집에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 즐겁고 순박한 마음으로 음식을 함께 먹고,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6-47).”
“......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미움과 박해를 받으면 기가 꺾여서 신앙이 흔들릴 수 있고, 반대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고
존경을 받으면 자만심에 빠져서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루카 6,26).
<둘 다, 신앙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사탄의 방해공작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움을 받든지 존경을 받든지 간에, 그런 일에 대해서 일희일비 하지 말고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가야 합니다.
4)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그분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마태 10,30).”로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의 신앙생활과 노력을 하느님께서 세세하게 알고 계시고, 그대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의 말씀과 마태오복음의 말씀을 합하면,
신앙생활은 절대로 ‘헛고생’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는 거룩한 일이라는 격려 말씀이 됩니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 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인내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잘 인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5).”>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