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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지음 / 정영목 옮김
사계절 / 2005년 2월 / 436쪽 / 13,000원
1부. 초원의 공포정치 1162~1206
1장 핏덩어리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자가 될 운명을 타고난 소년의 이야기는 1162년 봄 유라시아의 광대한 내륙 지방의 가장 외딴 지역에서 시작된다. 정확히 말하면 현대 몽골과 시베리아가 맞닿은 곳 근처였다. 납치되어온 젊은 여자 후엘룬은 첫 아이를 낳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곳은 그녀의 고향이 아니었으며, 지금 그녀의 남편 노릇을 하는 사람은 그녀가 결혼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메르키트 부족의 칠레두라는 다른 젊은 전사의 부인이었던 것이다. 남편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던 그녀를 납치한 남자는 작고 미미한 집단에 속한 예수게이였다. 훗날 이 무리는 몽골족으로 알려지게 되지만 현재는 타이치우드 친척들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상태였다. 자주 되풀이되는 이야기에 따르면, 후엘룬의 첫 아기는 오른손에 핏덩이를 쥐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삶의 경험도 없고, 글도 모르고, 몹시 외롭기까지 했던 젊은 여자는 아들의 손에 나타난 이 이상한 징조를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 아이는 곧 테무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테무진이 9살 때, 아버지인 예수게이가 타타르족에게 독살을 당하자 타이치우드 씨족에 의해 그의 가족 전부가 버림받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모두들 거친 삶을 살아가는 땅이었지만, 이들은 거기에서도 초원생활의 가장 밑바닥까지 추락한 것이다. 테무진은 그의 가족과 함께 비극을 견디어내면서 초원지대의 엄격한 카스트 구조에 도전하고, 자신의 운명을 주도하고, 가족이나 부족보다는 신임하는 동료와 동맹을 맺어 이것을 일차적인 지지기반으로 삼겠다는 강한 결의를 굳히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밖에서는 자무카라는 소년과 의형제를 맺는 친밀한 유대를 나누었지만 집에서는 배다른 형 벡테르가 권위적으로 못살게 구는 바람에 형제간의 경쟁이 더 심해졌다. 몽골 유목민의 가족생활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보통 엄격한 위계질서의 지배를 받았다. 벡테르는 아버지가 죽임을 당한 뒤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남성으로서 점차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무진의 친모인 후엘룬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벡테르를 남편으로 받아들여 가장으로 삼겠다는 뜻을 밝히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테무진은 벡테르가 가장이 되는 상황은 용납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동생 카사르와 함께 벡테르를 죽였다. 이미 테무진은 뒤따르지 않고 앞서 나가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앞자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관습을 어기고, 어머니에게 도전하고,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앞길을 막는 사람은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테무진은 벡테르를 죽여 배다른 형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는 했지만, 금기를 어겼기 때문에 가족을 더 큰 위험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타이치우드 씨족이 그들의 영토에서 살인을 저지른 죄를 물어 테무진을 벌하려 했기 때문이다. 테무진이 그들에게 잡혀 노예생활을 하는 동안 한 가난한 가족이 목숨을 걸고 탈출을 도와준 것에 테무진은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사건을 통해 테무진은 그의 씨족이 아니라 해도 가족과 다름없이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 같다. 훗날 테무진은 혈연적 유대가 아니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태도와 행동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것은 초원 사회에서는 혁명적인 발상이었다.
1178년 테무진은 16세가 되자 아버지가 죽기 전에 점지한 약혼녀 부르테를 데려왔다. 신부는 함께 살게 되는 남편 부모에게 옷을 가져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유목민에게 큰 선물은 쓸모가 없었지만, 질 좋은 옷은 인기가 높았을 뿐 아니라 실용적인 가치도 높았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테무진은 그런 선물을 아버지에게 주었겠지만, 아버지가 없었기 때문에 외투를 가장 요긴하게 사용할 방도를 궁리했다. 그는 담비 외투를 이용해 아버지의 옛 우정을 되살리고, 이런 동맹을 통하여 자신과 점점 늘어나는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기로 했다. 테무진이 자신이 받은 결혼 선물을 아버지의 친구인 토그릴(훗날 흔히 옹 칸이라고 알려진 지도자)에게 준 것은 그를 자신의 아버지로 인정하는 행동이었다. 그리고 옹 칸은 선선히 선물을 받아들임으로써 그를 일종의 양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테무진의 가족이 이미 겪은 고생으로는 모자랐는지, 테무진의 어머니를 빼앗겼던 부족 메르키트는 18년이 지난 뒤에 이제 와서 과거의 수모를 복수하겠다고 나섰다. 메르키트는 다섯 자식을 기르느라 늙어버린 과부 후엘룬이 아니라 테무진의 젊은 신부 부르테를 데려가 후엘룬 납치에 대한 앙갚음을 했다. 옹 칸과 주도면밀하게 맺어놓은 동맹은 테무진이 이 위기를 대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메르키트의 도전은 그가 위대한 칸의 길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2장 세 개의 강
테무진은 초원지대의 끊임없는 전쟁과 소요로부터 떨어져서 조용한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메르키트의 침략으로 그런 삶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추방당한 자로서 궁핍한 삶을 살고 싶지 않다면, 늘 그의 야영지를 마음대로 습격하는 침략자들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다면, 초원 지대 전사들의 위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만 했고, 그때까지 피해온 거친 게임에 가담하여 늘 전쟁을 치러야 했다. 테무진은 싸우는 쪽을 택했다. 옹 칸의 진지를 찾아 지원을 요청하기로 한 것이다. 늙은 칸은 그 나름대로 메르키트에 구원(舊怨)이 있었기에 선뜻 돕겠다고 나섰다. 옹 칸은 또 젊은 몽골의 영웅으로 새로 떠오른 인물에게 테무진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게 했다. 바로 테무진의 의형제인 자다란 씨족의 자무카였다. 두 사람의 도움으로 테무진은 메르키트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아내 부르테와 감동적인 재결합을 했다.
이후 테무진은 자신의 작은 무리를 데리고 안전한 산을 떠나 초원지대로 나와 자무카와 함께 생활함으로써 사냥꾼 생활을 버리고 유목민 생활을 택했다. 하지만 테무진이 자무카의 지도를 따르고 그로부터 배우는 데 만족하는 생활은 일년 반 정도로 끝이 났던 것 같다. 배다른 형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보다는 형을 죽이는 쪽을 택했던 젊은이에게 이런 관계는 견디기 힘들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계급 위계에 따른 초원의 오래된 관습 역시 영향을 주었다. 친족 위계에서 각각의 가문은 뼈라고 불렸고, 혼인이 허용되지 않는 가장 가까운 관계는 흰 뼈, 혼인이 허용되는 먼 친족 관계는 검은 뼈였다. 테무진이 자무카의 무리에 속해 있는 한, 먼 검은 뼈 친족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계속 받아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181년 5월 중순 테무진은 그를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몰래 달아났다. 이 두 청년 사이에 벌어진 균열은 이후 20년 동안 몽골의 중요한 전사로 성장한 두 사람 사이의 전쟁으로 발전했으며, 결국 두 사람은 불구대천의 원수 사이가 되었다. 테무진은 19세에 자무카와 갈라선 뒤, 스스로 전사들의 지도자가 되어 부하를 모으고 권력기반을 다지기로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다루기 힘든 몽골 부족을 통일하여 칸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궁극적 목표를 세웠을 것이다. 이런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자무카는 그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가 되며, 그들의 분쟁은 몽골족 전체를 내란의 소용돌이에 빠뜨리게 된다. 이 두 경쟁자는 이후 25년 동안 서로 가축과 여자를 약탈하고, 상대를 습격하여 부하들을 죽였다. 몽골족의 최고 통치자 자리를 놓고 싸움을 벌인 것이다.
1202년 옹 칸은 테무진에게 동쪽의 타타르를 약탈하는 원정을 맡겼다. 테무진은 타타르 원정에서 오랫동안 초원 생활을 지배하는 규칙을 다시 완전히 바꾸게 된다. 첫 번째 혁신은 완전한 승리를 거둔 다음에 약탈을 시작하라는 명령이었고, 두 번째 혁신은 습격 과정에서 전사한 모든 병사의 과부와 고아에게도 일반 병사와 똑같이 전리품을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테무진은 이 정책을 통해 부족 내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의 지원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병사들의 충성심도 더 끌어냈다.
이제 병사들은 자신이 죽더라도 테무진이 남은 가족을 돌봐준다고 믿었다.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 때문에 귀족 다수가 분노했으며, 일부는 그를 버리고 자무카에게 합류했다. 이로써 지체 높은 가문과 일반적인 유목민 사이의 구분은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1203년 타타르 정복 후 테무진은 몽골 군대와 부족을 다시 한 번, 훨씬 더 혁신적으로 개혁했다. 초원지대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에 따르면 친족의 망(網) 이외의 사람들은 모두 적이었으며, 입양이나 혼인이라는 유대를 통하여 가족으로 편입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테무진은 그런 집단들 사이의 끊임없는 다툼을 끝내고 싶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나면 지도자들은 죽이고 생존자들은 노예가 아니라 완전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후에는 검은 뼈와 흰 뼈의 구별마저 폐지해버림으로써 그의 무리는 모두 하나의 통일된 민족 구성원이 되었다. 이로써 테무진은 초원 세계에서 상당한 위치를 확보했다.
3장 칸들의 전쟁
옹 칸의 마지막이 멀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누가 그의 뒤를 이을지는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테무진은 20년 이상의 투쟁 끝에 몽골족 대부분을 다스리게 되었지만 아직 경쟁자 자무카를 제압하지 못했다. 옹 칸은 대체로 테무진 편에 섰지만, 그럼에도 은근히 두 하위 칸들이 서로 경쟁하도록 부추기고 있었다. 하지만 자무카는 자신이 전투에서 테무진과 맞서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계략을 통해서 테무진이라는 잠재적 위협을 없앨 계획을 세웠다. 자신의 딸과 테무진의 장남 주치의 결혼을 허락한다는 전갈을 보내고 테무진을 초대하여 함정을 준비한 것이다. 테무진은 옹 칸의 왕실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에야 가까스로 자무카의 계략을 간파하고 필사적으로 달아났다. 테무진은 이제 그의 능력을 최대로 시험받게 되는 위기에 직면했다.
테무진은 먹을 것도 없이 지친 몸을 이끌고 며칠간 계속 달아나다가 진흙탕인 발주나 호숫가에 이르렀다. 부하들 가운데 불과 19명만 남아 있었다. 부하들은 흙탕물을 함께 마시며 끝까지 그에게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이 사건은 친족 관계, 인종, 종교를 떠나 상호 헌신과 의리에 기초하여 결집한 몽골 민족의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집단은 테무진의 추종자들이 이룩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의 맹아였으며, 이것이 결국 몽골 제국 내 통일의 기초로 힘을 발휘하게 된다. 테무진은 발주나에 은신하면서 반격 계획을 세웠다. 며칠이 지나자 새로 조직된 수만 명의 군대가 초원에 다시 모여들었다. 아마 테무진 자신도 이 정도 규모의 군대가 모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테무진의 군대는 옹 칸의 군대를 물리쳤다기보다는 삼켜버렸다. 그리고 1205년에는 자무카까지도 사로잡게 된다. 테무진은 이제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자무카에게 복수를 하지 않고 오히려 다시 그와 힘을 합치려 했다. 하지만 자무카는 살아서는 테무진을 실망시켰지만, 죽음으로 더 나은 친구가 되겠다고 말하고 죽음을 자청했다. 이제 테무진은 방대한 땅의 명실상부한 통치자로서 남쪽의 고비로부터 북쪽의 툰드라까지, 동쪽의 만주 삼림으로부터 서쪽의 알타이 산맥까지 모든 것을 통제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한 뒤 각각의 혈통, 씨족, 부족에 내려오는 세습적인 귀족 칭호를 모두 없앴다. 그리고 테무진 자신은 칭기스 칸(Chinggis Kha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몽골어에서 친(Chin)은 강하고, 단단하고, 흔들림 없고, 두려움 없다는 의미였으며, 늑대를 가리키는 몽골어 치노(chino)와 가까웠다. 실제로 몽골족은 자신들이 늑대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칭기스 칸은 단순하면서도 새로운 칸에게 잘 어울리는 칭호였다.
모든 유목민 부족이 단결하고 칭기스 칸이 통치자로서 확고하게 자리를 굳히자, 몽골인은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막막해했던 것 같다. 적이 없으면 뭉쳐 있을 이유도 없었다. 칭기스 칸은 새로운 적을 찾는 것 같았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부족은 없었다. 칭기스 칸은 대군을 호령했지만 그가 다스리는 사람들은 대개 가난했다. 반면 남쪽 고비 사막 너머에는 비단길을 따라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상당한 물자가 흐르고 있었다. 칭기스 칸은 이런 물자 흐름의 불균형을 사로잡고 자신의 군대를 다른 군대와 맞붙여 시험해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마치 그의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이 그런 기회가 곧 나타났다.
2부. 몽골 세계대전 1211~1261
4장 황금 칸에게 침을 뱉다
칭기스 칸이 48세가 되고 그의 새로운 나라가 세워진 지 4년이 흐른 1210년 말의 해에, 주르첸(여진족의 금나라) 대표단이 몽골 야영지에 도착하여 새로운 황금 칸이 즉위했음을 알리면서 칭기스 칸의 몽골이 속국으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했다. 칭기스 칸은 복종하는 태도를 보이라는 명령을 받자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땅에 침을 뱉었다고 전해진다. 이어 그는 황금 칸에게 욕을 퍼붓더니 말에 올라 북쪽으로 달려갔다. 칭기스 칸은 그렇지 않아도 교역 물자 때문에 주르첸과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황금 칸이 복종을 요구했으니 이제 공격할 구실을 얻은 셈이었다.
1211년 칭기스 칸은 고비 사막을 넘어 주르첸을 침공하겠다고 결정했다. 광대한 고비 사막을 넘으려면 많은 준비가 필요했다. 몽골군의 이동과 대형은 두 요인에 의해 결정되었는데, 이점에서 이들은 다른 모든 전통적인 문명의 군대와 분명하게 달랐다. 첫째, 몽골군은 모두 기병으로만 이루어졌다. 둘째, 병사들과 함께 다니는 예비의 많은 말들 외에는 따로 병참부나 거추장스러운 보급 대열이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몽골 전사가 적은 식량과 물만으로도 오래 버틸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혐오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곡물 식사를 하는 주르첸 병사들과는 달리 몽골 병사는 아무리 가난해도 주로 단백질을 먹었으며, 따라서 이와 뼈가 튼튼했다.
몽골의 싸움 방식은 수천 년 동안 몽골에서 발전해온 전통적인 초원 전투 체계를 세련되게 다듬은 것이었다. 결국 몽골족은 우월한 무기 때문에 승리를 거둔 것이 아니었다. 무기를 만드는 기술은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될 수 없다. 한쪽 편에서 유용하게 써먹은 무기는 전투를 몇 번만 하고 나면 상대편도 사용하게 된다. 몽골의 승리는 작은 무리를 지어다니던 유목민이 수천 년 동안 다져온 단결과 규율에서 나온 것이며, 지도자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다. 어디서나 전사들은 지도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배운다. 그러나 칭기스 칸은 부하들에게 자신을 위해 죽을 것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을 할 때 무엇보다도 몽골군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을 중요한 전략적 목표로 삼았다. 수십만 명의 병사들에게 쉽게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역사 속의 다른 장군이나 황제들과는 달리 단 한 명의 목숨이라도 함부로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1215년 칭기스 칸은 마침내 중도(베이징)를 함락하고 내몽골의 높고 건조한 고원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칭기스 칸은 이번에도 전쟁에서 이겼다. 그리고 이제 초원의 칸의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물자를 고향 사람들에게 실어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채우지 못할 만큼 몽골 민족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정복을 할수록 정복에 대한 요구도 늘어났다. 그리고 카라 키타이에게 승리를 거둠으로써 이제 중국인과 무슬림 사이의 비단길을 완전히 통제하게 되었다. 칭기스 칸은 일차적인 생산지역인 송나라나 일차적인 구매지역인 중동을 통제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이의 연결고리들은 통제하게 되었다. 그는 대량의 중국 교역 물자를 통제하게 되자 중앙아시아나 중동의 무슬림 국가들과 교역을 할 수 있는 엄청난 기회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219년 군사 분야와 상업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을 쌓은 칭기스 칸은 예순의 나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칭기스 칸은 자신이 다 사용할 수도 없고 자기 민족에게 나누어주어도 남는 물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는 이 엄청난 양의 새로운 자원을 이용해 교역을 자극하고 싶었다. 현대의 아프가니스탄의 산맥으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방대한 지역은 투르크족 술탄 무함마드 2세가 통치하고 있었으며, 그의 제국은 호라즘이라고 불렀다. 칭기스 칸은 이곳에서 나는 이국적인 상품들을 원했으며,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 머나먼 땅의 술탄과 교역 상대로서 동반자 관계를 맺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술탄은 자신이 아는 가장 극적이고 도발적인 방법으로 칸을 자극했다. 사절들 몇 명을 죽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얼굴을 망가뜨려 주인에게 돌려보낸 것이다. 칭기스 칸은 분노, 수치, 좌절을 느끼며 전쟁 준비에 들어갔다.
5장 술탄과 칸의 대결
칭기스 칸은 1219년 토끼 해에 서쪽으로 출발하여 용 해인 이듬해 봄에 호라즘 샤에 도착했다. 그해가 끝나기 전 몽골군은 호라즘 제국의 모든 주요 도시를 점령했으며, 술탄은 칭기스 칸 전사들의 무자비한 추적을 피해 숨어들었던 카스피 해의 어느 작은 섬에서 쓸쓸히 죽어갔다. 몽골족은 새로운 땅으로 계속 밀고 들어갔으며, 4년에 걸친 원정에서 파리를 잡듯이 중앙아시아의 도시들을 정복했다. 정복하는 과정은 약간씩 달랐지만 결과는 늘 똑같았다. 어떤 도시도 그들의 공격에 버티지 못했다. 몽골군은 항복하는 자들에게는 정의를 약속하고, 저항하는 자들에게는 파괴를 맹세했다. 주민이 친족 관계 제안에 화답하여 진짜 친척처럼 식량을 제공하면 몽골군은 그들을 가족 구성원으로 여겨 보호해주고 가족의 기본적인 권리를 부여했다. 물론 거부하면 적으로 상대했다.
칭기스 칸의 중앙아시아 정복에서 한 집단, 즉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은 포로가 된 사람들 가운데서도 최악의 운명을 겪었다. 몽골군은 귀족을 만나면 가능한 한 빨리 죽이려 했다. 칭기스 칸은 적의 귀족을 자신의 군대에 받아들인 적이 없었으며, 다른 일을 맡기는 경우도 매우 드물었다. 칭기스 칸은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나라들에 이르렀을 무렵 부자와 권력자들의 충성심, 신뢰성, 유용성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었다. 또한 여론이나 대중의 태도에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게으른 부자들의 운명에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몽골군은 귀족을 죽임으로써 적의 사회 체제를 무너뜨렸고, 나아가서 미래의 저항 가능성을 최소화했다. 일부 도시는 귀족이 전장에서 죽고 그 가족이 몰살을 당한 뒤에 사회를 재건할 힘을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4년간 중앙아시아를 정벌한 칭기스 칸은 60대로 접어들었다. 부족 내의 경쟁자도 없고 외부 적의 위협도 없는 상태에서 권력은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러나 전쟁에서는 이렇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그의 가족은 그가 죽기도 전에 이미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칭기스 칸은 자신을 신으로 생각하게 된 다른 정복자들과는 달리 자신이 인간임을 분명하게 인식했으며, 자신이 죽은 뒤 제국이 순조롭게 과도기를 넘어가도록 준비를 해두고 싶어했다. 하지만 자식들의 싸움을 보면서 칭기스 칸은 자신의 사후에 제국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칭기스 칸은 평생 친척을 불신하고 젊은 시절부터 함께 지내온 동료나 친구들에게만 의지했기 때문에 자식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돕지 못했으며 그들을 자신의 후계자로 훈련시키지도 못했다. 그는 오랫동안 자식들 교육을 태만하다가 한꺼번에 모든 것을 가르치려 했다.
칭기스 칸은 지도력의 첫 번째 열쇠가 자기절제라고 가르친다. 특히 자만심과 분노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자식들에게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필요한 말만 하라. 지도자는 말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보여주어야 한다. 칭기스 칸은 자신의 수수하고 소박한 생활방식에 따라 자식들에게도 물질적인 천박함이나 허튼 쾌락을 추구하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한다. 그는 자식들에게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군대를 정복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교훈으로 꼽힌다. 군대는 전술과 전력만 우월하면 정복할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정복할 수 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은 하나지만 그 신민이 하나로 통일되는 것은 결코 허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과 후계자들은 그의 다른 많은 가르침과 마찬가지로 이 가르침도 무시해 버렸다.
그의 긴 생애의 마지막 원정 대상은 몽골 제국 창건 이듬해인 1207년에 공격했던 외적 탕구트였다. 그들은 항복을 했으면서도 호라즘 침공 때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본때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탕구트와 전쟁을 하기 위해 고비 사막을 가로지르던 1226~1227년 겨울에 잠시 발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하던 중 겁 많은 말이 결국 대칸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칭기스 칸은 낙마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탕구트 원정의 최종 승리를 불과 며칠 남겨 놓고 죽었다. 칭기스 칸의 죽음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사람으로는 로마인을 연구하면서 제국과 정복의 역사를 파헤쳤던 18세기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간결하게 말했다. 칭기스 칸은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 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몽골인이 칭기스 칸의 바람과 명령을 이루려면 할 일이 아직 많았다.
6장 유럽 원정대
칭기스 칸이 죽고 나서 몽골이 셋째 아들인 우구데이 취임을 축하하는 일에 한눈을 파는 동안 새로 정복한 신민들 가운데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공물을 보내지 않았다. 우구데이는 몽골의 지배를 재확인하기 위해 중국 북부와 중앙아시아에 다시 대군을 보내야 했다. 우구데이는 군대를 따라가지 않았다. 우구데이는 그의 아버지가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말을 타고 정복을 할 수는 있지만 말을 타고 다스릴 수는 없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그러나 말을 타고 통치하는 것, 즉 권력의 중심이 옮겨다니는 것이야말로 몽골 성공의 제1요인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우구데이가 짧은 치세에 저지른 몇 가지 실수 가운데 첫 번째가 이 정책을 버리고 권력 중심과 제국의 행정부를 고정시키려 했다는 점이었다. 몽골은 이후 40년에 걸쳐 말을 탄 전사들의 나라로부터 정주(定住)한 조정이 다스리는 나라로 바뀌었다. 물론 여기에는 칭기스 칸의 유산과는 대조를 이루는 문명화된 퇴폐의 온갖 장식품이 따라붙었다.
1235년 우구데이는 아버지의 부를 거의 모두 탕진해버렸다. 우구데이의 도시는 건설과 운영에 큰 비용이 들어갔으며, 그의 생활습관도 유지비가 많이 들어갔다. 우구데이가 수도를 건설하고 행정부를 개혁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건, 결국 몽골 제국은 정복에 의존하고 있었다. 몽골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우구데이는 새로운 목표, 이제까지 약탈하지 않았던 목표를 정하고 전쟁을 해야 했다. 하지만 어디에 있는 누구를 약탈해야 할까? 유럽 침공을 원하는 쪽과 송나라 공격을 선호하는 쪽으로 가족의 의견이 갈리자 그들은 전례 없는 주목할 만한 결론에 이르렀다. 사방으로 몽골군을 밀어낸다는 결정이었다. 즉 몽골군을 나누어 송나라와 유럽을 동시에 공격하자는 뜻이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연합군들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는 어떤 군대도 이루어낸 적이 없는 위업이었다.
이 결정은 과감하기는 했지만 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최악의 결정으로 꼽을 만한 것이었다. 몽골군은 송나라와 전투를 하여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는 했지만 결국 본토를 정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우구데이는 가장 아끼는 아들을 잃기도 했다. 송나라 원정 실패의 원인은 집중력의 분산과 몽골 최고의 장군인 수베데이의 부재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어정쩡한 공격 때문에 송나라는 비틀거리면서도 40년을 더 버티고 나서야 몽골군에게 항복했다. 반면 유럽 원정은 가족의 여러 왕자들 사이의 오랜 다툼에도 불구하고 군사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전에 칭기스 칸이 정복한 도시들에서 거두어들였던 부와 비교하면 이번에도 전리품은 보잘것없었다.
1241년 12월 11일, 우구데이는 술에 취해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죽었다고 한다. 칭기스 칸의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칭기스 칸이 죽고 나서 불과 14년이 지난 시점에 아들 넷이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러자 칭기스 칸의 손자들은 다음 대칸이 되기 위한 경쟁을 계속하기 위해 고향으로 달려갔다. 가문들 간의 투쟁은 이후 10년간 계속된다. 적어도 이 10년 동안은 세계가 몽골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범의 해인 1242년 초 몇 달 동안 몽골군은 서유럽으로부터 러시아의 근거지로 물러났다.
7장 왕비들의 싸움
몽골의 남자들이 전장에 머물며 다른 나라들을 정복하느라 바쁠 때 여자들은 제국을 운영했다. 우구데이 재위시 싸움이 가장 심하게 벌어졌던 러시아와 동유럽을 제외한 나머지 몽골 제국의 관리는 여자들의 손에 맡겨졌다. 칭기스 칸의 막내아들 톨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는 중국 북부와 몽골 동부를 통치했다. 칭기스 칸의 둘째아들 차가타이의 미망인 에부스쿤은 중앙아시아, 즉 투르키스탄을 통치했다. 1241년에 우구데이가 죽자 그의 미망인 투레게네는 공식 섭정이 되어 1241년까지 10년간 다른 여자들 몇 명과 더불어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관리했다. 이 여자들 가운데 몽골족 출신은 없었다. 모두 정복당한 초원지대 부족 출신으로 칭기스 칸 집안에 시집을 왔다. 또 이 여자들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성(性)도 종교도 권력투쟁의 장애가 되지는 않았다. 이들은 자신의 아들의 손에 제국 전체를 넘겨주려고 싸웠다.
우구데이의 아들인 구육이 대칸에 즉위한 지 불과 18개월 만에 급사하는 등 제국 중심에서 정치투쟁이 계속되고 훨씬 더 치열해졌다. 이 싸움의 승리는 칭기스칸의 넷째 아들 툴루이의 미망인 소르칵타니에게 돌아갔다. 그녀의 장남 뭉케를 대칸으로 즉위시킨 것이다. 뭉케의 치세에 국가와 황금 가족의 모든 에너지는 칭기스 칸이 미완으로 남겨두고 떠났던 사업 쪽으로 다시 방향을 틀었다. 송나라와 중동 아랍 국가들의 정복이었다. 원정을 재개하려면 먼저 경제를 안정시키고, 정부 지출을 통제하고, 지난 10년간 구육을 비롯한 행정관들이 쌓아놓은 엄청난 부채를 처리해야 했다. 화폐 표준화를 통해 예산 수립 과정을 표준화했고, 이에 따라 최초로 중국에서부터 페르시아에 이르기까지 표준화된 계산 단위가 사용될 수 있었다. 제국의 재정이 굳건한 발판 위에 올라서자 뭉케는 새로운 정책과 사업을 구상하기 위한 전체회의를 열었다.
뭉케는 유럽의 신기한 기계나 설계를 좋아했지만 그쪽 방향으로 다시 원정을 시작하는 데에는 아무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칭기스 칸의 양 방향 원정, 즉 중국 송나라와 아랍이나 페르시아 등 무슬림 문명 양쪽에 대한 원정으로 복귀했다. 뭉케는 가장 군사적 자질이 뛰어난 형제 훌레구에게 우익을 맡겨 아랍 도시들을 공격하게 했다. 또한 군사적 경험은 부족했지만 중국 문화를 깊이 알고 있는 쿠빌라이에게 좌익을 맡겨 송나라를 정복하게 했다. 뭉케는 대칸으로서 몽골의 중심에 남았다. 1253년 5월 훌레구와 쿠빌라이는 그들의 할아버지가 명령했고, 이제 맏형이 이어받은 양쪽 영토의 정복을 완수하러 떠났다.
훌레구의 군대는 무슬림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바그다드까지 거침없이 나아갔다. 바그다드는 <천일야화(Thousand and Ond Nights)>를 들려준 전설적인 이야기꾼 셰헤라자데의 도시였다. 훌레구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도시 내의 기독교도와 은밀한 유대관계를 맺었다. 바그다드의 정치적, 종교적, 인종적 분열을 이용하려는 의도였다. 바그다드의 기독교도는 언제든지 적대적으로 변할 수 있는 무슬림의 바다 속에 있는 소수파로서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으며, 훌레구는 그 두려움을 이용한 것이다. 1258년 2월 5일 마침내 몽골군은 바그다드의 성벽을 돌파했으며, 5일 뒤 통치자인 칼리파는 항복했다. 약탈은 17일 동안 계속되었다. 몽골군은 불과 2년 만에 서쪽의 유럽 십자군과 동쪽의 셀주크 투르크가 200년 동안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였어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그들은 아랍 세계의 심장부를 정복했다. 그 이후 2003년 미군과 영국군이 들어올 때까지 무슬림이 아닌 군대가 바그다드나 이라크를 정복한 일은 없었다.
홀레구가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중동의 땅과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정복한 것과 비교할 때 송나라를 무너뜨리고 중국 남부를 합병하겠다는 그의 동생 쿠빌라이의 계획은 임박한 현실이라기보다는 여전히 요원한 꿈처럼 보였다. 그는 몽골의 세력 범위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장애에 부딪혔을 뿐 아니라, 그가 다스리는 영토 내에서도 도교와 불교 승려들 사이의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에 시달렸다. 뭉케는 쿠빌라이를 불러들이고 질책했다. 몹시 실망한 뭉케 칸은 새로운 계획을 짤 수밖에 없었다.
뭉케 칸은 자신이 직접 송나라 원정에 나서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뭉케 칸은 유럽 원정에 참여했고 몽골의 장군들 가운데 가장 큰 업적을 세운 수베데이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스승이 세상을 떠난 지 2년이 지난 지금 송나라 원정을 이끌 가장 훌륭한 장군은 뭉케 자신이라고 할 수 있었다. 뭉케는 외곽의 왕국들을 재빨리 제압한 뒤 원정 2차년도에 송나라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인을 알 수 없는 전염병으로 인해 1259년 8월 11월에 뭉케 칸은 갑자기 죽었다. 뭉케 칸이 죽자 전진은 중단되고 제국은 그 상태에서 응결되었다. 몽골 제국은 뭉케 칸 치세에 가장 넓은 땅을 차지했다. 뭉케는 칭기스 칸의 후손 가운데 몽골 제국 전체로부터 대칸으로 인정받은 마지막 칸이었다. 뭉케 이후에도 많은 칸들이 제국의 여러 지역을 나누어 다스렸고 그들 가운데 다수가 칭기스 칸의 상속자로서 대칸 칭호를 차지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다른 분파나 가문 전체가 인정한 대칸은 한 사람도 없었다.
뭉케의 형제들은 가끔 원정에 나서기는 했지만 외부의 적과 싸우기보다는 서로 싸우는 데 힘을 기울였다. 승리는 쿠데타를 일으킨 쿠빌라이가 가져갔다. 그는 세계 최대의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를 다스렸다. 그러나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몽골의 왕가 일부와 그 추종자들은 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상징적인 위치 정도만 인정하고 무시해버리면서 자신의 국경에서 간헐적인 전쟁을 한 세대 더 계속했다. 몽골 제국은 이제 별도의 정부를 갖춘 네 개의 주요 지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 티베트, 만주, 고려, 몽골 동부를 다스렸지만, 몽골과 만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쿠빌라이를 대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터키에 이르기까지는 훌레구와 그의 후손이 다스리면서 근대 이란의 기초가 놓이게 되었다. 중앙의 초원지대는 우구데이와 투레게네의 손자 카이두 밑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으면서 쿠빌라이 칸의 권력과 대등하게 맞섰다.
3부. 세계 인식의 대전환 1262~1962
8장 쿠빌라이 칸의 새로운 몽골 제국
쿠빌라이 칸의 천재성은 그의 군대가 아무리 크고 그의 무기가 아무리 세련되었다 해도 단지 힘만으로는 중국 전체를 정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한 데서 엿볼 수 있다. 그는 할아버지와 같은 수준의 군사적 기술을 갖추지 못했지만, 그의 집안 누구보다도 머리가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쿠빌라이는 예리한 전략적 재능을 갖추었으며, 쓸 만한 구상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능력도 보여주었다. 그는 이런 능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영토를 관리했으며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결국 쿠빌라이는 할아버지가 야만적인 힘으로 이루지 못했던 과업, 즉 지상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중국 전체를 정복하고 통일하는 과업을 대중정치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중국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위대한 문명을 과시하기는 했지만 통일된 나라는 아니었다. 교육받은 엘리트는 모든 사람을 단일 정부 밑으로 묶어들인 통일된 나라라는, 이루지 못한 꿈에 집착했다. 쿠빌라이 칸은 이전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중국의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민족주의적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혹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쿠빌라이는 새로운 왕조의 황제이자 창건자로서 자신의 이미지를 중국화하려 했다. 쿠빌라이는 강한 군대와 훌륭한 선전(宣傳)이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그의 전략의 세 번째 요소를 꼽으라면 좋은 행정과 정책이었다. 그는 대중의 지지를 얻고 통치자의 외래적 성격을 탈색시킬 수 있는 체계적이고 능률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노력했다. 전체적으로 쿠빌라이의 법과 처벌 체계는 송나라의 체계보다 일관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온건하고 온정적이었다.
쿠빌라이는 덧없는 대중적 인기를 얻으려는 단기적 전략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대륙문명의 충성을 얻어내기 위해 거의 20년에 걸쳐 장기적인 전략을 일관되게 체계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중국 대중의 입장에서 볼 때 몽골인은 자신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기는 했지만, 취향이나 감수성 면에서는 중국 조정의 관리보다 오히려 몽골인에게서 더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해가 갈수록 송나라를 버리고 몽골 치하의 땅에 가서 살거나 몽골에게 도움을 주는 병사나 관리나 농민의 숫자가 늘어갔다. 송 왕조는 갑자기 무너지거나 정복을 당한 것이 아니라 서서히 침식당하면서 해체되었다. 1276년 몽골군은 마침내 송나라 수도 항저우를 점령했고 이후 몇 년 동안 지방에서 산발적으로 발생하던 소부대의 저항마저 쓸어버렸다. 쿠빌라이 칸은 끈질긴 선전과 빈틈없는 정책을 통해 칭기스 칸이 막강한 군대로도 하지 못했던 일을 해냈다.
쿠빌라이는 육지로 닿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곳을 장악하게 되자 새로 정복할 땅을 찾아 바다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몽골의 승리 전략을 바다에 적용하는 데는 실패했다. 할아버지가 지상 원정의 기초로 삼았던 말 탄 사냥꾼의 오랜 전술은 해상원정에서는 먹혀들지 않았다. 일본과 자바에서 패하는 바람에 몽골 제국의 동쪽 한계는 일단 물을 건너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말았다. 따라서 몽골 제국은 1242년에서 1293년 사이에 그 최대의 크기에 이르렀으며, 네 번의 전투 -폴란드, 이집트, 자바, 일본이 상대였다- 가 몽골 세계의 바깥 경계를 확정지었다. 이 네 경계 안의 영역은 파괴적인 원정과 정복에 시달리며 그때까지와는 매우 다른 종류의 통치체제에 급격하게 적응해야 했다. 그러나 그 단계를 지나자 100년간 전례 없는 정치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상업, 기술, 지성이 그 전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화려하게 꽃을 피웠다.
9장 팍스 몽골리카
1287~1288년 겨울 어느 날 미사를 드리던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1세는 몽골 황제 쿠빌라이 칸이 보낸 사절 랍반 바르 사우마를 맞이하기 위해 옥좌에서 일어났다. 에드워드 왕이 사절 앞에서 일어선 것은 몽골의 칸에게 복종의 예를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몽골 사절의 손에서 기독교의 성체인 빵을 받아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처음 유럽을 침공한 이후 50년 동안 몽골이 세상을 얼마나 바꾸어놓았는지 잘 보여준다. 서로 잘 모르는 상태에서 세계의 각 부분을 차지하던 문명들은 이제 통신, 상업, 기술, 정치가 서로 연결되는 하나의 대륙간 체제의 일부가 되었다. 훗날 서구 학자들은 국제적으로 평화와 번영이 확대되어가는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여 14세기를 ‘팍스 몽골리카’ 또는 ‘팍스 타타리카’라고 명명했다. 이제 몽골 칸들은 평화로운 교역과 외교를 통하여 이전에 무기의 힘으로 얻지 못했던 상업적, 외교적 연결통로를 얻으려 했다.
몽골인의 상업적 영향은 그들의 군대보다 훨씬 멀리까지 퍼져갔으며, 쿠빌라이 칸 치세에는 몽골 제국이 ‘몽골 회사’로 바뀌었다. 13세기 내내, 그리고 14세기 초에 몽골인은 제국 전체의 교역로를 유지했다. 처음에는 군사정복을 통하여 만들어진 길을 상업에 이용했지만, 곧 군대는 말을 타고 육지를 가로지르는 것이 가장 빠른 반면 대량의 물자는 배로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몽골은 일본과 자바 침공 과정에서 조선(造船)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군사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지식을 평화적인 상업활동에 돌렸다.
역사상 대부분의 제국은 정복한 땅에 자신의 문명을 강요했다. 따라서 고고학자들은 어떤 장소에 남아 있는 물리적 흔적을 연구하기만 하면 힌두, 아스텍, 말리, 잉카, 아랍 제국의 성장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자신이 정복한 땅에 가벼운 몸으로 왔다. 그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가져오지 않았다.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언어나 종교를 강요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몽골인이 아닌 사람들은 몽골어를 배우는 것을 금지했다. 몽골은 외래 작물의 경작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주민의 집단적인 생활방식을 갑자기 바꾸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전통적인 제국은 한 도시에 부를 축적했지만 몽골 제국에서는 주요한 도시 하나가 전체를 지배한 적이 없었다. 제국 내에서 물자와 사람은 늘 이곳저곳으로 이동했다.
종교적 관용 정책을 펴고, 보편적인 알파벳을 고안하고, 역참을 유지하고, 연감이나 돈이나 천문학 표를 인쇄하는 과정에서 몽골 제국의 통치자들은 일관된 보편주의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신민들에게 강요할 제도가 따로 없었기 때문에 도처에서 제도를 들여와 결합했다. 그들은 가장 효과가 좋은 길을 찾았고 그것을 찾으면 다른 나라로 퍼뜨렸다. 이 과정에서 지방 엘리트의 사상 독점을 부수었다. 몽골은 제국을 정복하면서 전쟁 방법에서 혁명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보편적 문화와 세계체제의 핵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지구문화는 몽골 제국의 종언 이후에도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했으며, 이후 수백 년 동안 근대세계체제의 기반이 되었다. 이 문화에는 원래 몽골이 강조했던 자유교역, 자유로운 교통, 지식 공유, 세속 정치, 여러 종교의 공존, 국제법, 치외법권 등이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10장 환상의 제국
암살, 실종, 납득이 가지 않는 죽음이 뒤얽히는 가운데 대칸 자리가 이리저리 옮겨다녔다. 1328년에서 1332년에 이르기까지 황금 가족의 구성원 가운데 적어도 네 명이 옥좌에 앉았으며, 7세의 린친발 칸은 1332년에 불과 두 달 동안만 자리를 유지했다. 모두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미천한 종부터 대칸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참혹한 죽음을 당할 위험에 처한 것 같았다. 하지만 수도 안에서만이 아니라 밖에서도 거의 비슷한 소동과 혼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려움의 진원지는 바로 역병이었다. 흑사병(黑死病)으로 알려진 이 병은 벼룩과 쥐를 통해 빠르게 전염되었다. 중국은 이 병 때문에 인구가 2분의 1 내지 3분의 1로 줄어든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은 몽골 세계체제에서 제조업의 중심 역할을 했기 때문에 페스트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진 것으로 보인다.
이 전염병은 피해를 입힌 곳이든 피해간 곳이든 관계없이 대륙의 모든 지역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페스트는 로마의 몰락 이후 유럽을 지배했던 사회질서를 거의 파괴해버려, 대륙에는 위험한 무질서만 남았다. 사람들은 이 병의 진짜 원인이나 전염 경로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곧 도시 안팎의 교역이나 사람의 이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 정도는 인식하게 되었다. 즉시 교역, 통신, 운송이 중단되었다. 페스트는 유럽을 고립시켰을 뿐 아니라 페르시아와 러시아에 사는 몽골인을 중국이나 몽골과 차단했다. 몽골 제국은 사람, 물자, 정보가 제국 전체를 끊임없이 빠르게 돌아다녀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연결이 없으면 제국도 없었다.
그 결과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몽골 사회는 빠르게 붕괴했다. 각각 1335년과 1368년에 몽골인의 지배가 무너졌다. 죽임을 당하거나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신민에게 흡수된 것이다. 몽골의 통제 하에 있던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토착 주민의 반란이 일어나 몽골인은 쫓겨나고 지방 엘리트가 정부를 장악했다. 간신히 몽골로 돌아온 사람들은 전과 다름없이 목가적인 유목민 생활을 계속했다. 르네상스와 몽골 제국의 시대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칭기스 칸은 인간 역사에서 가장 낮은 수준으로까지 격하되었다. 몽골을 아시아 문제의 원천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일본에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모든 몽골인을 정복해야 할 근거로 삼는 태도는 유럽의 정복과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칭기스 칸과 몽골의 잔혹성은 문명화된 잉글랜드, 러시아, 프랑스의 식민주의자들이 아시아를 통치할 수밖에 없는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유럽 과학자나 정치가들과는 정반대로 이 이데올로기의 피해자인 아시아의 지식인과 활동가들은 칭기스 칸에게서 새로운 영웅을 발견했다. 인도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새로운 세대의 아시아인은 유럽의 지배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망 때문에 칭기스 칸과 몽골에서 아시아 최고의 정복자를 보았다. 이것은 유럽의 우월성이라는 교조를 반박하는 생생한 증거였다. 황화에 대한 서구의 공포가 커지는 동안 아시아인은 점차 공동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현실적인 방법으로 범몽골주의 개념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몽골 제국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아시아인 모두가 하나의 깃발 아래 단결할 수 있다면, 서구 여러 나라의 점점 커지는 힘과 맞서 싸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내내 러시아와 중국은 칭기스 칸의 고향을 나누어 갖는 협정을 유지해왔다. 영국이 19세기 인도의 마지막 무굴 황제의 아들과 손자들을 처형했듯이, 소련은 20세기 몽골에 남아 있던 칭기스 칸의 후손을 숙청했다. 이들은 숲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한 뒤 흔적도 없이 땅이 묻히기도 하고,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가 죽을 때까지 일만 하기도 했으며, 그냥 역사의 밤 속으로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이후 몽골 박해 과정에서 언어학자, 역사학자, 고고학자를 비롯해 칭기스 칸이나 몽골 제국과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주제를 전공하는 학자들 한 세대가 완전히 사라졌다.
맺음말 - 영원한 푸른 하늘, 칭기스 칸
몽골군은 25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로마군이 400년 동안 정복한 것보다 많은 땅과 사람을 정복했다. 현대 지도에서 칭기스 칸이 정복한 땅은 30개국이며 인구로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런 성취에서 가장 놀라운 측면은 그의 휘하에 있던 몽골 부족 전체가 약 100만 명으로, 현대 일부 기업의 직원들보다 적은 수였다는 점이다. 칭기스 칸은 이 100만 명에서 군대를 징집했는데, 그 수는 10만 명에 불과했다. 현대의 대형 경기장도 꽉 채우지 못할 숫자였던 것이다. 칭기스 칸이 이룬 업적의 규모와 범위는 어떤 수준에서 보든, 어떤 관점에서 보든, 상상의 한계에 도전하며, 아무리 설명에 능한 학자라도 그 앞에서는 말문이 막히고 만다.
칭기스 칸의 제국은 주위의 많은 문명을 연결하고 융합하여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냈다. 칭기스 칸은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 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를 건설했다. 몽골인은 정치, 경제, 지성의 면에서도 헌신적인 태도로 꾸준하게 국제주의적 열정을 과시했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려 했을 뿐 아니라 자유무역, 단일한 국제법, 모든 언어에 사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알파벳에 기초한 세계질서를 수립하려 했다. 따라서 몽골인이 손을 댄 나라의 주민은 대개 처음에는 미지의 야만적인 부족의 파괴와 정복 때문에 충격을 받았지만 곧 유례 없는 문화교류, 교역 확대, 생활수준 개선의 혜택을 보게 되었다. 몽골인의 업적이 이렇게 많기 때문에 영어를 사용한 최초의 작가 제프리 초서가『캔터베리 이야기』에서 가장 긴 이야기를 아시아의 정복자 칭기스 칸에게 바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학식 높은 사람이 그런 경외감을 보인 것에 놀라움을 느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