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 나라
진(秦)나라에 이어 중국을 통일한 왕조(BC 202∼AD 220). 진나라가 BC 206년에 멸망한 뒤 항우(項羽)와 패권을 겨루어 승리한 농민 출신 유방(劉邦;高祖)에 의해 창건되었다. BC 206년 유방이 항우에 의해 한왕(漢王)으로 봉해졌는데 한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한나라는 AD 8년에 외척인 왕망(王莽)에게 제위(帝位)를 빼앗겨 한때 중단되었으나 25년에 일족인 유수(劉秀;光武帝)에 의해 부활하였다. 따라서 왕망이 찬탈하기 전의 한나라를 전한(前漢), 부활 후의 한나라를 후한(後漢)이라 한다. 또한 전한의 도읍은 장안(長安)에, 후한은 뤄양[洛陽(낙양)]에 두었기 때문에 도읍의 위치에 의해 전한을 서한(西漢), 후한을 동한(東漢)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최초로 통일국가가 성립된 것은 진나라 때이지만 진나라가 천하통일 후 15년만에 멸망한 것과는 달리, 진나라에 이어 통일왕국을 건설한 한나라는 중간에 17년의 중단시기가 있으나 중국 왕조 가운데 400여 년에 걸쳐 가장 긴 지배력을 유지하였다. 한나라는 통일왕국을 달성한 뒤 고조·문제(文帝)·경제(景帝)·무제(武帝) 등으로 왕권이 계승되는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진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유교의 국교화,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군현제(郡縣制) 실시 등 정치체제 및 사상통일을 기하여 통일왕국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세력을 크게 신장시켜 무제 때에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선제(宣帝) 이후 외척·환관(宦官)이 중앙정계의 실권을 잡게 되어 조정의 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고 이때를 이용하여 왕망이 제위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칭하였다. 왕망은 주(周)나라 제도를 이상으로 삼아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였으나 이상에 치우친 나머지 농민반란과 호족의 봉기 등 혼란이 초래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왕망이 망한 뒤 유수 광무제가 뤄양을 도읍으로 왕위에 올라 한나라를 재건, 혼란을 수습하고 정권의 기초를 다졌다. 이후 명제(明帝)·장제(章帝)를 거치면서 국내외적으로 적극적인 정책을 취해 다시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화제(和帝) 이후에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외척이 정치의 실권을 잡았고 황제가 환관의 힘을 빌어 외척의 간섭을 배제하는 과정에서 외척과 환관의 정치적 싸움이 되풀이됨으로써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었다. 환제(桓帝) 때에는 환관 선초(單超)의 도움으로 충제(沖帝)·질제(質帝)·환제의 3대에 걸쳐 정치를 독점한 양기(梁冀) 등 외척을 몰아냈으나 환관의 진출을 억제하기 못하여 그 뒤 후한 최대의 환관 전횡기를 맞게 되었다. 환관은 관료·호족과 결탁하여 중앙 및 지방 관리계에 세력을 확장하고 부정부패를 일삼았으며, 이에 대해 외척·환관의 정권독점에 반대하고 명분·절조를 존중하던 유교적 관리·지식인들이 반환관·반정부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 청류(淸流)는 두 차례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는데 이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이로 인해 청류파 관료는 관계에서 일소되었다. 그 뒤 궁정정치는 혼란이 거듭되어 통치능력을 상실하였고 호족에 의한 겸병(兼倂)의 위기에 놓여 있던 농민은 외척·환관의 실세 아래 무거운 세금수탈로 빈곤이 심화되었다. 더욱이 천재·기근이 계속되어 만성적 기아상태에 빠지게 되자 대규모 농민전쟁인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의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고 그 중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전멸시켰으나 뒤에 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이윽고 헌제(獻帝)를 옹립한 조조가 강대해져 화베이[華北(화북)] 대부분을 통일하고, 그의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로부터 제위를 빼앗아 위(魏)나라를 세움으로써 후한은 완전히 멸망하고 삼국분열의 시대를 맞았다.
제도와 사상
군현제와 중앙집권제 확립
유방은 제위에 오른 뒤 진나라 통치방식을 답습, 중앙집권적인 관료제와 군현제를 실시하였다. 중앙관제로는 황제 밑에 행정·군사·감찰의 최고책임자인 승상(丞相)·태위(太尉)·어사대부(御史大夫) 등 3공(三公)을 두고, 3공 밑에 정무분담기관으로 태상(太常;의례제사)·광록훈(光祿勳;궁정경호)·위위(衛尉;궁문 수비)·태복(太僕;車馬관리)·정위(廷尉;사법)·대홍로(외교)·종정(宗正;종실관계)·대사농(大司農;국가재정)·소부(少府;황실재정)의 9시(九寺;그 장관은 九卿)을 두어 중앙정부를 구성하였다. 한편, 지방은 크게 군으로 나누고 그 아래에 현을 두었다. 그 관제는 중앙정부를 모방하여 군에는 행정장관인 태수(太守), 부관인 승(丞), 군사지휘관인 위(尉), 감찰관인 감(監)을 두고 현에는 장관인 영(令;大縣의 長)·장(張;小縣의 장), 부장관인 승, 군사에 위를 두고 각각 황제의 명령에 따라 중앙에서 파견하여 통치를 맡게 하였다. 고조는 이 군현제와 병행하여 봉건제를 채용, 초(楚)·한의 싸움에서 한나라에 협력하여 공을 세운 한신(韓信)·팽월(彭越)·영포(英布) 등의 공신과 그 일족을 제후왕(諸侯王)으로 봉하고 그 봉지(封地)를 왕국이라 하였다. 이와 같이 군현제와 봉건제를 병용한 제도가 한나라의 군국제이다. 이들 봉건제후들은 한나라 초기에는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실력자로서 봉건영지를 통치하였으나 그들의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불안을 느낀 고조가 모반(謨反) 등의 구실을 내세워 차례로 제후왕을 멸망시켰다. 고조 말년까지 원격지의 장사왕(長沙王)을 제외한 다른 성씨의 제후왕은 모두 복속되었고 그 대신 고조의 근친동족을 봉건제후로 봉하고 <유씨(劉氏) 아닌 자는 왕이 될 수 없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이후 봉국에 임명된 동족의 제후왕 역시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제를 가지고 군대를 거느리는 등 강력한 세력으로서 전국토의 2/3에 해당하는 봉지를 통치하였다. 이에 대해 한나라 조정에서는 제후왕을 교도할 태부(太傅)와 관리를 통솔할 승상(丞相;나중에는 相) 2명을 파견하였을 뿐 제후왕의 실태는 거의 독립국과 같았다. 이와 같이 정치적·경제적 힘을 신장시킨 제후왕의 존재는 중앙정부에 위협적 존재가 되었고 문제 때인 BC 174년 회남왕(淮南王)인 유장(劉長)이 모반을 일으켜 폐절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제후왕의 세력 억제를 위해 경제 때 영지삭감정책을 취하자 BC 154년에 오왕(吳王) 유비 등 7개국 제후들이 연합하여 한나라에 반기를 드는 <오초7국(吳楚七國)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을 진압한 경제는 제후왕을 정치에서 분리, 봉국정치는 상(相)을 비롯한 중앙파견 관리가 집행하게 하였고 제후왕의 봉지는 추은령(推恩令)에 의해 왕자들에게 분봉하는 등 제후왕의 권력을 축소시켰다. 무제 때에는 제후왕의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히 제거하여 제후왕의 행동범위를 엄격히 제한하는 한편 전국을 13주(감찰구)로 나누고 중앙에서 자사(刺史)를 파견, 정치에 대한 감찰제도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군국제가 실질적으로는 군현제가 되어 황제의 직접 통치에 의한 중앙집권적 전제통치 체제가 확립, 중국의 새로운 통치방식으로 정착하게 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유교의 국교화 정책
무제 때에는 중앙집권에 의한 전제체제의 지배를 사상면에서 뒷받침하기 위하여 유교의 국교화 정책을 취하였다. 진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에 의해 탄압되었던 학문과 사상은 한나라 때로 접어들면서 부흥하여 유가(儒家)·법가(法家)·도가(道家)·음양가(陰陽家) 등 제자백가(諸者百家)의 난립시대를 맞게 되었다. 한나라 초기에는 정치적으로 진나라의 유산과 전통을 계승하면서 전후 부흥을 위해 진나라와 같은 적극정책을 배제하고 소극정책을 취함에 따라 <무위(無爲)>의 철리(哲理)를 주장하는 노자사상(老子思想;道家思想)이 유행하였다. 문제로 대표되는 <무위>의 정치는 이 도가사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가 부흥하자 간소화를 신조로 삼는 도가정치 대신, 의례와 음악, 정치의 문화성을 중요시하는 유가사상이 관심을 끌게 되었다. 특히 동중서(董仲舒)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設)에 근거한 천인론(天人論)은 황제를 정치·윤리·종교 등의 중심으로 만드는 사상으로 무제의 중앙집권체제 확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무제는 동중서의 헌책(獻策)에 따라 유교를 국교로 정하고 BC 136년에 유교의 고전인 역(易)·서(書)·시(詩)·예(禮)·춘추(春秋)의 5가지 경서에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어 태학(太學)에서 가르치게 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를 낭중(郞中;간부후보생)으로 발탁하였다. 또 BC 134년에는 유교의 덕목인 효행이나 청렴한 자를 낭중으로 등용하는 효렴(孝廉) 선발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유학은 황제지배 아래 국가질서의 지도이념이 되었고 유학을 통해 교양을 갖춘 자가 정치 지도자가 된다는 방침이 세워져 관료가 되기 위한 필수조건이 되었다. 이것은 중국 관료제 특징의 하나인 문관우위원칙을 제도적으로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유교가 국가의 지도이념이기는 하나 무제는 유교의 국교화를 통하여 사상통일을 꾀하는 한편 유교일변도를 지양하고 다른 사상의 장점을 수용하여 정치에 있어 기술면에서는 법가주의, 정신면에서는 유교주의를 채택하여 전체적으로 양쪽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한나라 조정의 보호를 받은 유교는 점차 사람들 사이에 침투하였고, 특히 음양오행설에서 비롯된 참위설(讖緯設;일종의 예언설)은 왕망의 한나라 찬탈에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평제(平帝) 때 예제(禮制)와 학제(學制) 개혁을 실시하였는데, 한나라 제위를 찬탈하여 신나라를 일으키자 유교 경전에 나오는 주나라 제도를 모범으로 삼아 내정·외정 전반에 걸쳐 대혁신을 단행하였다. 왕망이 실시한 일련의 개혁은 지나치게 복고적인 것이어서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철저한 유교주의 정치는 후한시대 한왕조의 기본방침이 되었다. 이와 같이 유교는 정치뿐 아니라 사회·문화 등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후한에 이르러 정착하게 되었다.
대외정책
한나라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무제 때 사상 최대의 대제국을 건설하는 등 크게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북방의 흉노(凶奴)와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BC 4∼BC 3세기 무렵부터 몽골고원 일대에 세력을 편 흉노는 진시황 때에 장군 몽염(蒙恬)에 의해 한때 인산산맥[陰山山脈(음산산맥)] 북쪽으로 쫓겨났으나 BC 209년 왕위에 오른 모둔 선우(冒頓單于)에 의해 통일되어 동쪽으로는 동호(東胡), 서쪽으로는 월지(月氏)를 쳐서 싱안령[興安嶺(흥안령)]부터 톈산산맥[天山山脈(천산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세력 아래 넣고 한나라에 대항하였다. BC 200년 한나라 고조가 흉노에게 패하여 포위된 일이 있은 이후 한은 흉노에 대해 유화정책을 취하였다. 천하통일 후의 정치·경제의 안정을 확립하기 위하여 흉노와 형제의 의(誼)를 나누고, 한나라 황족(皇族)의 딸을 선우의 비(妃)로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술·식량 등을 흉노에게 공납하였다. 이러한 화친외교는 문제·경제에까지 이어졌으나 오초 7국의 난이 평정된 뒤부터 국내 문제가 해결되었고, 무제에 이르러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자 무제는 흉노에 대해 적극적인 강경책으로 전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토벌하고, 동방으로는 한반도에 진출하여 한4군(漢四郡)을 설치하였으며 남쪽으로는 베트남에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또한 무제는 흉노 원정에 앞서 공수동맹 체결을 위해 장건(張騫)을 서방 대월지국(大月氏國)에 파견하였다. 그의 서방원정은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하였으나 파미르고원을 넘어 페르시아 지역에 이르는 대원정의 결과 중국과 서방과의 교역을 트는 계기가 되었다. 한나라와 대원(大苑)·대월지·오손(烏孫)·대하(大夏) 등 서역 나라들과의 교역을 통해 서역으로부터 포도·석류·호두 등의 진기한 산물이나 말·낙타 외에 음악·곡예·잡기(雜技) 등이 전래되었고, 중국의 견직물이 서아시아를 거쳐 멀리 로마에까지 전래되어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실크 로드>가 열리게 되었다. 이어 제7대 선제 때에는 오손과 동맹하여 흉노를 치고, 또 흉노 대신 북방에 진출한 강(羌티베트)족을 굴복시켜 서역과의 교통로를 확보하였으며 BC 60년에는 정길(鄭吉)을 서역 도호(都護)로 임명, 구자(龜玆)에 주재시켜 서역 여러 나라를 평정하였다. 약체화된 흉노는 내부 분열을 일으켜 BC 51년에는 호한야(呼韓邪) 선우가 한나라에 투항하여 신종(臣從)하는 등 한나라 초기 이후의 대(對)흉노 문제는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그 뒤 왕위에 오른 왕망이 극단적인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바탕을 둔 외교정책을 강행, 우호관계에 있던 흉노를 비롯한 서역 및 동방 여러 나라들의 이반(離反)을 초래하였고 왕망의 현실과 동떨어진 개혁정책으로 혼란이 가중, 결국 15년만에 신나라는 멸망하였다. 이후 후한의 초대 광무제 때에는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하자 48년에 남흉노 및 북방의 오환(烏丸)을 쳐서 복속시켰다. 광무제 이후 제2대 명제, 제3대 장제, 제4대 화제 때는 후한의 전성기로서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북흉노를 공격하였고 또한 서역 여러 나라를 복종시키고 74년에는 다시 서역도호를 설치하여 서역 경영을 맡게 하였다. 서역도호 반초(班超)는 파미르 동쪽의 50여 국을 복속시켰으며, 97년에는 감영(甘英)을 대진국(大秦國;로마제국)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후한의 대외적인 발전도 제4대 화제 때까지이며 그 뒤로는 외척·환관에 의한 혼란이 나타나기 시작, 서북의 강족(羌族)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주변 여러 나라가 이반하였다. 또한 전한의 무제 때에 군현으로 지배하였던 베트남이나 한반도 북쪽도 반란이 계속되자 한나라는 타협책을 쓰는 한편 영역 축소 정책을 취하였다. 이와 같이 후한 중기 이후에는 전한 이래 중국의 영향을 받아 문화적·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한 주변 민족들이 중국 지배에 강하게 반발,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흔들리게 되었다. 이것은 위(魏)·진(晉)의 남북조시대에 벌어지는 주변 여러 민족의 자립운동, 나아가서는 동아시아세계 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사회·경제
향리제사회와 호족
한나라 때 사회의 기초 구성원은 농민으로 이들은 향(鄕)이라고 불린, 집락 속에 리(里;약 100호)를 단위로 집단거주하며 자영농업을 영위하였다. 농민은 원칙적으로 국가로부터 작위(爵位)를 받아 리내(里內)의 신분질서를 형성하며 군현제를 통한 국가의 직접 지배를 받았다. 향에는 삼로(三老;敎化를 담당)를 비롯하여 색부(嗇夫;세무·소송 담당)와 유요(담당)를 두었고 경찰 역할을 맡아 수행하는 정(亭)이 있었으며 정에는 정장(亭長)을 두어 향관(鄕官)이라고 총칭하였다. 이들 말단관리는 주민 중에서 천거, 군현에서 임명하여 징세나 요역의 부담 및 가벼운 민사·형사사건 등은 이들 향관의 책임하에 처리하였다. 한제국은 독립자영농민과 이러한 향리제사회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농민 사이에 부농과 빈농의 분화가 진행, 부농은 토지확장 및 토지매수로 대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강한 경제력과 혈연관계로 맺어진 이들 호족세력은 더욱 세력을 신장시켜 경작지를 비롯한 주변의 산림·원야·늪·못 등을 사들여 장원을 구축, 자급자족체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이식(利殖) 사업을 벌여 막대한 경제력으로 농민생활을 압박하였다. 농민은 각종 조세·요역 등의 부담가중과 재해·질병 등으로 빈곤화가 심화되어 토지를 상실하고 호족의 소작인·노비로 전락하게 되었다. 한편 부국강병책으로 인한 상업·수공업이 번영함에 따라 출현한 사영 수공업자·상인들이 재산 보전책으로 토지를 매점, 농민의 몰락을 가중시켰다. 이와 같이 경제력이 호족에게 집중되고 자영농민이 몰락하여 호족 산하에 흡수됨으로써 국가 기반인 향리제도가 붕괴되자 BC 7년 애제(哀帝) 때에는 대토지 소유자의 소유지와 노비의 소유인원수를 제한하는 한전법(限田法)을 공포하였으나 반대자에 부딪혀 실천하지 못하였다. 또 왕망 정권은 경작지를 왕전(王田), 노비를 사속(私屬)이라고 규정하고 모두 매매를 금지하고 소유지 면적에 제한을 가하였으나 이 법령도 공포 후 3년만에 폐지되었다. 남양(南陽) 호족출신이며 호족의 지원을 받아 한왕조를 재흥시킨 후한의 광무제는 노비 해방령을 공포하였으나 그 매매 금지 및 토지소유 제한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하지 않아 대토지 소유는 후한시대를 통하여 더욱 진행되었다. 호족들은 유학을 배워 지방 군현의 속관(屬官)이 되어 효렴 등의 유리한 선거(選擧;관리등용법)에 의해 관계에 진출하여 정치적 힘을 획득하였다. 더욱이 그 사이에 생긴 문생(門生;師弟의 관계), 고리(故吏;長官과 屬官의 관계), 통혼(通婚) 등 여러 관계에 의해 지역을 넘어선 넓은 유대를 맺고 권력 중추부에 접근, 세력을 강화하였다. 그 결과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약해지는 등 정치적·사회적 모순이 누적됨에 따라 농민층의 불만이 폭발, 후한 중기 이후 해마다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일어났는데 그 가운데 <황건의 난>은 가장 큰 규모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