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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게, 그의 비밀을 묻다 : '올드보이' 류성희 미술 감독과의 인터뷰 | |
2003년, 한 해 농사 마무리하며 서로 덕담 주고 받을 시점에, 우리 영화계는‘올드 보이’라는 가공할 괴물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이 괴물은 뼈대 있는 가문의 후손으로, 명석한 두뇌와 수려한 외모, 흡인력 있는 보이스 컬러에 거칠면서도 세련된 패션 센스까지 갖추었다. 일각에선 그의 정신 건강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으나 진단서는 아직 발급 보류된 상태. 그러나 그‘일각’들조차 완벽에 가까운 그의 매력을 부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기꺼이 더 깊이, 그 매혹 속으로 빠져 들기 위한 안내자를 찾았다. 그가 바로‘올드 보이’의 류성희 미술 감독이다. 정글 : 먼저, 프러덕션 디자인에 있어 원작의 의존도(?)는 어느 정도였습니까? 류성희 : 원작 만화를 재미있게 읽었지만 디자인에 있어서 원작 만화에 대한 의존도는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물론 느와르라는 영화 장르적 특성이 영화 전반의 분위기에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듯이, 만화 역시 조명과 캐릭터의 표현에 있어서 필름 느와르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나 감금방이나 우진의 집 등은 훨씬 전형적이라고 봅니다. 감금방을 예로 들자면, 우리는 이러한 시멘트 감옥과 간이 침대, 변기의 전형성을 파괴하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참을 수 없이 반복되는 일상성을 컨셉트로 가져 왔습니다. 3류 호텔이 주는 폐쇄 공포와 익명성, 거기에 전체의 큰 컨셉트 하에 디자인된 패턴을 강조하여 낯섦을 가미하고자 했습니다. 우진의 펜트하우스는 철저히 영화적인 계산 하에 노출 콘크리트의 느낌에서 조명 색상을 계산하여 벽 색깔을 영화적으로 바꾸고, 수로 등을 통해 역시 낯섦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저나 박찬욱 감독님은, 장르 안에서 장르의 전형성을 파괴하는 데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리얼리티와 판타지의 경계 안에서 줄타기를 즐기듯이... |
정글 : 흔히 대화가 소통되지 않을 때,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다'라고 말하는데, 이 영화는 벽이 아주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긋난 꺾쇠 같은 무늬의 감금방 벽지는 미도의 아파트에서 변주되고, 모텔에서 다시 변주되는 것 같습니다. 우진이 감시하던 미도네 맞은편 아파트의 벌집 문양과 연관된 상징성도 분명히 있을 것 같습니다. 반면 펜트하우스는 아무 무늬도 없는 창백한 공간에 거대한 파도 그림만 있습니다.‘올드 보이’의 여러 벽들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시오. 그리고 벽지들의 패턴은 류성희 감독님이 새로 도안하신 건가요? 아니면 기존 제품들에서 선택하신 건가요? 류성희 : 벽지는 감금방, 미도의 아파트, 모텔, 우진의 감시 아파트, 새 감금방 이렇게 5군데에 사용되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계속적인 변주라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시 아파트의 벌집 문양을 제외한 나머지 4군데의 벽지들은 반복적인 기하학 패턴이라는 시나리오 상의 묘사에서 출발한 것으로, 낯설지만 트렌드와 너무 멀리 떨어지지 않도록 고민한 끝에 요즘의 레트로 경향으로 접근하였습니다. 다만 그 보다는 아주 약간 더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기를 원했습니다. 따라서 기존 제품의 벽지는 당연히 구할 수 없었기에 60년대에 흔히 유행했던 패션이나 벽지 그리고 기타 제품들을 자료 조사하였고, 그로부터 변주하였다고 볼 수 있겠네요. 꽃무늬나 자유 곡선들은 일부러 배제하였고 이러한 반복 패턴의 나름 대로의 의미는 결국 이 모든 공간들은 거대한 우진(또는 그 위에 있는 자!)의 통제, 계획 하에 있는 것이고, 더 깊은 의도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선택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결국은 통제 되고 컨트롤 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습니다. 어떤 관객들은 매우 불편해하고 어떤 관객들은 영화적 표현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은 이러한 태생적인 양면성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은 관객 각자가 받아들이는 대로가 정답이지만, 이 영화는 나름대로 많은 상징들이 부여되어 있고, 이 상징들을 너무 진지하게 끌어 안지 않고 유희하려 노력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그녀에게, 그의 비밀을 묻다 : '올드보이' 류성희 미술 감독과의 인터뷰 | |
정글 : 처음 납치되던 장면의 우산, 손수건, 포장지 등으로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우진 문양'의 디자인 컨셉은 무엇입니까? 길고 날카로운 조각들이 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는 듯한 모습은 어린 대수가 훔쳐 보던 깨진 유리창 또는 거미줄을 연상케도 합니다. 그리고 이사한 새 감금방에 미도 혼자 남겨질 때의 벽지는 '우진 문양'을 변주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도 연관이 있는 것인지요? 이 감금방도 이제 우진에게 완전하게 장악되었다, 라는 암시 같은. 류성희 :‘우진 문양’은 앞서 언급한, 감시 아파트의 벌집 패턴과도 유사성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연히 발견한 서양의 고딕 스테인드 글라스 귀퉁이의 문양에서 영감을 얻고 발전된 것입니다. 새 감금방 문양은 이전과는 조금 달라 보이길 원했고, 우진 문양과 다른 벽지들의 중간 지점에 있기를 원했으며, 다소‘희망’적으로 보여지기를 원했습니다. 박찬욱 감독님이나 나나, 이 슬픈 비극 안에서 나름대로 미도에게 희망을 실어줄 것을 심정적으로 간절히 원했다고나 할까요? 흔히 볼 수 있는 눈(雪)의 결정체와 같은 모양이지만, 사이즈를 키우는 바람에 역시 낯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Yellow’처럼 이전에 한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색상을 사용,‘태양의 색’이라 스스로 이름 지었습니다. |
정글 : 감금방 벽에 걸린 앙소르의 그림은 누구의 아이디어 입니까? 영화에도 잠깐 나오는 최민식씨의 머리 긴 모습과 매우 흡사하고, (자조적으로 그림 속의 남자 표정을 흉내 내는 듯한 장면도 나오지 않습니까?) 가둔 자의 가학적 에너지와 갇힌 자의 무기력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 소품이라 생각됩니다. 원본만으로도 충분히 섬뜩한 그림을 영화 속에서는 좀 더 다른 덧칠(?)을 해서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만든 듯도 합니다. |
류성희 : 시나리오에는 이발소에서 볼 수 있는 광대의 그림이라 묘사되어 있었습니다. 광대의 다양한 이미지나 자료 사진들을 프리젠테이션 할 때, 제가 맨 뒤에 슬쩍 앙소르의 그림을 붙여 놓았습니다. 광대의 그림은 사실 너무 조롱하는 것 같은 느낌과 함께 전형적이라 생각되어서, 눈은 울고 있지만 입은 웃으며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 있는 이 남자의 그림은 무척 강렬했고, 단순하게 말하면서도 훨씬 중의적이고 품위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림체는 덜 예술적이고 조악하게 그리려 했고, 영화에 나온 것보다는 훨씬 선명한 색채가 조명 때문에 묻히고 그로테스크하게만 느껴져 가슴이 아프기도 했습니다. | ||
정글 : 펜트하우스의 창 밖 배경이 된 장소는 어디입니까? 남대문이 보였던 것도 같은데, 한실장이 내려다 보는 장소는 이질감이 느껴졌습니다. 모두 한 장소가 맞습니까? 류성희 : 맞습니다. 프라자 호텔 옥상에서 파노라마 카메라로 촬영한 것에 포토샵으로 건물들을 합성한 것입니다. 이것을 천 위에 거대하게 프린트한 것으로 전문용어로는 백드롭 (Backdrop)이라고 합니다. 한실장이 내려다보는 장소는 후반 작업 중에 CG팀이 합성한 것입니다. 바닥이 보이기 때문이죠. 나머지는 다 세트장에서 백드롭을 걸고 촬영한 것입니다. |
정글 : 우진의 허리에 새겨진 십자가 문신은 어떤 의미입니까? 자동 옷장이 십자가 모양으로 갈라지고 다시 닫히는 것도 의미가 있을까요? 류성희 : 지적하신 대로, 옷장이 십자가로 닫히는 것도 의도된 것입니다. 감독님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저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이유를 묻거나 설명하거나 하지는 않았습니다. 때로는 너무 진지해서 말로 표현하기에는 어색하고 머쓱한 순간이 오기도 하거든요. 너무 문장으로 정리하려 하지 마시고, 느끼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길... 정글 : 미도의 개미 환상 장면과 후반부에 잠깐 스치는 최면 장면에서 미도는 같은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 옷 문양 역시 우진의 문양과 흡사한데, 그것은 미도가 느꼈을 과거의 고독과 최면 등에 우진이 개입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거라 볼 수도 있을까요? 류성희 : 우진의 문양을 연상하게도 하지만 마지막 새 감금방의 문양과 더욱 비슷합니다. 역시 거대한 그림 안에서 서로 연관됩니다. 정글 : 우진이 자살하는 총은 어떤 모델입니까? 그리고 날렵한 피스톨이 아닌, 앤틱한 느낌의 총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카메라 수집과 같은, 우진의 앤틱 취향일 뿐입니까? 류성희: 모델 이름은 데린저(Derringer)社의 클래식 모델입니다. 공식 모델명보다 '데린져 은'이라는 애칭으로 많이 불리운다고 합니다. 박찬욱 감독님이 직접 고르셨고, 말씀하신 대로 우진의 개인적 취향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
정글 : 끝으로, 대수가 감금방을 처음 찾아냈을 때, 깜짝 놀란 감금방 문지기가 보던 책이 바닥에 굴러 떨어지고 카메라는 바닥에 엎어진 책 표지를 잠시 클로즈업 합니다. 그런데 그게 어처구니 없게도 '아르미안의 네딸들'이더군요. 류성희 : 박찬욱 감독님의 특별 주문이었습니다. 아마 마쵸의 전형으로 보이는 사람이 감성 만화의 절정인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읽는 설정의 대비가 재밌다고 생각하셨을까요? |
정글 : 덤으로, 수아가 어린 대수 옆 벤치에 앉아 읽던 책은 무엇이었습니까? 표지는 마치 원서 같던데... 류성희 : 실비아 플라스의 시집입니다. 역시 박찬욱 감독님의 특별주문이었고 마침 제가 개인적으로 대학교 때 즐겨 읽던 시집이어서 그것을 사용하고 겉 표지만 60년대 원판을 씌워 사용했습니다. |
1. 제임스 앙소르 : James Ensor, 1860-1949 |
15년 감금 생활 동안 대수의 유일한 친구였던‘슬퍼하는 남자’는 벨기에 출신의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그림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골동품 가게에서 본 가면들의 기억이 강렬하게 남아, 가면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남긴 것으로도 유명합니다.‘가면에 둘러 싸인 자화상',‘음모'등의 작품이 대표적입니다. 그렇다고‘가면을 통하여 인간의 위선을 신랄하게 파헤쳤던 그는...’ 같은 따분한 말은 생략하기로 하지요. 생전엔 그리 주목 받지 못했지만, 이후 벨기에 100프랑 지폐에 얼굴이 새겨졌을 정도로 벨기에를 대표하는 화가로 인정 받고 있기도 합니다. |
2. 실비아 플라스 : Sylvia Plath, 1932-1963 수아가 좋아하던 실비아 플라스는 미국의 시인이며, 영국의 시인 테드 휴즈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위에서 앙소르의 그림을 보았듯이, 부분이나마 실비아 프라스의 시한편도 엿보도록 하지요. - 아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혔어요.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조금도 아빠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그들은 춤추면서 아빠를 짓밟고 있어요. 그들은 그것이 아빠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 실비아 플라스‘아빠' 中 일부 - 그녀는 서른 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세번째 자살 시도였습니다. |
3. Derringer Pistol 1825년, 미국인 헨리 데린저가 자신의 이름을 딴 소형 권총을 처음 만들면서 데린저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총열 2개에 장탄수 2개인 데린저는 크기가 작고 조준이 쉬워, 프로 도박사들이나 자신이 총을 소지한 사실을 숨기고자 하는 이들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습니다. 이에 콜트나 레밍턴과 같은 총기 제조 회사들도 앞 다투어 소형 권총을 제작하게 되는데, 데린저는 이후 이러한 소형 권총들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원이 조미료의, 퐁퐁이 주방 세제의 대명사가 된 것처럼 말입니다) 1865년 4월 14일, 링컨은 존 J.부스의 데린저에 피격 당합니다. - 자료 출처 : http://www.spartacus.schoolnet.co.uk 요즘은 실제 사용보다는 장식용, 수집용으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데린저 몇 정들을 함께 감상해 보지요. |
첫댓글 난 올드보이가 영 취향에 안 맞던데...
전 취향이란 게 없어서...무색무취무심ㅋㅋ.올드보이는 영화만으로도 좋았지만 그 속에 있던 각종 소품과 코드들이 그냥 널려있다기보다 의도와 의미가 매우 강하게 다가와서 저도 촘촘히 보았었거든요.'이야기'만이 아닌 볼거리생각거리가 많은 영화였지 싶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