石회장 프로필/▲1921년 평양 출생 ▲1944년 일본 중앙대학 법과 졸업 ▲〃 6월 한국광복군(제3지대의 전신인 제6징모처)에 입대 ▲〃 11월 중국 중앙군관학교에서 한국광복군 간부과정 졸업 ▲1945년 1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근무 ▲〃 4월 한국광복군 제2지대와 미국전략사무국(OSS) 특수훈련과정 수료 후 대위 임관 ▲〃 8월 한미합동 국내 정진 작전에 참가해 국내 공작요원으로 활동 ▲한국독립유공자협회 부회장 ▲(현)광복회 감사, 독립기념관 이사, 한국광복군동지회장(제9대) ▲건국훈장 애국장
올해는 우리 민족이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조국광복을 맞은 지 60년째가 되는 뜻 깊은 해이다. 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광복군이 창설된 지 65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선열들의 숭고한 뜻과 거룩한 희생에 보답하는 길은 21세기 세계 인류국가로 우뚝 설 도약의 기반을 만드는 것이다. 민족의 긍지를 높이고 진실한 교훈을 찾아내 후손들에게 물려 줄 역사를 재정립할 때라고 본다. 석근영 한국광복군동지회 회장은 무엇보다도 국군의 뿌리인 광복군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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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광복 60주년을 맞은 감회가 있다면.
▲광복군이 사상과 이념을 떠나 중국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인 것처럼 각계각층에서 남과 북이 하나되기 위한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으면 한다. 역사적으로 뜻 깊은 올해에는 그 어느 때보다 다방면으로 남북 교류를 활성화했으면 한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유학하며 항일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일본 대학 시절 동료 학생들과 일본에 대항할 방법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여러 번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거나 죄 없이 잡혀가 매 맞고 감옥에 들어간 학생도 많았다.
1944년 일본군 학도특별지원병 명령에 따라 문과학생 대부분이 지원병으로 강제 징집됐다. 나는 몇몇 친구와 중국으로 도피했으나 곧바로 부친이 연행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어쩔 수 없이 징집에 응했다. 고향인 평양에서 일본군으로 징집됐으나 중국에서 훈련 도중 탈출했다. 학도지원군 56명이 새벽에 탈출한 것이다. 동료 학생이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아찔한 모습을 보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후에 나는 한국광복군에 들어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배경은 무엇인가.
▲임시정부는 1940년 9월17일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군대를 가지고 전쟁에서 성과가 있어야 발언권을 확보하고, 연합군과 함께 일본에 선전포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광복군 창설은 조국 독립에 신명을 바치려는 동포들의 지원과 성금이 큰 힘이 됐다.
―한국광복군이 중국 충칭(重慶)에 근거지를 마련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장제스 군대가 충칭까지 후퇴하면서 임시정부도 함께 이동하게 됐다. 광복군은 임시정부를 따라 이동할 수밖에 없었고 후에 각 지대를 편성하게 됐다.
―광복 이후 한국광복군의 옛터와 활동지역 등을 방문한 적이 있는가.
▲광복회 주최로 갔다온 적이 있다. 광복군 출신 20∼30명이 세 차례에 걸쳐 현지를 찾았다. 당시 광복군 총사령부 터에는 식당이 들어서 있었다. 충칭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가 뚫린다고 하여 표지석이라도 세우려고 했으나 허용되지 않았다. 중국 정부에 요구해 주변에 당시의 건물을 복원하려 했지만 이마저 거부당했다. 다행히 임시정부가 들어섰던 건물은 복원됐다.
―당시 한국광복군과 중국군과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중국 내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므로 임시정부 설립부터 중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더군다나 임시정부의 군대조직인 한국광복군의 경우 중국 군사위원회의 각종 지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광복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에 참가해 성과가 있었다면.
▲영국 군대와 함께 인도와 버마(미얀마의 옛이름) 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상대로 교란작전을 펴 승리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중국 군대와의 합동작전은 수시로 있었다. 1945년 들어 미국 군대와 공동으로 국내 정진 훈련을 했다. 나는 폭발이나 요인 암살 등의 특수훈련을 받았다. 일본이 원자폭탄 공격을 받고 항복을 선언해 국내 진공이 무산되고 말았다.
―한국광복군동지회는 언제 설립했는가.
▲광복 후 이승만 정권의 친일파 세력의 방해 때문에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생존 회원들이 모여 1965년에 설립했다. 독립운동단체인 만큼 일반인들과 가까이 하려고 노력했으나 재정이 어려워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동안 우여곡절은 없었는가. 현재 회원 중 생존자는 몇명이나 되나.
▲변변한 사무실 하나 얻을 돈이 없어 서울 시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정부로부터 대우를 못 받은 것이 가장 서러웠다. 지금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측에서 사무실을 무상으로 내주고 있다. 사무실은 재향군인회의 찬조금과 회원 회비로 꾸리고 있다.
설립 당시 550명의 회원이 있었으나 대부분 사망하고 현재 150명 정도 살아 있다. 대부분 80세 이상 고령으로, 정기총회나 송년회 때 만날 수 있다. 우리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항전한 전우들이어서 만나기만 하면 민족과 나라 걱정이 앞선다.
―같이 활동한 한국광복군 중 사망 이후 북한에 안장된 회원이 있는가. 있다면 북한을 방문해 동료의 묘에 참배할 계획은.
▲광복군 회원은 없으나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던 김규식(부주석), 조소항(외무장관), 엄항섭(선전부장) 등 7명이 북한에 안장돼 있다. 이들은 한국전쟁 때 납북돼 사망했으나 빨치산 출신들보다 격이 낮은 아래쪽에 묻혀 있다고 한다.
5년 전 통일부에 방북 신청을 했다. 북측에 안장된 국무위원 묘소 참배가 목적이었지만 허가가 나지 않았다. 일부 회원이 개인 자격으로 다른 나라를 통해 방북한 걸로 알고 있다. 기회가 되면 임시정부 유족들과 함께 광복군 회원들도 방북해 참배하고 싶다.
―절차상 어려움이 있겠지만 북한에 가게 되면 빨치산 출신들과 만날 뜻은 있는가.
▲빨치산 부대에서 밥해주던 여성들을 포함해 20∼30명의 대원이 살아 있다고 들었다. 북한 정권은 이들을 각별히 대우한다고 한다. 항일 투쟁 당시 광복군과 빨치산은 공동의 적인 일본 군대를 상대로 싸웠기 때문에 서로 미워할 이유가 없다. 남북이 갈라져 서로 왕래하지 못했지만 만나게 되면 할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현 시점에서 한국광복군 회원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무엇인가.
▲사실 우리가 임시정부에 있을 때는 남북이 없었다. 독립을 이룰 것으로만 생각했지 분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국제정세에 의해 남북이 갈라졌지만 반드시 동질성을 회복해 통일을 이뤘으면 좋겠다. 통일에 대해 주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회원들은 하루라도 빨리 통일돼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나라가 더욱 발전했으면 한다.
―그동안 한국광복군에 대한 연구 작업은 어느 정도인가.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체계적인 연구로 상당한 진전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안다.
―대한민국 국군과 임시정부 한국광복군과의 관계는 어떠한가.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받아 수립됐다. 따라서 임시정부의 광복군이야말로 대한민국 국군의 정통성 있는 뿌리라고 볼 수 있다. 신세대 군인에게도 이러한 역사적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었으면 한다.
―국군의 날이 한국광복군 창설일과 다른 이유는.
▲국군의 날인 10월1일은 한국전쟁 때 연합군과 함께 북으로 진격한 날이다. 이날을 기념하려고 국군의 날로 정한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어 남북통일을 이루자는 시기에 냉전시대의 산물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동안 청와대와 국회, 국방부에 한국광복군의 정신을 이어받으려면 광복군 창설일인 9월17일을 국군의 날로 정하자고 건의했지만 아직까지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들의 망언이나 중국의 역사왜곡에 어떻게 대처해야 한다고 보는가.
▲기막힌 일이다. 우리나라가 빨리 단결해 국력을 키우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좌우가 갈등하고 지역을 들먹이며 싸울 때가 아니다.
―한국광복군 유가족 대우 등에 대해 정부에 건의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면.
▲지금까지도 형편없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가시밭길을 걸어온 유가족들에 대한 배려가 너무 인색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특히 독립운동가 후손들에게 국가보훈처가 지급하는 보상이나 연금에 불만이 많다. 원래는 3대를 보상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2대로 줄어들었다. 즉 아버지와 아들 대까지만 보상해 주고 있다. 그것도 장자에게만 해주는데, 모든 자녀에게 혜택이 주어져야 한다고 본다.
―올 한국광복군동지회의 주요 행사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
▲다음달 14일 국립현충원 지청천 장군 묘역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관 백산 지청천 장군 48주기 추도식에 이어 한성수 열사 60주기 추도식(5월13일)이 있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 광복군 무후선열 묘역에서 한국광복군 무후선열 17위 추모 제전과 한국광복군동지회 정기총회(5월 27일)가 있다. 백범기념관에서는 한국광복군 창군 65주년 기념식 및 학술회의(9월 1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 선전포고 64주년 기념식 및 강연회(12월 9일)가 있다.
첫댓글 아쉽게도......... 광복군과 현재 한국군은 아무런 연고가 없으니-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