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西區)
-신라에 병합되면서 경덕왕 16년(757) 지방제도 때 동래군으로 개편
-1910년 일제강점으로 동래부가 부산부로
-광복 후에는 1951년 구제 실시를 전제로 6개의 출장소가 설치되었는데, 옛 부산시청(중앙동)을 기준으로 서쪽에 위치한다고 하여 서부출장소라 하였다.
-그 후 1957년에 비로소 구제로 변경되면서 서구가 되었다.
-1975년 구직할의 사하출장소가 시직할 출장소로 승격되었고, 1983년에는 서구에서 사하구가 분구되어 나아갔다.
남부민동(南富民洞)
-부민동에 속해 있다가 1914년 부산부제가 실시되면서 남부민동으로 분리하여 나온 동
-본래는 부민동과 함께 부민포(富民浦)로 불리던 곳이다.
동대신동(東大新洞)
-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 또는 「고분도리」(고리짝을 만드는 들)이다.
-1914년,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한」은 큰길을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 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1926년 동대신정과 서대신정으로 구분하게 되었고, 광복 이후 1947년 동명개칭 때 동대신동으로 바뀌었다.
부민동(富民洞)
-갈대밭과 풀밭이어서 예로부터「샛디」라고 불러왔다.
-「샛디」는 초량(草梁)이란 말이다. 당시에는 인가가 매우 적은 시대이긴 하지만 이 넓은 지역을 모두 초량이라고 부르기에는 불편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해정리를 신초량리라 하고, 원래의 샛디는 구초량리라고 불렀으며 이러한 지명은 개항(1876년) 당시까지도 있었다고 한다.
-부민동은 수천 하구의 부민포에서 따온 것으로 보이며, 부민포는 부산부곡의 옛 명칭이 부산(富山)이며,
부산부곡의 사람들이 쓰던 포구라는 뜻으로서 부민(富民)이란 명칭이 생겨났다고 추측된다.
부용동(芙蓉洞)
-일제시기에는 중도정(中島町)이라 불렀다.
-광복 이후 1947년 7월 일본식 동명을 우리의 동명으로 개칭할 때 부용동으로 고쳤다.
-1962년 부민동에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래 행정구역상 부민동이었다가 분리되었다는 점에서 부민의 부(富)라는 글자와 부(富)를 상징하는 부용화(芙蓉花)를 동시에 고려하여 지은 동명인 듯하다.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부용화가 많이 피어 있어서 부용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서대신동(西大新洞)
- 옛 지명은「닥밭골(楮田)」(닥나무가 많이 나는 골) 또는 「고분도리」(고리짝을 만드는 들)이다.
-1914년, 보수천의 호안공사 이후 일본인이 대거 밀려와서 생긴 새로운 시가지를 한새벌이라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한새벌의「한」은 큰길을 큰대(大) 또는 태(太), 새는 새로운 이라는 뜻의 신(新), 벌은 넓은 땅이라는 뜻을 가진 동(洞)이므로, 대신동은 한새벌의 한자식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서대신동은 1926년 서대신정과 동대신정으로 구분되었고, 광복이후 1947년 동명 개칭 때 서대신동으로 바뀌었다.
아미동(峨嵋洞)
-아미골이란 골짜기가 생기고, 그 골짜기 이름에서 아미동이란 마을 이름이 생긴 뒤 아미산이란 산 이름이 생겼다.
-아미의 뜻은 지금의 아미동 지역에서 내려다보는 토성동의 옛 토성이 반월형이 되어서
누에나방이 가진 예쁜 눈썹 같아서 미인을 가리켜 아미라 하는 그 아미로 미화된 것으로 본다.
암남동(岩南洞)
-과거 동래군 사하면 암남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는 암남(暗南)으로 적혀 있는 곳도 있는 것으로 보아 음에 맞추어 한자를 붙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하므로「암남」은「아미골」의 남쪽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보인다.
-이곳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조선후기부터라고 생각된다.
초장동(草場洞)
-용마가 초원이 좋아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전설을 따라 생겼다고 한다.
-이곳을 초원이었다고 하여 초장동이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이곳은 역시 목마장은 초장동 뿐만 아니라 주변일대가 거의 다 조선시대 조정에서 운영하는 목마장이었다.
-초장동이란 이름 역시 초원의 장(場)인 초장에서 나왔다고 한다.
충무동(忠武洞)
-원래 부민포에 속한 해변이었다.
-일제시기 한때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 소화정(昭和町)이라 불리었다.
-1947년 7월 일제식 동명 개칭 때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비석을 세우고 충무동로터리로 명명하면서 동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일본인이 물러간 후 일본천황의 연호를 따서 지은 이름을 일본을 무찌른 장군의 시호를 딴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토성동(土城洞)
-토성이 있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1906년 일본거류민단에 의해 설립된 부산고등여학교(현 부산여자고등학교 전신)를 현 토성중학교 자리에 신축할 때부터 파괴되기 시작하여
토성초등학교 건물을 비롯한 건물이 차례로 들어서서 지금은 거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한다.
http://www.busan.go.kr/seogu
문제시 호다닥 수정~!
첫댓글 오신기하디 나 아는 사람이 맨날 부민동 부유할부 백성민 이러면서 부유한 사람이 시는 동네라고 막그랫엇는데 ㅋㅋ
한글너무예쁘다 샛디 라는말 처음봐
충무동이름 속시원하다 왜놈시키들
대신동에 닥밭골벽화마을이있는게 옛지명에서 따온거였구나ㅋㅋㅋㅋ 대신동에 일본인들이 옛날에 진짜 많이살았대
서대신 2동은 없는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