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관 박사 이야기
한강의 기적은 대통령, 기업인의 리더십 만으론 불가능했다. 그들 뒤에서 구체적 밑그림을 그린 영 웅들이 있었다. 한국은 후진국에서 선진국이 돼 유럽에 전투기, 탱크 자주포를 수출하는 전무후무한 나라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같은 거인들이 동시대에 태어났다는 것도 분명히 기적의 한 요인일 것이다. 광개토대왕 같은 사람이 한꺼번에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학과 기술 문외한 이었다. 구체적인 산업 전망과 그 설계도를 그릴 능력이 있을리 없었다. 대통령과 기업 회장의 리더십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대체 어떻게 아무것도 없던 1960 ~1970 년대에 고도 공업국가의 기반이 닦였는지 늘 의문이었다. 한 분이 보내준 책에서 그 답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 같다. 우리는 우리 기적의 역사에 대해 너무 아 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또 절감했다.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황하 상·백 년 동안)’이라는 책으로 김재관(1933~2017)이란 사람의 이야기다. 김재관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산업은행과 서독 유학생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그런데 산업은행에서 유학 기간에도 월급을 주겠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인재 양성 제도였다. 이 대통령은 과학을 몰랐지만 미국에서 MIT를 둘러보며 여기에 나라가 죽고 사는 게 달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산은은 김재관에게 출국 때까지 국내 산업 현장을 둘러보라고 알선까지 해줬다. 전쟁 직후 형편없는 시절이었지만 한국은 싹수가 있는 나라였다. 김재관은 부산 피란 시절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미군 무기들이 모두 특수한 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뮌헨공대에서 그의 전공은 이때 이미 금속학으로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박사 학위를 받고 세계적 제철소인 데마크 종합 기획실에 들어갔다.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을 얻으려 서독을 방문했다. 서독에 돈 벌러 간 광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의 연설을 한 것으로 유명한 그 방문이다. 박 대통령은 유학생들을 초청해 조찬 모임을 했다. 박 대통령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라고 하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김재관이었다. 박정희와 김재관의 첫 만남이자 한국 산업사에 기록될 순간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한국 철강 공업 육성방안’이라는 두툼한 논문을 전달했다. 김재관은 유학과 직장 생활 내내 한국에 종합제철소를 짓는 문제에 골몰했다. 제철소는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국가적 과제였지만 도무지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제철과 같은 거대하고 복잡한 문제를 아는 한국인 자체가 없었다. 금속학을 공부하고 세계 굴지의 제철소 종합기획실에 서 일한 김재관은 한국이 기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정희는 김재관을 눈여겨보았다.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첫 번째 해외 유치 과학자 18명 중 한 명으로 그를 불러 제1연구부장을 맡겼다. 박정희는 제철소 건설을 일본에서 받아낸 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일본은 그 돈을 타당하게 쓴다는 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했다. 그 임무를 김재관이 맡았다. 중대한 기로였다 협상은 도쿄에서 열렸다. 놀라운 것은 30대 중반인 그가 그때 이미 10년, 20년 뒤 우리 산업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자동차와 조선에 쓰이는 특수강까지 만드는 제철소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 같은 김재관의 제철소 방안에 ‘불가능하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그는 제철소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 결국 일본은 김재관 방안의 타당성을 인정했다. 포항종합제철 신화의 시작이다. 그가 그린 포스코 공장 배치도는 20년 뒤 생산 규모가 9배로 커졌는데도 조금도 변경 없이 적용할 수 있었다. 그 후 김재관은 KIST에서 ‘한국 기계공업 육성 방안’을 보고 하고 박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1973년 ‘중화학공업화 선언’을 한다. 한국이 농업국가에서 공업국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골간이 선철, 특수강, 중기계, 조선이었다. 선철과 특수강은 산업의 쌀인 동시에 대포 등 무기를 만드는 재료였다. 김재관은 뮌헨공대에서 독일군 함포와 대포의 금속 조성을 공부해놓고 있었다. 중기계는 탱크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조선은 유조선과 동시에 군함도 만들었다. 오늘날 K방산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로 임명했다.
김 차관보는 일부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해 ‘한국형 승용차 양산화’ 계획을 채택시킨다. 조선과 자동차 모두 당시 기업인들은 손을 저었으나 유일하게 정주영 회장이 "하겠다"라고 손을 들었다. 현대자동차, 현대 중공업 신화의 시작이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ADD(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에 임명한다. 임명된 날 당시 심문택 소장, 김재관, KIST 조선 담당 김훈철 세 사람은 남해 한산도 충무공 사당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임전무퇴로 국방기술을 완성한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ADD에서 미사일까지 나왔다. 당시 박대통령이 KIST 연구원들에게 밥을 사면 그 자리에서 코피를 쏟는 연구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의 이 나라는 그냥 된 것이 아니다. 이상의 이야기는 여러 경로로 확인한 결과 사실과 다르지 않았다. 대한민국의 기적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영웅이 있다. 그들을 알고 기리는 것 이상의 후세 교육이 없을 것이다. -양상훈 주필의 칼럼
100 자평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은 박정희 대통령의 혜안에서 비롯된다.
1964년 독일을 방문한다. 전용기도 없어 독일 전세기 루프 트한자 비행기를 이용해 서독에 간다. 뤼프케 대통령과 회담 후 파독 광부와 간호부(간호사의 당시 명칭)들을 만난 자리에서 눈물바다가 형성된 일을 기억하라. 이때 차관을 얻는데 성공하는데 숨은 공로자가 있다. 아직도 생존해 계신 백영훈 박사다. 광부와 간호부를 파견하고 대신 차관을 얻을 수 있도록 징검다리 역할을 하신 분이므로 잊어 선 안될 분이다. 그리고 김재관 선생이 있었다. 백영훈 선생은 바로 고속도로를 뚫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고, 김재관 선생은 역시 독일 유학파로 포항제철의 정확한 밑그림을 그렸으며 박태준 회장이 등장해 불도저식 경영으로 오늘의 포철을 만들어냈다. 눈물 없이 볼 수 없었던 명장면이 떠올라 회상해 본다. KIST의 원조인 한국 과학원은 창경원 옆에 위치한 초라한 건물이었다. 선각자들의 피눈물 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이분들이 바로 우리 자유 한국을 만든 숨은 영웅들이다. 이래서 지도자의 비전과 자질 그리고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닌가? 조선을 팔아먹은 고종의 무능함에 나라를 뺏기고 36 년 동안 고생을 하고 6.25 남침으로 피폐한 나라를, 지금의 선진국 대열에 오르게 한 국부 이승만과 경제를 살린 박정희! 훌륭한 두 분의 지도자를 반드시 기억하고 존경하고자 한다.
김재관(金在官) 박사
김재관(金在官, 1933년 4월 19일 ~ 2017년 12월 25일)은 대한민국 제1호 유치과학자이며,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기반이 되는 '포항종합제철소' 건립 제안 및 청사진을 제시하였고,
한국 과학기술연구원 (KIST)에서 대한민국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최초 밑그림을 그린 과학자이다.
초대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를 역임하면서는 '고유모델 자동차 산업 육성방안'을 추진하여 대한민국 자동차 산업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고,
이후 '한국 표준과학 연구소(KRISS)'의 설립을 주도하고, 초대 및 제2대 소장으로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의 뼈대가 되는 국가 표준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국가표준제도(헌법 제127조 제2항)' 헌법 및 '국가 표준 기본법'을 설계 및 건의하고 명문화 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하여,
대한민국 과학기술과 산업의 고도화 및 지속가능성에 대한 국가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 호는 우정 (宇正, 집 우자, 바를 정): 내재된 뜻은 온 우주의 균형이 올바로 잡히다.
'표준'의 역할을 뜻함과 동시에 올바르고 큰마음과 성품을 내포한 호.
공적
대한민국 제1호 유치과학자
1967년 대한민국 제1호 유치과학자로 초청되어 귀국한 김재관 박사는
당시 불모지였던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종합제철/자동차 산업/ 국가표준제도 등의 초기 설계자로서,
대한민국 과학기술과 산업 발전의 중요한 기틀을 설계하고, 그 기반을 마련함.
한국 중화학공업 발전의 기반이 되는 ‘(포항) 종합제철소’ 건립 제안 및 청사진 제시
귀국 전인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뮌헨 방문 때, 한국경제를 재건하고 한국 산업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10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가 필요함을 건의((“한국의 철강공업 육성방안(1964)” 제안서)) 하여
‘포항종합제철소 (현 POSCO)’건립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공헌함.
귀국 후, KIST 초대 제1연구부장으로 부임하여 종합제철소에 대한 설계·기획을 맡아, 중화학공업 발전의 기반이 될 수 있는 국제적 규모(103만 톤)의
‘포항종합제철소’ 청사진을 제시. 해외 차관 유치 등 종합제철소 건립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마련함.
당시 일본과의 종합제철소 건립을 위한 협상은 대일 청구권 자금의 44.3%를 차지하는 핵심 내용으로 대일 청구권 자금 유치에 결정적인 기여를 함.
당시 일본과의 포항종합제철소 사업 협상을 위한 기술 분야 협상 대표자로도 참여하여,
종합제철소 건립 타당성을 직접 설득하였으며, 한국 산업 발전에 중추적인 기여를 할 포항종합제철소의 높은 성장 가능성과
기술적 경쟁력을 견제하는 일본 측과 타협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설득시켜 협상을 최종적으로 타결시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함.
한국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는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의 최초 밑그림을 그림
1970년, 대한민국 중화학공업 육성의 최초 밑그림이 되는 ‘중화학공업 발전방안’ 마련의 실무책임자(KIST)로서 한국 산업 발전의 중요한 밑그림을 제시함.
즉, “중공업 발전의 기반(1970)” 보고서를 통해 제철, 조선, 전자, 중화학, 자동차 산업 등 대한민국 주요 산업의 최초 육성방안을 기획·설계하고, 이들 산업 탄생의 밑그림을 제시하여, 한국 산업 발전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크게 기여함.
‘고유모델 자동차 산업 육성방안’을 추진하여 한국 자동차 산업 발전의 기반을 마련
이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등을 거쳐 1973년 초대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로 역임을 하면서
“고유모델 자동차 산업 육성방안”을 제시하고 정책적으로 추진함. 당시 제시한 ‘고유모델 정책’으로 인해 '포니'가 생산되고,
한국이 개발도상국으로서는 유일하게 국제적 규모의 자동차 제조 산업을 가지게 되는 중요한 기반이 됨.
'고유 모델 자동차’ 산업전략은 개발도상국으로는 중국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한국이 고유한 자동사 산업과 경쟁력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산업정책으로 평가됨.
‘한국 표준연구소 (현, 한국 표준연구원(KRISS)) 초대 소장으로 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의 뼈대가 되는 국가 표준의 기반을 마련
1975년 ‘한국 표준연구소’ 설립을 추진하고, 6년간 초대 및 제2대 소장을 역임하면서 독자적 국가 표준 시간·시보 제도의 확립,
국가 표준의 측정, 개발, 운영의 토대를 마련하여, 한국 과학기술 및 산업 발전의 핵심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함.
‘국가표준제도 (헌법 제127조 제2항)’ 헌법 및 ‘국가 표준 기본법’을 설계 및 건의하고 명문화하는데 기여하여,
대한민국 과학기술과 산업의 고도화 및 지속가능성에 대한 국가적 기반을 마련
‘한국 표준연구소’ 소장 역임 당시(1980년), 헌법 제127조 제2항,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한다"라는 ‘국가표준제도’의 헌법 명문화를
국회 및 법제처에 건의 및 그 명문화를 추진하여, 오늘의 국가 과학기술과 산업의 고도화, 지속 가능한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공헌을 함.
1997년 ‘국가 표준 기본법’을 국회에 건의하고, 제정하는데 기여하여 ‘국가 표준 심의 국’ 창설과 국가 표준 대표기관인 ‘표준원’ 설립 등,
국가표준제도 확립의 국가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데 공헌을 함.
약력
1944 ~ 1950. 중앙중학교 졸업 1950 ~ 1956.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기계공학과 학사 1956 ~ 1958. 서독 뮌헨 공과대학교 기계공학 석사 (Dipl.-Ing.) 1958 ~ 1961. 서독 뮌헨 공과대학교 기계공학 박사 (Dipl.-Ing.)
경력
1958 서독 뮌헨공대 기계공학과 근무 1962 ~ 1964. 서독 DEMAG 社 기획부 근무 1964 ~ 1964. 서독 뮌헨공대 금속(기계재료) 연구소 연구원 근무 - 대한민국 종합제철산업 육성 건의(뮌헨, 박정희 대통령) 1967 ~ 1972. 한국 과학기술연구소(KIST) 연구 부장 (제1연구소) - 포항종합제철소 최초 설립 프로젝트 추진 주역 및 최초 103만 톤 설계 / 대한민국 최초 고유모델 자동차 산업 건의 및 기획 /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원인“중공업 발전의 기반” 정책 설계 1968 ~ 1968. 미국 Battelle 기념 연구소 연구원 1972 ~ 1973. 국방과학연구소(ADD) 부소장 1973 ~ 1974. 상공부 초대 중공업 차관보 - 고유모델 자동차 산업 정책 수립 및 추진 / 대덕과학 연구 단지 건립위원장 1974 ~국립공업표준시험소 소장 1975 ~ 1980. 한국 표준연구소 초대 소장 1980 ~국가표준제도의 헌법 명문화 국회 건의 1980 ~국가표준제도의 헌법 명문화 법제처에 건의 1980 ~국가 개헌안(제118조 1항)에 국가표준제도 명문화 1980 ~국가표준제도(헌법 제128조 2항) 국민투표 확정 1981 ~ 인천대학교 기계공학부 교수 1985 ~ 한독협회 부회장 (회장 김우중) 1985 ~ 1991. 한국정밀공학회 회장 1987 ~국가표준제도 (헌법 제127조 2항) 국민투표 확정 1988 ~ 1991. 인천대학교 대학원장 1997 ~국가 표준 기본법 제정 국회 건의 1999 ~국가 표준 기본법 의원입법으로 제정 1999 ~국가 표준 기본법 발효 1999 ~국무총리 산하에 국가 표준 심의 국 창설 1999 ~국가 표준 대표기관인 표준원 설립
수상
1971. 국민훈장 동백장 1988. 5.16 민족상 2001. 과학기술훈장 혁신장
저서
‘한국의 철강공업 육성(영문)’ (1964) ‘중공업 발전의 기반 (상, 하)’ (1970) ‘국가표준제도의 국제비교 연구’ (1986) ‘2000년대의 국가표준제도’ (1988) ‘선진 국가표준제도의 확립 연구’ (1998) '묄렌도르프의 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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