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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5: 2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3. 부활의 첫 열매 ( 15 : 20-28 )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 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고전 15: 20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확실한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잠자는 자들 즉 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
그의 부활은 죽은 자들의 부활의 시작이 되었다!
1]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잠자는 자"란 말은 죽은 자들을 비유한다.
"첫 열매", 하나님께 처음 익은 열매를 바치면, 수입되는 곡식 전부를 바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의의(意義)를 가진다.
* 롬 11: 16 –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라.
* 출 23: 19 - 네 토지에서 처음 거둔 열매의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니라.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 출 34: 26 -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 레 2: 12 - 처음 익은 것으로는 그것을 여호와께 드릴지나 향기로운 냄새를 위하여는 제단에 올리지 말지며
* 레 23: 10, 17, 20 –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7 너희의 처소에서 십분의 이 에바로 만든 떡 두 개를 가져다가 흔들지니, 이는 고운 가루에 누룩을 넣어서 구운 것이요, 이는 첫 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것이며 20 제사장은 그 첫 이삭의 떡과 함께 그 두 마리 어린 양을 여호와 앞에 흔들어서 요제를 삼을 것이요, 이것들은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이니 제사장에게 돌릴 것이며
* 민 15: 20-21 – 20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거제로 타작 마당의 거제 같이 들어 드리라. 21 너희의 처음 익은 곡식 가루 떡을 대대에 여호와께 거제로 드릴지니라.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그의 백성의 부활도 얻어진 것이다. 그는 머리요 그의 백성은 몸이니, 머리가 부활하였은즉 몸된 교회도 부활하도록 되어있다.
* 롬 6: 5 -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 골 1: 18 -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소망 : 새에덴교회 소강석 목사
오늘은 세계의 모든 교회가 부활절 기념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면서 부활하신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우리 모든 성도들 가운데 넘치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이 부활절 기념 예배에 참여한 것은 부활의 가능성의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오직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경배하며 부활의 복음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요 11: 25-2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이 물음은 2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우리들에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실하게 믿으시는 분은 아멘 합시다.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나에게 무슨 기쁨과 생명이 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우리의 소망이 이생뿐이라면 우리가 가장 불쌍한 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요 산 진리의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도 기쁨과 감격과 소망의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번 부활주일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소망이라는 주제의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세상은 어떤 방법으로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막아보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마 27장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장사 지낸 후 3일만에 부활하겠다는 말씀이 생각나서 여러 가지 방법을 펴가면서 부활을 막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불안하고 두려워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활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마 27: 62-66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말을 합니다. "빌라도 총독이여!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저가 살았을 때 사흘만에 반드시 부활한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사흘만에 부활하지 못하도록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러자 빌라도가 "너희에게 군대(파숫군)가 있으니 가서 힘대로 그 무덤을 지키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많은 군사들을 동원하여 무덤 문을 무거운 돌로 인봉하고 밤낮으로 교대하며 예수님의 무덤 문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당시 로마 군대는 가장 강한 군대였습니다. 이 군대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만일에 예수님이 살아난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시 죽이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돌로 인봉한단 말은 무덤 입구를 큰 돌로 막고 밧줄로 돌을 매여서 출입구에다가 연결을 하고 밧줄을 중앙과 양 끝을 초나 흙으로 봉해서 그 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하는 최대의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어리석은 방법입니까?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홍해와 요단강을 가르시고 해와 달을 멈추시게 하신 분이라면, 그까짓 돌로 막은 인간의 인봉 하나를 무너뜨리지 못하겠습니까? 그까짓 로마의 군대 하나를 못 처리한단 말입니까? 그래도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시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로마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소문내도록 했습니다.
마 28: 12-14, “그들이 로마 군병들에게 돈을 주면서 예수의 시체를 제자들이 도적질 해 갔다고 소문을 퍼뜨려달라 ‘고 주문을 했습니다. 그래서 로만 군병들은 많은 돈을 받고 헛소문을 퍼뜨렸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들입니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기어이 부활하시고 마셨습니다. 마침내 부활하시고 말았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보는 가운데 인봉된 무덤 문이 열리고 찬란하게, 너무도 영광스럽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두려워서 도망을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소식은 제자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거리거리마다 소문나게 하였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리고 그 부활의 소문은 영원한 생명의 복음이 되어 인류가 사는 구석구석에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2.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떻게 부활하셨습니까?
1) 세상의 모든 불의와 거짓과 악과 허위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엮어서 십자가에 죽게 하였습니다. 전혀 죄인이 아닌 분을 죄인으로 무고하게 엮어서 죽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인간적으로 볼 땐 예수님께서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터지는 죽음을 당하셨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앞에서 당당하게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불의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거짓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불의와 악과 허위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야 이 놈들아! 너희는 나를 무고하게 죽였지만 난 이렇게 부활했어. 난 이렇게 살아났단 말이야!" 한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의 부활을 통하여 진실과 진리가 허위나 거짓보다는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참과 선이 불의와 악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게 아무리 세상에는 불의와 악과 허위와 거짓과 미움이 가득하고 그것으로 무고한 사람을 엮어서 억울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참이 이기고 선이 이기며 진리가 이기고 진실이 이긴다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세상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2) 죄악의 모든 저주와 사망 권세를 정복하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인간에겐 죄가 들어오면서 온갖 저주와 사망권세가 세상을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수많은 질병과 고통 중에 신음하다가 늙어 죽을 운명에 처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고통 중에 신음하다가 늙어 죽어야 할 수밖에 없는 운명!그러기에 이세상 어느 누구도 사망권세를 이겨낸 사람이 없습니다. 철학자 헤겔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인생은 죽기 위해 태어났고 죽음의 종착역으로 전력 질주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죄악의 화살이 우리를 향해 사정없이 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 위에 사는 모든 인생들은 이 죽음의 무기인 죄의 화살 앞에 백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따라서 죽음이란 온 세상, 온 인류의 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의 역사는 죽음과 싸우는 역사였습니다. 하지만 역사상 이 죽음의 권세와 싸워서 승리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누구도 죽음의 권세 앞에 당당하게 항거하지 못했습니다. 죽음 앞에 어떤 영웅, 호걸도 백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참으로 서글픈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을 생각하면 서글퍼집니다. 그렇게 남자 다웠던 알렉산더 대제,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어서 억울해서 울었던 것만 빼놓고는 단 한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알렉산더 대제도 죽음 앞에서는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중국의 만리장성을 가 보셨습니까? 얼마나 긴 성이었으면 만리장성이라고 했겠습니까? 거기 가서 보면 진시황제의 남자다움과 황제로서의 웅대 무비한 통치력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역시 사람들에게 좀처럼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도 죽음을 생각하면 눈물을 흘리곤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과연 죽음은 서글픈 것입니다. 또한 죽음은 불길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죽음이란 너무나 흉칙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양귀비나 미의 여신 비너스 같은 여인이라 할지라도 싸늘한 시체로 누워 있다면 아무도 곁에 두고 보고 싶어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래도 냄새나는 썩은 송장과는 함께 못삽니다. 예)시신 앞에 향을 피우고 꽃으로 관을 싸는 것도 사실은 죽음의 흉칙함을 미화시키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불길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특별히 병원에 가 보면 4층이 있던가요? 호텔에 가도 4층은 없습니다. 만일 있으면 4층이라고 하지 않고 "F" 층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층은 언제나 죽을 "死"를 연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불길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깨끗하게 단장해 놓은 공원묘지라 할지라도, 아무리 호텔같이 꾸며놓은 납골당이라 할지라도 그곳에 가면 기분 좋은 사람은 없습니다. 괜히 흉칙한 기분만 듭니다. 그마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불길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죽음은 모든 관계와 단절되고 나 혼자 싸늘한 시체로 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죽음을 불길하게 생각하고 두려워하면서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보고 몸부림치다가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바로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참 인간으로 오셔서 참 인간으로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물론 나사렛 예수도 죽음의 화살을 맞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비참하고 치욕적이고 저주스런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치욕적인 죽음을 당했을 때 온 세상은 낙망하였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낙망하였고 그를 의지했던 모든 사람이 낙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죽음의 법칙 앞에 백기를 들었다고 절망을 했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그의 죽음은 자기 백성을 위해 반드시 죽어야 했던 대속의 죽음일 뿐이었습니다. 대속의 죽음 후에 예수님은 죽음의 비극을 넘어서 다시 영원히 부활을 하셨던 것입니다. 안식후 첫날 바야흐로 새벽의 여명이 오고 있는 무렵 한 새로운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시체를 묻어둔 동산의 터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덤 터가 진동을 합니다. 그러더니 로마 군병들이 인봉을 해 놓았던 돌이 터지고 무덤 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면서 흰옷 입은 천사들의 옹위를 받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무덤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비참하게 죽으신 주, 가장 치욕적인 죽음을 당했던 주님께서 이제는 그 치욕적이고 저주스러운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한 새 생명의 주로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의 법칙을 박살내시고 영원한 새 생명의 법칙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영원한 죽음의 운명을 정복하시고 영원한 영생의 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의 원수였던 죽음 자체를 뿌리채 뽑아버리시고 무덤의 세력을 일격에 박살내 버리신 후 왕중 왕으로 부활하셨던 것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미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적용하는 부분에대해서 살펴봅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뉴스입니다.
이 세상에는 깜짝 놀랄만한 뉴스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만큼 위대한 뉴스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은 영원한 뉴스요, 이 우주에서 가장 위대한 복음중의 복음 뉴스입니다. 그것은 저 카르타고의 명장 하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해 왔다거나, 로마의 젊은 명장 스키피오가 배를 타고 건너가 하니발 장군의 수도를 불질러 버렸다는 정도의 뉴스가 아닙니다. 그것은 알렉산더 대제가 마게도니아를 점령했다거나, 나폴레옹의 군대가 유럽을 점령하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러시아까지 진격했다는 뉴스도 아닙니다. 아니면 몽고의 징기스칸이 이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었다는 소식도 아닙니다. 또 아니면 콜롬부스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소식도 아니고 리빙스턴이 아프리카를 발견했던 소식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영원한 뉴스, 복음의 뉴스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들은 이 세상의 한 시시한 역사적인 일에 불과합니다.
참 복음의 영원한 뉴스란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한 죽음의 법칙을 깨뜨리시고 영원한 새 생명의 법칙으로, 영원한 영생의 주님으로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시대를 초월하고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여 계속되는 영원한 복음 뉴스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그 치욕적인 죽음 때문에 모든 제자들은 절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 소식을 듣고는 갈릴리 어부들의 가슴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목격한 그들은 가슴이 울먹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 충만을 받은 후 예루살렘 거리로 나가 외쳤습니다.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바로 이 부활 소식은 제자들에 의해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경으로 전파되었고 마침내 2000년이 흐른 후에도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뉴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영원한 새 생명의 법칙을 도입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세상 역사에서 가장 큰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도 많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법칙을 영원히 깨뜨리시고 영원한 새 생명의 권세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만큼 큰 기적의 사건은 없습니다. 어떻게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람이 죽으면 사람의 몸을 구성한 약 30가지의 원소들은 썩고 분해되어 흙이 됩니다. 그리고 죽은 자는 생존자와 영원한 단절의 관계를 이룹니다.
그런데 이렇게 죽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도 그냥 죽은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온몸이 상하시고 물과 피를 다 쏟고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다시 부활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것도 영원한 부활로 말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부활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모든 자들을 부활하게 하셨으니 이 세상에 이보다 더 큰 기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3)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제일 큰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크게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① 실제로 과거에 있었던 역사적인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주후 33년에 역사적 사실로 있었던 실제사건입니다. 그것은 영적 사건이나 영적 의미만을 부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좀 전문적인 표현으로서 "게쉬테트"의 사건이 아니라 "히스토리컬한 fact"입니다. 이 사실은 빌라도 총독이 로마의 황제인 디베리우스에게 쓴 편지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십자가에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났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을 믿어야 합니다.
② 오늘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현재적인 부활입니다.
늘 강조하는 사실이지만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원한 부활 세계의 삶을 도입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활 세계의 영원한 축복을 미리서 맛뵈기 식으로나마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 양심의 부활: 타락했던 양심이 변화된 부활,변화된 양심을 통하여 부활 세계의 은혜를 누리고 적용합니다.
㉯ 윤리적 부활: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잘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의 행위와 삶이 변화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사는 것입니다.우리는 이런 윤리적 부활도 경험하고 적용합니다.
㉰ 심령의 부활(영혼의 부활) : 죽은 심령, 잠을 자고 침체된 심령이 영적인 부활(부흥)을 경험하여 풍성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 세계의 삶을 성령과 더불어서 맛뵈기식으로 누리며 적용합니다.
㉱ 축복의 부활: 불통이 형통으로, 가난이 부자로!
이외에도 여러 가지 영적인 부활이 있는데 이걸 우리는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는 부활은 과거의 사실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현재적인 복음의 소식으로 들리게 되고 이 복음을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속에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③ 미래에 실제로 있을 소망의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 개인의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 20절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첫 열매로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나중 열매로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첫 열매를 따먹으면 나중 열매를 따먹는 것이 시간문제이듯이 우리의 부활도 시간문제에 불과합니다. 그것은100% 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부활은 우리 모든 성도의 소망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음의 노예로 살아왔던 우리에게는 영원한 미래의 부활만이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인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부활, 꿈에도 소원은 부활... 우리가 죽으면 육체의 모든 원소는 핵분열처럼 해체되어 버립니다. 예) 핵에너지: 원자를 분해해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핵융합에너지는 핵을 융합함으로써 만듭니다. 이것은 우라늄이 아닌 바닷물에 있는 중수소를 가지고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화장하거나 매장을 해서 형체와 원소까지 없어진 것 같아도 주께서 나팔 부실 때 우리 몸의 모든 원소가 융합할 것입니다. 영광스런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렇게 부활의 소망이 있는 사람은 이제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죽어도 다시 영원히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에겐 죽음이 생명의 종식이 아닙니다. 형태의 변모이며 장소의 이동일 뿐입니다. 죽음은 우리의 영혼이 주의 품에 고이 안식하는 것입니다. 죽음은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이요, 영원한 부활을 경험하는 코스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이 두려울게 뭐 있습니까?
김정준 목사의 시: "내가 죽는 날"
내가 죽는 날 저 좋은 낙원에 이르니 그대들은 찬송을 불러주오.
또 요한 계시록 20장 이하를 읽어주오
나의 묘비에는 이것을 새겨주오.
'임마누엘, 단 한마디 말을
내가 죽는 날은 비가 와도 좋다.
내가 죽는 날은 바람이 불어도 좋다.
내가 죽는 시간은 밤이 되어도 좋다.
중략...
오 내가 죽는 날.
나를 완전히 주님의 것으로 부르시는 날
나는 이 날이 오기를 기다리노라.
다만 주님이 뜻이면 이 순간에라도 닥쳐오기를
번개와 같이 닥쳐와 번개와 함께 사라지기를,
다음은 내게 묻지 말아다오
내가 옮겨간 그 나라에서만 내 소식을 알 수 있을 터이니
여러분! 여러분도 이런 시를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시를 읊으며 안심하고 죽을 수 있겠습니까?
부활의 소망이 있는 자는 다 그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은혜와 소망이 충만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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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이 즐거워야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모든것이 긍정적으로 보이게 되므로
얼굴엔 늘 미소를 짓게되고 밝고 유쾌하게 된답니다.
얼굴에 환한 웃음과 함께 오늘도 멋지게 시작하시고요.
항상 웃음이 있는 그런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