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하나님과 화목하고 평안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청컨대 너는 그 입에서 교훈을 받고 그 말씀을 네 마음에 두라
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왕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리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서 빛이 비취리라
네가 낮춤을 받거든 높아지리라고 말하라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구원하시느니라
무죄한 자가 아니라고 건지시리니 네 손이 깨끗함을 인하여 그런 자가 건지심을 입으리라"욥기22:21~30
엘리바스의 명설교가 욥이 당하고 있는 고난의 숨결을 역류시킵니다
우리들의 삶에 조건없이 해와 비를 주시는 하나님의 온전하심이 아니면 위로받을 수 없는 욥같은
자들이 의외로 우리 주변에 많이 있읍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 있다면 악인과 선인에게 차별치 않는 사랑을 퍼붓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만큼 권위를 행사하는 것은 없읍니다
그래서 "절대적 사랑의 절대적 권위"입니다
그 어떠한 악도 그분의 사랑을 막을 길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를 못박는 일에 동참한 당대 예루살렘의 종교적인 모든 기득권자를 용서했다는 걸
안다면 우린 더 더욱 그분의 사랑의 권위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나나 저들이나 그 용서에 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저런 천박한 나사렛 마을에서 태어난 젊은 청년이 자기를 감히 용서하느냐며
자존심이 상할뿐입니다
묵상 연구하는 율법과 말씀을 통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율법과 말씀을 통해 자신들에게 익숙한 선악간의 명암을 더욱 더 선명케하기 위해
경계에 경계를 더해 가며 그들의 숨결과 이상으로 빚어 만든 것이 그들의 하나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이런 고착화된 원칙과 보상의 세계에 안주하려는 것을 끄집어 내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에 내게도 고난이 없었다면 나도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고난을 통과하면서 욥은 이걸 절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만으로는, 심지여 하나님의 말씀으로도 자기를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고난 당하기 전엔 그나마 그 수준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엄청난 재앙은 아무리 탄식해도 그 무게가 재앙보다 더 무거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재앙의 세계로 충만히 임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런 계시의 무게에 짓눌러 있다 합니다
그 계시를 원만히 이해하기를 사모하는 맘은
하나님을 직접 뵙기 원하는 절대절명의 가난한 심령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만 이해하기도 버겨운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온전하심이 무엇인지 알라고
"그리스도"를 성경에 담아 주셨읍니다
그리스도를 상고함으로서 우리는 온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려면 베드로가 그러했듯이 필연코 아버지의 계시가 주어져야 가능하다걸 고백하게 됩니다
결국 그리스도(진리 영생)을 얻으려함에 우리들의 모든 수고가 얼마나 무익하다는 걸 고백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무익함의 인식은 내 뜻을 내려놓고,
내 주권을 포기하고 아버지 뜻에 순종함으로서 내 속에 아버지를 채워나감으로서
가장 확실한 우주적인 신분을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도 그리스도안에서 아버지의 아들이되었다는 것 말입니다
욥이 사모하는 바 심판자로부터 영영 멀리 있게 된 신분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인간(나사렛 예수)에게서 그리스도(하나님 보좌에 앉아계신 그리스도)로 넘어가는 과정(승천)속에
필연코 임하게 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고난입니다
내 뜻과 내 주권의 한계 밖, 곧 아버지 뜻과 아버지 주권의 경지로 이사가는 과정은 고난과 시련외에는 없읍니다
다윗이 얼마나 부르짖었으며 심지여 예수조차 살아생전 큰 통곡과 간구로 아버지께 부르짖어 십자가를 지는
응답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한계 밖으로 가면 얼마나 큰 자유와 기쁨과 평안함과 생명이 기다리고 있는지요.
욥은 지금 인간들이 이해하는 선악간의 원칙과 보상만으로는 메꿔지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도무지 그 세계로부터 들려오는 뚜렷한 목소리가 없다는 것에 몹시도 가난해져 있는 것입니다
굳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에 접근하여 묵상한다면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지금, 벌써부터, 충분히 "복이 있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친구들의 멋진 말들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자기를 만족시켜 줄 자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말할려면 반드시 충족 조건이 채워져야만 합니다
곧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담고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말씀조차 울리는 꽹과리라는 말입니다
욥은 세 친구들 못지않게 하나님 말씀에 최종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읍니다
그럼에도 욥은 그들의 말을 용납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수없이 저항합니다
그 저항의 극치는 욥기 27장 5절로 표현되어집니다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하지 않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산을 옮길만한 믿음일지라도,심오한 진리일지라도, 천사의 말일지라도, 심지어 내 몸을 불살라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꽝이라 했읍니다
욥기 23장은 욥의 가난함이 얼마나 절대적인 가난함인지 잘 표현해주고 있읍니다
우린 반드시 그 분이 아니면 채워지지 않는 가난함을 늘상 지니고 살아야하는 자들입니다
다른 것 수두룩히 가득 가득 갖다 주어도 하나님이 아니면 안되는 가난함이 내 속에 있지 않으면
나는 이미 내 스스로 부요한 자요,
내 스스로 부족함 없는 자요, 내 스스로 부자입니다
이런 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가난함을 알지 못한다, 네 벌거 벗은 걸 알지 못한다 네 눈 먼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거움이라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곳을 알꼬 그리하면 그 보좌 앞에 나아가서 그 앞에서 호소하며
변백할 말을 입에 채우고 내게 대답하시는 말씀을 내가 알고 내게 이르시는 것을 내가 깨달으리라
그가 큰 권능을 가지시고 나로 더불어 다투실까 아니라 도리어 내 말을 들으시리라
거기서는 심판자에게서 영영히 벗어나리라
그런데 내가 앞으로 가도 그가 아니 계시고 뒤로 가도 보이지 아니하며
그가 왼편에서 일하니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편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니사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정한 음식보다 그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구나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킬까 그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그의 앞에서 떨며 이를 생각하고 두려워하는구나
하나님이 나로 낙심케하시며 전능자가 나로 두렵게 하시나니
이는 어두움으로 나를 끊지 아니하셨고 흑암으로 내 얼굴을 가리우지 아니하셨음이니라"욥23:1~17:욥기 24:1
첫댓글 큐티본문(5/8)-욥기23:1~17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