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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의 저자들 (안함로, 원동중, 이암, 범장, 이맥)
<삼성기 상>의 저자, 안함로安含老
안함로는 신라 진평왕 때의 도통한 승려이다. 성은 김씨이고,
안흥법사, 안함법사, 안함태安含殆 화상 등으로 불린다. 불교가
흥했던 신라의 대표적 고승 열 분을 기리는 신라 십성十聖 가운
데 한 분이다.
23세(601, 진평왕23) 때 수나라로 가서, 열반에 이르는 십승十乘
의 비법과 심오한 불교 경전과 진문眞文을 공부하고 5년 후 서역
의 승려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일찍이 세속 너머의 세계에 뜻을
두었던 그는, 사물에 통달하고 지혜가 밝아, 번뇌의 속박을 벗어
나 가고 머무름을 뜻대로 하였다. 또한 물 위를 걷고 공중을 날아
다니는 범상치 않은 신통력을 보였다고 한다.(<해동고승전>). 이
로 보건대, 그는 신교神敎의 선맥仙脈을 계승한 인물임에 틀림없
다.
<삼성기 상> 서두를 읽어보면, 그는 불교에만 국한되지 않고 유불
선儒佛仙과 상고시대 신교 문화를 회통한 당대의 고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선덕여왕 9년(640) 만선도량萬善道場에서 62세로 입적하
였다.
안함로(579 ~ 640)
유불선과 신교에 정통한, 당대 신라인들로부터 큰 공
경을 받은 고승. 경주 불국사 맞은편의 <신라를 빛낸
인물관>에 신라 십성 중의 한 분으로 모셔져 있다.
<삼성기 하>의 저자, 원동중元董仲
원동중에 대한 자세한 행적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세조가 팔도관찰사에게 수거하도록 유시한 도서 목록(<세조실록
>)에 안함로와 더불어 <삼성기>의 저자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전의 인물임은 분명하다. 이유
립은 원동중을 고려 때 인물로 비정하였다.
<단군세기>의 저자, 이암李嵒
[고려사] <열전>에 올랐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인 행촌 이암은 고려 25대 충렬왕 때 고성 이씨 이우李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행촌이란 호는 그가 유배되었던 강화도의 마을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뛰어난 학자와 관리가 배출된 고성 이씨 집안의 9세손이다. 증조부 이진李瑨은
고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학사를 역임하였으며 조부 이존비李尊庇 역시 과거
에 급제하여 文翰학사 및 進賢館 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부친 이우李瑀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나 문음제를 통해 경상도 김해와 강원도 회양의 부사를 지냈다.
[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의하면, 이존비는 환국과 배달의 역사에 대해 근본을
통하고 환단사상에 대해 깊은 안목을 가진 대학자였다. 할아버지 이존비의 정신을
그대로 전수받은 후손이 바로 행촌 이암이다.
이암은 10세 때 강화도 마리산의 보제사에 들어가 3년 동안 유가의 경전과 우리 고
대사에 대한 기록을 탐독하였다.
행촌 이암(1297~1364)
부모님이 그리울 때면 마리산 꼭대기의 참성단에 올라, 수천 년 전 그곳에서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올린 단군왕검의
역사의식을 가슴에 새겼다. 그 때 지은 시①를 보면, 십대의 어린 나이에 나라의 평안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염
원을 세우고 있다.
17세(1313년)에 문과에 급제한 이암은, 고려가 원나라의 내정 간섭을 받던 시기의 여덟 국왕 가운데 여섯 분을 모시
면서 격동의 삶을 살았다. 충선왕 때 나라의 관인을 관장하는 직책으로 시작하여 두 차례 유배를 당하고, 왕의 책봉
을 위해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였다. 이후 수년 동안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62세(1358년) 때 공민왕의 부
름에 환도하여 오늘날의 국무총리 격인 수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정치를 단행한 개혁군주이다. 그러한 공민왕의 곁에 이암이 있
었다. 문하시중이 된 그 다음 해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서북면西北面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가 되어 적군 4만 명
을 격퇴시켰고, 1년 후 홍건적의 2차 침입 때는 경북 안동으로 피난가는 공민왕을 호종하였다.
당시 고려 조정은 임금 앞에서 자신을 ‘臣’ 이라고 말하지 않을 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친원파의 간신이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이암은 청렴결백하여 사사로이 재물과 권익을 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건적을 격퇴하고 왕을
호종한 공로로 좌정승에 제수되기까지(1361년) 했지만, 공민왕의 부름에 응한 지 5년 만에(1363년) 사퇴하고 야인
이 되었다.
행촌에게는 고려와 조선의 여느 정치가, 학자와는 남다른 면모가 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 서적만이 아니라 동서
문화의 원류인 신교 사서를 탐독하여 신교의 삼신문화에 정통하였다. 첫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3년을 보낼 때도
우주의 이치와 천문, 풍수, 지리 등을 연구하는 독서를 많이 하였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나(1335년) 천보산 태소암
에서 1년간 머물 때, 소전素佺거사②로부터 인류 문명의 황금시절이었던 환단(환국-배달-조선)시대를 lrfhr한 고서
적들을 전수받았다. 신교문화에 통한 이암을 소전거사가 알아보고서 석굴 속에 감춰져 전해오던 사서를 전해준 것이
다.
이암은 나중에 그것을 근거로 <단군세기>를 쓰고, 당시 소전과 나눈 이야기를 바탕으로 환단시대의 도학을 논한 <태
백진훈太白眞訓>을 지었다. 이때 복애거사 범장과 청평거사 이명도 소전거사에게 비기秘記를 전수받아, 범장은 <북
부여기>를, 이명은 <진역유기>를 저술하였다. <단군세기>와 함께 이 사서들은 한민족의 상고 역사와 문화의 본래 면
목을 드러낸 소중한 문헌들이다.
이암이 언제부터 <단군세기>를 집필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단군세기> 서문을 보면, 그는 67세(1363년)에
사직에서 물러난 후 강화도로 건너가 선행리 홍행촌에 海雲堂을 지어 기거하면서 <단군세기>의 마지막 손질에 혼신
을 다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해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③
민족의 현실을 통탄하며 역사를 똑바로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웅변하는 <단군세기> 서문에서 그는 ‘인간은 어떻
게, 왜, 무엇을 위해 생겨나는가’, ‘인간으로서 가장 멋진 삶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명쾌한 필치로 밝
히고 있다. 인성론을 중심으로 신교의 역사관을 정리한 이 서문은 대학자로서의 지적인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만고의 명문장이다. 행촌 이암, 그는 동방 한민족의 역사를 유교사관도 불교사관도 아닌 한민족 고
유의 신교사관으로 저술한, 신교사관의 정립자이다.
<북부여기>의 저자, 범장范樟
고려 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 출신인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의 제자이다.
<용호재龍湖齋. 고려 말기의 복애(伏厓)
범장을 주벽으로 모신, 광주광역시 생용
동에 있는 금성 범씨(錦城 笵氏)의 재실...>
호가 복애伏崖이므로, 복애거사라고도 불렸다.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령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
사郎舍의 책임자인 간의대부諫議大夫 등을 지냈다.
그는 고려의 국운이 다한 것을 알고 사관仕官의 뜻을 꺾고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한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
람이다. 후에 고향 금성으로 돌아가 생을 마쳤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세 번이나 불렀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
찬한 <화해사전華海師全> 등이 있다.
이암의 생애 소개에서 밝혔듯이, 범장은 천보산에서 이암과 이명을 만나 한민족의 상고 역사의 진실을 드러낼 것을
결의한 후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를 저술하였다. 이는 당시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고, 나아가 고조선 → 북부여 → 삼국시대 → 고려로 이어져 온 국통 맥을 온전히 이어가
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표출이었다.
<태백일사>의 저사, 이맥李陌
이맥(1455~1528)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호는 일십당一十堂이며 행촌 이암의 고손자다. 1474년(서종 5) 진사시에 합
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학문에만 힘쓰다가 1498년(연산군 4) 44세 때 비로소 급제하였다. 성균관 전적 등 여
러 관직을 거쳐 사헌부장령에 이르렀다. 이때 장숙용(장녹수)이 연산군의 총애를 내세워 분에 넘치는 재물을 탐하고
사치를 일삼자 여러 차례 탄핵 상소를 올렸다가 결국 괴산에 유배되었다(1504). 귀양살이 시절에, 집안 대대로 내려
오던 책들과 노인들에게서 채록한 이야기를 토대로 우리의 옛 역사를 기록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높은 관직을 제수받아 사간원의 대사간에 임명되기도 하였으나 이의를 제기하는 대신들 때문
에 우여곡절 끝에 동지돈녕부사에 머물렀다. 이는 강직한 성품 탓에 조정 내에 적이 많았던 때문으로, 1517년(중종
12) 연산군의 후사를 세우는 일에 그가 취한 입장에서도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다. 그는 “연산은 종묘에 죄를 얻었으
니 속적屬籍이 마땅히 끊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66세 때인 1520년, 실록을 기록하는 사관인 찬수관撰修官이 디어 세조, 예종, 성종 때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수거하
여 궁궐 깊이 감춰 둔 상고 역사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금서들의 사실史實과 예전 귀양시절에 정리해둔 글들
을 합쳐 한 권의 책으로 묶어 <태백일사>, 즉 ‘정사正史에서 빠진 태백④의 역사’ 라는 뜻의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중국을 사대하는 조선의 악습과 성리학에서 벗어나는 학설에 대해서는 조금도 용납하지 않는 세태로 인해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못하고, 7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집안에 비장하였다.
<태백일사>는 한민족의 7천 년 상고 역사를 환국, 배달, 고조선 각 시대별로 세밀하게 다루면서 당시 신교 문화의 신
관, 우주관, 인간관, 역사관, 윤리관을 조목조목 전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교 문화 역사서의 완결본인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가히 한민족 신교문화의 집대성자라 할 수 있다.
(각주)
① “어쩐 강화에 밥 짓는 연기가 싫어
단군님 제단에 오르면 오히려 신선의 풍모가 가득한데,
강과 산은 변하지 않으나 백성의 풍속은 변하여 가네.
어려운 이 세상 누가 바로 잡을 것인가.
천하의 평안을 위해 나도 일하였으면” (이기문, <행촌선생 연보>)
② 소전거사 : 소전거사의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삼신과 하나 되어 온전한 사람이 되다’는 전佺 자를 쓴
그의 이름으로 보아 그는 신교문화의 전도佺道에 회통한 인물이다. 이명, 범장, 이암에게 비기秘記를 전한 그는 한
민족의 창세 역사를 되찾아준 배후의 손길이다.
③ 이암이 <단군세기>를 쓸 수 있었던 것은, 은퇴시기를 잘 판단하여 정적들의 보복을 피하고 마음을 닦아 욕심을
멀리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④ 태백 : 여기에서 태백은 큰(太) 밝음(白)이란 뜻으로 태백의 역사란 ‘동방 한민족의 대광명의 역사’를
말한다.
<환단고기> 안경전 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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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자료 옮겨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