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서사 외 5편
배진우
방향을 좋아하는 눈빛이
책갈피를 끼운 페이지에서 머뭇거린다
밖에선
말을 더듬던 남자가
손잡는 걸 싫어하던 애인에게
새로운 방법을 설명해주었다
낮에 찾은 단어처럼
고양이의 동료는 기지개를 켠다
첫 고백을 훔친 계절이 있었고
익숙하지 않아서 좋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고양이가 아프면 무슨 색으로
덮어주어야 하나
무늬와 발자국
겨울에 태어난 동물에게는 하얀 애칭이
고양이는 고양이만 떠올리게 하니까
멈춘 책장마다
어두운 호기심에서 시작된 서사가 있다
짧은 범죄와 그로 인한 갈등
마른 입술을 가진 나와
더듬거리는 배경이
어두우면
고양이가 운다
고양이는 앞으로도
둥근 것이 밤인 줄 알고
사물의 월식
달이 한 주기를 끝내면
시선부터 의심한다
렌즈를 끼고 잠이 들었던 하루
눈 뒤로 넘어 간 렌즈는 원래 목적을 잃고 흰자 검은자를 오가며
볼 수 없던 나의 안을 보고
시력이 가담할 수 없던 뒤편으로 숨고는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눈동자를 한 바퀴 돌아온 렌즈는 월식을 끝낸 달처럼 나와 가까워졌다
눈을 감고 떴을 때 없었던 잔상이 얼룩을 만들면
렌즈가 기억하던 크레이터라 믿었던 날
별자리처럼 그럴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패한 각도에 따라 흔들리는 달의 종류는
물건 아닌 물건 같아서
시선부터 의심한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는 건
달의 시작을 궁금해하며
여백에서 안부를 채우는 일
손 그림자에 묻힌
앞에 쓴 필체가 낯설게 기울었다
반달 같은 눈을 하고 보면
사연으로 부푼 사물이
지금과 가깝고 지금이 아픈
첫 문장을 괴롭힌다
눈 안에서 달을 대신해 공전하던 렌즈가 있었다
왜곡된 다른 사람의 원근을 무시하던
나는 달과
달이 아닌 먼 것들에 관하여
시선부터 의심한다
사이
무대 위 배우가 선다 나는 그때 필요처럼 답답해졌고 너를 두 번 본다 너를 많이 닮았다는 말을 들었다 다른 세상의 기술 같았던 너의 인상
희로애락을 담기에 너의 얼굴은 너무 작다며 가까운 벤치를 본다 지금은 딱딱한 것 앞에서 어떤 연기를 시작해야만 할 거 같다
창가 바로 앞에 꽃을 심었다 너와 함께 했지만 꽃말은 홀로 좋아했던 꽃을 들고 대기실 앞을 서성인다 붉게 걸음을 유지하던 네 모습을 따라한다
내일을 코스프레하던 태양, 몇 개의 움직임 앞에서 정색하는 너, 달이 대역으로 살아간 밤, 나를 많이 닮았다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다
내가 아끼던 발음들은 너도 좋아했지 우리에게 선택은 많았고 인연은 없었다 첫 대사와는 무관한 공연이 시작되려 했다
연기라도 아픈 것은 하지 않기로 한다 낫는다는 걸 보여줄 수 없으니까 창밖에서 출처 없이 피어나는 연기를 풀어주고 싶다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를 악역으로 너는 남겠지 우리는 일기를 같이 쓰던 둘도 없는 친구니까 가파른 조명 아래 너의 뒤집힌 발성과 함께
무대 위 네가 선다 안에서 밖을 노크하던 첫 지문은 멀리 떠날 거라는 복선 같아서
낙엽이 없는 나라에서 온 사람 너는 너의 식대로 그 역할을 해낼 것이다
왼손잡이용 햄버거
한 입 베어불면 그곳에서 햄버거는 시작합니다
왼손잡이에게는 왼손잡이용 햄버거가
오른손잡이에게는 오른손잡이용 햄버거가 필요합니다
양손으로 잡고 먹던 경험은
햄버거의 회전을 고려하지 못한 일
좌지우지해도
두 손 모두 난해해 보이니까
어쩐지 쉽게 풀리는 포장지를 벗기면서
구매 후 빠른 시간 내에 의심을 해야 했습니다
정확하게 먹고 싶은 음식은 종종 식욕을 앞서가고
일식은 태양이 달에 가려지는 것입니까?
달이 태양에게 가려지는 것입니까?
그랬다면 지구는 어디에?
문은 미는 것이 맞겠습니까?
당기는 것이 맞겠습니까?
그랬다면 나는
양파나 토마토처럼
햄버거에는 둥근 게 들어갑니다
둥글지 않은 것은
둥글게 만들어 넣습니다
재료의 순서는 정확합니다
참깨빵 위에 순쇠고기 패티 두 장 특별한 소스 양상추……
치즈를 들추어 피클을 빼기 위해 주춤하다가
맛에도 순서가 있었고
따라온 그늘이 자기 자신을 덮어가는 중이면
식은 음식과 보낸 시간들
끝에서는 음력처럼 속삭이던 나날을 잠시 떠올릴지도
한쪽이 부족한 사람이
왼쪽 벽을 잡고 따라가는 애인의 기념일을 기억하고
누가 나를 사랑해달라고 했나요?
질문이 지워질 때까지
답변을 대신하는 물음들만 있습니다
햄버거를 앞에 두고 짧게 명상하는 사람도 있었고
나는 그에게서 멀리 돌아왔습니까?
같은 층을 나누어 가졌지만
햄버거는 빵-패티-빵
일식은 태양-달-지구
틀린 문제만 틀립니다
물음과 거짓말은 서로 자리를
바꿀 줄 알고 있습니다
일식은 자기보다 작은 것을 삼킵니다
한입 베어 물면
들쭉날쭉 자국이 남고
가지런한 것은 바깥에
어느 곳이든 햄버거는 시작합니다
모서리
서로의 태몽을 거두어들인 밤 달이 네모지다
가지지 못해 내 것이 된 것들
나를 보고
마음이 마음을 잃어버렸다
주름의 속성에서 멀리 벗어나지 못하는 파도
내 비밀이 있다면 영영 굳지 않는다는 것
있다면 그곳은 만지기 위한 곳
봉합이 실패하여 너덜너덜 부는 바람도
낡아 부스럼 많은 새벽도 스치는지 모르게
재회가 있다면
네모난 달맞이를 끝내며
각지지 않은 것을 숭배하던 부족은
환호를 지르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까
신음으로 밤을 낭비하던 입술은 모서리를 닮아가고
다섯 번째 발가락에서
부끄럽게 피고 지는 물집이 자랐다
만지면 만질수록 딱딱하게
지독한 농담처럼
나를 불러줘 빠르게 읽어줘
유통기한 없는 비누를 연구한 이들이
환생하여 그것으로 몸을 닦거나
매끄럽게 달에 이르는 거리를 잰다는데
없을 듯한 동작을 반복했다
세상은 세상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어려운 것은 없었다
모서리를 닮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태몽을
두 번 꾸었다는 여담을 들었다
예언
오랜 시간 보지 못한 친구에게서 가지런한 소문 같은 것을 느낀다
의자위에서 깜빡이는 전구를 갈아 끼우다가 요령이 부족한 까닭에 몇 번이고 나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질 때마다 옆방 사람들은 찾아왔다 소란보다는 내 방에서 흔들리는 의자 다리 같은 것이 서러웠다고 수명을 다한 것은 깜빡거리니까 새벽은 찾아오고
당분간,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으면 종이 한 장 위에 박힌 스테이플러처럼 멍청해지고는 했다
깜빡이는 것이 무섭다고 했더니 방법이 있어 누군가 크게 말했다 전구보다 눈을 더 빨리 감고 뜨면 어떻겠냐고 그의 말을 따라 빠르게 눈을 감고 떴다 세상은 온통 빛이거나 온통 어둠이었다
사랑하고 있는 짝사랑이 사랑하고 있는 짝사랑처럼
나쁜 짓을 하고 얻은 좋은 병처럼
기다리는 사람은 기다려야만 오는 것일까
기다리는 사람은 오고 있어서 오지 않는 것일까
전구는 끝을 향해 깜빡이고 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의 눈 감을 때 만들어지는 표정 같은 것이 홀로 그리워지고 위기를 기다리는 이 속눈썹 위에는 이미 결말이 자리 잡았다
오고 있어서 오지 않는 친구의 약속 같은 깜빡임
깜빡거리니까 깜빡일 때마다 나는 내 삶의 취향 이상은 되지 못하였다
— 《문예중앙》(2016년 / 봄호) , 2016년 《문예중앙신인상》 당선작(심사위원: 함성호, 오은)
배진우
경북 김천 출생.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6년 《문예중앙》 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