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종서(57) 성균관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두 달여 전 일본의 가속기 대부 중 한 사람인 세키구치 마사유키(關口正幸) 전 도쿄대 교수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 자리에서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을 만큼 자존심이 상했다. 일본의 한 가속기 전문가가 ‘대전 과학벨트의 중이온가속기 건설 담당자들로부터 초빙을 받았으나 너무 바빠 (한 수 아래인) 일본 기업체 기술자를 보내 도움을 주기로 했다’며 은근히 한국 수준을 얕잡아 봤기 때문이다.
채 교수는 국산 독자 모델을 개발해 상용화한 국산 가속기의 개척자다. 지방에서도 의료용 방사성동위원소를 생산해 암 진단 등에 사용하는 것도 그가 개발한 사이클로트론이 주요 도시에 설치된 덕이다. 그런 채 교수가 일본 전문가의 장례식에서 답답한 소리를 들었으니 얼마나 속이 상했을까.
채 박사는 중이온가속기용 기술·장비 상당 부분이 외제 차지가 돼 가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필자가 과학언론인이었던 시절, 기획 단계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품이나 기술을 제외하고는 우리 힘으로 이것을 한번 건설해 보자던 다짐을 채 박사와 나누었던 터였다.
부품 2300여 개 대부분 국산화
한국원자력의학원의 부산 동남권원자력의학원에 설치하려는 중입자 암 치료기도 마찬가지다. ‘수입품 중이온가속기’(예산 약 4500억원), ‘수입품 암 치료용 중입자가속기’(예산 1950억원)가 성사되지 않았으면 하는 게 채 교수나 필자의 바람이기도 하다. 모두 국민 세금이 투자되는 거대 사업들 아닌가. 이런 현실을 지켜보는 채 교수로선 대통령한테 ‘상소문’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이번 인터뷰를 하려고 채 교수를 만났는데, 그는 여전히 겁 없이 국산 사이클로트론 개발에 나섰던 1999년 당시의 열혈 연구자 모습 그대로였다. 그가 한국원자력의학원 연구원(83년)으로 시작해 외제 사이클로트론 운영을 맡은 지 15년 만에 국산 개발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사이클로트론을 그가 처음 개발했을 즈음(2002년) 주변에선 ‘사기’라는 비아냥이 있었다. 빔이 쏟아져 나오는 영상도 ‘카메라를 조작할 수 있지 않느냐’라는 의심까지 받았다. 당시 그는 2300여 개의 부품 중 서너 개를 빼곤 전부 국내에서 제작해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하는 뚝심을 보였다. 세키구치 교수의 장례식에서 일본인 지인은 그를 일본 과학자들에게 소개할 때 ‘한국산 사이클로트론을 개발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어느 나라에서 기술을 도입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일본인 지인은 ‘독자 개발’이라고 대답해 모두 크게 놀라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필자는 취재 현장에서 외제를 통째 사오는 모습도 적지 않게 봤다. 국산인 것처럼 보이는데 속은 거의 대부분 외제였다. 그러면 돈은 돈대로 외국으로 나가고, 국내에는 남는 게 별로 없게 된다. 어렵더라도 우직하게 개발하다 보면 설사 실패할 망정 얻는 게 훨씬 많다는 게 과학기술의 속성이다. 채 교수는 그런 점에서 ‘모범 과학자’다. 20년 가까이 지켜봐 왔지만 그런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다.
개척자는 항상 외롭고, 끌어내리려는 사람이 많기 마련이다. 채 교수 역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전까지 온갖 루머에 시달렸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채 교수가 개발한 국산 사이클로트론을 대구·광주·전주 등 주요 도시에 설치했을 때였다. 그런데 사이클로트론에 문제가 많아 잘 가동되지 않는다는 루머가 돌았다. 그는 공개적으로 세미나를 열어 권역별 사이클로트론 담당자들이 가동 현황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악성 루머를 잠재웠다.
사이클로트론 문제 해결사
국내에서 처음으로 대전류의 30MeV(100만 전자볼트) 사이클로트론을 한국원자력연구원 정읍분소에 설치해 새 건물로 이전했는데 이게 잘 돌아가지 않았다. 그 무렵 채 교수는 한국원자력의학원에서 성균관대학교로 이직한 뒤였다. 한국원자력의학원과 한국원자력연구원은 정상화를 위해 3년 동안 여러 시도를 했으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외부에 이런 사실이 알려지게 돼 결국 태스크포스(TF)가 발족됐다. 채 교수가 책임을 맡아 한 달여 만에 정상 가동시켰다. 사이클로트론을 새 건물로 이설하면서 부품들의 아귀를 제대로 맞춰놓지 않은 게 원인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필자는 과학언론인으로서 채 교수가 겪은 고초를 옆에서 지켜봤었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고 했던가. 채 교수는 원자력계와 가속기계의 파벌 속에서도 세계적인 연구자 반열에 올라 있다. 수입 사이클로트론 운영 15년, 국산 사이클로트론 개발 18년 등 외길 30여 년 만에 그의 머리에 씌워진 영예다. ‘한 우물만 파다가는 빠져 죽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그는 한 우물 속에서 성공 모델을 보여줬다.
채 교수는 “해외 대가들로부터 ‘원 포인트 레슨’이 없었다면 국산 사이클로트론 개발 과정에서 부닥치는 기술적인 난제의 고비고비를 쉽게 넘지 못했을 것 같다”고 술회했다. 그래서인지 그에게는 사제 관계만큼이나 끈끈한 인연을 맺어 온 해외 대가들이 여럿 있다. 세키구치 교수도 그랬다. 그의 장례식에 참석한 한국인은 채 교수가 유일했다.
스위스연방연구소(PSI)의 피터 시그 박사는 자신의 집에 채 교수의 전용 방을 내줄 정도다. 미 국립브룩헤븐연구소(BNL)의 데이비드 슐라이어 박사, 독일 핵연구소(KFK)의 헤르만 슈바이커트 박사도 채 교수를 가족처럼 대한다. 이제는 채 교수도 해외 기술자들에게 한 수씩 지도해 주곤 한다. 지금까지 국내외에 특허 48건을 등록했으며, 국제 논문 125편을 발표했다.
개인 음악실서 아이디어 충전
채 교수는 ‘두 집 살림’을 한다. 하나는 가족과 함께 사는 집, 또 하나는 ‘자신만의 음악실’이다. 그는 서울 구로동의 한 건물 지하에 LP판 8000여 장과 진공관 앰프의 전축, 에디슨 시절의 라디오 등을 갖춰놓고 있다. 젊은 시절 프랑스 방문 땐 센강 주변 노점상에서 무더기로 나온 중고 LP판을 발견하고선 여행가방에 그것들을 몽땅 담아 온 적도 있다. 그는 이 음악실에서 휴식과 함께 새로운 아이디어를 충전하곤 한다.
채 교수 일생의 꿈은 소형 산업용·의료용 가속기로 우리나라의 국제경쟁력을 높이는 것이다. 순수 과학용 대형 가속기엔 수조원이 들어가야 할뿐더러 세계 1등이 아니면 경쟁력이 없다. 그래서 한 대당 1000억원 정도 하는 암 치료용 양성자 가속기에 주목한다. 이 분야에서 소형화, 저가 경쟁이 가속화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손 놓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게 채 교수의 충언이다.
박방주 교수 sooyong1320@gachon.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