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11일 아침 일찍 독산성 둘레길을 산보하기 위해 오산 독산성 세마대 서문주차장을 향했다.
코스: 세마대서문 주차장→세마대서문→암문→남문→세마대→보족사→동문→북문 →서문→세마대서문주차장
거리: 2.5km
시간: 40분
세마대 서문 주차장
세마대 독산성 올라가는 입구
독산성
독산성은 사적 제 14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연장은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의 처음 축조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독산성의 위치적 특성이 용인,양지 간에 있는 고성과 남한산성이 기각지세를 이루어 왕도의 문호를 굳게 한다는 전략상의 이점이 있는것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원래 백제가 쌓은 고성이었고, 신라통일기나 고려시대에서도 군사상 요지로 돼 왔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왔으나, 임진왜란때 권율장군이 폈던 진묘(眞妙)한 병법 전략에 연유해 지금은『세마산』 또는『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다.
세마대 서문
서문은 남문과 함께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정조14년 1790년 독산성에 행차한 정조가 서문을 통해 출입하였다.
이문은 순조 4년 1804년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폐쇄되었다.
파손 되어 있던 것을 1983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으며, 바닥에 성문 고정시켰던 문확돌 2개가 남아 있다.
서문에 서서 서쪽 봉담쪽을 바라보며...
남쪽 암문 방향을 향해...
암문
암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이문은 순조 4년 1804년에 현릉원의 경관을 보호하기 위해 서문을 폐쇄하는 대신 새로 지은 성문이다.
1985년에 복원하여 정비하였고 이후 2010년에 개거식 성문이 평거식 성문으로 복원 되었다
남문
남문은 독산성의 정문으로 진남루라는 문루가 있었다.
1831년 편찬된[화성지]의 기록에 따르면 문루의 규모는 6칸 이었으며 남문을 영조,정조,순조때 고쳐 지었다고 한다.
이 문으로는 말과 소가 다닐수 있었으며 독산성의 주 출입구 역할을 하였다.
지금의 모습은 파손되어 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하여 정비한 것이며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학석 2개가 남아 있다
새마지구 모습
동탄 모습
세마대의 유래
누각에 걸려있는 세마대 중건기(화성교육장 정형모 찬 1957)를 살펴보면 조선시대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삼남의 의용병 13만 대병이 일시에 독산성으로 집결하였던 요새로서 그 후 도원수 권율장군이 독산성에 진을 치고 백미로 백마를 목욕시키는 묘안의 병법으로 위기를 모면하였고, 3천여 명을 병마곡에서 격멸하였다고 한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는 승전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세마대를 세우고 석대산이라 불리던 곳을 세마산이라 칭하고 병기창을 두어 군사 훈련을 하게 하였다.
이후 영조 26년(1750) 왕이 친히 독산성을 방문하여 군기수련을 강화할 것을 엄명하고 성을 둘러보며 가히 하늘이 내려준 요새라 하였다한다.
정조 16년(1792)에 사도세자를 현륭원으로 모시고 세마산을 향로봉이라 칭하였으며 세마대를 다시 중수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에 이르러 왜인들에 의해 세마대는 무참히 파괴되고 주민들은 각처로 흩어져 폐허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풍진풍우 50여년 만에 1957년 ‘독산성세마대 고적 중건추진위원회’가 구성되어 유희훈위원장을 중심으로 “무너진 역사를 다시 빛내고 민족 정서앙양에 무언의 지침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금난으로 누차 중단되었으나 각계각층의 협조와 지방민의 노력으로 천신만고 끝에 경비를 조달하여 준공을 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중건기에 기록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형태인 누각에는 이승만대통령이 행서체로 쓴 편액이 이 걸려있다.
세마대에서 수원쪽을 바라보며...
보적사
동문
동문은 평거식 성문으로 천장석과 바닥에 성문을 고정시켰던 문확석이 각각 두개씩 남아 있다.
동문은사람만 다니던 문으로 성문 안쪽에 보적사가 있다.
보적사에서 북동쪽 양산봉과 수원과 동탄을 바라보며...
보적사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보적사는 창건당시 이 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수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문은 보수중이라 돌아서 가야 한다.
다시 세마에 도착
우회길로 북문을 향해...
북문 모습
북문을 조사 발굴을 통해 밝현진 내용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신문기사 내용]
- 독산성, 세마대지 학술발굴조사 현장 모습.사진=오산시청 제공
[오산(경기)=데일리한국 심재용 기자]오산시 독산성과 세마대지에서 삼국시대 성곽이 최초로 확인됐다. 오산시(곽상욱 시장)는 29일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재)중부고고학연구소와 한신대학교박물관이 조사 중인 사적 제140호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이하 독산성) 학술발굴조사에서 삼국시대 성곽을 최초로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번 조사는 독산성 북동치 및 북문지 주변 성곽 일부에서 배부름 및 이탈 현상 등이 확인되어, 성곽 보수·정비에 앞서 복원성벽 아래 숨겨진 원성벽의 구조와 축조방법을 확인해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실시했으며, 조사 결과 복원성벽 아래에 묻혀있던 삼국~조선시대 성벽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삼국시대 성벽은 조선시대 성벽 아래에서 확인됐고, 내벽과 외벽을 함께 쌓는 협축(夾築)방식과 외벽만 쌓는 편축(片築)방식을 모두 이용해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을 달리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외벽은 대체로 장방형 혹은 방형의 성돌을 이용해 바른층 쌓기 했으나, 일부 구간에서는 세장방형의 성돌을 이용해 쌓은 것으로 볼 때 수차례 고쳐 쌓은 것으로 파악된다. 외벽의 바깥쪽으로는 체성벽 하단부를 보강하기 위한 기단보축을 조성하고, 이에 덧대어 점토를 다시 보강하기도 했다. 내벽은 일부 구간에서만 확인됐고 높이는 약 4m이다. 내벽은 외벽과 달리 가공하지 않은 할석을 이용해 층을 맞추어 쌓아올렸다. 조선시대 성벽은 삼국~통일신라시대 성벽의 적심부 상면에 쌓아올렸으며, 특히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북문 아래층에서 조선시대 전기에 해당하는 문지와 적대 등이 확인되어 주목된다. 또한 성 안쪽 내탁부에서는 상부에 여장(女墻)이 확인되었고, 성 안쪽을 보다 쉽게 오르내릴 수 있게 조성한 계단식 석축시설은 종·횡방향으로 쌓았다.유물은 삼국~통일신라시대 토ㆍ도기편(타날문토기편, 단각고배편 등), 연화문 와당, 승문, 선문 및 격자문계 기와편, 고려시대 청자편ㆍ반구병, 조선시대 도기편ㆍ백자편ㆍ다양한 문양의 기와편ㆍ전돌편 등이 출토되었다. 유적의 연대는 성벽 축조기법과 출토유물을 통해 볼 때 삼국시대(6~7세기)에 처음으로 축조된 후, 조선시대(15~18세기)까지 지속적으로 운영된 것으로 판단된다. 오산시 관계자는 “이번 발굴조사를 통해 독산성에서 삼국시대 성벽이 처음 확인돼 독산성의 초축시기 및 수축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확보됐다”며 “서울·경기 지역의 관방체계와 산성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밝혔다. 플랭카드 내용 정리
1592년[선조 25년]- 의병장 김천인 독산성 주둔하여 전라도 관찰사겸 순변사 권율 독사성 주둔 하여 우키와헤데이 군과 전투 승리
1594년[선조 27년]-경기도 관찰사 유근의 독산성 수축
1602년[선조 35년]- 석성으로 수축→기존 성벽이 토성이었을 가능성 많음
1603년[선조 36년]-변웅성장군이 수축,샘을 만듬
궁노,포화 기계등 무기를 설치[200호 민가와 과정100구]
1624년[인조 2년]-경기도 군대를 재편하여 총융청 설치
1750년[영조 26년]-영조 행차했다가 독산성행차 남문과 서문 누각설치
1760년[영조 36년]-사도세자가 온양에 행차후 독산성에서 하루밤 유숙 진람루에 올라가 활쏘기를 함
1790년[정조 14년]-운주당에서 부로들을 위로하고 사도세자가 유수하였을때 물으시고 민호에게 민포를 지금
1792년[정조16년]-수원부 중군 이한흥과 민광목이 5031명을 동원하여 성벽을 고쳐쌓음
1805년[순조 5년]- 서문 출입을 통제하고 암문설치
1831년[순조 31년]- 화성유수 박시수에 의해 3개월에 걸쳐 수축. 관청 건물[운주동,진남루등]일제 정비
북서쪽을 바라보며...
서쪽을 바라보며...
남쪽을 바라보며...
서문을 향해...
서문을 나오면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소서
● 남자는 마음 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 로 늙는다고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꽃 같은 인품의 향기를 지니고
넉넉한 마음 으로 살게 하소서.
● 늙어 가더라도
지난 세월에 너무 집착 하지 말고
언제나 청춘의 봄날 같은 의욕을 갖고
활기가 넘치는 인생을 살아 가게 하소서.
● 우러난 욕심 모두 몰아내고
언제나 스스로 평온 한 마음 지니며
지난 세월을 모두 즐겁게 안아
자기 인생을 사랑 하며 살게 하소서.
● 가진 것 주위에 모두 나누어
아낌 없이 베푼 너그러운 마음이
기쁨의 웃음 으로 남게 하시고
그 웃음소리가 영원의 소리가 되게 하소서.
● 늘어나는 주름살 인생의 경륜 으로 삼고
자신이 살아 오면서 남긴 징표로 고이 접어
감사한 마음, 아름다운 마음으로
큰 기쁨 속에 살아 가게 하소서.
● 인생 이란 결국 혼자서 가는 길
살아온 날들의 경륜이 쌓인 그 무게 노여워도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가벼운 마음 으로 그렇게...
마음의 부자로 살게 하소서.
● 자연 스런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마음의 호수 하나 가슴에 만들어 놓고
언제나 기도 하는 마음으로
근심 없는 시간을 살아 가게 하소서.
● 그것이....
우리들 인생의
가장 큰 행복 이게 하소서...
= 좋은글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