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심(心) / 이치운
살아 움직이는 것은 ‘먹는 것’이 필요불가결하다. 먹지 않고는 사람이든 동물이든 살아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허기진 배를 채운 후에야 삶에 대한 희망도 품을 수 있고, 예(禮) 또한 차릴 수 있다.
식당이나 가게에 붙은 간판들이 오가는 사람들을 유혹한다. 올망졸망한 간판은 식욕의 미끼가 된다. 유행하는 옷을 멋지게 차려입은 마네킹은 식당거리에서는 맥을 못 춘다. 외벽이 시커멓게 그을려 있고 기름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식당에서 나오는 전 부치는 냄새는 한때 철공 일을 했던 추억을 미끼로 나를 유혹한다.
70년대 말 전포거리는 철물 부속 골목이었다. 10대 후반을 이곳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쇠를 두드리고 용접을 했다. 섬에서 배를 타다 야반도주해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던 나에게 도시에서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험한 생계 골목이었다. 돈독한 우정을 다졌던 친구들과 동생들을 만난 곳이기도 하다.
부산에 와서 처음 정을 붙인 곳은 전포동 부속 골목 독서실이었다. 잠잘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은 협소한 은신처였다. 공부할 때는 2인용 책상이 되지만 잠잘 때는 0.3평 정도의 빈 곳에 몸을 웅크려 의자가 있던 자리에 몸을 구겨 넣는다. 구겨 넣기 수행을 5년이나 한 덕인지 아무리 작은 공간이라도 잠자리 탓을 하지 않는다. 구부리고 자는 습관은 엄마 배 속에 있던 태아의 자세라 오히려 편안하게 느껴졌다.
독서실은 화재 위험이 있어 취사를 엄금했다. ‘젊을 때는 돌도 소화시킨다’는 이야기처럼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젊은 학생과 직공은 독서실 출입구 셔터가 내려지기만을 기다렸다. 관리 직원의 묵인 아래 라면 한 봉지를 주머니에 넣고 독서실 벽을 타고 넘었다.
전포성당 도로변은 포장마차가 집결하는 장소다. 새벽 3시가 되면 영업을 마친 포장마차가 세워진다. 어느 마차에든 몰래 들어가 꺼져가는 연탄불에 라면을 끓여 먹고 하루 허기를 달랜다. 먹고사는 문제가 고민이었던 20대 초 나와 친구들은 몸에 지방이 없어 체중 감량에 걱정이 없었다. 허기진 생활이지만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루 세끼 먹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무엇을 먹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다. 반찬 투정할 게 없어 좋았다. 절식(節食)은 당연했다. 자연스럽게 장수에 도움이 된다니 이 또한 덤이다.
형편이 조금 나아지면 서면 은하극장 골목에 있는 대영식당을 찾는다. 부엌일을 하고 있는 아주머니는 시골 할머니처럼 후덕했다. 밥을 먹고 식당 문을 열고 나오면 뒷문에서 기다리다가 누룽지를 신문지에 둘둘 싸서 건네주면서 한마디 덧붙이곤 했다. "젊어서 배곯으면 몸이 크지 않고, 배고픈 서러움을 겪다 보면, 성격이 외골수가 되기 십상이다." 그러니 배곯지 말라 하셨다. 그때 얻어먹은 누룽지 덕분에 성격은 끈질기게 되었고 잘 누른 누룽지처럼 구김살이 없다.
종종 동물 단백질을 먹고 싶을 때가 있다. 이럴 때는 내기 축구에 참가한다. 직장 팀과 동호회 팀이라 두 쪽 모두 전력이 만만치 않다. 시합이 다가오면 독서실 원생 중 공 좀 찬다는 사람들을 수소문한다. 시합에서 이기면 친구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비용이 생겨서 신나고 시합에 참여한 원생들은 스트레스를 풀 기회를 얻는다. 일주일 내내 의자에 앉아 공부하는 터에 몸 풀 기회가 어디 흔한가. 운동할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 한다.
나는 공을 차본 경험이 많지 않아 발이 아닌 몸으로 했다. 심판 눈에 띄지 않도록 교묘히 반칙을 한다. 몸으로 밀치면서 함께 넘어지는 할리우드 액션을 연출한다. 심판 눈에는 몸무게 50㎏ 정도밖에 나가지 않는 내가 반칙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폭력을 누구보다도 싫어하지만 고기가 필요한 친구들을 위해서는 부득이 할 수밖에 없었다. ‘법보다 주먹이 먼저인 세상’이지만 섬에서부터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을 혐오하게 키워졌다. 거듭 말하지만 축구장에서만 그렇게 한다.
동물 단백질이나 채소 섭취가 더 필요한 친구들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 교회든 절이든 행사가 있는 날은 음식이 넉넉히 준비된다는 걸 안다. 음식 때문에 종교 행사에 참석하는 파렴치는 아니다. 단백질이 필요한 친구들은 예배에 참석하고, 채소로 건강을 챙겨야 하는 친구들은 사찰 행사에 참석한다. 음식이 남아 버려지는 일이 없도록 환경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이다.
채소를 유난히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서울 불광사 큰스님에게 원일이라는 법명을 받고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아 나중에 춘천에 있는 큰 절의 주지가 되었다. 단백질 보충을 즐기던 후배 한 명은 새벽 기도와 주말 예배는 물론 각종 행사에도 꼭 참석했다. 이런 열성으로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 부목사로 활동 중이다.
독서실 생활 2년째였던 나는 먹고사는 일에 서툴러 영양실조 진단을 받은 적이 있어 식단에 신경을 써야 했다. 채소와 단백질을 고루 섭취하기 위해 격주로 예배와 불공을 드리러 다녔다. 최고의 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성경과 반야심경에 나오는 가르침을 성실히 실천한 덕분인지 나는 문학도가 되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를 얻었으니 먹는 것 때문에 종교 행사에 참석했다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하나님과 부처님은 “세상 모든 일에는 뜻이 있다.”고 하셨다. 친구들과 나는 밥의 진실에 따라 삶의 길을 따랐으니 성인께서 도와주셨다고 믿는다.
모든 생명체는 먹어야 산다. 초식동물은 풀을 먹고 육식동물은 다른 동물의 살을 먹는다. 잡식인 인간은 웬만하면 무엇이든 먹는다. 하지만 과식은 금물이다. 과식은 몸을 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욕심으로 먹기 때문이다. 무엇을 먹든 음식의 마음을 먹어야 몸과 마음을 키운다.
사물에도 마음이 있다. 나무에는 목심(木心)이 있고, 흙에는 토심(土心)이 있고, 돌에는 석심(石心)이 있듯 밥인들 어찌 밥심(心)이 없겠다고 할까. 밥도 자신을 지성으로 먹어주는 사람에게 곡식의 진심을 전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