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묘년, 토끼의 문화적 상징성
2023. 2. 옛사람의 향기
정은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왕실문헌연구실장
올해는 검은 토끼의 해 계묘년이다. 토끼는 십이지 중 네 번째 동물이며, ‘卯’는 문짝을 밀어 여는 형국으로 시작을 의미한다. 묘향은 정동(正東), 경칩과 함께 시작하는 묘월은 음력 2월, 묘시는 오전 5~7시에 해당한다. 여기서 동쪽은 해가 떠오르는 방향이며, 음력 2월은 만물이 땅을 뚫고 나오는 시기이고, 묘시는 하루의 시작을 여는 시간이기도 하다.
동양문화권에서 토끼는 달과 얽힌 신화와 전설부터 옛 고사와 관련된 사자성어의 주인공이자 옛 민담까지 다양하게 등장한다. 따라서 토끼에 얽힌 옛 이야기와 미술작품을 함께 살펴보는 것도 계묘년 새해를 맞는 색다른 의미가 있을 듯하다.
1. 달 속에서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
시문
중국에서 달과 토끼의 관계는 한대에 이르러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한대 화상석과 동경에서도 달 속의 토끼를 확인할 수 있다. 문헌에 달과 토끼가 처음 등장한 것 역시 전한 시기로 유학자 유향이 쓴 『오경통의(五經通義)』에 의하면, “달 가운데 토끼와 두꺼비, 나무꾼이 있다[一月中有兔與蟾樵].”라고 하였다. 후한 시기에는 곤륜산의 서왕모 신화와 결합되면서 토끼가 서왕모의 권속으로 절굿공이를 들고 불사약을 찧는 모습으로 등장하며, 기원후 500년경부터 점차 계수나무를 배치하고 좌우에 토끼와 두꺼비가 함께 약을 찧는 모습으로 등장하였다. 이에 이백은 「파주문월(把酒問月)」에서 “옥토끼는 봄이고 가을이고 불사약만 찧는다니, 항아(姮娥)는 외로이 지내며 누구와 이웃할까.”라는 시구를 남기기도 하였다. 여기서 항아는 자신의 남편 예(羿)에게 서왕모가 내린 불사약을 훔쳐 먹고 신선이 되어 달로 도망한 여인으로 달 속에 옥토끼와 함께 두꺼비의 모습으로 등장하곤 한다.
송대 이후에는 달의 도상에서 계수나무가 점차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선약을 찧는 토끼가 중심을 이루게 된다. 한편 옥토끼 위에 드리운 잎이 무성한 계수나무는 한나라 서하의 나무꾼 오강(吳剛)의 전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나라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에 의하면, 오강은 선술(仙術)을 배우다가 죄를 지어 월궁으로 귀양을 가서 옥도끼로 계수나무를 찍어 넘기는 일을 해야 했는데, 그가 게으름을 피우는 동안 찍혔던 계수나무의 상처에 다시 새 살이 돋는 일이 반복되면서 월궁의 계수나무가 영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옛 그림에서도 계수나무 아래 불사약을 찧는 옥토끼가 자연스럽게 조합을 이뤄 등장하여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소재가 되었다.
2. 매에게 제압당한 교활한 토끼
매가 토끼를 사냥하는 그림은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과 일본에서도 유행하였는데, 새해를 맞아 세화(歲畫)로 많이 그려졌다. 여기서 매는 제왕 또는 충신을, 토끼는 교활한 소인배를 상징하여 이러한 그림 소재는 제왕이나 충신의 위엄으로 교활한 간신을 제압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김원행은 『미호집』에서 소나무와 매를 그린 병풍을 보고 “매가 바야흐로 그 꼭대기에 앉아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노려보다가 몸을 움츠려 아래로 내려가려 들면 토끼는 어느새 숨어 얕은 풀 속에서 숨죽이니, 그 궁색하고 위축됨이 가련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통쾌한가.”라고 하였다.
김원행이 보았던 그림의 소재는 최북의 <토끼를 응시하는 매> 외에도 명나라 화가 여기(呂紀)가 그린 <토끼를 쫓는 매>를 참조할 수 있다. 여기의 그림에는 매서운 눈빛으로 도망가는 토끼를 응시하며 급하강하는 매와 위기의 순간 당황하며 숨을 곳을 찾는 토끼 사이의 긴장된 순간을 생생하게 묘사하였다. 또한 현재 심사정의 <토끼를 제압한 매>는 날카로운 매의 발톱에 제압당한 토끼를 그린 작품으로 당시 세화로 유행했던 화제임을 알 수 있다.
3. 털빛 고운 가을토끼
서거정은 그림 병풍 중 토끼를 보고 읊은 시에서 “길짐승으로 예부터 성정이 어둡지 않으며, 중산의 무성한 풀숲에서 편안히 조는구나. 묻노라 너는 어찌하여 세 굴을 영위하느냐. 섬궁(蟾宮)에 가면 보금자리 얻어 살 만도 하거늘.”이라 하여 중산의 토끼, 교토삼굴(狡免三窟), 달 속에 방아 찧는 옥토끼 등 토끼와 얽힌 이야기를 시에서 모두 언급하였다. 여기서 중산은 지금의 안휘성 선성(宣城) 북쪽과 강소성 율수(溧水) 일대의 지명이다. 진(秦)나라의 장군 몽념(蒙恬)이 중산의 토끼털로 처음 붓을 만들었다고 전하며, 이후 중산에서 나는 토끼털로 만든 붓이 ‘중산호(中山毫)’로 유명세를 얻었다.
토끼털이 가장 정교하게 그려진 그림 중 하나가 바로 최북이 그린 <조를 탐하는 가을토끼>이다. 이 그림은 최북이 토끼를 직접 관찰하여 사생한 것으로 보인다. 잘 익어 고개 숙인 조의 열매를 탐하는 토끼의 진지한 표정과 극세필의 털 묘사에서 마치 살아 있는 토끼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하다. 이 그림은 사실적 표현의 영모화에 뛰어났던 변상벽이 그린 토끼 그림과 비교했을 때도 그 사실적 묘사력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산림경제』에 의하면, 토끼는 가을이 깊어져야 금기(金氣)가 온전해져 먹을 만 하다고 하였는데, 그림 속 살진 토끼의 털빛도 매우 윤택해 보인다.
‘토각구모(兎角龜毛)’는 동진의 신이소설인 『수신기(搜神記)』의 “상나라 주왕(紂王) 때 큰 거북에게 털이 나고, 토끼가 뿔이 났으니 이는 전쟁이 일어날 조짐이었다.”에서 유래한 말로 꿈같은 세상의 분분한 일을 의미한다. 연초부터 세계 각처의 전쟁과 자연 재해 등 힘겨운 소식이 전해지지만, 자연에서 많은 새끼를 낳아 새 봄의 시작을 여는 토끼의 ‘풍요와 번성’이라는 길상적 의미가 올 한해 우리에게 더 큰 힘을 발휘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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