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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石에게 영향을 준 短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 요절 시인,
메이지 시대의 그늘을 노래하다
월간조선 배진영 기자
2021년 12월호
⊙ 소설가가 되기를 원했지만, 詩(短歌)에서 재능 발휘… 吟風弄月하던 단카를 생활인들의 詩로 변모시켜
⊙ 白石, 이시카와를 흠모해 ‘石川’의 ‘石’을 따다가 필명 지어
⊙ “실무에서는 쓸모도 하나 없는 歌人이라고/ 날 보는 사람에게/ 돈 빌리고 말았네”
⊙ “새로 구입한 잉크에서 나는 향/ 마개 뽑으니/ 주린 배에 스며서 서럽기도 하구나”
⊙ “농사꾼들의 대부분은 술까지 끊었다고 한다/ 더 곤궁해진다면/ 무엇을 끊으려나”
〈동쪽 바다의 조그만 섬 바닷가 백사장에서
나 울다 젖은 채로
게와 어울려 노네〉
짧은 시(詩)지만, 그림이 그려진다. 삶에 지치거나 실연(失戀)의 아픔 때문에 바닷가를 찾은 젊은 사내가
슬픔에 젖어 백사장을 헤매다가 어디선가 엉금엉금 기어 나온 게를 발견하고 노닥거린다.
그 모습은 언뜻 보기에는 평화롭지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울고 있다.
이 한 수(首)만 가지고도 좋은 시이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시는 다시 이어진다. 아니나 다를까.
〈뺨에 흐르는
눈물 닦지 않은 채
한 줌의 모래 움켜쥐어 보이던 사람 잊지 못하네〉
역시 이 젊은 사내는 실연한 것이다. 그는 여전히 떠나가 버린 옛 여인을 그리워하고 있다.
시는 계속된다. 이 세 번째 수에 이르면 당초 생각이 맞아떨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드넓은 바다 나 홀로 마주하고
이레 여드레
실컷 울어보고자 집을 뛰쳐나왔다〉
그렇다. 이 시(詩)는 짧은 시들이 이어지는 연작시(連作詩)이다.
시 한 수 한 수를 다시 읽어본다. 5·7·5·7·7의 음보를 느낄 수 있다. 일본의 단카(短歌)다.
지독한 가난을 노래한 시인
작가는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1886~1912년) 메이지(明治) 시대의 시인이다. 본명은 하지메(一).
필명인 다쿠보쿠는 ‘딱따구리’라는 의미다. 20세 때 《동경(憧憬)》이라는 시집을 내면서
‘천재시인’으로 주목받았지만,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이번에 나온 《이시카와 다쿠보쿠 단카집》(필요한책 펴냄)은
그의 단카집인 《한 줌의 노래》와 《슬픈 장난감》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기자는 문학은 잘 모르는 문외한(門外漢), 아니 문외한(文外漢)이지만, 읽는 맛이 색달랐다.
서두에서 소개한 것처럼 한 수 한 수가 독립된 단카로서의 맛이 있지만,
4~6수 정도를 읽다 보면 하나의 이미지가 저절로 그려진다.
그리고 하나의 장(章)을 다 읽고 나면 운문의 형식으로 된 하나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이런 식으로 시인은 일상의 삶에 찌들대로 찌든 도시민의 모습을 그리기도 하고,
떠나온 고향의 풍광과 어린 시절의 친구들의 모습을 담아내기도 한다.
삶으로부터 도망쳐서 떠도는 나그네의 삶, 병상에서 신음하는 병자의 처연함,
그리고 제구실을 하지 못하는 가장의 부끄러움도 노래한다.
음풍농월(吟風弄月)하던 단카를 생활인들의 모습을 그려낸 시로 승화시킨 것이다.
시집 전체를 지배하는 색조는 어두운 회색이다. 절망감이 섞여 있는 회색이다. 지독한 가난의 색이다.
이 가난은 그의 아버지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고, 본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아버지는 일본의 동북 변방인 이와테현의 사찰 주지였다.
대처승(帶妻僧)이 일반화되어 있는 일본이니, 아버지가 승려였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오히려 지방에서 상당히 대접받는 유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아버지가 금전적인 문제로 주지 자리에서 쫓겨나는 바람에
같은 현 내에 있는 모리오카시로 이주한다.
이때부터 여섯 식구의 신산한 삶이 시작된다.
자녀 가운데 유일한 남자였던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역할을 해주어야 했지만,
문청(文靑)의 꿈에 쫓겨서였을까? ‘천재’라는 찬사에 들떠서였을까?
그는 스스로 중학교를 중퇴하고 소설가가 되겠노라며 도쿄로 상경(上京)한다.
‘중학교 중퇴’라고는 해도 오늘날과 비교해 고학력이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 학력으로 얻을 수 있는 일자리는 별로 없었다.
이시카와는 이후 문예지 편집자, 출판사 교정자, 지방신문 기자, 지방 소학교 대리교사 등을 전전한다.
거기에 더해 절제력이 약하고 낭비벽이 심한 예인(藝人) 기질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실무에서는 쓸모도 하나 없는 歌人’
때문에 이 시집 곳곳에는 한때 무지개를 좇았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실에 치여 사는 젊은 문인의 서러움이 절절히 녹아 있다.
《한 줌의 노래》 첫 장의 제목은 ‘나를 사랑하는 노래’지만, 세상은 시인을 사랑해주지 않는다.
〈“그 정도의 일로 죽어야 하나”
“그 정도의 일로 살아야 하나”
그만해라 그 문답〉
그래도 시인은 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실무에서는 쓸모도 하나 없는 가인(歌人)이라고
날 보는 사람에게
돈 빌리고 말았네〉
〈변덕이 심한 사람에게 고용되어
절절하게도
나 사는 이 세상이 너무나 싫어진다〉
〈새로 구입한 잉크에서 나는 향
마개 뽑으니
주린 배에 스며서 서럽기도 하구나〉
그는 소설가가 되기를 갈망하지만, 그의 ‘달란트’는 시, 특히 단카에 있었다.
그 괴리에서 오는 아픔도 시가 된다.
〈시원치 않은 소설을 쓰고서는 기뻐라 하는
사내 가련하구나
초가을 바람 불고〉
그래도 시인은 19세 때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한다.
그 여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 여인을 바라보는 젊은 지아비의 마음은 또 어땠을까?
〈여인이 있어
내가 하는 말에는 거역 않으려 부심하고 있구나
보고 있으니 슬퍼〉
歸鄕과 방랑
21세 때 시인은 가족과 함께 고향 시부타미로 돌아간다.
‘연기(煙)’는 그 기억에 대한 시들이다.
시인은 고향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그리운 고향 사투리를 들으며
소년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며 귀향을 기뻐한다.
〈고향에 있는 산들을 향해 보면서
할 말도 없네
고향에 있는 산은 고맙기도 하구나〉
여전히 가난하고 불안하기는 해도 시인은 애써 고향에 돌아온 평안함을 노래하기도 하지만,
결국 고향에 다시 정착하는 데는 실패한다.
이듬해인 1907년 5월부터 1년간 시인은 일본의 북쪽 끝 홋카이도로 가서
지방신문 기자 등의 자리를 전전한다.
이 시기의 일들을 노래한 것이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이다.
지지리도 가난한 주제에 때로는 변방 술집의 여자들을 품에 안아보기도 하지만,
그 여인들 역시 아픈 상처를 하나 가득 안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죽고 싶지는 않은가 물어보니
이것 보라며
목에 난 어떤 흉터 보여주던 여인아〉
〈죽을 정도로 내 취기를 기다려
온갖 가지의
서글픈 이야기들 속삭여 대던 사람〉
‘그 마음가짐 자세, 잊지 않으려 했지만’
방랑이나 다름없던 홋카이도 생활도 1년 만에 때려치우고 시인은 다시 창작을 위해 도쿄로 올라온다.
1년 뒤에는 가족도 상경해 다시 가정을 꾸린다. 《아사히신문》 교열계에서 일하면서
문예지 《스바루》 등에 소설을 발표하지만, 그 삶은 여전히 위태위태하다.
1910년 10월에는 첫 가집(시집) 《한 줌의 노래》의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지만
같은 달 장남 신이치가 출생 후 24일 만에 죽는 비극을 맛본다.
그런 와중에서 새해는 온다. 새해의 다짐, 자신에 대한 실망과 회한, 이런 것들은 모두 시가 된다.
〈어제까지는 아침부터 밤까지 잔뜩 긴장한
그 마음가짐 자세,
잊지 않으려 했지만〉
‘잊지 않으려 했지만’이라는 것은 결국 잊었다는 얘기다.
새해의 결심이 얼마 지나지 않아 마모되어버리는 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새로운 날인 내일이 오리라고 믿는다 하는
나 스스로의 말에
거짓이야 없건만—〉
‘말에 거짓이야 없건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는다. 결국 전과 다를 바 없는 삶.
그래도 먹고살려면, 가족을 건사하려면, 변변찮은 직장이나마 나가야 한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기만을,
오로지 하나 기다림으로 삼아,
오늘도 일을 했네〉
직장인들의 마음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또 한 번 미소를 짓게 된다.
하지만 그 미소는 이내 시인의 고단한 삶을 노래한 시 앞에서 사라져버리고 만다.
〈왜 이 모양인가 한심하게 여겨져
약한 마음을 몇 번이나 꾸짖고는,
돈을 빌리러 간다〉
그렇게 빌린 돈을 시인은 밀린 하숙비를 내고, 빚을 갚는 데 쓰는 게 아니라
유흥가에 가서 탕진하고, 충동구매를 하면서 날려버린다. 그 마음이 편할 리 없다.
〈지저분한 손을 보네—
마치 꼭
요즘을 사는 나 자신의 마음과 마주하는 듯하다〉
〈최근 사오 년
하늘을 올려 보는 일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노라
이럴 수도 있는가?〉
“이시카와는 가여운 녀석이다”
얼마나 삶이 고단했으면, 얼마나 미래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았으면,
사오 년 동안 하늘을 올려 보는 일이 한 번도 없었을까?
‘이럴 수도 있는가?’라는 시인의 탄식에 함께 가슴이 무너진다.
〈“이시카와는 가여운 녀석이다.”
가끔 이렇게 스스로 말하면서
슬픔을 느껴본다〉
정말 이시카와는 가여운 녀석이다.
그놈의 가난으로도 부족해 본인과 가족이 줄줄이 병에 걸린다.
1911년 1월 시인은 만성복막염으로 입원해 수술을 받는다.
그해 12월에는 어머니와 아내가 결핵에 걸리는 액운이 닥친다.
시인은 시를 가지고 병원에서 만나는 의사와 간호사의 흉을 보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아픔을 호소하기도 한다.
가난 앞에서, 병 앞에서 청춘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마음은 자꾸 가라앉는다.
〈아니 그러면 살고 싶지 않다는 의미입니까
의사가 하는 말에,
아무 말 못하는 마음〉
〈굳세게 잡을 만큼의 힘마저도 사라져버린
비쩍 마른 내 손이
애처롭기도 하네〉
〈가련하게도,
병이 치유되기를 바라지 않는 마음 나에게 있다.
이 무슨 마음일까〉
〈오늘도 다시 가슴에 통증이 있네.
죽을 거라면
고향에 돌아가서 죽고자 생각한다〉
그래도 시인의 시름을 덜어주는 것은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즐거워하다가도 시인은 탄식한다.
〈네 부모와도,
부모의 부모와도 닮지 않기를—
그렇게 너의 아비는 생각한단다, 애야〉
〈단 한 명뿐인
사내자식이었던 나는 이렇게 자랐지.
부모님도 슬프지 않겠는가〉
이시카와는 아이를 낳고 나서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아예 애를 낳지 않는다. 이런 후회를 하게 될 것이 두려워서.
‘소심한 혁명가’
이시카와 부부.
시인이 살았던 시대는 메이지 시대의 끝자락이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라는 목표를 향해 상하 할 것 없이 40년을 달린 끝에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고 ‘대일본제국’은 세계 7대 열강의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 피로감이 몰려왔다.
‘우리는 그동안 무엇을 위해 그리도 허위허위 달려왔던 것일까?’ 하는 의문이 지식인들의 가슴을 때렸다.
마치 개발연대(開發年代)를 지나면서 ‘근대화’에 대한 피로감에서 전(前)근대와 사회주의로 일탈했던
한국의 지식인들처럼…. 배움의 깊이는 깊지 않았어도, 시인 역시 그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사람들 모두
같은 쪽을 향해서 가고 있구나
그것을 측면에서 보고 있는 내 마음〉
〈농사꾼들의 대부분은 술까지 끊었다고 한다.
더 곤궁해진다면,
무엇을 끊으려나〉
사람들이 모두(적어도 대부분이) 제국주의, 군국주의를 향해 가고 있을 때,
그것을 측면에서 보는 시인의 눈에 사회주의가 들어온다.
마침 1910년 일단의 사회주의자들이 천황을 암살하려다가 미수에 그치고
대거 처형되는 이른바 ‘대역(大逆)사건’이 발생한다.
시인은 몰래 금서(禁書)를 들여다보고, 테러리스트들과 감옥에 간 사람들을 생각하고,
병상에서 ‘혁명’을 헛소리처럼 내뱉는다.
그리고 러시아 황제를 암살한 여성 혁명가의 이름을 따서 딸에게 ‘소냐’라는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한다.
‘소심한 혁명가’를 곁눈질하는 시인은 그런 감정들도 단카로 노래한다.
그래도 시인은 세상보다는 자신을 먼저 탓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단카들은 회색빛이기는 해도 날이 서 있거나 아주 우울하지는 않다.
시인이 10년이나 20년 후쯤 태어났다면, 아니 그가 10년이나 20년만 더 살았더라면,
그는 프롤레타리아문학 같은 데에 한쪽 발을 담갔을지도 모른다(두 발 다 담그지는 못했을 것 같다).
하지만 하늘은 그에게 그런 수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음산한 노트를 달라”
1912년 4월 시인은 친구 도키 아이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돈이 더는 없다. 단카집을 낼 수 있게 해달라.”
문득 죽기 직전 친구에게 돈을 만들어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던 소설가 김유정이 생각난다.
“지금 나는 병마와 최후의 담판이다. 흥패가 이 고비에 달려 있음을 내가 잘 안다.
나에게는 돈이 시급히 필요하다. 그 돈이 없는 것이다. 필승아. 내가 돈 백원을 만들어볼 작정이다.
동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네가 좀 조력하여주기 바란다.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허니, 네가 보던 중 아주 대중화되고 흥미 있는 걸로 두어 권 보내주기 바란다.
그러면 내 50일 이내로 역(譯)하여 너의 손으로 가게 하여주마.
하거든 네가 극력 주선하여 돈으로 바꿔서 보내다오.… 돈이 생기면 우선 닭 30마리를 고아 먹겠다.
그리고 땅꾼을 들여 살모사, 구렁이를 10여 마리 먹어보겠다. 그래야 내가 다시 살아날 것이다.”
도키 아이카는 시인의 요청을 받는 즉시 도운도 서점에 가서 시인의 단카집을 내는 계약을 맺고 돈을 받아온다.
목돈이 생긴 시인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원고를 손볼 시간이 없었다.
시인은 아내에게 “그 음산한 노트를 달라”고 했다.
194수의 완성된 단카와 미완성인 한 수의 단카가 담긴 노트였다.
‘그 음산한 노트’라니…. 시인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를 여기서 다시 느낄 수 있다.
원고를 넘긴 지 며칠 후인 1912년 4월 13일 오전 9시, 시인은 세상을 떠났다. 사인(死因)은 폐결핵.
그의 나이 26세, 남들 같으면 이제 막 인생을 꽃피우기 시작할 나이였다.
도키 아이카는 시인의 유고(遺稿)를 모아 그해 6월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두 번째 단카집을 냈다.
이것이 이 책의 후반을 차지하는 《슬픈 장난감》이다.
시집이 나오기 6일 전 시인의 두 번째 딸이 태어났다.
하지만 시인의 아내도 이듬해인 1913년 5월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박복한 집안이었다.
이시카와를 흠모했던 조선의 시인
백석
이 시집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한국을 병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노래했다.
지도에 나온
조선국 자리 위에
시커멓도록
먹물을 칠해가며
가을바람을 듣네
일본 국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와 등불을 들고 축하행렬을 이루고 있을 때,
시인은 ‘이래도 되는 건가?’라는 의문을 던졌던 것이다.
그의 이 시는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된 이웃 나라를 위한 조시(弔詩)였다.
그리고 이시카와 다쿠보쿠는 메이지유신의 성공과
‘대일본제국’의 영광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자기 자신을 포함하여)을 노래한 시인이었다.
이런 이시카와 다쿠보쿠를 흠모했던 조선의 시인이 한 명 있었다.
평북 정주 출신의 시인 백기행, 곧 백석(白石)이었다.
백석이라는 필명은 바로 이시카와(石川)의 ‘石’을 가져다 지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