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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會因由分
-이 경을 설하는 인연.-
언젠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스승께서는 슈라바스티(舍衛城)에 머물고 계셨다.
아침일찍 스승께서는 옷을 입고 가사를 걸치신 다음,밥그릇을 들고 탁발(托鉢)하기 위해
큰 도시인 슈라바스티로 들어가셨다.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供養)을 마치신 다음,
스승께서는 의발(衣鉢)을 치우시고 발을 씻으시고
그 분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는몸을 곧게 펴고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으셨다.
그 때에 많은 비구(比丘)들이 스승이 계신 곳으로 다가섰다.
그들은 스승의 발 밑에 머리를 조아려 경의를 표하고는
스승의 주변을 오른 쪽으로 세번 돈 다음에한 쪽에 가서 앉았다.
善現起請分
-수보리가 가르침을 청함.-
그때에 장로 수부티(須菩提)가 그 대중들 곁으로 와서 앉았다.
그 다음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웃옷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 쪽 무릎을 땅에 대고 두 손을 모아 스승께 합장했다.
그리고는 스승께 이렇게 여쭈었다."스승이시여,놀라운 일입니다. 참으로 경탄할 일입니다,
선서(善逝)이시여. 얼마나 많은 보디사트바들이,그 위대한 존재들이 여래(如來)께서
베풀어 주시는 최고의 은덕에 의해 도움을 받았는지!
그런데 스승이시여,이미 보디사트바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어떻게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까?"
大乘正宗分
-보디사트바는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이 말을 듣고,스승께서 수부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니 수부티여,주의를 기울여 잘 들어라.
보디사트바의 길에 뜻을 둔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무릇 생명체의 세계(衆生界)에 속하는 모든 것들, 존재하는 이 모든 중생을 나는 열반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아무 것도 남지 않는 무여열반(無餘涅槃)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
그러나 무수한 중생을 열반의 세계로 인도했다 하더라도 실은 어느 것 하나 열반으로 인도되지 않았다.'
어째서 그런가? 만일 보디사트바가 '중생(衆生)'이라는 관념을 가지면
그는 진실로 보디사트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째서일까? 만약 그에게 자아라는 생각,중생이라는 생각, 생명있는 영혼이라는 생각,
또는 개아(個我)라는 생각이 있으면 그는 보디사트바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고타마 붓다를 사랑한다.
왜냐하면 그는 내게 종교의 핵심적인 본질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는 불교의 창시자가 아니다. 불교는 부산물일 뿐이다.
그는 세상에 전혀 다른 종류의 종교를 도입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종교아닌 종교를 제창했다.
그는 종교(religion)가 아니라 종교성(religiousness)을 제시했다.
이것은 인류의 의식의 역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일이다.
붓다 이전에도 종교가 있었다.
그러나 순수한 종교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은 아직 성숙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붓다와 더불어 인류는 성숙기로 접어들었다.
물론 모든 인간이 성숙의 길로 들어선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붓다는 길을 여는데 선구적 역할을 했다. 붓다는 문없는 문을 열었다.
인간이 그렇게 심오한 가르침을 이해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모된다.
그런데 붓다의 가르침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떤 가르침보다도 심오하다.
붓다가 이루어 놓은 일,붓다가 닦아놓은 길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붓다처럼 순수한 향기를 퍼뜨린 사람은 아무도 없다.
종교를 창시한 다른 사람들, 깨달음을 얻은 다른 사람들은 청중과 타협했다.
하지만 붓다는 청중과 타협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의 순수성이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을 이해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
다만 진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그대가 이해하건 이해하지 못하건 개의치않고 말한다.
이것은 일면 매정해 보인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이것은 커다란 자비심이다.
진리는 있는 그대로 말해져야 한다.
대중과 타협하는 순간, 진리를 일반대중의 평범한 의식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순간,
그 진리는 영혼을 잃고 빈 껍데기만 남는다.
그 순간 진리는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진리를 인류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서는 안된다.
인류가 진리의 수준으로 올라가야 한다.
바로 이것이 붓다의 위대한 점이다.
이천 오백년 전 어느 날,지금같은 아침시간에 이 <금강경>이 태어났다.
그 곳에는 1250명의 승려가 모여 있었다.
그것은 슈라바스티(Sravasti;舍衛城)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당시에 슈라바스티는 커다란 도시였다.
'슈라바스티'라는 단어는 '영광의 도시'라는 의미이다.
슈라바스티는 고대 인도의 영화의 도시 중 하나였다.
90만 가구가 그 곳에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도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아주 작은 마을이 그 자리에 남아있을 뿐이다.
이젠 지도에서도 슈라바스티라는 도시명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도시명조차 사라졌다.
지금 그 곳은 사헤트 마헤트(Sahet-Mahet)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 곳에 그토록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고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하지만 만물은 끊임없이 변하는 법이다.
그것이 삶의 길이다.
한때 도시였던 곳이 공동묘지처럼 황폐해지고,공동묘지였던 곳에 도시가 들어선다.
그렇게 삶은 변화무쌍한 흐름이다.
붓다는 슈라바스티라는 이 도시를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그는 45년 동안 가르침을 폈는데,이 슈라바스티라는 도시에 25년을 머물었다.
그는 그 도시의 인민들을 사랑했음에 틀림없다.
그 도시인들은 매우 진보된 의식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붓다의 위대한 경전들 모두가,거의 모든 경전이 이 슈라바스티에서 태어났다.
이 <금강경> 또한 슈라바스티에서 탄생했다.
이 경전의 산스크리트어 이름은 <Vajrachchedika Prajnaparamita Sutra>이다.
거기엔 '벼락처럼 단번에 자르는 지혜의 완성'이라는 의미가 들어있다.
그대가 허용하기만 한다면,붓다는 벼락처럼 단번에 그대를 자를 수 있다.
붓다는 그대의 목을 자를 수 있다. 그
대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도록 도울 수 있다.
붓다는 살인자인 동시에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
한편에서 그는 살인을 해야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새로운 생명을 부여해야 한다.
그 새로운 탄생은 낡은 것이 파괴되어야만 가능하다.
낡은 것이 타고남은 재 위에서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인간은 불사조이다. 신화에 나오는 불사조는 그저 신화적인 존재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은유(隱喩)이다.
불사조는 인간을 상징한다.
인간을 제외하고나면 불사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죽어서 다시 태어나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이 예수가 니고데모에게 했던 말의 의미이다.
니고데모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수였으며 학식있는 랍비였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주요 사원을 관리하는 위원 중의 하나였다.
어느날 밤 그는 예수를 만나러갔다.
그는 낮에 예수를 찾아갈만한 용기가 없었다.
그는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말할지 두려웠다.
그는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떠돌이 선생을 찾아간다는 것은....
모든 랍비와 지식층에 의해 경원시되는 인물을 찾아간다는 것은....
도둑과 주정뱅이,창녀들과 어울려 다니는 자를 만나러 간다면?....
하지만 그는 마음 속에는 예수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이 너무 강했다.
아마 그는 예수가 사원으로 걸어들어 오는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예수를 보고 무의식 깊은 곳에서 강렬한 느낌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다.
어느날 밤,예수의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이 떠나고
제자들마저 잠자리에 들었을 때 니고데모는 예수를 찾아가 물었다.
"신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가 말했다.
"그대가 죽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가능하지 않으리라.
신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먼저 그대가 죽어야 한다.
지금의 그대를 죽여야 하리라.
그래야만 내면의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본질적인 존재가 표면으로 구현되기 위해서는 에고가 죽어야 한다.
그것이 'Vajrachchedika Prajnaparamita'의 의미이다.
그것은 벼락처럼 한 번에 절단내 버린다.
그것은 단 한 방에 그대를 끝장낸다.
그것은 붓다의 가장 위대한 가르침 중 하나이다.
그 가르침과 하나가 되라.
경전으로 들어가기 전에 몇가지 알아야 할 사실이 있다.
그것이 그대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고타마 붓다는 억압적이지 않고 비이념적인 정신으로 시작한다.
그것은 매우 드문 현상이다.
흔히 일반적인 정신의 경우에는 매우 억압적이다.
그들은 억압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을 변형시키지 못한다.
오히려 인간을 불구자로 만들 뿐이다.
그들은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노예로 만든다.
그들은 강압적이다. 그들은 추악하다.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의 저자인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을 들어 보라. 그는 이렇게 썼다.
"당신 자신에 대해 더 많은 폭력을 행사할수록 당신은 더 아름답게 성장할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는 날마다 금욕을 행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당신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 최상의 길이며 가장 완벽한 수행이다."
유사 이래 수 많은 성자들이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토마스 아 켐피스는 병적인 상태이다.
프랑스의 성직자 보쉬에(Bossuet)는 렇게 말한다.
" 이 세상이여,저주받으라! 저주받으라,지구여! 수천 수만번 저주받으라!"
왜 세상이 저주받아야 하는가? 그들에게 있어서 삶은 저주받은 것이 되어야 한다.
이 사람들은 마치 신이 삶에 반대하는 것 처럼 생각한다.
삶이 신에 반대하기라도 하는 듯이 생각한다.
하지만 삶이 곧 신이다.
거기엔 적대적인 관계가 성립되지 않는다.
사실,거기엔 분리조차 없다.
신과 삶은 다르지 않다.
그들은 하나의 실체를 가르키는 두 개의 이름일 뿐이다.
붓다는 억압적이지 않다.
이것을 명심하라.
만일 억압적인 불교도를 발견한다면
그들은 결코 붓다를 이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라.
그들은 자신의 병적인 상태에 붓다의 가르침을 끌어들였을 뿐이다.
붓다는 아무 이념도 없다. 그는 아무런 이념도 제시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모든 이념은 마음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에서 나온 이념은 그대를 마음 너머의 세계로 데려갈 수 없다.
어떠한 이념도 마음 너머의 세계로 가는 다리가 되지 못한다.
마음이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념을 버려야 한다
붓다는 이상(理想)마저 믿지 않는다.
모든 이상은 인간의 내면에 갈등과 긴장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이상은 분열을 조장하고 불안을 야기한다.
그대는 이저저러한 사람인데,이상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한다.
그 사이에서 그대는 양 갈래로 잡아당겨 지고 찢어진다.
이상은 불행을 창조한다. 이상은 정신분열증을 초래한다.
이상이 많을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정신분열증적인 상태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갈기갈기 분열될 것이다.
오직 비이념적인 의식만이 내면의 분열을 막을 수 있다.
만일 산산히 분열된 상태라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평화와 고요를 알겠는가?
이념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과의 싸움을 계속한다.
매 순간이 갈등의 연속이다.
그는 갈등과 혼란 속에 산다.
그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결정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신뢰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을 두려워하게 되고 자신감을 상실한다.
그리고 일단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은 모든 존엄성을 잃는다.
그때에 그는 성직자,정치가 등 어느 누구에게라도 기꺼이 노예화될 준비가 되어있다.
그는 어떤 올가미에 걸리기를 기다린다.
사람들은 왜 추종자가 되는가?
왜 올가미에 걸리는가?
왜 스탈린,히틀러,모택동에 빠지는가?
그 주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념적인 혼란은 그들을 뿌리채 흔들어 놓는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설 수 없다.
그들은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를 원한다.
그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며,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너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고 말해주는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아이덴티티(identity)를 필요로 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아와 본성을 망각했다.
인간이 모든 이념을 버리지 않는 한 스탈린,
히틀러,모택동같은 인물은 계속해서 나타날 것이다.
내가 모든 이념이라고 말할 때 이 '모든'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나는 고상한 이념과 그렇지 않은 이념을 구별하지 않는다.
모든 이념이 위험하다. 사실,고상한 이념이 더 위험하다.
그런 이념은 더 강한 힘으로 사람들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고상한 이념은 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모든 이상은 질병(disease)이다.
말 그대로 편안하지 않은 상태(dis-ease)이다.
왜냐하면 그대가 둘로 분열되기 때문이다.
그대는 이상 속의 그대와 현실의 그대로 분리된다.
그리고 현실 속의 그대는 비난받고 이상 속의 그대는 칭송받는다.
이제 그대는 곤경에 처한다.
멀지 않아 그대는 신경질환이나 정신병에 걸릴 것이다.
붓다는 억압도 없고 이상도 없는 삶의 길을 제시한다.
그것이 그가 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이다.
그는 천국에 대해,미래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그대가 매달릴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대로부터 모든 것을 벗겨간다.
그는 그대의 자아까지 벗겨간다.
그는 계속해서 벗겨가고,
마침내 그대의 자아라는 개념,나,에고라는 개념까지 벗겨간다.
그리고 순수한 비어있음만을 남겨둔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내어주는 법을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직 취(取)하는 법을 안다.
우리는 계속해서 모든 것을 취한다.
"나는 시험을 취한다.","나는 부인을 취한다.","
나는 낮잠을 취한다."-이렇게 그대는 계속 취한다.
심지어 취할 수 없는 낮잠까지 취한다.
그대는 잠에게 자신을 내주어야 한다.
잠은 그대가 자신을 내버릴때에만 온다.
그대는 심지어 부인,남편까지 취한다.
이 얼마나 불경스러운 말인가?
부인은 재산이 아니다.
집을 취할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떻게 부인이나 남편을 취한단 말인가?
우리의 언어는 우리의 심리상태를 나타낸다.
우리는 내주는 법을 모른다.
어떻게 포기하는지,어떻게 놓는지 모른다.
어떻게 모든 일이 그대로 일어나도록 방임하는지 모른다
붓다는 모든 이상을 벗겨간다.
미래 전체를 앗아간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내어주기 힘든 마지막 것까지 앗아간다.
그는 그대의 자아까지 앗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한 비어었음,때묻지 않은 순결한 비어있음만을 남겨둔다.
그 순결한 비어있음을 그는 니르바나(涅槃)라고 부른다.
니르바나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대의 순수한 비어있음이 곧 열바이다.
그대가 지금까지 긁어모은 모든 것을 버릴 때,
더 이상 아무 것도 쌓아두지 않을 때,더 이상 인색하거나 집착하지 않을 때,
그 때에 돌연 비어있는 공간이 나타난다.
그 공간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하꾸인은 모든 존재는 본래부터 붓다이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비어있는 공간이 거기에 있다.
그런데 그대는 온갖 잡동사니를 긁어 모았다.
그래서 그 비어있는 공간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계속해서 물건을 집 안에 쌓아두는 것에 비교될 수 있다.
그때에 그대는 빈 공간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더 이상 공간이 남아있지 않다.
마침내 집안에서 움직이기조차 어려워지는 날이 온다.
공간이 없기 때문에 사는 것조차 어려워진다.
그러나 공간은 아무데로도 가지 않았다.
그대는 너무 많은 가구를 쌓아 놓았다.
텔레비젼과 라디오,전축,피아노,그 밖의 온갖 물건을 가득 들여 놓았다.
그러나 공간은 어디로도 가지 않았다.
가구를 치우면 공간이 거기에 있다.
그 공간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그 공간은 가구에 의해 가려져 있었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다.
그 공간은 단 한순간도 방을 떠난 적이 없다.
그대 내면의 비어있는 공간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대의 니르바나,그대의 무(無) 또한 그와 다를 바 없다.
붓다는 니르바나를 하나의 이상으로써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가두는 대신 해방시킨다.
붓다는 그대에게 사는 법을 가르친다.
어떤 목적을 위한 삶이나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해지는 삶을 가르친다.
그는 각성된 의식으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나는 그 각성이,초롱초롱 깨어있는 의식이
그대에게 무엇인가를 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깨어있는 의식은 수단이 아니다.
깨어있는 의식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그 자체가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다.
깨어있는 의식은 그 자체로 가치있다.
붓다는 저 세상을 가르치지 않는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 산다.
그런데 성직자들은 계속해서 저 세상을 가르친다.
그들이 말하는 저 세상은 사실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똑같은 세상을 좀더 개량하고 뜯어고친 것은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무엇을 근거로 저 세상을 창조하겠는가?
그대가 아는 아는 세상은 오직 이 세상뿐이다.
물론 그대는 이 세상을 좀더 낫게 개량하고 손질할 수 있다.
더 아름답게 장식할 수는 있다.
몇 가지 추한 것을 제거하고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몇 가지를 추가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저 세상은 이 세상의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대가 저 세상은 이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
그럴 수가 없다. 그 세상은 이 세상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것은 그대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며,상상이 빚어낸 게임이다.
그 세상에서 그대는 아름다운 여자를 가질 것이다.
물론 이 세상에서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가질 것이다.
그리고 그 곳에서도 똑같은 종류의 쾌락을 가질 것이다.
아마 더 영구적이고 안정된 쾌락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똑같은 종류의 쾌락이다.
그 곳에서 그대는 더 나은 음식,더 맛있는 음식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음식을 먹는다는 점에는 다를 바가 없다.
그대는 그 곳에서 집을 소유할 것이다.
아마 황금으로 지은 집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집을 소유한다는 점에서는 이 세상과 다를 게 없다.
그대는 이 세상에서와 똑같은 일을 반복할 것이다.
경전들을 살펴보라.
그들이 천국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보라.
그러면 그대는 다소 개량되긴 했어도 이 세상과 똑같은 세상을 발견할 것이다.
여기 저기 다소 손질을 가하긴 했어도 그것은 참된 의미의 다른 세상이 아니다.
그것이 내가,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저 세상이 별로 다른 세상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그 세상은 미래에 투영된 이 세상이다.
그 세상은 이 세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태어났다.
그 세상에는 불행과 가난,질병이 없을 것이다.
사지가 마비되거나 눈이 멀거나 벙어리가 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대가 이 세상에서 좋아하지 않는 일은 그 세상에 없을 것이며,
그대가 좋아하는 것들은 넘치도록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세상은 전혀 새로운 세상이 아닐 것이다.
마음은 새로운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다.
마음은 새로운 것을 생각해낼 재간이 없다.
마음은 낡은 세계에 산다.
마음은 낡은 것들의 집합체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통해서는 결코 새로운 것이 생길 수 없다.
새로운 것은 오직 마음이 작용하지 않을 때,
마음이 그대를 조종하지 않을 때,마음을 옆으로 밀어 놓았을 때에만 일어난다.
새로운 것은 오직 마음이 개입하지 않을 때에만 일어난다.
그러나 천국과 낙원에 대해 말하는
그대의 모든 경전들은 똑같은 이야기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더 좋은 아트지에,더 좋은 잉크를 쓰고,더 개량된 인쇄술에,
더 원색적인 삽화를 끼워 넣었겠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똑같다. 달라질 수가 없다.
붓다는 내세(來世)나 저 세상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는 다만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는 이 세상에서 더 주의깊고 깨어있는 의식으로 사는 법을 가르친다.
그래서 아무 것도 그대의 비어있는 공간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그대 내면의 비어있음이 오염되지 않도록,
여기 이 세상에 살면서도 더럽혀지지 않도록,
그대가 세상 안에 있을 수는 있지만
세상이 그대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도록 가르친다.
저 세상을 지향하는 정신은 억압적이고 파괴적일 수 밖에 없다.
그 정신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동시에 타인을 파괴한다.
한 마디로 말하면,그것은 병든 정신이다.
붓다의 정신은 전혀 다른 향기를 지닌다.
그의 정신에는 이상도 없고 미래도 없으며 저 세상도 없다.
그 정신은 지금 여기에서 피어나는 꽃이다.
그 정신은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이 주어졌다.
붓다의 정신은 그대가 좀더 많이 보고,좀더 많이 듣고,
좀더 많이 존재할 수 있도록 더욱 더 깨어있는 것이다.
명심하라,그대는 오직 의식하는 만큼만 존재한다.
더 많이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더 의식적이 되라.
의식은 존재를 가져다준다.
그리고 무의식은 존재를 앗아간다.
술에 취했을 때 그대는 존재를 잃는다.
깊은 잠에 곯아 떨어졌을 때 그대는 존재를 잃는다.
그런 사실을 관찰해본 적이 없는가?
예민하게 깨어있을 때 그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갖는다.
그대는 더 중심잡히고 깊이 뿌리내린다.
주의깊게 깨어 있을 때 그대는 존재의 확고부동함을 느낀다.
그것은 거의 손으로 만져질 듯이 분명한 느낌이다.
그러나 무의식적일 때,그저 질질 끌려가듯이 살아가고 깊이 잠들어 있을 때,
존재에 대한 감각은 그만큼 무뎌진다.
존재는 항상 그대가 가진 의식의 양과 비례한다.
그러므로 붓다의 메세지 전체는 의식적으로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이유때문이 아니라 의식을 가진 상태가 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의식은 존재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그대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의식이 창조한 그대는 지금의 그대와 너무나 다르다.
그래서 그대는 그 모습을 상상할 수도 없다.
'나'가 사라진 그대,자아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그대,
아무 것에도 갇히지 않는 그대.....순수하게
비어있는 공간,그 무한함,한정없는 비어있음.....
이것을 붓다는 명상의 상태,올바른 명상의 경지,
즉 삼마사마디(sammasamadhi)라고 부른다.
붓다는 그것을 전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경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홀로있음은 고독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홀로(alone)'라는 이 아름다운 단어에 대해 생각해 보았는가?
'홀로(alone)'는 '모두가 하나(all one)'라는 의미이다.
'홀로(alone)'라는 말은 '모두(all)'와 '하나(one)'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졌다.
홀로있음 안에서 그대는 우주만물과 하나가 된다.
홀로있음에는 고독과 관계된 어떤 것도 없다.
홀로있을 때 그대는 고독하지 않다.
그대는 홀로있지만 고독하지는 않다.
그대는 우주 삼라만상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외로울 수 있겠는가?
홀로있음 안에서 그대는 다른 사람을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들을 잊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필요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대가 그들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대가 그들을 그리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들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와 전체 사이의 모든 경계선이 사라졌다.
하나가 전체가 되고,전체가 하나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alone'이라는 영어단어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
붓다는 삼마사마디(sammasamadhi)는 홀로있음이라고 말한다.
우주 삼라만상과 하나가 될만큼 철저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 올바른 명상이다.
만일 그대가 비어있다면 그대의 경계선이 사라진다.
비어있음은 아무 경계선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비어있음은 무한하다.
비어있는 공간에는 무게도 없고 색깔도 없고 이름도 없다. 어떤 형태도 없다.
그대가 비어있을 때,그대는 어떻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구분할 것인가?
그대에게는 색깔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형체도 없고 경계선도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구분지을 것인가?
비어있을 때 그대는 모든 것과 하나이다.
그대는 존재계 안으로 용해되었다.
존재계가 그대와 합쳐졌다.
그대는 더 이상 외딴 섬이 아니다.
그대는 광막한 대륙이 되었다.
붓다의 모든 메세지는 '삼마사마디(sammasamadhi)'라는 이 한 마디로 압축된다.
올바른 명상이 붓다가 전하는 메세지의 전부이다.
그런데 무엇이 올바른 명상이며, 무엇이 그른 명상인가?
만일 명상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명상이다.
그리고 명상가가 사라진다면 그것은 올바른 명상이다.
올바른 명상은 그대에게 비어있음과 홀로있음을 가져다 준다.
금강경,이 경전 전체는 절대적으로 비어있게 되는 법을 말한다.
이것이 붓다가 세상에 주는 가장 중요한 선물이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이 경전은 붓다의 훌륭한 제자,아난다에 해 기록되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다.
붓다의 모든 경전은 '나는 이렇게 들었다.'는 말로 시작된다.
붓다가 입적(入寂)하자,
그가 45년 동안 폈던 가르침을 한데 모으기 위해 모든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그중에서도 아난다는 45년동안 줄곧 붓다와 지낸 유일한 제자였다.
그러므로그는 가장 믿을만한 인물이었다.
다른 제자들도 붓다의 말을 듣기는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그들은 붓다와 같이 있을 때도 있었고 떨어져 있을 때도 있었다.
오직 아난다만이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다녔다.
그래서 아난다가 이야기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사실 하나는
아난다가 "붓다는 이렇게 이렇게 말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나는 이렇게 들었다."라고 말한다.
그 차이점은 실로 대단하다. 그는 "붓다는 이렇게 말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붓다가 이야기 한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들은 바가 전부이다.
붓다가 말한 것은 오직 그 분만이 안다.
그 분이 의미한 바는 그분만이 안다.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들은 바가 전부이다.
나의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그 분은 무엇인가 다른 것을 의미하셨을지도 모른다.
내가 몇 개의 단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또는 내가 무의식중에 임의대로 몇 개의 단어를 슬쩍 끼워넣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대단한 진실성이다. 그는 이렇게 주장하지 않았다.
"이것이 붓다의 말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목격자이다."
실제로 그는 목격자이다.
아무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난다의 겸손함을 보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붓다가 말하고 있었으며 나는 듣고 있었다.
나는 오직 내가 들은 바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정확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내가 은연 중에 끼어들었을 수도 있고 내 임의대로 해석을 가했을 수도 있다.
내가 몇 개의 단어를 잊어버렸을지도 모르고,
나의 마음이 거기에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일 모두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나는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그때까지 아난다는 아직 깨달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내가 보증할 수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이다."
언젠가 나는 이렇게 들었다.
스승께서는 슈라바스티(舍衛城)에 머물고 계셨다.
아침일찍 스승께서는 옷을 입고 가사를 걸치신 다음,
밥그릇을 들고 탁발(托鉢)하기 위해 큰 도시인 슈라바스티로 들어가셨다.
탁발에서 돌아와 공양(供養)을 마치신 다음,
스승께서는 의발(衣鉢)을 치우시고
발을 씻으시고
그 분을 위해 마련된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는
몸을 곧게 펴고
앞 쪽에 주의를 집중하고 앉으셨다.
그대는 놀랐을 것이다. 아난다는 아주 세세한 일까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붓다와 같은 이에 대해 전할 때에는 매우 주의깊어야 한다.
그래서 아난다는 이렇게 사소한 일들까지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게다가 그는 이 많은 일들을 거듭해서 적고 있다. 그 작고 사소한 일들을.
스승께서는 슈라바스티(舍衛城)에 머물고 계셨다.
아침일찍 스승께서는 옷을 입고 가사를 걸치신 다음,
밥그릇을 들고 탁발(托鉢)하기 위해 큰 도시인 슈라바스티로 들어가셨다.
아난다는 그림자처럼 붓다를 따라다닌다.
그는 그림자처럼 붓다의 뒤를 따르며 말없이 지켜보고 있다.
붓다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은총이다.
그는 붓다의 모든 것을 지켜본다.
출처 : 명상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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