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은 한국의 레크레이션 다이빙 역사가 몇십년을(1999년 7월 기준)
흘렀는데도 변변하게 정리된 기록이 없다는것이 매우 안타까웠다.
현재 레크레이션 다이빙에 입문한 다이버들 중에는 테크닉이 중요하지
역사는 무슨 역사냐고 할런지 모른다. 이 나라에 태어난 사람이라면
단군신화는 알아야 되듯이 다이버라면 우리나라의 다이빙 역사 정도는
알아야 된다고 판단되어 우리나라 다이빙 역사를 요약하여 기술해 본다.
우리나라 다이빙 역사 또한 해군의 유능했던 다이버들에 의해 민간인
들에게 전파되었으며, 대학의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에 의해 도입되었고
보급되었다. 1963년 3월 대학의 모험심 많은 개척자들에 의해 남대문
근처의 골방에서 "한국스킨 스쿠바 클럽" 이 창설되었다.
[(현)대한수중협회, KUA, 김상겸, 이병두, 최초의 잠수단체]
고려대학교(이병두, 황치효), 연세대 (윤석인, 오윤배),
한양대(노건기, 김광휘), 동국대(차광), 중앙대에서 스킨스쿠바 다이빙
써클이 생겼다.
(1968∼1969)
이 시기의 서울의 다이버라야 100∼200명이었으며 활동적인 다이버는
고작 30명 내외였고, 잠수 이론서는 없었으며 장비 또한 형편었었다.
그러나 다이버들간에 정신세계는 매우 우호적이고 낭만적이었다고
원로들은 얘기하고 있다. 이때 서울에는 (주)엑심 (김광휘) 이라는
장비수입을 겸한 건축자재 수입 가게가 한남동에 있었고,
우정사(임성기)와 반도스포츠(유영제)가 서울 남대문 시장앞에
있었다.(한국 최초의 장비점들)
1971년 제주도 수중비경을 맛보고, 1972년 일본인 다이빙 강사와
다이빙을 해본 김광휘는 1973년 스쿠바 다이빙을 배우기 위해 일본
으로 유학을 갔다. 1973년 한국에서도 외국단체로는 처음으로 PADI
(코스디렉터: 윌리암스)가 들어와 강사들을 배출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김광휘는 1975년 한국에서는 최초로 서귀포 파크관광호텔에
코리아 다이빙센터 라는 RESORT SHOP을 창업했다.
(김광휘, 이철우, 황치전)
서로가 합심하지 아니하면 물속을 구경할수 없었던 그 시절
서울에서는 모든 다이버들이 우정사를 중심으로 장비도 구입도
구입하고 정보도 교환을 했다.
안정훈(아트스포츠 대표), 정일만(이민), 현용부(스쿠바 장비센타 대표)
는 임성기 (우정사 대표)를 시켜 홍보하면서 한국 최초의 순수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한국잠수동호회"가 1976년 설립되었고(현용부,정일만,
안정훈,김인배,고창근,임성기,양태빈,박순원,홍근원, 오성원
(전 현대중공업 구매부장, 현중 잠수연합회장 역임),김인영,오윤배,
정연평,이건,한형도(작고), 장석은,김과윤,오경민,장준량,이병수,김희일)
현재까지 일부 회원이 남아 매월 침목다이빙을 실시하고 있다.
이때 경북에도 경북잠수동호회(대구잠수동호회)가 생겼으며,
자매결연을 맺어 서로 참목을 도모하고, 경북의 스포츠 스쿠바 다이빙
보급에 일익을 담당했다.(정호응,변춘부,김호상,임성지, 박병훈,배칠근,
이태균,시흥기,이석근)
1977년 김광휘와 조길도, 김현웅이 배출시킨 김영수외 그 문화생들로
우리나라 2번째 순수취미 스쿠바 다이빙 클럽인 "판 코리아 다이빙
클럽"이 결성되었고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한편으로, 연세대 스킨스쿠바 써클 창설의 주축중 한사람이었던 윤석민
을 중심으로 오윤배, 안정훈, 이요섭은 미도파백화점 부근에 스쿠바
다이빙 샵인 "바다상사"를 창업했으며 윤석민(작고)과 이요섭은 전길남
NAUI 강사(재미 공학박사)로부터 강사자격을 취득했다.(1978년)
이들이 현재"NAUI KOREA"의 주축 멤버들이다.
잠수동호회 멤버였던 김인영은(SCUBA DIVER지 발행인) 1979년 잠수
이론이 체계화되지 못한 이땅에 "스킨,스쿠바 다이빙 원리"라는 잠수
이론서를 최초로 집필하여 발행하므로써 잠수계에 기원이 되는 한획을
그었다.(80년대 잠수이론 교육시 단체와 상관없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책임)
1979년 김봉제, 조현종, 차광, 김창환을 중심으로 창설된 "KUDA
(한국잠수협회)"가 유일하게 문교부에 사단법인 으로 등록되었고
KUDA와 KUA는 상호견제와 선의의 경쟁으로 현재까지 우리나라
수중계를 이끌어 오고있다.
한때 무분별한 강사 자격증의 남발로 잠수계에 비난을 받았던 KUDA는
지봉규(PADI강사, 조오련 수영코치, IDEA KOREA 초대대표)원로가
KUDA 기술위원장이 되어 1989년
DITC(Diving Instructos Training College) 제도를 만들어 92년까지
이론과 기술을 겸비한 강사들을 배출하므로써 KUDA 인물 역사상
한획을 그은 사람이다. 이때 주축 멤버들이 지금의 잠수계를 이끌고
있는 인물들이다.(백상현,정현우,채상훈,정순태(작고))
1950년 6.25사변과 함께 우리나라 해군에 스쿠바 다이빙 보급되어
군복무중 다이빙을 배워 전역후에도 계속하였거나, 그들로부터 배운
젊은이들, 그 모험심 많은 젊은이들이 써클과 클럽을 만들었던
1960년대 까지를 스쿠바 다이빙의 도입기로 본다면, 1970년대는
초창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때 뿌리를 내린 단체를 중심으로
1980년대에는 스쿠바 다이빙이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다.
1981년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강사(기형희)가 탄생되었고 1983년에는
윤희성,김재영,김용중,박종섭,하승수 를 중심으로 10여개 대학을 묶은
"전국대학 잠수연합회"가 결성 되었으며, 1990년까지 한강수중탐사,
휴전선에서 여의도까지 수중탐사, 일본원정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전.대 잠수연합"을 창설했던 이들은 1989년 일본으로 건너가서
BSAC 강사가 되었으며 BSAC를 국내에 도입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4년 7월 BSAC는 "BSAC KOREA"(대표 박종섭)로 독립하게 된다.
1987년 이전까지는 잠수하면 수중사냥과 채집이 거의 전부였다.
1980년 초까지는 어촌의 인심도 좋았으나 무분별한 남획으로 잠수
할 수 있는 POINT가 없어지던 이시기에 초창기 잠수를 도입했던
우리나라 잠수계 엘리트들을 중심으로 1987년 "한국수중사진연구회
(한국수중사진 영상협회)"가 창설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서 스킨스쿠바 다이빙 원리라는 잠수이론설을
집필했던 김인영은 1987년 9월에 수중전문지 "SCUBA DIVER"를
격월간으로 발행하게된다. 잠수관련 소식이 전무했던 그 시절
잠수이론, 수중사진, 외국소식등을 전달하여 우리나라 수중인들의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렸으며 지금까지 많은 수중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1990년 이전에는 잠수하면 일부 특수계층에만 하는 것으로 인식
되었으나 90년 이후 국가의 발전과 각종 메스컴들의 영향으로 회사원,
자영업을 하는 일반인들에게까지 급속도로 보급되었다.
1992년 6월26일 드디어 한국에도 수중계의 두뇌집단이 생겨났다.
잠수와 관련된 의학자,생물학자,공학자,학술계,수중영상전문가,
잠수관련 특수부대 책임자들이 모여 "한국수중 과학회(KOSUST)"
를 창립했다.(고철환 서울대교수, 재종길 해양연구소 연구원,
윤석근, 이병두, 정의욱, 김광택,고태식,이선명등 33명)
1992년 7월 썬스포츠 김광휘는 SCUBAPRO에서 보급하는
"SEA(SCUBAPRO EDUCATIONAL ASSOCIATION)"을 도입했으며,
1983년 전국대학 잠수연합을 주도했던 김재영은 1994년 일본에서
SSI를 도입하였다. 또한 한국잠수협회(KUDA) 위상을 한단계 높였던
지봉규 원로는 1997년 미국 잠수교육 협회인
" IDEA(International Diving Educators Association) "을 김석철
(현 IDEA-ASIA대표)로 하여금 국내에 도입케 하였다.
그후 PDIC, NASE등 외국의 다이빙 단체들이 국내에 도입 되었으며,
앞으로로 계속 도입될 전망이다.
1995년엔 한국수중사진연구회원 고태식(해군UDT전역)이 수중비디오
촬영으로 방송에 진출해 수년간 스쿠버다이빙이야기를 방송한다.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 스쿠버다이빙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게 되었다.
잠수장비가 부족했고 검정 슈트가 유행했던 50,60,70년대를 거쳐
잠수가 본격 도입되었고, 장비들이 좋아졌던 80,90년대 초반에 이어
우리는 이제 컴퓨터게이지 시대를 지나서 NITROX, 재호흡기 시대를
살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