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백련사/옮긴 글
강화도에는 이 절을 비롯하여 청련사(靑蓮寺),
황련사지(黃蓮寺址) 등 연화(蓮花)와 관련된
이름을 가진 절이 많은데,
그 유래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름을 전하지 않는 인도 승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절터를 물색하다가,
강화도 고려산에 이르렀을 때 그 산정(山頂)에서
다섯 색깔의 연꽃이 만발한 연지(蓮池)를 발견하였다.
인도승은 오종련(五種蓮)을 꺾어서 공중으로 날리고
그 연꽃이 떨어지는 곳마다 절을 세웠는데,
흰 연꽃이 떨어진 곳을 백련사라고 하였다.
다섯 절을 창건한 인도승은 산 이름도
오련산(五蓮山)이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이르러 고려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절은 416년(장수왕 4)에 창건하였으며,
그 뒤의 역사는 뚜렷하지 않으나 1806년(순조 6)에
건립한 의해당(義海堂)의 사리비(舍利碑)와
부도(浮屠)가 있다. 의해당은 휴정(休靜)의
6세손에 해당하는 선맥(禪脈)을 이은 고승이다.
그 뒤 1905년 인암(忍庵)이 박보월(朴寶月)과 함께
퇴락된 당우(堂宇)를 중건하였으며,
1908년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탱화를 봉안하였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극락전(極樂殿)과 삼성각(三聖閣)·
칠성각(七星閣)·대방(大房)·요사(寮舍)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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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님 남홍 스님/무정 정정민
내 누님 남홍스님,
꽃 같은 스무 살에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셨다.
회색 승의를 입고 빛이 나는
머리를 우로 약간 비스듬히 하고
걷는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내 이름을 부르기보다는 늘 "정 선생!'하고 부르셨던 누님은,
속세의 인연을 끊기 위해 동생을 동생이라 부르지 않았다.
내 이름이 있건만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동생까지도 높이는 누님의 철저한 사랑 앞에 오늘은 목을 놓아 울고 싶다.
누님이 이승을 떠난 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내가 성장한 뒤에는 누님이라 부르지 못했다.
누님을 늘 남홍스님이라 불렀다.
세상의 이름은 이미 버렸으니,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다.
사랑이 많아서, 앞에서
엄격하고 뒤돌아서서 우시는 누님을 생각하니,
지금 같은 가을이 정말 서럽다.
167cm의 늘씬한 키와 가냘픈 몸매,
그리고 약간 긴듯한 얼굴이 얼마나 미인이셨는지 모른다.
내가 어렸을 적에 나를 본 사람들은,
나를 만져보고 가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귀엽고 아름다운 아이였다고 한다.
내가 그 누님과 너무나 닮았으니,
얼마나 미인인가 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많은 청년들이 누나 만나기를 소원하여,
어린 나는 과자도 참 많이 얻어먹을 수 있었다.
나이 차가 10년이 조금 못되니, 그럴 만했다.
그런 누님이,
어느 날,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버린 것이다.
갑자기 이 속세가 싫어서 그런것 같지는 않았다.
사랑의 실연으로 아파서 그랬던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병이 있어서 부모와 형제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인 가운데 결행을 하신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20대 꽃다운 나이에
얼마나 비탄에 잠겼을까 생각하니 정말 마음이 아프다.
내 두 딸도 그 나이를 넘어섰으니 이해가 조금 간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흘렀다.
비구니 생활에 익숙한 세월이 되기도 했지만
병은 호전되지 않아서 더욱 몸이 약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내 나이 28세 되던 해였다.
전기에 관한 책을 내고 병이 생겨버렸다.
직장에 나가면서, 밤에는 학원강의를 나갔고,
새벽에는 어학원에 다니면서
한참, 많은 꿈을 꾸던 시절이 있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시간의 분주함은,
지나치게 긴장하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건강을 놓치고 말았다.
결국, 병이 생겨버린 것이다.
병원에 갔을 때는 요양을 요하는 심한 병이,
폐를 깊숙이 침투한 뒤였다.
정말 바쁘고 분주한 나이에, 가장 힘찬 도약을
하고 있는 나이에, 얼마나 절망적이었는지 모른다.
죽음 보다 더한 절망이었다.
육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고, 해야 할 일은 많은데, 그것을 할 수가 없었다.
이때 생각나는 분이 누님이셨다.
남홍스님이라 부르던 내 누님이었다.
자신도 아파서 스스로 몸도 잘 이기지 못하던 누님은
나에게 한 달 동안 주사를 놓았다.
엉덩이가 주사자국으로 굳어져 아파하면,
눈물을 흘리면서, 따뜻한 수건을 가져다주셨다.
본인도 누군가의 수발을 받아야 하는 아픈 몸인데도,
남들의 눈을 의식해야 하는 처지임에도,
가여운 동생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동생을 돌봤다.
그렇게 하기를 6개월을 하고 나니,
나는 많이 호전이 되었지만,
누님은 더욱 많이 지쳤다.
"이제는 더 이상 내가 너를 돌 볼 수 없으니,
네 건강은 네가 알아서 챙겨라!" 하시고는 뒤돌아서서 우셨다.
내가 앓았던 병이 결핵이었으니, 당시의 속설로는 잘 먹어야 산다고 했다.
그래서 고기를 먹어야 하고, 심지어는 사탕(뱀탕)도 먹어야 한다고 했다.
이런 희귀한 음식을 먹는 것이 어렵다거나,
준비하는 것이 어렵다기보다는 내가 요양을 하는 곳에서 먹기가 어려웠다.
살생을 금하고 육식을 금하는 사찰에서 그런 음식을 먹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음식을 먹었다.
사찰의 규율도 엄격하고 지켜야할 도리도 있었지만
동생을 사랑하는 누님의 사랑은
수십 년을 속세와 담을 쌓고 살아오신
엄격한 규율도 지키지 못하게 하고 말았나 보다.
지금 나는 그 누님을 생각한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를 그처럼 사랑한 누님을 생각하면서 울고 있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나무에 매달린 잎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다 떨어뜨리고 말겠다는 생각을 하는지,
찬 바람과 함께 천상에서 떨어지는 비는,
나무를 모두 두들겨 패는 듯하다.
그 비는 나뭇잎을 두들기는 것만 아니다.
가을에 쓸쓸하여 외로운 내 마음을,
더욱 쓸쓸하게 하고, 가슴 까지 두들기고 있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은 눈물이다.
연인이 아니라 할지라도 큰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갚지 못한 자의 눈물은 당연하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은 유난히 몸이 아팠던 과거를 되살리면서,
이제는 추억만 남아 버린 내 누님 남홍스님의 얼굴을 그리워한다.
내 그리움은 눈물이 절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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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거날 같이 백련사에 저와 동행했던 시인이신 정정민님 보내오신 글과 사진 입니다.
정취가 너무 좋습니다.
구름처럼 생긴 옛추억이 내 가슴을 스쳐갑니다.../ 조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