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투병중에 이주일씨가 국민들에게 쓴 마지막 눈물의 편지
저는 오늘 진갑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을 모시고 잔치를 열지 못하는 점이 안타깝기만
합니다.
제가 폐암 판정을 받고 투병을
시작한 지도 벌써 두 달이 다 돼갑니다. 아직도 병을 고치기 어려우니 주변정리를 하라고 얘기하던 의사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날벼락이
나에게 닥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습니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에게 해코지를 한 적도 없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면서 남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맞고보니 좀더 많은 분들에게 더
잘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누구보다도 마음고생이 컸던 사람은 아내와 가족들입니다. 코미디언
남편을 돕기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입니다. 병석에서 제가 짜증을 내도 아내는 웃음을 잃지 않고 저를 돌봐주었습니다.
제가 아프다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셨습니다. 이리역
폭발사고 때 제가 극장에서 업고 나왔던 가수 하춘화씨는 나를 붙들고 엉엉 울었습니다. 나와 함께 축구를 했던 박종환 감독은 대만에서
전화를 걸어 ‘힘을 내라’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그밖에도 고마운
분들이 저의 쾌유를 빌어주고 계십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입니다. 여러 곳에서 암으로 투병중인 환자들에게도 희망을 주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열심히
살겠습니다.
저의 직업은 코미디언입니다. 코미디언은 사람을 웃기는 직업입니다.
저는 유랑극단 시절부터 온갖 고생을 다 하면서도 남을 웃기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1980년대 ‘토요일이다 전원출발’이라는 코너에서
실수로 물에 빠지면서 저는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물에 젖어서 엉망이 된 저의 머리를 보고 시청자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저는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최고의 코미디언이 됐고, 국민들은 저를 끔찍하게 사랑해주셨습니다.
한때는 전두환 대통령과 머리 모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방송에 나가지 못하고 밤무대를 전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전대통령은 제가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고 실의에 빠졌을
때 청와대로 불러 밤새도록 술을 따라주셨습니다. 저는 그때 어떤 사람도 함부로 미워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가장 세금을 많이 낸
사람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저는 성공한 뒤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생하는 분들에게 성의껏 도움을 주었습니다. 열심히 살면 언젠가는 희망이 보인다며 그분들을 격려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저를 사랑해주신 국민들 덕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주영 회장이 만든 국민당에 들어가 경기도 구리시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습니다. 처음에는 당선이 어려울 것 같았는데, 가는 곳마다 저에게 박수를 보내는 분들을 보면서 자신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 저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해서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지만, 많은 정치인들은 저를 코미디언으로만 대했습니다. 그래서 정책을 연구하기보다 상가집에서 밤을 새우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즐겁게 해드리는 것도
정치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4년 동안의 국회의원 생활은 저에게 엄청난 절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미련없이 국회의원 출마를 포기했습니다. ‘4년 동안 코미디
잘 배우고 간다’는 말도 그래서 했던 것입니다. 정치인들이 국민을
편안하게 만들 생각은 하지 않고, 날마다 편을 갈라 싸움질만 하고 있습니다. 정치를 떠난 지 5년이 다 되지만 아직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다시 코미디언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전과는 다른 코미디로 시청자들을 만났습니다. 어떤 분은 ‘역시 이주일’이라고 했지만, 또 어떤 분들은 ‘감각이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우리나라 코미디는 두 가지 금기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와 성적인 농담입니다. 외국에서는 이것이 최고로 인기있는데, 한국에서는 함부로
이것을 다룰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보니 코미디가 깊이가 없고 말장난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요즘 텔레비전에는 훌륭한 후배 개그맨들이 많은데, 저는 코미디가
말장난으로만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개그’라는 말은 영어에도 없습니다. 후배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길 수 있는 희극인으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저는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강원도 춘천에서 축구를 할 때는 박종환 감독보다도 제가 실력이 더 좋았습니다. 저는 중도에 축구를 포기했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저는 박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뒤 전세계를 다니면서 응원을 했습니다. 19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대회에서 한국이 4강에 올랐을 때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저는 축구붐을 조성하기 위해 연예인 축구단을 만들었는데, 동대문운동장에서 중거리슛을 성공시키고 트랙을
두 바퀴나 돌던 일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제가 내년에 한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못 볼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운동장에 가서 응원을 해도 시원치 않을 것 같은데, 월드컵을
보지 못한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부디 한국 선수들이
열심히 해서 꼭 16강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항상 남을 웃기면서 살아왔던 제가 이렇게 병실에 누워 있으니까 옛날 생각이 많이 납니다. 부산 해운대에서 함께 새벽까지 소주 수십 병을 마시고 쓰러졌다가 아침에 아주머니들이 깨워서 일어났던 조용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경기도 분당의 우리집으로 찾아왔던 후배들,
그리고 제가 어려울 때마다 도움을 주셨던 은인들….
무엇보다 가장 고마운 분들은 20년 이상 저를 대한민국 최고의 코미디언으로 길러주신 국민들입니다. 그분들께 아무리 보답해도 은혜를
다 갚지 못할 것 같습니다. 살아 생전에 팬들을 위해 정말 멋진 공연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몸이 따라주지 않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제가 병을 털고 일어나면 팬들에게 꼭 값진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이주일을 오랫동안 사랑해주신 모든 팬들에게 다시 한번 다짐합니다.
저는 희망을 잃지 않고 병마와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저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팬들에게 드리는 코미디언 이주일의 마지막 약속입니다. 팬 여러분 정말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